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존에서 꼭 인터뷰 하고 싶은 한국 호러 감독이 몇 있었다. 그중에서 특히 80년 대를 주름잡은 [공동묘지] 시리즈의 김인수 감독과 [천년환생] 등의 남기남 감독 등은 반드시 찾아뵙고 인터뷰를 해보고 싶었지만, 도대체 어디로 연락해야 할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돌파구는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영구 아트 무비의 심형래 감독을 인터뷰하다 '지나가는 말'로 남기남 감독의 연락처를 물어봤더니, 제깍 휴대폰 번호를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씨네 21 사건도 있었으니 언론(?)을 기피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우려와 달리 쉽게 컨펌을 얻어냈고, 그래서 호러존의 인터뷰어들은 토요일 아침부터 이태원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이태원의 크라운 호텔'이라는 말에 다소 기가 죽어있긴 했지만, 다행히도 그곳은 '시골 다방' 분위기라 한층 편한 느낌을 받을수 있었다. 호러존의 취재진들은 30분이나 일찍 도착해 질문할 내용들을 사전 점검하고 있었고, 남기남 감독님은 15분 일찍 도착해, 마침내 역사적인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김진성 (이하 진) : 저... 남 감독님이신가요?
남기남 (이하 남) : 어, 그래. 뭔 일로 나를 다 찾았어?
자신이 만든 [평양 맨발] 같은 액션물에 '깡패'로 출연해도 먹힐만한 외모의 남기남씨는, 그만큼이나 걸걸한 목소리로 호러존의 취재진을 맞아주었다. 그의 말과 표정에는 확신과 신념이 넘쳤고, '추억'을 먹고 사는 구세대가 아닌 지금도 활약중인 '현역'의 기백을 보여주는건 누구라도 본받을만한 점이리라. 남기남씨의 이야기는 '반말'과 '존대'가 섞여있는 형식이었는데, '거만'이라기 보다는 '편한' 인터뷰를 위한 장치인듯 싶었고, 덕분에 상당히 양질의 인터뷰를 얻어낼수 있었다. 이 인터뷰 역시 '녹취(필기)'로 작성된 것이므로, 몇몇 부분은 지나치게 생략되거나 확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린다.
진 : 감독 데뷔를 하신게 정확히 언제시죠?
남 : 그러니까 내가 1972년에 감독으로 데뷔를 했고, 1975년부터 1993년까지 1년에 4작품 이상을 만들었어요. 많을 경우에는 1년에 9작품까지 했으니, 지금까지 103편을 한거야. 그 전에 9년간 조감독 시절이 있었고. (참고로 한국 영상 자료원의 웹싸이트인 www.cinematheque.or.kr 에서 검색하면, 그의 작품을 40여편밖에 찾을수없다.)
김종철 (이하 종) : 감독님은 처음에 어떻게 영화계에 발을 들여 놓으시게 되신건가요?
남 : 그러니까 내가 1972년에 [내 딸아 울지마라]는 작품으로 데뷔를 했죠. '신파'였는데, 당시 엄청난 흥행 성적을 거뒀어. 그거 보러 서울 시내 술집 여자들이 다 왔으니까. 다음으로 만든 작품이 [사나이는 슬프다]라는 것이었는데, 반대로 이건 망했어. 그 다음에 작품 준비하려고 작가 1명하고 잠적을 해버렸는데, 그 때 세상이 뒤집혀 버린거야. 영화사들에 규제를 가하면서, 한 영화사당 3명의 전속 감독만을 쓸 수 있게 했거든. 그런데 나는 잠적해서 연락도 끊겼으니, 어떤 영화사에도 전속이 될 수 없었지. 그렇다고 아무 영화사나 마구 비비고 들어 갈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나는 '홍콩'으로 가서, '여소룡'이라는 배우 데리고 [속 정무문]부터 액션영화를 시작했지. 아마 [정무문] 시리즈는 내가 다 찍었을거야. 그거 국내에서 10만 이상씩 다 들었는데, 그때 10만은 요즘 10만하고 또 다르잖아. 정말 많이들 보러온거지. 저렇게 액션을 30여편 정도 하니까, 날 '저질'이라 부르더라고. 좀 짜증이났지.
