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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효용군은 어떤 군사인가
누가 왜구의 기세를 꺾었을까요?
현감(縣監)? 부사(府使)? 절도사(節度使)?
영암현감 이덕견은 항복해 포로가 된 상태였고 장흥부사 한온과 병마절도사 원적은 살해된 상태였다. 그럼 그런 상황에서 왜구와 싸우고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도대체 누구라는 말인가?
잠깐!
절도사(節度使)는 어떤 직책인가?
절도사는 고려 전기 10도(道) 12주(州) 절도사체제 하의 지방장관이다. 절도사체제는 당나라에서 안사(安使)의 난 이후에 절도사 이하 관찰사(觀察使), 단련사(團練使), 방어사(防禦使) 등 군사적으로 편성한 지방제도였다.
조선시대 서반 무관 외관직이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는 종2품,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는 정3품이었다. 각 도의 군권(軍權)을 장악하였으며 대개는 종2품인 관찰사가 겸임하였다.
조선최초 의병장이라고 한 전라좌우우호와 진해현감, 해남현감을 지낸‘양달사’였다.
양달사는 의병을 모집해 영암읍성에서 왜구와 맞서 싸우면서 성을 지키는 그들의 약탈과 방화와 살인을 막는 일과 그들을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못 디디게 하는 10개의 성을 함락해 기세에 오른 왜구보다 병력수와 무기, 군량미 등의 군사력이 열세였고 사기도 저하됐지만 의병장인 양달사는 기죽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방어 및 전투에 임했다.
양달사 의병장은 웅성거리고 있는 분들을 향해
“주목하시오 영암읍성을 함락하기 위해 왜구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미 영암현감이 왜구한테 잡혀 항복했고 항복하며 포로가 된 상태입니다.”
“우리만큼은 절대 저들한테 항복하거나 포로를 당해서는 안 됩니다.”
“왜구들은 약탈과 방화, 사람을 죽이는 못된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웅성거렸던 소리는 일시에 조용해졌고 긴장의 눈이 짙었다.
“우리는 왜구들의 만행에 절대 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힘을 합쳐 왜구들을 물리쳐야합니다.”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양달사 의병장이 힘주어 외치자 의병과 성안 사람들은
“맞소! 우리는 저 왜구들에게 읍성을 내주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가 저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안됩니다.”
“우리는 영원히 저 악마들에게 괴롭히는 당하게 됩니다.”
“우리의 주권마저 빼앗기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정신 차립시다.”
“맞서야합니다. 싸워 이겨야합니다. 왜구를 물리쳐야합니다.”
“읍성을 반드시 지켜야합니다.”
“싸웁시다. 여겨냅시다. 물리칩시다.”
집결한 성안 사람들은 상기되고 성난 얼굴로 목청이 터지라고 크게 외치며 왜구들의 기세를 꺾겠다고 힘을 모았다.
양달사 의병장은 읍성 사람들의 결전태세를 위한 결의에 대해
“여러분들의 결전의지가 대단합니다.”
“이런 마음들이라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불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코 이겨낼 것입니다.”
“들으시오. 우리는 마음은 이미 하나가 됐습니다.”
“이제는 각자 맡은 위치에서 역할을 충실히 해주길 바랍니다."
양달사 의병장은 형 등 참모들을 시켜 읍성 사람들에게 임무를 맡겼다. 성문지기, 연락병, 전투병사, 음식담당, 창고지기, 무기지기, 의료담당 등 역할을 주며 일전태세로 하여 강인한 군대를 조직해 왜구에 맞섰다.
성안에서 왜구들과 맞섰던 양달사 진영은 성안을 지키는 데는 탄탄한 모습을 보여 왜구들이 무너뜨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성 밖의 일이 걱정이었다. 성 밖에서는 왜구들이 무차별적으로 약탈과 방화를 하고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상안에서는 왜구의 침입을 막고 있었지만 성 밖에서의 만행은 어떠한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성을 벗어나서까지 싸운다는 것은 무리였고 모험이었다. 한계상황에 처한 상황에서 지켜봐야만 하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일부 군대를 투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구들이 노리는 게 바로 똘똘 뭉친 양달사 진영을 이간시키거나 흩어지게 하여 무기력하게 하는 것임을 양달사 의병장을 잘 알고 있어 왜구의 전략에 빠져들지 않았다.
양달사 군대가 결전태세를 갖추며 함성을 크게 외치자 왜구는 긴장감이 돌았다. 다행히 정규군인 조선군이 영암읍성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도순찰사 이준경과 경상좌병마절도사 조안국, 좌우방어사 남치근과 김경석을 파견했다는 소식도 듣게 된다.
