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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돌담길
근대개화기에 우리 나라를 찾은 서양인들의 목격담이나 저작물에 가끔 등장하는 지명으로 '가구거리(Furniture Street)'라는 것이 있다. 어떤 책에서는 이곳을 '장롱거리(Cabinet Street)'라고 표기해놓았다.
1902년 5월 24일에 벌어진 '덕수궁 남쪽도로 폐쇄소동' 때에도 이 가구거리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이에 관해 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의 외교사연표 (1904)에는 "한국정부는 궁궐의 남쪽 담장을 따라 나 있는, 공사관구역(Legation Quarter)에서 가구거리(Furniture Street)로 이어지는 도로를 폐쇄할 듯을 공표했다. 이후 타협에 따라, 이 거리는 단지 남쪽으로 비껴나게 되었다"고 정리하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서양인들 나름으로는 꽤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인지, 이곳의 거리풍경이나 상가구조를 설명해 놓은 구절이 자주 눈에 띈다. 1886년 7월에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되어 이땅에 처음 발을 디딘 조지 길모어 목사(Rev. George W. Gilmore, 吉毛; 1858~1933)는 1892년에 펴낸 <서울에서 본 조선(Korea from its Capital)>을 통해 이곳에 대한 자신의 소감을 이렇게 남겼다. “이 대목에서 선교사들에 대해 말하면 조선에 거처하려는 의도를 가진 가족은 책상가구를 가져올 필요가 없다고들 얘기한다. 이들은 그곳에서 크고 널찍하고 편리하며 장식도 잘 된 캐비닛을 본국에서 구할 수 있는 것에 비해 훨씬 더 싼 값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서울의 한 거리는 외국인들로부터 ‘장롱거리(Cabinet Street)’라고 불러지는데, 이는 이 길의 양쪽에 이런 물품들의 판매에만 거의 전념하는 가게들이 들어차있는 까닭이다. 이들 장롱의 가격과 미국 내에서의 가치를 고려해본즉, 나는 종종 미국인들의 수요로 인해 공급이 고갈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지가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좀 늦은 시기에 우리 나라를 찾은 영국의 저명한 지리학자이며 여행작가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여사는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1897)에서 가구거리에서 겪은 강렬한 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외국인들은 서랍달린 큰 책상과 결혼장롱의 제작에 빠져들어, 영국공사관 근처에 있는 한 거리에다 '장롱거리(Cabinet Street)'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이것들은 비록 크지는 않지만 그토록, 그리고 정말로 매력적인데, 어떤 것들은 단단한 밤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어떤 것들은 단풍이나 배나무로 덧대어 붙였고, 돋을새김을 하거나 가죽끈을 대고 황동으로 경첩을 달았으며, 게다가 놋쇠로 만든 큼직한 걸쇠에다 6인치나 되는 자물쇠로 장식하고 있다. 이것들은 철저히 조선적인 것이었음에도 유별나게 화사하다. 이른 아침을 제외하고는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쇼핑이 여가활동으로 보이지도 않았는데 이는 천한 계급의 여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대낮에 나돌아다니지 않는 것에 부분적인 원인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가구거리 혹은 장롱거리는 과연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버드 비숍의 글에 '영국공사관 근처에 있는 한 거리'라는 단서가 들어 있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1902년 11월부터 이듬해인 1903년 6월까지 8개월 가량을 이탈리아 영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머물렀고 귀국 후인 <꼬레아 에 꼬레아니(Corea e Coreani)> (1904, 1905)라는 저술을 남긴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ti, 魯士德; 1876~1948)는 가구거리(가구상가)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육조거리(六曹거리)와 남대문로(南大門路)의 중간지점에서 대한제국 황제의 현재 거처인 정동궁(貞洞宮)이라 불리우는 궁궐을 지나 역시 남대문(南大門)으로 통하는 또 다른 서울의 주요간선도로를 만나게 된다. 이 길가에는 한국의 장농이나 함을 파는 상점들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서울의 외국인들에게 이 길은 '캐비닛 스트리트(Cabinet Street)'라는 영어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의 도시들에서라면 최악으로 여겨질 만큼 도로상태가 좋지 않고 크기 또한 작아서 그다지 주목할 만하지는 않지만 서울에서는 모든 열망의 정점을 나타내는 다른 두 개의 길이 캐비닛 스트리트의 정동궁 부근에서 시작되어 하나는 서대문(西大門)으로, 다른 하나는 서소문(西小門)으로 이어져 있다. 서대문으로 통하는 길은 러시아와 프랑스공사관 앞과 영국과 미국공사관 근처를 지나가는데 이 때문에 이 거리에 '공사관거리'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서소문에 이르는 길은 같은 이유로 '이탈리아공사관 거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까를로 로제티, 서울학연구소, <꼬레아 꼬레아니> (숲과나무, 1996), 54쪽)
로제티의 설명에 따르면, 가구거리라는 것은 청계천 모교(毛橋, 모전교)를 건너 무교동으로 가로지르고 다시 덕수궁 앞을 지나 남대문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무교동길'과 '태평로 2가'를 합친 길이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태평통(太平通) 일대가 대로(大路)로 뚫린 것은 1912년 이후의 일이므로, 지금과는 사뭇 다른 도로구조라는 점은 따로 짚어둘 필요가 있다. 그가 남긴 '서울지도'에도 '캐비닛 스트리트(Cabinet Street)'의 위치가 잘 표시되어 있으므로 이를 참고하여도 좋을 것이다.