종 : 감독님께서도 나름대로 영화를 만드는 철학이나 생각이 있으실텐데요.
남 : 나는 예술이나 문예 작품을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대종상 같은건 노리지도 않았지. '영화는 곧 산업이다'라는 생각 아래, 종합 예술을 만든다고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어왔어요. 제조업자인 '자본주'와 소비자인 '관객'만 만족시키면 된다 이거지. 사람들이 나를 '저질' 감독이니 뭐니 얘기하는데, 난 관객이 1시간 40분동안 재미있게 보면 만족이야.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학생들이 용돈 아껴서, 주부들이 무료한 대낮에, 극장을 찾아 재밌는 영화 보면 됐지, 거기에 뭐가 더 필요해? 그건 요즘 활약하는 후배 감독들도 마찬가지잖아. 관객들이 즐거웠고, 돈 괜찮게 벌었으면 되는거 아냐? 거기서 뭘 더 바래? 저런 얘기는 다른 감독들의 '질투'에서 나온 것이기도 해요. 아마 한국 감독중 내가 가장 많은 중상 모략과 모함을 받았을거야. 생각해봐요. 정말로 저질이고 별 볼일 없으면, 그렇게들 날 씹어대겠어? 그래도 요즘은 많이 좋아졌어. 우리때 '영화'를 하는 사람은 '현실'을 함부로 건드릴수 없었거든. '총'이나 '빨갱이'같은건 절대 못 나왔다고.
진 :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영화들, 세상에는 무척 많죠.
남 :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으니까 생각나는데, 예전에 무슨 트원티(Twenty)인가 하는 잡지에서 나한테 인터뷰를 해간적이 있지.
종 : 씨네 21 말씀하시는 겁니까?
남 : 어 그래 씨네 21. 거기서 나를 그 외국의 무슨 감독하고 비교하면서 '저질'이라고 했더라고.
진 : 에드 우드(Ed Wood) 말씀하시는듯 싶은데요?
남 : 맞아 그 이름일꺼야. 그때 기자가 남동철인가? 나랑 종씨라서 반갑고 그랬는데, 그 기사 이후 일체 연락도 안 해. 정말 기분 나쁘더라고.
(사실 남기남 감독의 경우 에드 우드 보다는 로저 코만(Roger Corman)에 가까운 편이다. 에드 우드는 만드는 영화마다 족족 대실패를 겪어서 사후에 재평가를 받은 경우지만, 남기남 감독은 한때 흥행 감독으로 분류 되었으니 뿌리부터가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로저 코만은 '싸고 빠르게' 찍는 감독인데다, 그를 토양으로 삼아 '스타'급 연기자와 감독 등의 인력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니, 오히려 남기남 감독은 이쪽에 가깝다. 물론 로저 코만이 끝없는 변신을 했다면, 남기남 감독은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을 너무 오랫동안 고집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이다. 결정적으로, 에드 우드 보다는 남기남 영화가 훨씬 재밌다.)
종 : 아까도 나온 얘긴데 말입니다. 일반인들이 남기남 감독님을 '3류'니 '저질'이니 말합니다. 왜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일까요?
남 : 70년대에는 영화사에 '수입 쿼터제'라는게 있었어. 1년에 몇편 이상의 한국 영화를 만들어야 영화를 수입할수 있는 권리를 주는 제도였지. 그래서 12월 말까지 검열을 받아야 하는데 아직 영화를 채 만들지 못했으면, 11월 말에 나를 불러서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하는거지. 그래서 1년에 4편 이상 9편까지 찍게 된거야. 나도 한때 '대종상' 분위기의 작품도 만들어 봤고, 영화를 만들면서 이딴걸 왜 만드나 하고 짜증을 낸적도 있어요. 한때는 액션물만 많이 찍어서 그렇기도 했고, 한때는 이대근하고 안소영 나오는 [합궁] 같은 에로물을 찍어서, 수입 쿼터제를 위해 일해서 등의 이유 때문에 나를 '저질'로 부르는 거겠죠. 질투하는 감독들이 그런 식으로 부르기도 했겠고.
진 : 그러면 1달동안 4편 이상을 찍으신 적도 있다는 건데요. 거의 1주일에 1편 이상을 찍는 속도네요. 그렇다면 대체 '빨리 찍는' 비결은 뭔가요?