잠깐!
방어사(防禦使)는 어떤 직책인가?
방어사는 고려.조선시대 지방 관직이다. 각 도에 배속되어 요지를 지키는 병권(兵權)을 가진 종2품의 벼슬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다음의 직위(職位)이다.
왜구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의병들을 보고
“저 것들 봐라!”
“겁 대가리가 없네”
“저놈들이 무서운 줄 모르고 날 뛰는구나”
왜의 장수는 병사들에게“저놈들을 목을 베어라!”서슬 퍼런 칼을 번쩍이며 높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는 상대가 쌔게 나와 당장 부서 버릴 것 같은 큰 소리는 냈지만 마음속은 긴장을 했다. 떨리는 가슴과 다리를 하며 양달사 의병장과 기 싸움을 했다. 왜구는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난 것 같아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기세는 점점 식어졌다.
이쯤하고 그럼 왜구가 침입하고 있을 때 영암현감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표 세 개를 쳐본다. 왜! 궁금 점이 많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덕견은 왜 포로(捕虜)로 잡힌 것일까?
466년(1555) 전 영암현감으로 이덕견(李德堅)이 부임해 있었다. 그는 갑작스런 왜구의 침입으로 당황을 했다. 해남, 강진을 함락한 왜구는 영암도 집어 삼키려고 군사들을 몰고 공략했다. 영암현감 이덕견은 달량진으로 일시에 쳐들어온 왜구에게 손 한 번 못써보고 그만 잡혀 항복하고 포로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미 달량진 수비대는 원체 중과부적이었던지라 결국 3일간 항전 끝에 함락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전라병마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은 전사하고 만다. 장수들을 전사시킨 왜구들은 영암현감 이덕견을 포로로 잡는 등 대참사가 발생했다.
1555년 5월 16일(음력) 전라도 관찰사 김주(金澍)로부터 5월 11일에 왜선(倭船) 70여 척이 달량(達糧) 밖에 와서 정박했다가 이진포(梨津浦)와 달량진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육지로 상륙하여 성 아래의 민가를 불태워 버렸고 결국 성이 포위되고 말았다는 내용의 장계(長計)가 조정으로 올라왔다.
잠깐!
관찰사(觀察使)는 어떤 직책인가?
관찰사는 조선시대 각 도에 파견되어 지방 통치의 책임을 맡았던 최고의 지방 장관이다. 감사(監司), 도백(道伯), 방백(方伯), 외헌(外憲), 도선생(道先生), 영문선생(營門先生) 등으로도 불리었다.
처음에는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라고 했으나 1466년(세조 12)에 관찰사로 개칭하였다. 고려의 안찰사(按察使) 및 안렴사(按廉使)의 후신으로 고려 말에 나타났으나 기능이나 지위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고려의 안찰사체제에서 조선의 관찰사체제로 바뀐 것은 고려 전기이래 꾸준히 추진되어 온 군현제(郡縣制)와 도제(道制) 정비 작업의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그 촉진제로서 구실을 담당, 조선의 중앙집권적 체제 구축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관찰사의 기능은 크게 두가로 나나눌 수 있다. 임금을 대신하는 지방 장관격의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첫째는 외관(外官)의 규찰이라는 관찰사 고유의 기능이다. 즉 국왕의 특명을 받은 사신으로서 끊임없이 도내를 순력하면서 1년에 두 차례 수령을 비롯한 모든 외관에 대한 성적 평가와 보고하는 일이었다. 둘째는 지방 장관의 기능으로 모든 외관의 상급 기관으로 도내의 모든 군사와 민사를 지휘 통제했고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상당한 정도의 직권단련이 주어졌다.
관찰사는 각 도의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를 겸임하였다. 관찰사의 임기는 조선 초기에는 1년이었다가 후에 2년으로 하였다. 고려 말 4~6품의 관리가 임명되던 것을 조선시대에는 종2품으로 품계를 높였다. 관찰사가 행정업무를 보는 관아를 감영(監營), 영문(營門), 순영(巡營)이라고 하며 관원으로는 도사(道使), 판관(判官), 중군(中軍) 등 중앙에서 선출된 향리(鄕吏)로 하여금 감영에 속한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6방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왜구들이 해안가로 상륙해서 행패를 부리자 가리포 첨사(僉使) 이세린(李世麟)이 즉각 병사 원적(元績)에게 이를 알려서 원적이 장흥부사 한온(韓蘊), 영암현감 이덕견(李德堅)과 함께 그를 구원하려고 달량진과 성이 있는 달량으로 달려갔다가 포위되었다고 한다. 결국 한온은 전사하고 남은 병력들은 달량에서 버티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왜구에게 화친(和親)하자고 화친제안을 했지만 결국 점령당하고 해안가 일대는 순식간에 장악당하고 만다.
