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압제가 심하던 1935년 조선일보사에서 공모하던 노랫말 가사에 일본 와세다대학교에 다니던 문일석이란 학생이 응모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민족가요가 된 목포의 눈물이란 노래를 손목인이 작곡을 하고 이난영이 불러서 대히트를 하고 지금도 국내는 물론 한일가왕전에서 일본의 젊은 여가수가 이난영처럼 불러서 국내 팬들을 감동케한 노래를 들으면서 아래 글 내용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아즈마아키(東亜樹) - 목포의 눈물(木浦の涙)|한일가왕전 3회 - YouTube
충무공의 혼(魂)과 일제강점기의 한(恨)을 품은 고하도
일제시대에 목포항이 3대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사적 장소인 고하도가 있다. 역사 · 문화적 자원과 함께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려고 이곳에 목화밭을 조성했다. 이 섬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육지면이 재배되었다고 한다. 충무공의 유적지 근처의 언덕 고하도 선착장에는 너비 62cm, 높이 183cm, 폭 33cm의 ‘조선육지면발상지비(朝鮮陸地綿發祥之碑)’가 세워져 있다. 육지면은 고려시대 문익점 선생이 들여온 재래면과 달리, 원산지가 남미로 따뜻한 곳에 잘 자라는 면화이다. 미국면이라고도 하는데 최초의 시험 재배지를 이곳으로 한 것이다. 1899년 일본영사 와카마츠 도사부로가 미국산 육지면을 시험재배하기 시작하였고, 재배에 성공하면서 전국으로 퍼졌다. 육지면 재배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1936년에 비를 세운 것이다. 이 비에는 ‘1904년에 고하도에서 처음으로 육지면 재배를 시작하였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해방 이후 이 비는 뽑혀서 인근에 버려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래도 역사를 담고 있는 의미가 있는 유산이라며 다시 세웠다고 한다.
충무공 혼이 깃든 고하도
원마을에서 바닷가 해안길을 따라 가면 유달산이 보이는 쪽으로 충무공을 기리는 모충각(慕忠閣)이 있다. 군량미가 많게 보이기 위해 쌓았다는 유달산 노적봉을 마주하고 있다. 고하도 앞바다에는 해경 경비정과 군함들이 정박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후예들이 자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이 섬을 전략지로 활용, 이곳에 진을 설치하여 왜적의 침투를 막아냈다. 충무공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다음, 이곳에서 1597년 10월 29일부터 이듬해 2월 17일 완도 고금도로 옮기기까지 108일간을 주둔하며 전력을 재정비했다고 한다. 이곳 고하도가 적들의 수중에 들어가면 호남의 곡창지대로 영산강을 통해 침투해 들어오기 때문에 매우 전략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판단에서 한 조치란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실로 핵심지원전략 요충지였던 셈이다.
▲모충각 입구
지금도 고하도에는 진의 성터가 남아 있다. 진영이 있는 곳은 불당골, 용오름길의 큰산 아래 부근이다. 칼바위에서 말바위 가는 길에는 성터의 흔적도 남아 있다. 자연적인 바위를 이용하여 쌓은 석성의 형태이다. 난중일기에 그 건설된 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비축된 군량미는 486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충무공의 정신을 추모하는 탄신제를 해마다 4월 28일 치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하도에는 이충무공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정유재란 때 고하도를 전략기지로 삼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세운 기념비이다. 경종 2년1722년 8월에 통제사 오중주와 충무공의 5대손인 이봉상에 의해 완성되었다. 비문에는 정유재란 때 이충무공이 전진기지로 고하도를 선정하게 된 경위와 전쟁 시 군량미의 중요성, 인조 25년1647년에 진영이 당곶진(목포시 하당 일대)으로 옮겨가게 되어 고하도진이 없어지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오중주 통제사가 비 건립을 주도한 내용, 후임 통제사들에게 고하도진의 터임을 알리기 위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남구만이 지었고, 글씨는 조태구가 썼다. 몸돌의 높이는 227cm, 너비는 112cm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이 비는 일제 강점기에 야산에 버려져 있던 것을 광복이 되면서 현 위치에 세웠다. 비각은 1949년에 세웠다. 외딴 섬에 기념비를 세우는데 공의 후손이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는 일로 보인다.
출처:(한국의 섬)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가사에 얼킨 사연(펌글)
2절의 첫 대목은 유난히도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 노래를 음반으로 만들어 일제의 검열을 받으러 갔을 때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검열 담당자는 노랫말에 나오는 원한이 필시 일본을 겨냥한 것이라며 소란을 피웠다. 이때 이철 사장은 기지를 발휘, ‘원한’은 인쇄과정에서 착오가 일어나 ‘원앙’을 잘못 표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원컨대 삼백연의 바람이 사이좋은 원앙새처럼 노적봉으로 편하게 분다는 뜻으로.... 사실상 <목포의 눈물>은 가사 그대로 한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분노를 노래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레코드사에서는 황급히 가사지를 다시 인쇄하여 들고 갔다. 거기에는 「삼백연 원안풍은 녹적봉」 밑에 로 바뀐 내용이 들어 있었다.
<목포의 눈물>은 이 사건을 겪으면서 더욱 잘 팔려나갔다.