남 : 나는 기획 기간(Pre-production)이 엄청 길어요. 짧아도 3개월은 기획하고, 작가도 A B C 3명한테 대본을 넘겨 받은후 모조리 내걸로 만들지. 그리고 제가요. 평소에는 술을 좀 먹지만, 촬영 이틀전부터는 전혀 술을 안 먹어요. 그런 식으로 '집중'해서 짧은 기간내 몰아 찍는거죠. 또 '누끼'라는게 있어. 여러명을 찍어야 하는 장면에서, 대본에 나온 순서대로 찍지 않고, 한사람의 장면만 미리 몰아 찍는거지. 그러니까 김씨 이씨 박씨의 대화씬이 있을때, 일반적으로는 매 씬마다 카메라를 돌려서 찍거든. 하지만 나는 카메라를 놓아둔채, 김씨의 대화만 몰아 찍고, 이씨의 대화만 몰아 찍는 식의 방식을 쓰지.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빨리 찍고 많이 버니, 제작자들이 나를 데려다 쓰는거지. 내가 살려낸 제작자들 참 많습니다. 그런데 내가 제작 - 감독을 맡은 영화들은 망했어.
종 : 제작과 감독을 다 맡으신 영화들은 어떤게 있으신지요?
남 : 대충 6편 정도 될거야. [사랑과 눈물], [머저리와 도둑놈], [씨내리], [소녀 18세]. [천년환생] 정도? 그정도밖에 기억이 안 나네. [씨내리]는 [씨받이]의 반대 의미의 제목이야. '씨를 내린다'는 거지.
진 : 제가 [천년환생]을 정말 좋아하는데요.
남 : 에이 좋긴 뭐가 좋아. 별로 못 찍은 영화인데.
진 : 제가 그 영화를 1998년 여름에 허리우드 극장에서 보고, 비디오 사다가 또 보고, 상영회에서 한번 틀며 보고, 저쪽 상영회에서 틀며 또 보고, 총 4번을 봤는데요. 정말 좋았습니다.
종 : 그런데 [천년환생] 포스터가 1996년 겨울에 벌써 나오지 않았습니까. 극장 상영까지는 2년이나 걸렸는데요. 무슨 이유라도 있으셨나요?
남 : 1998년? 아닐껄? 그때는 허리우드 극장에서 무슨 '한국 공포 영화제 심야 상영' 한다고 한번 빌려줬고, 그리고 저 어디야 삼성에서 하는데. 호암 아트홀에서 또 '공포 영화제' 한다고 필름 빌려달라는 요청 들어와서 빌려준게 전부야. 그 이상은 극장에서 상영 안 했을껄? (결국... 월요일에 시작해 금요일에 막을 내렸던 [천년환생]의 허리우드 극장 상영은, 감독 본인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다. ...)
종 : [천년환생]에 대해 질문이 또 있습니다. 후반부 닭장 결투씬이 [스타워즈]의 광선검 대결을 연상시키는데요. 혹시 거기서 의식하고 따오신건가요?
남 : 전혀 아니야. '낚시'에 사용하는 '캐미'라는게 있어. 흔들면 형광빛이 번쩍번쩍 나는건데, 그걸 미국에서 사와서 사용하게 된거지. 원래는 그걸 심형래가 갖고 있는 960 콤마 찍어주는 그런 카메라로 고속 촬영해야 하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카메라는 그냥 250 콤마를 찍을수 있는 장비였기 때문에 별로 폼이 안 났지. (촬영에 대한 '전문 용어'라서 제대로 옮기지 못했다.) [천년환생] 마지막 결투때 나오는 '닭장'은, 원래 '닭이 울면 귀신은 사라진다'는 공식에 따라 선택한거야. 닭장을 빌리면서 닭 300마리를 두당 1,500원에 구입해서 쓰게 되었지.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어. 라이트를 비추니 이 닭들이 구석으로 뭉쳐서 움직이지를 않는거야. 그래서 어쩔수 없이, 전 스탭이 닭을 두세마리씩 던지며 찍었지. 사실 나도 벽이 막 녹아내리고 손이 튀어 나오는 그런 셋트 크게 지어놓고, 거기서 영화 찍으려 했어.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7,000만원이 들지 뭐야. 하지만 닭장을 사용하면 700만원밖에 안 들었지. 만약 돈이 있었으면 더 좋은 셋트에서 찍었겠지만, 그때는 어쩔수가 없었어.