이때 이운경과 이준경이 오면서 전세가 급변하게 되고 적극적으로 맞서 싸울 준비를 하는데 남치근은 겁을 먹고 있어 남치근에게 호통을 친다. 적들은 도망을 갔지만 완전히 격멸을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남치근 같은 장수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또 인근 장수(장군)들이 무서워서 나올 궁리를 하지 않아서였다.
달량진 앞바다에 왜구들이 배를 정박하고서 곧 상륙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덕견 현감은 병사들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전라병마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은 왜구들과 싸우다가 전사를 하게 되고 이덕견은 손을 들며 항복하고 포로로 잡힌다.
“칼과 화살을 내려놓고 투항하라!”
“너는 우리 군사(왜군)들에게 포위당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의 목을 당장 칠 것이다.”
“어서 말에서 내려와 무릎을 끌어라!”
왜장이 무서운 얼굴로 호령을 하자 이덕견 현감은
왜구들의 전력태세를 보고서 주저 없이 말에서 내려와 무릎을 끌었다.
“살려주십시오!”
“목숨을 유지하게 해준다면 장수(왜장)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살려주길 호소했다. 처절한 굴함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서 헤어날 방법이 없었다. 당연 한온이 전사하고 이덕견 현감마저 잡혀 군사들은 동요했다. 백기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왜구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바로 포로로 잡힌 이덕견 현감을 데리고 영암성으로 진입한다.
영암읍성에 들어와 영암성을 지키고 있던 군사와 백성들을 향해
“봐라! 너의 수장은 포로로 잡혀있다.”
“수장은 항복을 했다.”
“너희들도 항복하며 투항하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들의 목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시간을 주겠다.”
“그래도 투항하지 않으면 전원 쳐 죽일 것이다.”
왜구들은 이덕견 현감만 포로로 잡아 그런 것이 아닌 군사와 일부 백성들도 잡아 놓고 곧 참수하려한 듯이 위협하며 성안의 사람들에게 공포를 조장했다. 이덕견 현감은 철장에 갖춘 개와 같았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쥐 죽인 듯이 꼼짝을 못하고 처참한 꼴로 무릎을 끌고 있었다. 왜구들에게 기가 죽어있는 이덕견 현감은 왜구들이 시키는 대로 성안의 병사와 백성들에게 항복하라고 왜구들이 시키는 대로 흐느끼며 전했다. 하지만 절대 현혹되지 않았다. 왜구들이 인질로 잡힌 이덕견 현감을 이용하려는 속셈에 절대 넘어가지 않았다. 결전해서 반드시 이기겠다고 정신무장을 더 해됐다.
왜장의 공포 호령에 성안에 있던 모든 분들은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한 난감한 상황이 됐다. 이런 상황에 처해있을 때 어디에선가 말달리는 소리와 의병들의 소리가 들렸다.
“다그닥! 다그닥! 키~ 히히히잉!!”
말들은 양달사 의병장의 고삐에 따라 갈기를 휘날리며 왜구들에게 향했다.
양달사 의병장은 성안에 도착해 말고삐를 당기며
“우워! 우아!”
말을 멈추게 했다. 그러면서
“왜놈들은 들어라!”
“만약 우리 병사와 백성을 털끝 하나라고 건들이면 가만두지 않겠다.”
“하나라도 손상을 입힌다면 각오를 하라.”
“지금 당장 영암읍성에서 떠나라!”
"영암 백성들을 괴롭히면 목숨을 각오해라!"
“그렇지 않으면 목숨이 온전치 못할 것이다.”
단호한 경고를 날리며 엄포를 주었다. 그리고
“당장 떠나라!”
“조선 땅에 다시는 발 딛지를 마라!”
“다시는 이 나라를 침략하지 말그라!”
큰 소리로 왜구들을 위협했다. 기 싸움을 했다.
하지만 왜구들은 눈하나 깜짝 않는 듯했다. 포기하지 않고 그럴수록 더 결전태세를 갖추었다. 여기에 맞서 아군들도 지지 않겠다며 강한 정신으로 방어했다.
