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정기 번역
지금의 예(禮)중에 사(社)보다 더 오래 된 것이 없으니,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보본반시報本反始)과 봄에 구하고 가을에 보답하는 (춘구추보春求秋報) 전례가 갖추어져 있다.
이것이 확대 되어 왕사(王社), 후사(候社) 등 치사(置社)가 되었는가 하면, 내려가 확대하고 또 확대되어 외딴 고장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사(社)가 없지 않았으니, 예를 들면 분유(枌楡)가 그것이고, 잡기(雜技)나 소기(小技)등이 스승에 의해 사로 일컫는 것이 있으니, 예를 들면 백련(白蓮)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기타 시(時) 모임이나 술 모임 같은 것들도 의례 이 사(社)의 칭호를 붙여 놓고 구약(舊約)을 거듭 다짐 할 적에는 향약(鄕約)을 모방하고 연회(宴會)를 열 때에는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모방하였다. 요컨대 고장이나 마을의 노소(老少)들이 약조를 할 경우에는 향약을 본보기로 삼고, 술을 마실 경우에는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본보기로 삼았으니, 이 또한 옛날의 도(道)를 실행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찌 다른 것 보다 조금 나을 뿐인가. 다만 촌락의 대소에 따라 인구의 과다가 있고 풍속의 후박에 따라 예절의 성쇠(盛衰)가 있는데 이는 필연적 추세이다.
전라도 영암군 구림촌은 물산이 풍부하기로 특별히 알려져 있다. 여지(輿志)를 상고해 보면 당(唐)나라 중엽에 구림촌의 최씨 처녀가 동산의 큰 오이를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먹었는데 먹고 난 다음 임신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사람의 도리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대밭에다 버렸는데 비둘기가 날개로 덮어 보호해 주자 다시 데려다 길렀다 한다. 그가 출가(出家)하여 도선(道詵)이라는 중이 되었다. 도선이 당나라에 들어가 중 일행에게 비술(秘術)을 배워 돌아 왔다.
또 광양현지(光陽縣志)를 상고해 보면 최유청(崔惟淸)이 저술한 도선(道詵)비문(碑文)에 도선은 광양의 옥룡사(玉龍寺)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속성은 김씨(金氏)이고 신라 영암 사람이다. 혹은 신라 태종(太宗)의 후예라고도 하나 사서(史書)에 그 세대의 계통이 기록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 강씨(姜氏)가 명주(明珠)를 삼키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기록 되어 있다. 최유청은 도선이 불도를 깨달은 과정을 두루 서술할 때 누락한 바 없었을 터인데, 도선의 어머니 성(姓)이 다른데다가 도선이 당나라에 들어간 일이 기재 되지 않았다. 최유청은 유명한 사람인데다가 세대도 요원하지 않으므로 고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의 민간 전설에도 도선의 어머니 성은 최씨이고 막 태어났을 때 영이(靈異)하였으며, 외를 먹고 비둘기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고 말하였으니, 도선이 중국에 들어간 것과 구림사람이란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그리고 그 마을이 이로 말미암아 구림촌으로 득명(得名)하였는데, 풍속에서 이른 바 국사암(國師岩), 아시천(阿是川) 또한불가사의(不可思議)로 붙일 수밖에 없다.
비록 마을 이름에 촌이 들어있지만 인구가 중다(衆多)하고 물산이 풍요하여 천하의 낙양(洛陽)곡역(曲逆)같은 큰 고을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상하 수백년간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그 마을 사람들이 군읍으로 자처하며 타촌의 사람들을 호칭할 때 반드시 “촌사람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라고 하였으니 옛날 어느 때부터 번창했단 말인가?
아니 도선이 방향을 잡은 마을의 터가 지리(地理)의 법에 맞아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아! 번창한 군읍으로 자처 했더라도 예(禮)로 절제(節制)하지 않을 경우 금수(禽獸)에 가까워 졌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니, 재앙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을 것이다.