진 : 결국 '돈'이 문제군요.
남 : 그리고 여자 귀신이 눈에서 광선 쏴서 아파트가 무너지는 장면 있잖아. 그건 남산 아파트 무너지는 장면을, 내가 거기 사용하려고 직접 찍어서 쓴거야. 문제는 그 여자 귀신 눈에서 나오던 광선인데, 그거 진흥공사에서 애니메이션 부탁해서 만든 장면이거든. 사실 정말 멋지게 하려 했지. 그런데 이자식들이 개판 쳐놓은거야. 어쩌겠어, 그냥 써야지.
종 : 감독님께 [천년환생] 음악에 대해서 질문이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될때 들리는 메인 테마 음악은 샘 레이미(Sam Raimi) 감독이 만든 [다크맨(Darkman)]의 음악과 똑같은데요.
남 : 그건 이종식이라는 분이 맡아서 쓴거야. 영화 만들때 그 분이 이거 좋은 곡이라고 들려줬는데 괜찮더라고. 그래서 그냥 썼지. 똑같지는 않고, 편곡 한거겠지.
종 : 편곡 정도가 아니라 그냥 거기서 따왔을 것이라 생각될 정도로 똑같습니다.
남 : 탁 터놓고 얘기하죠. 여태까지 저는 일부러 남의 영화를 차용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이런건 있죠. 영화 만드는데 누가 와서 '이런 요소 어떠냐?'고 물어볼때, 좋아 보이면 난 그걸 씁니다. 그 과정에서 뭔가 들어왔을수는 있겠지만, 내가 일부러 베낀건 단 하나도 없어요. 다른 사람의 비슷한 영화도 되도록이면 보지 않으려고 해요. 그건 내가 확실히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사실 나는 그 영화도 보지 않아서, 그게 어떤지 전혀 모르겠어요. ('차용'이나 '표절'은 상당히 민감한 문제인데, 이 인터뷰를 읽는 분들이 각자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고 본다. 한가지 확실한건, 남기남씨의 영화중 뭔가를 쌔빈듯한 느낌이 드는 부분은 상당히 적다는 거다.)
진 : 남기남 감독님의 최근 작품에 대한 질문입니다. [망치를 든 짱구와 땡칠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건 언제 개봉하나요?
남 : 그거 개봉은 했어. 서울 몇군데서 하고, 지방에서도 몇군데 했을텐데, 사람 별로 안 들고 막 내렸지. 이제 더 이상 '아동물'은 극장에서 안되더라고. 애들이 하고 놀게 너무 많고, 비디오로 금방 나와버리니, 이제는 극장에 와서 안 봐.
진 : 그럼... 아직 비디오로는 나와있지 않은가요?
남 : 비디오로는 아직 출시 안 했지.
종 : 한국 영상 자료원 인터넷 서비스 ( www.cinematheque.or.kr ) 을 찾아보니까, [망치를 든 짱구와 땡칠이] 이후의 영화가 몇편 더 올라와 있던데요. 그것들은 어떻게 된겁니까?
남 : 지금 현재 [용의 닌자]라는 홍콩 배우들과 작업한 작품이 완성되어 검열중이고, [어머니 절받으세요]라는 작품은 2/3 촬영 끝났어. [용의 닌자]는 액션물이고, [어머님 절받으세요]는 추석 개봉을 예정으로 두고 있는 이산가족 얘기지. 중국 여인을 어머니로 두고 있는 아들이 40년만에 헤어진 어머니와 만나게 된다는 내용이야. 중국 로케중이지. 그리고 여름방학 개봉 예정으로 [너 없는 나]라는 슬픈 청소년물 하나를 찍을 예정인데, 그건 현재 책(대본)이 나와있어.
종 : [영구와 땡칠이]가 1989년 개봉하면서 작년 [쉬리]가 개봉할때까지 국내 비공식 최고 관객 동원을 차지했는데요. 당시 흥행에 얽힌 말씀을 좀 해주실수 있으신지요?