이윤경 부사는 왜구가 더 강하게 덤벼들며 날뛰는 것을 보고 매우 당황했다. 김경석, 남치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겁을 먹을 정도로 기가 죽었는지 몸을 떨었다. 그리고 살살 뒤로 피하련듯 몸을 사렸다. 양달사 의병장은 그런 장수들의 비겁한 모습에 화가 치밀었지만 꾹 참고 결전태세에 임했다.
"나는 누구인가?"
"저런 비겁한 장수는 되지 않겠노라!"
"나는 이 나라, 이 고을과 백성을 지키기 위해 의병을 조직해 여기에 왔노라!"
"나의 결전태세가 적을 치겠다는 막아내겠다는 강인한 정신이 있다면 적은 굴복할 것이다."
"그들은 포기하고 항복하거나 도망을 갈 것이다."
"왜구들이 이 성에서 떠나는 것은 나의 의지에 달려져있다."
양달사 의병장은 다른 장수들은 망설이고 있었지만 자신은 장독기와 칼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우리 단결해 저 왜놈들을 물리칩시다."
"모두 나가 싸웁시다."
하며 성에서 보이는 월출산의 위용만큼 기세에 힘입어 결전태세에 임했다. 월출산 당당한 자태처럼 양달사 의병장도 강한 모습으로 적을 응시했다.
양달사 의병장은 병사와 백성들에게
“왜구에 포위되어 있지만 절대 동요하지를 마십시오!”
“우리는 저 왜구들과 싸워서 반드시 이겨내야 합니다.”
“싸웁시다. 물리칩시다.”
거듭 호령하며 전투에 임했다. 전투에서 이겨낼 방법을 생각해낸 양달사 의병장은 굿패거리인 창우대를 조직하고 또 진흙탕이 있는 곳으로 봐두고 그곳으로 유도를 한다. 군사작전이 치밀하게 속도 있게 진행하여 왜구들을 꼼짝 못하게 하여 그들이 기절초풍하게 했다.
“걸음아 나살려라!”
완전 속임수에 당하는 왜구들의 패배(敗北), 양달사 의병장의 계략이 큰 승리를 가져와 성안에는 승리의 함성이 성 밖에까지 울려 퍼진다.
“이겼노라!”
“저 왜놈들을 우리가 박살내었노라!”
기쁨의 함성이 그칠 줄을 몰랐다.
영암전투에서 양달사 의병장은 말이 진흙탕에 빠진 바람에 말은 양달사 의병장은 왜구가 던진 창에 등이 맞았고 그만 진흙탕에 누워버렸고 말을 버리고 왜구들의 포위에서 간신히 탈출했다. 양달사 의병장은 다시 성안에 들어가 말을 빌려 타고 다시 진흙탕이 있는 곳으로 가 다시 맞서 싸웠다. 양달사 의병장은 몸에서 피가 났지만 개의치 않고 왜구와 끝장을 보겠다며 육탄(肉彈)으로 덤벼들었다. 왜구들은 이런 양달사 의병장을 보고“끈질긴 놈이구나”,“이놈이 겁 대가리가 없구나!”하며 쉽게 포기하지 않는 양달사 의병의 병사를 보고 난처하며 당황했다. 긴장을 한 왜구들은 쫓기고 쫓기며 결국 잡히거나 죽거나 하는 등 패배를 하고 만다.
영암전투에서 결국 승리는 우리였지만 앞서 벌여진 일에는 달량진을 점령한 왜구들은 이덕견 현감을 이용한다.
왜구들은 이덕견을 죽이지 않고 나름대로의 필요성이 있어 계략을 꾸민다. 이덕견에게 살려줄 테니 왜장(倭將)은 내 말을 잘 들어라 하며 조건을 제시한다.
포박 상태인 이덕견은 항복을 하고 왜장의 말에 복종(僕從)을 하게 된다.
왜구들은 포로로 집힌 이덕견에 군량미 30섬을 요구하는 글을 주어 영암으로 보내는 방자함도 서슴없이 보인다.
왜구들은 포로로 잡힌 이덕견을 조선 조정(朝廷)에 보내는 편지를 전달해주는 조건으로 풀어주게 된다.
편지내용은 어떤 글들이 쓰여 있을까요?
“조선 왕은 명심하라.”
“지금 당장 한양으로 진격해 도성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겠다.”
도발적인 엄포가 쓰여 진 편지였다.
