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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동(朱安洞)
⚫ 인천 ‘짠물’
인천을 대표하는 땅 이름 중 하나인 주안은 ‘주안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요즘에는 없어져 쓰이지 않는 이름인 주안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 등의 자료를 통해 볼 때 지금의 남동구 간석동 만월산(滿月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주안산은 「신중동국여지승람」에 ‘朱雁山’이라는 한자로 나온다.
이 때문인지 “흙이 붉고〈朱〉, 산의 모양이 기러기〈雁〉가 내려앉은 것 같아 주안산이라 부른다“고 글자 그대로 해석하곤 한다.
하지만 그 산의 모양이 기러기가 내려앉은 것 같다는 말은 객관적으로 볼 때 전혀 타당성이 없다. 더욱이 「대동여지도」에는 ‘岸(언덕 안)’자를 쓴 ‘朱岸山’으로 나와 있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주안산의 뜻을 기려기와 연결지어 해석하는 것은 억지일 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의 사이인 18세기 정조 임금 때 발간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朱安面(주안면)’이라 하여 지금과 똑같은 ‘朱安’으로 써놓았다. 이 ‘朱安’이 어떤 특별한 뜻을 담아 쓴 글자인지, 아니면 글을 쓰거나 옮겨 적는 과정에서 흔하게 생길 수 있는 단순한 오기(誤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여기서의 ‘安’은 아마도, 뒤에서 설명할 것처럼, ‘붉은산’이라는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바꿔 적으면서 ‘붉은’의 ‘―은’을 나타내기 위해 쓴 글자로 보인다. 이는 ‘雁’이나 ‘岸’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일이다.
따라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나오는 ‘朱安’이 ‘朱雁’ 이나 ‘朱岸’과 다르게 특별한 뜻을 갖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朱(붉을 주)’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이 산이 동(銅) 성분을 많이 갖고 있어 흙이 붉은색 이 기 때문에 쓴 글자로 본다.
이는 상당한 타당성 이 있다.
여기서 멀지 않은 남동구 간석동 신명여고 주변은 예전에 “쇠를 파낸다”는 뜻으로 보이는 ‘쇠판이’로 불렸던 곳이다. 역시 가까운 경인전철 동암역(銅岩驛)은 그 주변 땅이 구리〈銅〉와 같은 광물질 성분을 많이 갖고 있어 불그스름한 색깔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얘기된다. 또 이곳과 연결돼 있는 주원고개 일대, 지금의 시교육청 옆 높은 지대는 예전에 ‘붉은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더욱이 지금의 만수동 벽산아파트 옆길을 따라 「인천가족공원(부평시립공동묘지)」 입구 방향으로 가는 쪽의 주안산 자락에는 일제 강점기에 실제로 일본인들이 구리〈동:銅〉와 은(銀)을 파내기 위해 운영한 광산이 있었다. 그때 이들이 거기서부터 주변의 부평 일대 땅 아래에 수없이 많은 땅굴(갱도:坑道)을 파고, 거미줄처럼 연결해 놓았다. 그래서 지금도 터파기 공사를 하다보면 땅굴이 발견되는 일이 있다고 한다.
이들이 운영하던 광산은 일제(日帝)의 패망(敗亡) 이후 멈춰 섰으나, 1954년 무렵에 엄씨(嚴氏) 성을 가진 어떤 사람이 광업권(鑛業權)을 따내 한동안 다시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이곳에서는 1980년대 말까지 광산 작업이 계속된 것으로 전해온다.
이런 점들을 볼 때 ‘주안’의 ‘朱’가 ‘붉은색 땅(흙)’ 때문에 생긴 말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雁’이나 ‘安’ 또는 ‘岸’은 글자의 뜻과는 관계없이 우리말 ‘붉은’의 ‘―은’을 나타내기 위해 끌어다 쓴, 비슷한 발음의 한자라고 풀이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옛날 사람들이 흙이 붉다고 해서 우리말로 ‘붉은산’ 이라 부르던 산을 한자(漢字)로 바꿔 쓴 이름이 ‘주안산’이다. 말로 할 때는 ‘붉은산’이고, 한자로 쓰는 기록물에는 ‘붉은산’이라는 말을 그대로 한자로 옮겨 쓸 수가 없으니까 ‘주안산’이라고 바꿔 쓴 것이다.
주안은 원래 지금의 남동구 간석동과 부평구 십정동 일대를 가리켰던 이름이었다. 주안산(만월산)이 이들 동네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구한말에 이들 동네는 ‘주안면(朱雁面)’에 들어있었는데, 주안산이 있는 동네이기 때문에 주안면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주안은 경인전철 주안역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이 돼버렸다. 이는 주안염전 때문에 생긴 일이다.
지금의 주안 일대는 구한말에 다소면(多所面)에 속해 ‘충훈부(忠勳府)’라 불렸던 곳이다. 반면 지금의 십정동과 간석동은 주안면(朱雁面)에 들어있었다.
1899년에 나온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에 보면 다소면에 충훈부와 송림 리, 화동 등 10개 동리(洞里)가 속해있는 것으로 나온다. 주안면에는 상십정리, 하십정리, 간촌리, 석촌리 등 8개 동리가 표시돼 있다.
충훈부는 조선시대에 공신(功臣)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부서였는데, 이곳에 그 충훈부가 관리하는 방죽이 있어 ‘충훈부’ 또는 ‘충훈리(忠勳里)’라 불렸던 것이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보면 90여 개의 땅 이름에 대해 우리말 이름과 한자 이름을 함께 적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중 우리말 이름 ‘불근섬(붉은섬)’은 한자로 ‘赤島(적도)’라 적혀 있다. 우리말 ‘불근’(‘붉은’의 15세기 표현)을 ‘赤(붉을 적)’자로 쓰고, ‘섬’(‘섬’의 15세기 표현)은 ‘島(섬 도)’로 쓴 것이다. 우리말로 말할 때는 ‘불근셤’이라 하고, 한자로 쓸 때는 ‘赤島’라 했음을 알려준다. ‘붉은산’을 ‘朱安山’으로 쓴 것도 이와 같다.
