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5> 송도갯벌의 인천사적 의미
이종복 / 시인 , 인천항토사 연구가
대 몽고 항전 40년 가까운 세월을 철옹성처럼 지켜내던 고려의 강화도가 궁여지책으로 갯벌을 매립했던 이유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극악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몽고군의 침탈과 정복욕은 온 나라를 초토화시켰고 내륙과 차단 당한 고려 정부는 분루의 고배를 마시며 자급의 길을 모색하게 되는데, 모자라는 식량의 배급원으로써 새롭게 창출한 것이 강화도 서북 일대의 갯벌을 매립하는 일이었다. 인천 관련 역사를 통틀어서 최초의 매립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최초 매립에 대한 역사적 의미는 자발적, 자구적, 자존적이라는 수식어가 꼭 기재돼야 하는 당위성이 부여된다.
근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식민지 건설 정책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획득한 서구열강이 이윤창출의 새로운 창구로서 야욕의 눈을 돌린 것이 바로 동아시아 일원이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중국이 드넓게 포진한 해안도시를 영국을 비롯해 서구열강에 내주었고, 이어 일본이 서구열강에 개항시장을 열게 됨에 따라 동북아시아 국가의 판도가 새롭게 뒤바뀌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송도 갯벌의 역사적 의미를 이야기하는데 웬 뚱딴지같은 너스레냐고 입방아 놓을지 모르지만, 알다시피 서구열강의 약소국 식민화 과정을 일찍부터 체득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탈 과정을 보게 되면 꼭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일본 운요오호 사건의 배상 문제로 부산과 원산 그리고 인천이 개항하게 되는데, 인천의 공식적인 개항은 1883년이지만 이미 일 년 전부터 일본은 제물포 일대에 영사관 부지와 목이 좋은 토지를 구획하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인천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지만 아직까지 제물포 일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서구세력에는 미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인천 해안의 매립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늘어나는 일본인과 전승에 따른 이점을 극대화하려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이 상황을 비켜가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제물포 해안의 매립이었다.
현재 항동 일대 아트플랫폼이 둥지를 튼 창고 건물 일대가 그 처음이다. 1899년 이후로 일본지계 방계 해안을 매립하더니만 해방 전까지 북성동, 만석동, 화수동, 신흥동, 학익동, 옥련동, 문학동 인근에 이르는 방대한 해안을 육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염전으로 활용하기 위해 주안과 십정동 일대, 군자와 소래는 예외로 치더라도 말이다. 이렇다 보니 매립은 곧 ‘침탈의 단초’였으며, 겨레의 터전을 훼손해 속셈을 채우는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권력자들의 투기처’가 되는 일이었다.
지금 인천시가 주도하고 있는 무자비하고 무분별하고 상식적이지 못하다고 평가받는 개발론에 맞물려 인천 해안의 마지막 보루인 송도 갯벌의 매립 의도를 살펴보면, 지난 역사의 구린 곳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마음의 허접함을 저밀 수 없다. 살아온 자연환경을, 아니 하늘이 내려준 삶의 터전을 인위적으로 바꾼 역대의 예시들을 조망컨대 현재와 그 후손에게 득이 됐다는 결과론은 여태껏 접해보지 못했다.
인천역 뒷편이 연안부두로 사용했던 1970년대만 해도 썰물을 뒤로 노랑부리 백로며 갈매기, 하물며 비둘기까지 합세해 갯벌을 쪼는 장면들이 필자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스스로 훌륭한 삶을 살았다고 자인은 못하지만, 유년기의 자산을 통해 인천을 노래하게 되었고 바다를 영혼의 터줏자리로 삼아 인천에서 살고 있다.
이제 바다도시 인천의 마지막 소도인 송도 갯벌이 벼랑 끝에서 흔들리고 있다. 개발의 광풍이 일고 사람의 영혼마저 화석화시켜버리는 시멘트 문명의 종착지 송도 갯벌에 세계적 보호종인 저어새가 새끼를 부화했다고 도하 신문들이 난리다. 그러나 마음이 아려온다. 풀어진 옷섶을 단단히 죄어야 할 터이다.
* 이 글은 2009년 7월 16일자 인천신문 기획칼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