향선생(鄕先生) 임구암(林龜岩)공이 이러한 점을 두려워 한 나머지 맨 먼저 회사(會社)를 창설하였는데, 선비들이 이구동성으로 호응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마음이 좁은 사람까지도 너나없이 추종하여 돌을 물에 던지듯이 의론이 일치 되었다. 이에 정자(亭子)에 알맞은 장소를 물색한 끝에 광술(廣術)의 곁에 자그마한 땅을 얻어 세 칸의 집을 건립한 다음 편액(扁額)을 회사(會社)로 붙였는데, 땅 3분의 2를 떼어서 제사지내는 터로 삼았다. 귀신에게 푸닥거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제단(祭壇)은 쌓지 않은 것이고, 집을 짓고 땅을 떼어 놓은 것은 상하의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춘추로 사람들이 모여 연회를 열면서 온 마을이 다 같이 즐기니 옛날 이 마을에 대해 “부유하게 살면서 가르친 바가 없다”고 지적한 사람은 그 입이 저절로 벌어졌고, 또한 흥미롭게 지켜보면서 마음속으로 부러워하는 자들도 많았다. 나의 할머니는 구림촌에서 태어나셨으므로 내가 어려서부터 익히 듣고 선망한 나머지 한번 그곳을 가보려고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다.
그 후에 내가 가문의 환란으로 인하여 그곳에 가 보았더니, 정자가 초가로 바뀌어 옛날 규모의 절반도 체 안 되었는데 정유년(丁酉年)에 불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림촌의 번창은 옛날과 다름없었고 정자는 복고 되지 않았지만 자그마한, 초가를 건립하여 고삭(告朔)의 양(羊)처럼 남아있었다. 그리고 산천의 형승은 옛날의 경관이 바뀌지 않았다. 월출(月出)이 진산(鎭山)으로 자리를 잡고 뾰족한 봉우리가 하늘에 치솟아 화성(火星)이 되어 남방을 진정하였다.
탈선천(奪禪川)은 왼쪽에서 흘러 나왔는데, 풍속에서 이른 바 아시천(阿是川)으로서 구림촌 밖을 안고 완만하게 흘렀다. 세속의 전설에 의하면 도선이 어렸을 때 시냇가에 나가 놀고 있을 때 당나라 선박이 시내의 하구에 정박해 있다가 몰래 도선을 데려갔다고 한다. 탈(奪)자를 방언(方言)으로 말하자면 앗아 갔다고 하기 때문에 아시천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시내는 지금 배가 드나들 수 없으니 근거로 삼을 수 없다.
도갑사는 월출산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데 도선이 머물러 결하(結夏)했던 장소다. 시내가 두 산의 사이에서 흘러나오다가 벼랑을 만나면 폭포가 되고, 구덩이를 만나면 연못이 되어 옥가루를 품어내고, 거울처럼 잔잔한 물결 등 그 형상이 여러 가지였다. 그렇게 구불구불 흘러 내려가다가 서쪽으로 꺾어 흘러 구림촌의 중앙을 가로질러 회사정의 계단 앞으로 흘러가는데, 넓은 들판은 손바닥처럼 보이고, 흰 모래밭은 눈과 같았다. 졸졸 옥결(玉玦) 소리를 내며 사람의 옷소매에 물방울을 튕기기도 하며, 흐르다가 마치 옷깃이 겹치듯이 탈선천과 합류하여 서호(西湖)로 들어간다. 그곳에 서호정이 있는데 옛날에는 그곳에 락락장송(落落長松) 천 구루와 아름다운 전죽 만개가 서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자는 허물어져 버리고 송죽(松竹)도 겨우 몇 구루만 남아있다. 시내가 정자의 밑에서 맴돌아 연못이 되었는데, 운몽(雲夢) 같은 것은 8,9개만 있어도 지푸라기만도 못될 것이고 동정호(洞庭湖)와 비교하면 어떠할지 모르겠다.
조수가 올라오면 만경창파(萬頃蒼波)를 이루다가 조수가 물러가면 갯벌이 간간히 드러나므로, 고기 잡는 사람들이 도보로 다닐 수 있으므로, 그물을 치지 않고도 수십 종의 해물을 잡을 수 있다.
서호정에서 몇 걸음 정도 가면 시장이 열리는데 생선의 비린내가 사람의 머리를 지근지근 아프게 하였으나 진시황(秦始皇)의 백사장 수레를 생각하면 일소(一笑)를 자아낸다. 남쪽의 가학령(駕鶴嶺)에 조도(鳥道)가 구불구불 나있고 서쪽은 은적산(隱積山)이 수구(水口)에 가로 놓여 방어의 문이 되었는데, 백금색의 암석이 석양빛을 받으면 아름답게 보여 가까이 접근하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았고그 너머에는 주룡도(駐龍渡)(나루)가 막고 있다.