남 : 사실은 아직도 [쉬리]보다 [영구와 땡칠이]가 많아. 하지만 [영구와 땡칠이]는 시민회관 같은 곳에서 주로 개봉해서, 집계가 제대로 되지 못했지. 당시 시청 옆에 국회의사당인가, 여하건 뭐 큰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도 [영구와 땡칠이]를 상영했어. 정말 엄청나게 많이 왔지. 그리고 이주일이 출연한 [평양 맨발] 있잖아. 이것도 피카디리 극장이 무너질 정도로 많이 왔지. 이주일이 영화 많이 찍었지만, 결국 장사 잘 된건 내 영화 하나밖에 없어. 또 [쉬리]는 영화 자체의 힘이라기 보다는, 그 '상황'과 '선전'이 작용한 것도 크다고 말할수 있죠. 아마 그 영화 실 제작비는 7억 정도밖에 안 들었고, 나머지 돈 30억은 홍보비 같은 부분에 사용되었을걸?
종 : [영구와 땡칠이]를 보면 '호러 캐릭터'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드라큐라부터 시작해서 동서양의 귀신이 총망라해 나오던데요. 그런 설정을 하시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건가요?
남 : 당시는 애들에게 '슬픔'의 정서만 강조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강했어요.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같은 영화들 있잖아. 나는 그거랑 달리, 애들에게 '개그'를 주고 싶었어. 그래서 그런 캐릭터들 사용한거야.
진 : 그런데 [영구와 땡칠이]는 원래 어떻게 찍게 되신건가요? 저희 호러존에서는 이 영화를 상당한 호러 걸작으로 손꼽고 있습니다.
남 : 당시 김청기 감독의 [우뢰매]가 엄청나게 성공했잖아. 그래서 심형래가 '아동영화'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나한테 하더라고. 당시 KBS에서 글 쓰던 장덕균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각본을 쓰게 되었지. 처음에는 [귀신잡는 영구] 같은 제목을 붙였는데, 이건 좀 아니더라고. 그래서 나한테 하루만 달라고 했지. 그러다가 동네를 가는데 왠 개 한마리가 있어서 뻥 찼어. '깨갱'하더라고. 거기서 착안을 해낸 이름이 [영구와 땡칠이]야. 그때 똥개를 한마리 사서 1개월간 훈련을 시켰는데, 얘가 힘이 없더라고. 막판에 물고 늘어지는 장면 있잖아. 그건 개가 물고 늘어진게 아니라, 배우가 개를 잡고 연기한거야. 아무리 훈련해도 그런건 안되더라고. (대단한 영화에, 대단한 뒷 얘기다.) 그리고 당시 드라큐라로 나오던 배우가 박동영씨었고, 스님으로 나온 장동일씨는 당시 무술 감독을 하던 사람이야. 그 뒤에도 몇편 더 같이 찍었지.
종 : 심형래씨와 처음 만나신 [각설이 품바타령]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수 있으십니까?
남 : [품바타령]이라는 연극 알아요? 안 봤으면 한번씩 보라고. 아주 잘 된 작품이야. 그걸 기초로 나는 심형래랑 [각설이 품바타령]을 만들었지. 옛날 각설이들은 공부하다 집안이 몰락해서 되는 경우가 많았거든. 이른바 '식자층'들이 있었다는 거지. 그래서 일제시대 당시 '독립군'의 군자금 운반책으로 그들을 사용하기도 했어. 나는 [품바타령]을 약간 코미디로 만들어서 [각설이 품바타령]으로 내놨지. 그런데 그것 때문에 '안기부'도 갔었어. 만약 이 필름이 북으로 가면 남한에는 거지들만 산다는 선전용으로 쓰일수 있다는 거야. 아 그때 정말 혼났어.
종 : 사실은 얼마전에 이 영화를 구했습니다. (그는 남기남씨에게 [철부지]의 커버를 보여주었다.)
남 : 아 [철부지]. 이거 재밌지. 사실 여기 심형래는 특별 출연으로 몇장면 안 나오고, 이성미랑 임하룡이 주연이야.
진 : 그리고 '남기남'이라는 이 이름이 매우 특이한데요. 혹시 본명이세요?