조정에서는 이 편지를 받고 깜짝 놀라며 발칵 뒤집혔다. 난리 난 조정은 서둘러 긴급회의를 했고 왕은 대신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에 조정은 바로 중앙군을 파병하기로 결의했으며 호조판서인 이준경을 도체찰사로 삼고 경상좌병마절도사 조안국, 좌우방어사 남치근과 김경석을 왜구를 토벌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파견한다. 이들의 활약으로 왜구를 토벌하고 영암에서도 왜구를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때 도춘찰사로 나주에 내려간 이준경은 겁을 내고 움츠리며 왜구를 소탕하는데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만다. 후에 그런 책임을 물어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된다.
잠깐! 이때 당시 왜국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왜! 저들은 조선 등을 침략했을까?
당시 왜는 16세기에 전국적으로 호족(豪族)들이 세력다툼을 하던 전국시대였다. 왜국의 집권세력이었던‘무로마치막부’의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어 내부 혼란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이에 왜국의 서부 지방 해안가에 사는 왜인들이 조선과 명나라에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자행하던 때라 을묘왜변 때 조선을 침입한 왜구가 꼭 대마도 왜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으나 조선의 조정은 대마도에 대한 무역 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강경책을 썼다.
을묘왜변 1차에서 전라도를 약탈하고 유린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왜구는 같은 해 6월 1차 때와 같은 무리들을 이끌고 제주도를 침략한다. 1차의 단순한 약탈이라는 성격을 떠나 제주도를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는 계획적인 침략이었다.
이 시기의 왜구는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전라도, 제주도, 일본을 잇는‘해상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절해고인 제주도에 근거지를 마련해야했던 왜구는 1555년 6월 1000여 명이 선박 60여 척에 분승(分乘)하여 제주도 화북포에 상륙하여 3일간 제주성을 들러 싸고 제주민과 왜구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제주목사 김수문(金秀文)을 중심으로 민.관.군이 협력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는데 여기에는 김성조.김직손.이희준.문시봉의 이른바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의 공격이 컸다. 이에 명종은 김수문에게 벼슬을 올려주고 비단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김성조에게는 건공장군 벼슬이 제수되었다.
왜구들의 침략을 물리쳤지만 이전과 다른 대규모 침략에 대비하고자 제승방략(制勝方略)을 도입하고 비변사(備邊司)를 상설화하였다. 왜구들의 노략질로 먹고 살려고 하는 행위가 날로 커졌으며 결국 노략질을 넘어 조선을 자기들 손안에 넣으려는 속셈으로 이르게 된다.
잠깐!
제승방략과 비변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제승방략(制勝方略)은 유사시에 각 고을의 수령이 그 지방에 소속된 군사를 이끌고 본진(本鎭)을 떠나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가는 분군법(分軍法)이다.
비변사(備邊司)는 조선시대 군국기무(軍國機務)를 관장한 문무합의기구(文武合議機構)이다. 비국(備局), 주사(籌司)라고도 한다. 조선의 군사행정은 국방부격인 병조에서 관장하였는데 외적의 침입 등 변방에 국가적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병조 단독으로 군사 문제를 처결할 수 없어 의정부와 육조의 대신 그리고 변방의 일을 잘 아는 지변사재상(知邊司宰相), 즉 경상도.전라도.평안도.함경도의 관찰사와 병사(兵使), 수사(水使)를 지낸 종2품 이상의 관원으로 구성한 회의에서 협의하여 결정한 기구이다.
도순찰사 이준경은 중앙군을 이끌고 내려와 나주를 거점으로 왜구들을 토벌하게 되었다. 이준경이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내려오는 이무렵 왜구는 달량진을 함락시킨 후 해남, 강진, 장흥 일대로 흩어져 분탕질치고 다니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준경이 중앙군을 이끌고 내려오지만 달량진 함락 당시 이미 전라병마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이 전사를 하는 등 전라도 방어 군의 지휘체계가 붕괴된 상태라 호남의 전력은 약해진 상태였다. 각 거점을 지키던 수령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었고 이 때문에 강진과 장흥의 수령들은 서둘러 고을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수령들은 왜구의 강한 공략에 그만 거의 몸만 피하게 됐으며 수령들은 너무 창졸지간(倉卒之間)에 도망간 터라 미처 물자를 챙겨가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두 고을의 물자는 왜구들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긴박한 상황이었는지“걸음아 나 살려라”줄행랑을 칠 정도로 왜구의 침입이 공포의 수준으로 몰아넣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해남현감 변협은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왜구들은 해남을 포기하고 영암으로 진격했다. 이미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왜구들이라 그들은 여세를 몰아 나주와 영암으로 쳐들어왔다.