《매일신보》 1914년 1월 1일자에는 덕수궁 화재사건을 알리는 기사가 수록된 가운데 이 광경을 알리는 사진자료 하나도 함께 소개되고 있다. 여기에 보이는 '덕수궁 돌담장'은 지금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경성과 인천》 (1929)에 수록된 미국영사관 앞 거리이다. 오른쪽으로 길게 이어진 도로가 바로 옛 경기여고로 이어지던 추억의 덕수궁 돌담길이다. 정비석의 《자유부인》에서는 이 길을 '영성문고개'라고 하여 '사랑의 언덕길'로 묘사하고 있다.
1963년에 발행된 《서울특별시사 : 고적편》에 수록된 덕수궁 일대의 전경이다. 태평로에 접한 덕수궁의 담장이 온통 철책으로 바꾸어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은 궁궐이 내부가 보이게 한다는 명목으로 1961년 10월 15일에 착공하여 그해 12월 24일에 철책담장공사를 마쳤으나, 그 후 1968년에 태평로의 재확장공사로 담장이 16미터 가량 뒤로 물러날 때에 다시 돌담장으로 복구되는 과정을 거쳤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15일자에 소개된 '덕수궁 영성문 일대의 철거 장면'이다. 여기에는 ""[헐어내는 덕수궁] 이왕직에서 덕수궁의 한 부분되는 영성문대궐을 다른 곳에다가 팔았던 것을 도로 물렀다는 기별은 어떠한 통신에 보도한대로 본보에도 소개하였더니 다시 들은즉 물렀다는 것은 거짓말이요 작년에 회철하다가 남았던 궁전을 요사이에도 계속하여 훼철하는 중이라. (영성문 안에서 14일에 박힌 사진)"" 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상세설명
"그 옛날에는 덕수궁 담 뒤에 있는 영성문 고개를 사랑의 언덕길이라고 일러왔다. 영성문 언덕길은, 한편에는 유서 깊은 덕수궁의 돌담이 드높이 싸여있고 다른 한편에는 미국영사관 지금의 대사관 돌담이 높다랗게 막힌데다가, 좌우편 담 안엔 수목들이 담장 밖에까지 울창한 가지를 내뻗어서, 영성문 언덕길은 마치 자연의 턴넬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남의 이목을 꺼리는 젊은 남녀들은 흔히 사랑을 속삭이고자 영성문 언덕길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물정(物情)도 바뀌는 법인지, 오늘의 영성문 고개서는 이미 옛날의 그윽하던 모습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십대의 젊은이들은 영성문 고개가 사랑의 언덕길이었던 것조차 모르게 되었다." 정비석의 <자유부인>에 나오는 구절이다. 영성문 고개는 옛 경기여고에서 정동 안쪽의 미국대사관저로 넘어오는 언덕길을 말한다. 흔히 덕수궁 돌담길로 알려진 바로 그 길이다.