장사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뱃머리가 서로 닿아있는가 하면 백사장 가에 어물전이 수목 속에서 어른거리고, 물새들은 연기가 서린 물가에서 지저귀며 날아다닌다. 그리고 호수 한가운데 들어있는 대죽도(大竹島)(대섬)와 소죽도(小竹島)(소섬) 두 섬이 중앙에 원교(員嶠)처럼 우뚝 솟아 있다. 그리고 도선의 유적지로 황장생(皇長生), 국장생(國長生), 몰자비(沒字碑), 매향포(埋香浦)등이 모두 몇리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동국문의 문헌은 부족하지만 영암의 진인(眞人)이 남긴 발자취라고 이르는데 있어서 그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남쪽에서 떠나 온지 10여년이 되었는데 조백원(曺百源)(조행립(曺行立)의 자(字))형이편지를보내 말하기를 “내가 고을 수령을 그만 둔 뒤로 마을에 살면서 자취를 어루만지며 감회가 일어날 때면 개연(慨然)한 마음을 금할 수 없으므로 마을 사람들과 같이 다시 회사정을 건립하였는데 과거에 사람들이 건립한 것 보다 더 화려하게 지어 후세 사람들이 보도록 하였다.
그런데 옛날 이 마을을 너만큼 아는 이도 없다. 나를 위해 글을 써주었으면 한다. 그러면 그것을 금약(禁約)으로 삼아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제1의 법령으로 삼으려고 한다.” 라고 하셨다. 그런데 내가 병을 자주 앓은 바람에 글 짓는 일이 겁이 나서 오래도록 착수하지 못하였다. 그 뒤 조형의 편지가 해마다 대여섯 통씩은 오는데, 회사정기를 써 달라고 부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임오년(壬午年)(1642)에 조행립 형이 평시령(平市令)으로 발탁되어 도성으로 들어오자, 손수 회사정의 본말을 기록해 가지고 찾아와 날마다 글을 지어 달라고 심하게 독촉하기에 내가 그 글을 받아가지고 다 읽어 보았다.
그리고 이어 생각해 보건데, 옛날에 백성들을 위하여 사(社)를 세워서 신인(神人)을 화목하게 하였기 때문에 사사(社事)를 위해서는 마을의 사내들이 흥기하고, 사전(社田)을 위해서는 나라의 사람들이 흥기하며 제사를 지낼 때에는 다 같이 공경하고 제물을 나누어 먹을 때에는 다 같이 즐긴다. 부류끼리 항상 이곳에서 모이고, 모이면 항상 이곳에서 즐겼으니, 정말 모든 아름다운 일이 모이는 곳으로 사를 보면 무리들과 즐거워 할 줄을 알 것이다.
그렇지만 음악이라 해서 어찌 정말로 북을 치고 술을 마시며 뱃놀이를 하고 술에 취해 신발을 잃어버리고 갓끈이 끊어진 줄을 모르는 것을 말하였겠는가. 이에 성인(聖人)이 반드시 도리로 절제시키기 때문에 군자(君子)가 인화(人禍)를 면할 것이니, 앞에서 말한 향약(鄕約)과 향음주례(鄕飮酒禮)가 이로 말미암아 제정된 것이다. 내가 일찍이 예를 배웠는데, 예는 주인과 손님 및 찬례(贊禮)를 위하여 만든 것으로서 삼빈(三賓)이 각각 자리하고 있고, 또한 상징한 바가 있으니 천지(天地), 음양(陰陽), 삼광(三光), 성백(成魄), 사시(四時)라 하는 것은 괜히 한 말이 아니다.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하는 자들이 이것을 분별하여 사양하면 다투지 않을 것이고, 오만하지 않을 것이며, 오만하지 않고 다투지 않으면 쟁송(爭訟)이 멀어질 것이고, 쟁송을 하지 않으면 횡포의 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선비는 위로는 각고의 공부를 하여 부지런히 실천 하면서 생각을 깊이하지 못 하는가 하면 또 향음주의(鄕飮酒義)에 “이 자리의 진정한 의미는 오로지 음식을 먹기 위한 것이 아니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기 위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예를 중시하고 재물을 천시한 것이다. 이 자리에 오로지 음식을 먹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예를 먼저하고 재화를 뒤로하는 의의가 있으니 예를 먼저하고 재물을 뒤로하면 백성들이 공경하고 사양하여 다투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예라는 것은 오직 예를 먼저하고 재물을 뒤로하며 공경하고 사양하여 횡포를 부리지 말며 전전긍긍(戰戰兢兢)해야 한다는 뜻을 향음주의 한편에 수없이 강조하였다.그리고 또는 그 대요(大要)를 들어 말하기를 “공경으로 견지하는 것을 예(禮)라 말하고, 예로 규범을 만들어 장유(長幼)로 하여금 힘써 실천하도록 하는 것을 덕(德)이라고 말한다.