남 : 아 본명이고 말고. 남기남(南基男). 터 기(基)에 사내 남(男). 물론 명함에는 그냥 남기남(南基南)이라고 씁니다.
종 : 아까도 말한 씨네 21의 만화에 보면 '남기남'이라는 등장 인물이 나오는데요.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남 : 뭐 별 생각 없어. 내 이름 갖다 써서 책 한권이라도 더 팔린다면 좋은거지.
진 : 저희같이 팬들이 찾아오고 싸인 해달라 이런 적도 많았나요?
남 : 아 물론 많았죠. 지방 촬영 다니거나 극장을 방문할때면, 나는 항상 싸인 공세를 받았어요. 당시 '감독'한테 싸인을 부탁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나는 예외였어요. 그리고 액션 영화 찍을 당시에는, 하루에도 10명씩 배우 시켜달라고 무술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어요. 그땐 정말 굉장했지.
종 : 남기남 감독님은 정말 많은 '알려진' 배우들을 데려다 영화에 출연 시키셨는데요. 그게 다 어떻게 된건가요?
남 : 내 영화에 나와서 뜬 사람 많습니다. [평양 맨발]의 이주일도 내 영화 이후 떴죠. [서울은 여자를 좋아해] 보면 박세민이나 최병서도 다 내 영화 거쳐갔습니다. 그리고 남포동 있죠. 원래 그 사람은 제작부장이었는데, 내 영화 [뒤돌아보지마라]에서 조연을 한번 한 이후로 배우를 시작했어요. 그래서 요즘은 그렇게 떠버렸지. 그런데 나는 출연진에 대해 한가지 철학이 있습니다. 감독보다 비싼 개런티의 배우는, 절대 쓰지 않아요.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치 않거든. 그래서 내 영화에는 '톱스타'는 절대 안 나옵니다.
진 : 어제 [태권소년 어니와 마스타 킴]을 50분 정도 보다 나왔는데요. 거기 신성일씨나 강석현씨 같은 상당히 지명도 높은 배우들도 나오더라고요. 그들은 어떻게 섭외해서 출연하게 된건가요?
남 : 한국 배우니까, 섭외해서 출연료 주고 쓴거죠. 거기서 뭐가 더 있겠어요? 그때 '어니'라고 태권도 잘 하는 애가 있었는데, 아마 성인이 되어서도 활동하고 있을거에요. 걔랑 마스타 킴이라고, 미국에서 도장 차리고 관장하던 사람을 섭외해서 만들게 된 영화죠. 그때가 [영구와 땡칠이] 찍던 때였는데, 며칠 낚시한다고 말해놓고 미국가서 4-5일만에 찍고 돌아온 영화에요.
종 : 요즘 보신 한국 후배 감독들의 영화중에서, 마음에 드시는게 있으신지요?
남 : 나 그거 재미있게 봤어요. [텔미섬딩]. 그 감독은 뭘 원하는게에 대한 철학이 있고, 전체적 구성이 확실한것 같아요. 요즘 연출자들은 대부분 '비디오 연출'을 하는것 같고 뭔가 부족함이 있는데, 그 감독은 뭔가 좀 다르더라고요. (그러고 보면,[텔미섬딩]이 남기남 감독의 스타일과 부합하는 면이 있다.)
진 : 외국 영화 감독중 좋아하는 분이 있으신지요?
남 : [벤허]의 윌리엄 와일러 감독, 정말 좋아해요.
종 : 심형래씨와는 오래전부터 많은 작업을 해오시지 않았습니까.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남 : 심형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이에요. 의리의 사나이지. 요즘도 나한테 잘해주고 그러는데, 나랑 같이 일한 사람중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사람 정말 없지. 하지만 심형래랑 내가 생각하는 영화의 관점은 정 반대야. 나는 성인 위주로 잔잔하고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좋아하고, 심형래는 아동 위주로 보여주는 재미를 좋아하지.