밀고 들어온 왜구들을 보고 놀란 영암, 왜구는 바로 영암현감 이덕견을 사로잡고 만다. 이덕견은 결국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당연 성안 백성들은 이덕견 현감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공포에 떨며 동요했다.
중앙군을 몰로 나주로 내려온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준경은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가까스로 시간을 맞춰 나주에 입성한다. 나주에 입성한 이준경은 나주 본성을 지키게 되고 병마사(정3품, 소장급 사단장) 조안국은 영산진을 지키고 방어사(종3품, 소장급 사단장) 남치근은 남평현에 각기 군을 나누어 주둔하게 된다. 영암읍성에는 방어사 김경석과 완산부윤 이윤경이 수비를 맡았다. 최전방인 영암읍성을 배치된 완산부윤 이윤경은 도체찰사 이준경의 친형이다.
잠깐!
도체찰사(都體察使)는 어떤 직책인가?
도체찰사는 조선시대 의정(의정)이 맡은 전시(전시)의 최고 군직(군직)이다. 국가비상시 왕명에 따라 1개 도(道) 또는 몇 개의 도(道) 군정(郡政)과 민정(民政)을 총괄하였다. 군직은 고려 공민왕 때 처음으로 등장하여 1364년(공민왕 13) 최유(최유)가 원나라 군사 1만을 끌고 침입하였을 때 이순(이순)이 도체찰사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도 현지에 도체찰사를 파견하였는데 지위 상으로는 도순찰사의 다음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정1품이 도체찰사(都體察使), 종1품은 체찰사(體察使), 정2품은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임명하였다가 새조 때에 이르려 품계에 관계없이 모두‘순찰사(巡察使)’라 하였다.
나주성을 지키고 있던 이준경은 형인 이윤경을 안전을 위해 나주성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이윤경은 동생 이준경의 권유를 뿌리치고 자청해서 영암읍성 사수를 결의했다. 왜구는 대대적으로 영암읍성을 공격해왔다. 그런데 막상 전문 무장이었던 김경석은 왜구들의 규모에 겁을 먹고 있었으며 적에 맞서 사울 생각은 안하고 영암읍성에 틀어박혀 성 밖이 약탈을 당하는 걸 보고도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다.
영암읍성에서 겁을 먹고 싸울 생각을 안 했던 김경석 왜 그랬을까요?
완산(전주) 부윤(府尹) 이윤경이 영암에 진을 치고 머무르면서 김경석에게 나가 싸울 것을 청하여도 김경석이 오히려 듣지 않다가 군교(軍校.사관생도)들이“만일 군사가 패하게 되면 혼자 죄를 받아야한다”고 하면서 나가 싸우기를 꺼려하자 이윤경이 재차 강청하자 김경석은 할 수 없이 군사들에게 나가 싸우라고 허락하기만 하고 자신은 오히려 성안에 남아서 군사들에게 지휘만 하고 따라 나서지는 않았다.
잠깐!
부윤은 어떤 직책인가?
부윤(府尹)은 종2품 문관의 외관직으로 관찰사와 동격이다. 경상도 경주부, 전라도 전주부, 함경도 영흥부, 평안도 평양부, 의주부에 두었다.
한성부, 수원부, 광주부, 개성부, 강화부는 부윤이라 하지 않고 판윤(判尹) 또는 유수(留守)라 했다.
이런 김경석을 보고 군사들은 어떠했을까요?
병사들은 이윤경의 지시를 받고 분개하고 원망하며 결전하여 적의 머리 1백급을 베자 남은 적들이 군량과 재물을 버리고 도주했다.
김경석이 몸을 사리자 이윤경은 분통을 터트리며 출전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며 거듭 청했다. 급기야 군사들까지 들고 일어나 출전을 종용하게 이르렀다. 방어사 김경석은 정 그러면 완산부윤 이윤경 휘하의 부대만 나가서 싸워보라고 마지못한 눈초리로 허락했다. 이 말을 듣고 이윤경은 불과 15명 정도의 병력만을 이끌고 출전해 약탈에 정신이 없던 왜구들을 급습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란 왜구들은 혼비백산하였다. 이 광경을 본 영암읍성의 군사들 또한 분기탱천(奮起撐天)하여 합세해 왜구의 수급 1백여 급을 얻는 대전과를 올렸다.
김경석이 성의 동쪽 문루 위에 앉아 날래고 용맹스러운 군사를 뽑아내어 나가 싸우게 한 지 한참 만에 왜구들이 북쪽으로 도망하여 사방으로 흩어지며 더러는 향교 안으로 들어가자 우리 1백 4급을 베고 또 북쪽으로 도망하는 왜구를 추격하여 6급을 베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도망가 버렸다.