李蘭影은 이 노래의 전반적 가창을 통하여 역사의 유구함이라든가 민족사가 품고 있는 원한을 재생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이별의 정조를 애타게 호소하는 듯한 여성적 한탄과 애교로 표현하였고, 맺고 끊는 分節의 분명함을 나타내었다. 혼자 절개를 지키며 살아가는 전통적 여성의 쓸쓸한 삶과 그 단호함에 대해서도 音色을 통해서 어떤 전달을 하고 있다. 2절의 셋째 행인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란 대목에서는 고향 목포에서 유년시절과 그 추억을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정서로 환기시키려는 듯 밝고 활기찬 걸음걸이로 다은 소절에 연결해 간다. 흔희 대중가요라는 것이 몇 차례 거듭 들으면 곧 식상이 되는 경우가 일반이나 이 교수는 목포의 눈물은 연거푸 다섯 번까지 반복해서 들어도 그 고유하고 독특한 맛 이 줄곧 지속된다고 칭찬하고 있다. 어떤 대학교수는 ‘목포의 눈물’을 50번 연속 들었는데도 감회가 다 다르다고 술회하며 노랫말이나 사연을 알고 들으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칠맛이 안다고 했다. 이제 까지는 「목포의 눈물」 노래말을 지었던 이가 문일석이라고 전해졌었는데 사실은 윤재희다.
윤재희(1916년생)는 원래 해남윤씨로 목포시 북교동 157번지에서 윤경하씨(1972년 목포에서 사망)의 1남 2년의 장남으로 태어나 목포북교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전주고등학교를 나와 일본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후 목포에서 살고 있었는데 마침 목포를 주제로 하는 노랫말 가사를 공모한다기에 24세에 습작으로 지어 응모하였고, 당시 윤씨집안에서는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문일석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재희씨는 아깝게도 단명하여 다른 작품을 더 쓰지 못하고 26세때(1942년) 작고 하였던 것이다. 이제까지는 문일석이라는 필명만 알았지 본 이름이 윤재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목포의 눈물」 가사 내용은 다분희 나라를 잃은 설움을 표현한 글로서 특히 2절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의 가사는 그때로부터 3백년전에 정유재란때 명량대전과 고하도에 이순신 장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일본인이 그때에는 꼼짝도 못했던 곳이었다는 점을 담은 내용이었다. 이 내용 때문에 윤재희는 일본경찰에 끌려가서 호된 문초를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울밑에 봉선화는 가곡으로써 당시 우리나라를 상징시키고, ’목포의 눈물‘은 유행가로써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는 노래말이었다.
목포의 눈물이란 한낱 유행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나라 잃은 민족의 한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유행이 되었고 우리 민적의 심금을 울리는 가사이고 선율이 되었던 것이다. 이난영은 1916년 여름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양동 42번지 속칭 양동 6거리의 산동네 초가집에서 태어났다. 李蘭影의 본명은 이옥례, 한국적 정서가 풍기는 이름이다. 노래로는 성공했지만 가정적으로는 숱은 마음고생을 하며 살아갔던 이난영은 65년 봄 그녀가 한 많은 세상을 떠난 날만은 보상 받은듯하다. 5.16이후 상황은 집회가 금지돼 있어 연예협회가 가수장으로 치르길 원하는 연예인들의 생각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그러나 손목인 선생 등의 노력으로 허가 되었다. 이난영의 집이었던 회현동에서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까지 모든 연예인들이 상복을 입고 뒤를 따랐다. 그날은 주변 교통이 모두 통제됐고, 시내에는 그녀를 보러 나온 시민들로 가득 찼다. 무리들은 <목포의 눈물>을 합창하며 걸었고 모여든 시민들고 하나둘 따라하더니 온통 <목포의 눈물>을 흐느끼듯 불러댔다. 이난영의 일생은 「목포의 눈물」 이 히트곡이 되어서인지 자신의 인생에 눈물이 너무 많았다.
당년 49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은 예명 때문일까... 나는 그림자 영자를 이름으로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영자는 실체가 없는 허께비지 않은가? 소설가 李無影도 그렇고... 가수와 노래제목은 우연이긴 하겠지만 너무 일치되는 부분이 맣다. 이난영과 남인수도 노래 말과 같이 되었고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람’, 배호의 ‘마지막 잎새’, 양미란도 흑점을 부르고 골수에 흑점이 생긴 진단을 받아 세상을 떠났고 김정호도 ‘간다 간다 나는 간다’하더니 33세에 그냥 갔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에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인가 목포의 설움‘<목포의 눈물>이 이토록 구슬프게 들렸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고향 목포, 본명 이옥례로 작곡활동을 하고 있던 오빠 이봉룡씨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천재 소녀가수’로 불렀던 그녀는 목포의 눈물과 함께 故人이 되어 경기도 파주시 용미리 산 91-1에 잠들있다.
3. 가사
목포의 눈물 - 나무위키 (namu.wiki)이난영 노래
목포의 눈물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연 노래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일제강점기로부터 약 30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유달산 노적봉에 볏짚을 덮어서 조선군의 군량을 많아 보이도록 왜군을 속였다는 고사에서 따 온 가사다. 1919년 이전이나 1930년대 말 이후라면 아예 금지곡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