옛 경기여고 일대는 1900년 이후 역대 국왕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이 있었고 이곳에 신문로 쪽으로 출입문을 낸 것이 영성문(永成門)이었다. 덕수궁의 후문과 같은 역할을 했던 이 대문은 1920년 여름에 헐려버렸다. 그러니까 영성문 고개는 예전에 영성문이 있었다는 데서 따온 명칭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영성문 고개가 사랑의 언덕길로서의 면모를 벌써 잃어버렸다고 적고 있다. 이 소설이 나온 것이 1954년이었으니 반세기도 훨씬 더 지난 때의 얘기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여전히 이 돌담길을 낭만과 사랑의 거리로 기억하고 또 그렇게 애용()하고 있건만, 50여년 전에 이미 사양길로 접어들었다고 설명한 대목은 어쨌든 낯설게 들린다. 가을이 깊어지는 이맘 때면 낙엽이 수북한 이 거리를 연인과 함께 걷고 싶다는 생각을 퍼뜩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만큼 덕수궁 돌담길은 해묵은 데이트 코스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렇다면 덕수궁 돌담길은 언제부터 생겨났으며, 여기에는 어떠한 근대역사의 굴곡이 숨어있는 것일까
당연한 얘기지만 덕수궁 돌담길은 덕수궁 때문에 생겨난 도로이다. 덕수궁은 1907년 고종의 퇴위 이후에 생겨난 명칭이고 그 전에는 경운궁으로 불렀다. 정동 일대에 경운궁이 크게 조성된 것은 1896년에 벌어진 아관파천 이후의 일이었다. 1년 가까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옮겨왔는데, 주위에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의 외국공관이 몰려 있었던 것도 이곳으로 환궁을 결정하게 된 배경이라고 알려진다. 더구나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나서 이곳은 그야말로 요동치는 근대사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한편으로 경운궁의 영역확장은 지속되었다. 한창 때는 지금의 서울시청 앞 광장은 물론이고 정동 안쪽으로 미국공사관 너머에 있던 수옥헌 구역과 선원전 일대의 광활한 면적이 모두 경운궁에 포함되기도 했다.
대한문 옆을 지나 정동 안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돌담길은 이렇게 새로이 확장된 경운궁이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덕수궁 돌담길은 애당초 경운궁이 확장될 때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때와 거의 비슷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기껏해야 덕수궁의 남쪽 담장, 다시 말하여 정동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특히 고종의 국장이 있던 1919년 이후에는 용도폐기된 궁궐이라 하여 식민통치자들이 이곳을 빠르게 해체해버린 것이 지금과 같은 규모로 덕수궁 영역이 크게 줄어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꽤나 너른 구역이던 선원전과 영성문 일대가 1920년에 이르러 완전히 철거되면서 원래의 덕수궁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새길도 함께 생겨났는데, 이것이 앞에서 소개한 영성문고개길이다. 이와 아울러 전에 없던 담장도 새로 쌓아 올렸으니 '사랑의 거리'로서 덕수궁 돌담길의 낭만은 바로 이 무렵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었나 싶다. 이와 관련하여 <동아일보> 1921년 7월 25일자에 수록된 '경성소경(京城小景) 말하는 사진 (3) 고궁전(古宮殿)에 신작로(新作路), 영성문터에서'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영성문고개길이 막 뚫린 때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서대문통에 고색이 창연하게 서 있던 '영성문'이 헐리기는 작년 여름의 일이다. 지금은 그 영성문 자리로부터 남편으로 정동까지 탄탄한 신작로가 새로이 뚫려있다. 이 신작로의 왼편 대궐자리에는 지금에 절이 되어 '선원전'의 뒤편자리에는 금칠한 부처님이 들어앉았다. 일시 정치풍운의 중심으로 동양의 주목을 모으는 '수옥헌'은 외국사람들의 구락부된 지가 이미 오래지마는 외국사신접견의 정전으로 지었던 '돈덕전'은 문호가 첩첩이 닫힌대로 적적히 길가에 서서 가지 부러진 고목의 나머지 녹음 사이로 불볕에 이우른 갈무봉의 고탑만 행인의 눈에 보인다. 이곳은 어찌하여 이다지 몰라보게 변하였는가 경비가 군졸하여 이왕직에서는 대궐을 팔아간 까닭인데 이왕직에 출입하는 사람이 분참봉을 팔아먹었다고 검사국에서 오너라 가거라 하는 것도 이렇게 팔기를 잘하는데서 전염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에 관대사모를 하고 양산 뒤에 호종하던 사람으로 금일에 이 길을 지나면서 감개가 깊을 자는 과연 누구가 있을는지."
그리고 이러한 돌담장의 변화는 대한문이 자리한 동쪽 방면도 마찬가지였다. 이곳 역시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직후 태평로 개설공사로 인하여 서울광장일대가 완전히 헐려나갔고, 이러한 일은 해방 이후에도 거듭되었다. 새로 쌓은 돌담장이나마 1961년에 이르러서는 덕수궁 내부가 보이게 한다는 명목으로 철책담장으로 교체하였고, 그후 1968년에 태평로의 재확장공사로 담장이 16미터 가량 뒤로 물러날 때에 다시 돌담장으로 복구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이 덕수궁 돌담길이 사랑과 낭만의 거리이기만 했던 것일까
돌이켜 보면 러일전쟁 이후 국권침탈을 노골화한 일본제국의 숱한 권력자들이 대한제국의 황제를 겁박하기 위해 부지런히 들락거리던 통로가 바로 이 덕수궁 돌담길이었다. 을사조약의 현장인 중명전 역시 이 길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이 돌담길은 애당초 매국과 망국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고등법원, 중추원, 조선사편수회, 고등법원과 같은 식민통치기구들이 이 길 한편에 잔뜩 포진하고 있었으므로 이곳은 때로 굴종과 수탈의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로서는 실패한 자주독립의 길이었던 셈이다. 어찌 보면 덕수궁 돌담길은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잘 포장된 고난의 행로였는지도 모르겠다.