이때 남치근은 남평현에 있다가 영암이 포위된 것을 듣고 구원하러 가다가 길에서 왜구를 만나 11급을 베었다. 그 이튿날 조안국과 남치근이 영암에 이르렀고 또 다음날 왜구들을 추격했지만 미치지 못했다.
조정의 사신들은 영암대첩을 보고‘왜구들이 감히 멋대로 돌격하게 된 것은 장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나 움츠렸기 때문이었다’고 말들을 했다. 그런데 왜구들은 공격하면 무너지고 쫓아가면 도망하여 조금만 군사의 위엄을 보여도 도망하여 숨기에 바빴다. 이러므로 영암읍성에서의 승전도 또한 날쌘 군인인 효용군(驍勇軍) 10여명이 먼저 싸운 데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효용군에는 양달사 의병장도 그 중에 한명이다. 이때 조안국은 영산진에 있었고 남치근은 남평현에 있었으니 진실로 김경석과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였다면 그 하찮은 도적 같은 왜구들을 거의 하나도 남김없이 섬멸할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양달사란 의병장이 있어 영암성은 지킬 수 있었고 왜구들을 죽이고 도망가게 했다.
왜구들이 조정에 편지를 전달하는 조건으로 풀어줬던 이덕견은 현감이라는 제구실은 못하고 그만 책임을 물어 좌천(左遷)되고 만다. 무능한 현감으로 낙인이 찍힌 역적으로서의 사형감이었다.
잠깐!
효용군(驍勇軍)은 어떤 군인인가?
효용군은 군인 중에 용맹한 자를 따로 뽑아 만든 부대이다. 일종의 창의군으로서‘특수부대.특공대.특전사’를 말한다.
모든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 김경석은 성안에서 떨고만 있었고 감히 자신의 머리를 내놓지 못하였다. 조안국과 남치근 모두 먼 지경에 군사를 주둔하고만 있었지 나아가 치려고 하지 않았다. 비록 왜구가 이미 패한 뒤에 쫓아가기는 했지만 또 때에 맞추어 추격하지 않아 왜구들이 무사하게 배에 오르게 했으니 이걸 두고 어느 누가 가만히 있을 사람 없을 터, 통분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영암읍성은 공과는 완산부윤 이윤경의 공(功)으로 되어져있다. 사실은 이윤경의 휘하에 있던 양달사 의병장의 공이 더 컸음에도 왜구를 대파하게 만든 사람은 이윤경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일까? 양달사 의병장에 대한 기술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운 대목으로 남는다. 일부에 남아 있긴 하지만 그의 공적은 실제 보여준 만큼의 부각이나 기술이 안 되어있는 등 대부분 묻혀있다.
왜 영암전투에서‘효용군’으로서 큰 활약을 했는데도 왜 그늘에 가려져 묻혔을까요?
싸움에서 큰 역할을 한 양달사 의병장이었지만 양달사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분들 때문에 부하인 양달사 의병장은 그 명성이 크게 부각이 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현대전도 병사들이 잘 싸워줘서 승전했지만 승전의 명예는 장군이 얻게 된다. 그리고 조정(朝廷)이 문제였다. 영암읍성 전투에서 대해서 보고를 받기를 양달사 의병장에 대한 공과(功課)의 보고보다는 제일 윗분들에 대해서만 보고가 올라가고 말기 때문이다. 또한 양달사 의병장을 인솔한 상관들이 자신을 공으로 내세우려 했기 때문에 양달사 의병장은 그 그늘에 가릴 수밖에 없었다.
왜구를 죽이고 도망가게 한 영암대첩 이후가 궁금하지 않나요?
영암읍성 전투에서 승기(勝氣)를 잡은 조선군은 즉각 추격에 나섰다.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겠다며 왜구들이 도망간 곳마다 샅샅이 뒤졌다.
영암읍성에서 폐퇴한 왜구들 중 일부는 엉겁결에 나주 방면으로 도주했다. 도주하다가 북쪽에서 내려온 병마사 조안국과 방어사 남치근 그리고 남쪽에서 추격해온 완산부윤 이윤경에게 포위되어 결국 처참히 살해당하는 등의 궤멸되었다. 이렇게 영암읍성에서 승리를 거둔 조선군은 그 여세를 몰아 달량진으로 진군해야했었는데 뜻밖에 조선군의 추격전은 여기서 끝이 나고 말았다.