종 : 혹시 심형래씨가 만든 영화들을 보신적이 있으신지요? 그 영화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 : [티라노의 발톱]인가 하고 [용가리]. 형래가 만든건 이거 2편이라고 봐. 사실[용가리]를 형래의 첫 작품이라 봐도 좋을 정도지. 그런데 아직 연출의 노하우가 좀 부족한것 같아. 요즘 젊은 감독 중에서는 영화에 대한 애정이나 경력 없이 그냥 한번 해보겠다는 사람이 많은데, 그건 아니라고 봐. 나도 조감독 9년 하다가 1972년에 감독 데뷔했잖아. 그에 비해 [쉬리]의 강제규 감독은 고생도 해봤고, 연출이 뭔지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지.
진 : 그동안 작업하시면서 여러 배우들과 일을 해오셨는데요. 그중에서 가장 호흡이 잘 맞는 배우는 누구였고, 별로 맘에 들지 않는 배우는 누구셨나요?
남 : 가장 죽이 잘 맞은 배우는 백일섭이었지. [무협검풍], [평양 박치기], [따귀일곱대], [소녀 18세] 등의 영화에서 같이 작업했어. 가장 잘 안 맞은 배우는 [합궁]에서의 안소영이었어. 하지만 대부분의 배우들과는 별 트러블이 없었어. 내가 원래 기가 좀 세니까. 내가 촬영장에서는 욕을 좀 많이 하는 욕감독으로 통하거든요.
종 : 남기남 감독님의 영화는 자료를 매우 구하기가 힘듭니다. 어떤 영화가 만들어 졌냐는 사실 자체도 알기가 힘들지만, 테이프도 엄청나게 힘들게 찾아야 발견할수 있습니다.
남 : 사실 나도 내 작품 3-40편 정도밖에 갖고 있지 않아요. 그것도 다 베타지. 당시 제작자들도 많이 이민 갔고, 창고에 남아있는 필름도 별로 없어. 예전에는 홍콩으로 20여 작품이 넘어가면서 '네가'까지 넘겼는데, 그것들은 국내에 없지. 한번 홍콩 가서 물어본 적이 있는데, 자기들도 그 필름은 없다 하더라고. 내가 판 그 작품들에 자기네들이 액션을 조금 더 찍어 넣어서, 완전히 다른 영화로 팔아먹었다는 거야. 그러니 그것들 원본은 남아있지 않지. 참 나 [평양 맨발] 없는데, 하나 카피해줘라. 화질은 별로 안 좋아도 상관 없어.
진 : 네...? ... 네... 카피해 드릴께요. (순간적으로 정말 당황했음.)
남 : 참 그거 알아요? 나는 내 영화에 꼭 한컷씩 출연해요. 한번 확인들 해봐요. (여기서 한번 더 당황했음.)
종 : 감독님께서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시는 영화 장르는 어느쪽이십니까?
남 : 사실 난 '미스테리'에 가장 애착이 있어요. 내가 만든 영화중 [노상에서], [뒤돌아보지 마라], [0시의 호텔], [폭풍을 몰고 온 사나이] 같은 영화들이 미스테리물이지. 미스테리와 멜로가 내 취향과 가장 잘 맞아요. 반면 액션은 이제 지겹고,아동 코미디는 더 이상 아이들이 보러 오지 않으니까 만들고 싶지 않지. 그런데 한국에서 미스테리는 흥행이 안 돼요. 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별로 장사가 안 되니까 하고 싶어도 만들수가 없죠.
진 : 미스테리 물을 좋아하신다니 다른 감독의 작품 중에서 재미있게 보신 작품이 있으실듯 싶은데요.
남 : 거 어린애 나오는 영화 있잖아. [식스 센스(The sixth sense)]인가? 그거 무척 재미있게 봤어요.
종 : 동시대에 활약하신 비슷한 부류의 감독분들이 몇 분 더 계시는데요. 그분들과 교류는 있으셨는지요? 예를 들어 [천년백랑]의 박윤교 감독님 같은 분들 말입니다.
남 : 박운교 감독님은 귀신 영화를 5-6편 정도 찍었고, 오래전에 타계하셨지. 당시에는 선후배가 아주 깍듯하고, 서로들 교류가 있었어. 하지만 요즘 영화판에서는 선후배간에 교류가 별로 없어. 충무로에서 지나가다 마주쳐도 "쟤 누구냐?" "어 이번에 무슨 무슨 영화 찍는 신인 감독이야." "그렇구나." 이정도야.