출처:(문화원형백과 구한말 외국인 공간/정동, 2007.,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성공회 서울성당[聖公會 서울聖堂]
요약: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대한성공회 서울 대성당 건물.
1978년 12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성공회 서울성당
지정종목지정일관리단체소재지시대종류/분류
1978년 12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22년 영국인 A.딕슨의 설계에 따라 영국성공회의 지원과 국내 신자들의 헌금으로 M.트롤로프 주교의 지도·감독 아래 공사가 착공되어, 4,449㎡의 대지 위에 991.7㎡ 건평의 화강석과 붉은 벽돌을 쌓은 조적조(組積造)의 로마네스크양식 건물로, 1926년에 헌당되었다.
십자형 장축(長軸) 중앙에 신랑(身廊)을 2층으로 하고, 목조 트러스 구조의 맞배지붕을 하였으며, 측랑(側廊)에는 1층 높이로 경사지붕을 덮었다. 거기에 네모지붕의 3층 높이의 종탑을 중앙부에 배치하고, 뒤쪽에 소종탑·후진(後陣)을, 옆으로는 수랑(袖廊)을 덧붙였으며, 정면에 아치문·장미창을, 측면에는 반원형 아치문을 배치하였다.
그런데 이 건물 건축 당시는 일제강점기여서, 원래의 '큰 십자가'형의 설계대로 못 짓고, 양쪽 날개와 아래쪽 일부를 뗀 채 '작은 일자형'으로 축소되는 바람에 '미완의 건물'이 되고 말았다. 최근에 우연히 영국 렉싱턴 지역의 박물관에서 원래의 설계도가 발견됨으로써, 1994년 8월 증축허가를 받고 원 설계도에 따라 1996년 5월에 축성식을 가졌다.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영국 대한민국대사관(英國大韓民國大使館)
[Embassy of the Republic of Korea in U.K.]
1883년(고종 20) 조영수호통상조약 조인 후 1884년 4월 서울에 영국총영사관이 설치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총영사관은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양국간의 실제적인 통상관계는 1949년 1월 18일 영국 정부가 신생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고 국교를 재수립하면서 시작되었다. 1949년 3월 17일 주한 영국공사관이, 1950년 2월 17일에는 주영 대한민국공사관이 개설되었다. 1957년 6월 13일 양국은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하였으며, 이후 외교통상 관계가 더욱 활발해졌다. 6·25전쟁 때는 영국군이 참전하여 글로스터 연대의 격전 등 큰 전공을 세웠다. 영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하여 당사자간 직접 대화에 의한 평화적 해결을 지지하며 선발 개발도상국으로서 한국의 경제적 지위를 인정, 영국의 주요 교역대상국으로 평가한다. 북한에 대해서는 미승인 정책을 견지해오다가 1991년 9월 남북한의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동시 가입으로 북한을 묵시적으로 승인하고 있다. 1986년 4월 대통령 전두환의 영국 방문에 이어 5월에 수상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가 방한하였고, 1989년 11월에는 대통령 노태우가 영국을 방문하였다. 1992년 11월 찰스(Charles) 황태자 내외가 한국을 방문하고 1998년 대통령 김대중이 영국을 방문하였으며, 1999년에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Ⅱ)가 한국을 방문하여 안동에서 73회 생일잔치를 한국 전통식으로 치렀다.
영국은 한국의 제7위 수출대상국(점유율 3.3%)이고 제15위 수입대상국(점유율 1.4%)이다. 친선단체에 의원 친선협회, 한·영 재계회의, 한·영 친선협회, 한국전쟁 참전용사회, 한·영 미래포럼 등이 있다. 교민수는 1999년 12월 현재 영주 거주자 2,690명, 체류자(유학생, 상사 주재원, 공무원 등) 8,640명으로 총 11,330명이다. 지역별로는 잉글랜드 9,020명(런던 8,407명), 스코틀랜드 1,520명, 웨일스 750명, 북아일랜드 40명이다. 주요업무는 정무·경제·통상·문화·홍보 업무와 여권·사증 발급, 영사 확인, 국적·병역·호적·재외국민등록 관련 등의 영사업무이다. 업무시간은 월요일~ 금요일 9시 30분∼12시 30분, 14시∼17시 30분(단, 영사업무는 10∼12시, 14∼16시)이고 토·일요일과 영국 공휴일, 한국의 4대 국경일인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은 휴무이다.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2024-07-11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