왜 더 이상 영암대첩으로 마무리하고 말았을까요?
영암전투에서 다들 큰 공을 세웠다. 김경식과 남치근만 빼고는 희생정신이 빛났다. 그런데 이런 일을 두고 조정에서는‘무관들이 지나치게 겁을 집어먹고 전투를 회피’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조정에서는 방어사 김경식이 영암전투에서 소극적으로 행동했던 것을 보고 그렇게 판단했을 법도하다, 그러나 왜구를 궤멸시키는 것은 맞다. 조선군이 분전해서 영암성에서 승리했던 것도 사실이다. 애초 왜구들은 조선의 영토를 점령할 생각으로 온 게 아니었던지라 어느 정도 약탈이 끝나가고 조선군의 방어태세가 갖춰지자 왜구들은 재빨리 후퇴한 것이었다. 일본이 이후 임진왜란과 근대에 태평양전쟁을 벌이는 걸로 보면 영토를 넓히려는 속셈은 없지나않다.
더 이상 왜구들과 전투를 하지 않는 것은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체계적으로 후퇴하는 왜구들을 추격해서 전과(戰果)를 확대한다는 것이 사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조선군의 방어체제는 전관차제를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각 부대가 각자 방어 구역을 나누어 지키는 형태라서 조직적인 추격전에는 부적합한 측면이 있었다. 추격을 통해 보다 큰 전과확대에는 실패했지만 완산부윤 이윤경의 활약으로 영암읍성은 보존하는 등 평화를 찾았고 왜구들은 물러감으로써 을묘왜변은 일단락되었다.
그럼 을묘왜변이 무엇을 느끼게 하고 필요성을 갖게 했을까?
영암전투를 끝으로 을묘왜변은 일단락됐다. 비록 왜구들의 침입은 격퇴하는데 성공했지만 을묘왜변을 통해 많은 시사점을 낳았다. 조선의 국방력(國防力)에는 많은 허점이 있다는 것이 들어났고 이계기로 개선되어야할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조정에서는 고민했다.
을묘왜변 같이 수 천 명 규모의 침입이 있을 시‘진관체제(鎭管體制.조선 전기 지방방위체제로서 각 요충지마다 진관을 설치하여 진관을 중심으로 독자적으로 적을 방어하는 체제)’는 그 한계성이 명확할 수밖에 없었다.
을묘왜변 계기로 조선 조정은 남방 지역에도 병력을 집결시켜 총력전을 벌이는 체제인‘제승방략(制勝方略.유사시에 각 고을의 수령이 그 지방에 소속된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가는 분군법)’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남방 내륙지역은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는 한계성 때문에 제승방략이라는 틀은 도입했어도 그 내실까지는 완전하지 못했다.
을묘왜란으로 조선은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을묘왜란을 계기로 조선은 국가 방어체제를 진관체제와 제승방략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또 을묘왜변을 계기로 도체찰사 이준경은‘화포(火砲) 무기’를 대대적으로 활용할 것을 건의한다. 이에 대해 명종은 이준경의 건으로 화포 제작에 나서게 되고 이 작업은 선조 임금에 와서도 화포에 신경을 쓰는 등 조선군은 대대적으로‘총통(銃筒)’개량하게 됐다. 이 개량된 총통이 임진왜란 때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조선시대 때 여러‘왜변(倭變)’이 있었다.
가장 큰 왜변으로는‘사랑진왜변(1544년 중종 39), 삼포왜변(1510년 중종 5)), 을묘왜변(1555년 명종 10),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 1598년 선조 31)’이 있었으며 왜구의 침입으로 일본과의 싸움으로 많은 군사 및 백성들이 희생을 당했던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왜구의 침입에 관한 소사를 더 파악해 본다.
*조선 초 왜구의 침입
1393년 5월 7일 왜구 13척이 고민량 침입, 1396년 8월 9일-120척 경상도 침입, 1396년 8월 18일 경상도 통양포 침입, 1396년 8월 23일 경북 영덕 영해성 침입(함락), 1396년 10월 27일 동래성 침입(포위), 1406년(태종 6) 전라도 침입, 1408년 충청도 침입
*대마도 정벌
1419년(세종 1)
*계해조약
1443년(세종 25)
*삼포왜변
1510년(중종 5)
*임신조약
1512년(중종 7)
*사량진왜변
1544년(중종 39)
*정미조약
1547년(명종 2)
*을묘왜변
1555년(명종 10)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1598년(선조 31)
*일제강점기
1910년(고종)~1945년(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