진 : 홍콩 영화쪽 교류가 있으셨으니 그쪽 영화도 좀 보실듯 싶으신데요.
남 : 오히려 홍콩 영화는 거의 보지 않아요. 지금 세계적으로 날리던 '성룡'도 옛날에는 한국에서 배워가던 입장인데, 내가 그런거 보게 생겼어요?
종 : '호러 영화' 중에서 재미있게 보신건 어떤 작품인가요? 그리고 그 장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 : 좋아하는 호러 영화라면, 대선배의 작품중에 [월하의 공동묘지] 정말 재밌게 봤어요. 내가 [천년환생] 처음 만들때 하고 싶었던게 그 고전을 다시 만드는 건데,기획하는 사람들이 배경을 '현대'로 끌고 와버렸어요. 원래대로 했다면, 지금 만들어진 그 영화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을거야. 개인적으로도 '현대물'은 필이 잘 안 와서, 그렇게 잘 만들지도 못했어요. 첫 장면에서 묘가 갈라지며 귀신이 튀어오르는 장면은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찍은건데, 거기서만 3천만원을 썼어요. 안타깝게도 예산 부족으로 원래 찍으려 했던 많은 부분이 누락되면서 실패작이 되었지. 그리고 원래는 '윤철형' 대신 '최수종'을 쓰려 했어요. 7-8년전쯤 미개봉된 작품이 하나 있는데, 최수종씨가 나랑 [일지매] 같은 영화를 하나 찍은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연결이 되어서 [천년환생]에 캐스팅하려 했는데, 당시 최수종이 곤란한 일이 생겨서 윤철형이 대신 들어가게 된거죠. '김청'하고 '윤철형'이 주연을 맡았는데, 영화는 망했지만 그래도 난 줄거 다 줬으니 떳떳하죠.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호러 장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영화의 유행도 사회 전반에 흐르는 '경향'을 쫓아가는게 좀 있는데, IMF 등의 힘든 사회에서는 '쇼킹'하고 '잔인'한 액션이 잘 먹히고, 마음이 편안한 사회가 오면 '호러'가 먹혀요. 그 유행을 타게 되면 나도 그런걸 만드는거지.
진 : 영화 찍으시면서 가장 고생하신 작품으로 어떤걸 꼽을수 있을까요?
남 : [오걸인]이라고, 최화정씨와 정혜선씨가 나온 여자 거지 이야기가 있었어요. 눈이 가슴까지 올라오는 곳에서 촬영하는 씬이 있었는데, 그때 상당히 고생했죠. [태권소년 어니와 마스타 킴]도 미국에서 찍어서 좀 고생을 했고.
종 : 마지막으로 요즘 한국 영화에 대해 말씀하시고 싶은 점 있으세요?
남 : 한국 영화는 우선 배우 개런티를 낮춰야 한다고 봐요. 배우들 몸값이 너무 비싸니까, 적은 돈으로 뭘 하나 하고 싶어도 상당히 힘들죠. 그리고 영화 인력들의 고령화가 너무 빨라요. 미국에서는 아놀드 스왈츠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같은 배우들도 50이 되어서 활동하고 그러는데, 한국은 너무 빨리 밀려나버려. 감독이나 제작진 등도 마찬가지고. 누가 뭐래도 영화는 '짬밥'인데, 신진 세대가 구세대를 너무 무시하면 안되죠. 사실 방 떠버려서 잘 먹고 잘 살아버리면 될텐데, 그렇지 못하니까 문제겠죠.
인터뷰는 끝났고, 김종철씨는 [철부지]의 커버에 '친필 싸인'을 받는데 성공했다! 500원짜리 비디오가 50,000원짜리로 둔갑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이날 호러존의 취재진은, '과거의 명감독'이 아닌 '현재의 일꾼' 을 만났고, 그 사실에 매우 흡족해 했다. 차후 다른 일로도 몇번 더 만나뵐수 있을 것이라는 약조를 뒤로 남긴채,취재진은 부족한 잠을 채우기 위해 각자의 길을 걸었다. 괜찮은 2시간이었다.
예 길죠? 하지만 아주 흥미로운 얘기들입니다..
제보자에 윤수형 제공에 호러존 편집에 저 박민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