덕이라고 하는 것은 몸으로 실천하여 얻은 것이기 때문에 옛날 도예를 배운 사람은 신심(身心)에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노력하여 실행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출입할 때 서로 우애하고 지킬 때 서로 협조하고 병들면 서로 부축해 준다. 이것들을 합쳐 상벌을 주어 권장하거나 징계할 때에 삼물(三物)로 흥기시키고 팔형(八刑)으로 규제하였으니, 고인이 백성을 위해 생각하는 바가 크고, 후세를 위하여 법을 만든 바가 주밀하였다.
아! 우리 동방이 거듭 액운(厄運)을 만나 전후 50여년간 전란이 그치지 않은 바람에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난리가 폐막(弊瘼)되어 버렸다. 비록 남방은 한 조각의 깨끗한 지역이라고는 하나 풍속이 말단에 이르렀으니 그 누가 휩쓸리지 않았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구림촌은 크고 작은 민호(民戶)가 무려 수 천 이나 되어 인구가 매우 많고 가옥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으므로 한 치의 땅이 금과 같아 채소를 심을만한 밭도 없다. 그래서 산을 등지고 호수를 안고 있으나 벼논이나 기장 밭이 대체로 백경(百頃)이 체 되지 않으므로 그 사람들이 고기를 잡지 않으면 장사를 하고, 장사를 하지 않으면 장인 노릇을 못 하는데 그래도 노는 손이 반이나 된다.
아래로는 족구를 하거나 장기는 두지 못 하면서 화사한 옷차림으로 날랜 말을 타고 다니어 한가로이 노니는 공자(公子)와 사귄다는 명성이 있다. 이와 반대로 외부의 유혹에 빠져 혹은 꽉 막혀 아무것도 모르거나 혹은 방자하여 제멋대로 행동하기도 하는가 하면 기세를 부리고 언변을 상승하며 괴변을 늘어놓고 시기하면서 남의 장단점을 견지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여인들은 비록 거문고 소리에 따라 춤을 추며 추파를 던져 사람을 유혹하지는 못해도 길쌈과 소원하여 대부분 시장에 나가는 풍조가 있으니, 그 풍속의 병이 점점 유래된 바가 있다. 옛날 구암공이 정사(政事)를 할 때에는 교화가 잘 먹혀들어 갔으나 오늘날 조형이 정사(政事)를 할 때에는 교화가 잘 먹혀들어 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풍속이 병들어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이점이 어려운 것 중에서도 어려운 것이다.
내가 향약과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모두 다 거론한 것은 그 이유가 단적으로 여기에 있으니, 조형께서는 위에서 표상이 되어 이끌어 갈 때에 그 방도를 다 하였으면 한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보고나서 왕도(王道)를시행하기가 쉽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나이를 존중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고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하는 데도 공경하고 사양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오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지금 백성들은 하,상,주(夏,商,周)삼대(三代)에 올 곧은 도리대로 실행했던 백성들과 똑같은 사람들이다”. 라고 하였는데 지금에도 어찌 반드시 그러한 사람이 없어서 끝내 교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향음주의(鄕飮酒義)에 주인이 앉을 때에는 반드시 동쪽에 앉는다는 것은 방형(方形)은 땅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동쪽은 봄으로 만물이 생동(生動)하고, 여름에는 성장하고, 가을에는 수렴하고, 겨울에는 갈무리하는 등 각자의 처소에서 책임을 맡아 어미 학이 울면 새끼 학이 화답(和答)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는데, 향음주의(鄕飮酒義)에 이른바 만물을 생산 한다는 것은 주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으니, 이는 실로 조형의 책임이다. 회사가 점점 성장하여 마을 사람들이 서로 교화 되어 예를 먼저하고 재물을 뒤로하며 공경하고 사양하여 다투지 않는 수준에 도달할 경우에는 지기(地氣)가 남쪽으로부터 시작되어 앞으로 뜨거워질 것이다.
나는 노둔한 사람으로 거론한 것이 옛날의 예뿐이다. 그렇지만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사람을 보고 말까지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면 나 또한 더불어 다행이겠다. 우리 조형이 벼슬에 실증이 나서 나라에 펼치었던 정사를 수렴하여 고향에서 그 정사를 시행 한다면 혜택은 몇 리에 벗어나지 않겠지만 그 또한 정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조형 마을에 타당한 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감히 이를 써서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에게 고하는 바이다.
15 ( 21 1643 1 15)
은 의 에서 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