그런데 190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햇볕 에 바닷물을 말려 소금을 얻는 천일제염(天日製鹽) 방식의 염전이 주안면 십정리(지금의 십정동)에 들어섰다. 그리고 1년여의 시험 생산에서 성공을 거두자 염전의 이름을 관할 면(面)의 이름을 따서 ‘주안염전’(정식 명칭은 ‘주안천일제염시험장’)이라 정하고 본격 적으로 소금 생산을 시작했다.
이처럼 인천에 국내 처음으로 근대식 염전을 만든 것은 서울을 포함해 생산된 소금을 소비할 수 있는 거대한 시장을 갖고 있고, 경인철도를 이용해 생산물을 빠르게 운반할 수 있으며,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보내기도 쉽다는, 최고의 입지(立地)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뒤 주안염전은 계속 그 면적이 늘어나 1910년 5월에는 지금의 주안역 뒤쪽에 새로운 4구(區) 염전이 준공됐다. 이러는 동안 처음에는 십정동 쪽 1구(區)에 있던 염전의 중심도 4구 쪽으로 옮겨 왔다. 염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기숙사나 공장의 창고 등 중요 시설들이 모두 이곳에 들어 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염전에서 나오는 소금의 수송 등을 위해 임시로 운영되던 기차역이 1910년 10월21일 지금의 주안역 위치에 자리를 잡고 정식 역(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이 역이 들어선 곳은 주안면 십정리가 아니라 다소면 충훈부리였다. 하지만 주안염전에 있는 역이라고 해서 주안역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 이후 주안역 이 영업을 계속하고, 주변이 발전하면서 ‘주안’이라고 하면 지금 주안역이 있는 지역을 가리키게 됐다. 말하자면 십정동·간석동 일대였던 원조(元祖) 주안의 이름을 차츰 빼앗아 이제는 이곳이 진짜 주안 행세를 하게 된 셈이다.
이는 지금의 제물포나 영종도가 원래 다른 곳에 있던 이름을 빼앗아와 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주안은 그 뒤 일제(日帝)에 의해 ‘朱雁’에서 지금과 같은 ‘朱安’으로 다시 한자 표기가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잘 알 수가 없다. 1936년 인천부가 부천군의 일부를 받아 지역을 넓혔을 때 정해진 동네 이름을 보면 이전의 ‘朱雁’이 ‘朱安’으로 바뀌어 있다. 그들이 앞서 말한 「호구총수(戶口總數)」의 기록을 보고 ‘朱安’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 내내 우리의 수많은 땅 이름을 원래의 유래와는 전혀 관계없는 새 이름으로 바꿔 지역의 뿌리와 정체성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런 일로 미뤄 ‘朱安’으로 이름을 바꾼 일 역시 같은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인천 ‘짠물’
앞에서 주안염전을 말했는데, 이 염전은 ‘인천 찐물’이라는 별명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인천은 ‘짠물 당구’라고 말하는 것처럼 흔히 ‘짠물’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 짠 바닷물을 맛볼 수 있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닌데도 유독 인천만 ‘짠물’이라 불리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염전 때문이다.
지금은 공업지대로 바뀐 주안염전 자리뿐 아니라 서구 가좌동 일대와 남동·군자 지역이 지금으로부터 40~50여 년 전까지는 대부분 염전이 었다.
바둑판 모양의 염전과 바닷물을 퍼 올리는 물레방아, 밀짚모자를 쓰고 햇볕에 마른 소금을 가래로 긁어모으는 인부, 소금창고로 소금올 운반하는 작은 철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런 풍경은 바로 이 주안염전에서 처음 시작된 천일제염(天日製鹽) 방식이다.
물론 인천에서는 그 이전에도 소금 생산이 활발했다.
「인천부읍지」 등 옛 자료에 보면 인천의 특산물로 소금이 꼭 소개돼 있고, “주민들이 농사에 힘쓰고 소금을 구우며 산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염말’이니 ‘벗말’이니 하는 땅 이름들도 모두 예전에 염전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흔적들이다.
일제(日帝)는 질 좋은 소금을 최대한 많이 생산하기 위해 주안염전을 계속 확장하는 한편 남동과 소래, 군자 등지에도 계속 염전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1930년대 이후 인천의 소금 생산량은 전국 최고 수준이 됐다.
1940
년대 정부에서 운영하는 전국의 천일염전 면적 통계를 보면 주안
과 남동·군자·소래 등 인천의 염전 면적이 1664정보(1 정보는 3OOO평)로 나온다. 이는 당시 전국에 있던 정부 운영 천일염전 전체 면적 5925정보의 28.1%에 해당하며, 다른 행정구역에 비해 가장 넓은 면적 이었다. 이뿐 아니라 이들 염전에서 나오는 소금을 정제(精製)하는 공장들까지 계속 늘어나 인천은 온통 ‘짠 동네’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천 짠물’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 별명인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인천의 도시 규모가 점점 커지고, 여기에 정부의 수출주도정책이 맞물려 산업단지 계획 이 적극 추진되면서 주안염전은 1968년 무렵부터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 대신 그곳에는 수출공단 5·6 단지가 만들어졌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남동·군자염전 등지에도 줄줄이 공단이 들어섰다.
그래서 이제 인천시 내에서는 살아있는 염전을 볼 수가 없게 됐다.
남동구의 소래습지생 태공원에서 체험학습용으로 운영하는 소규모 염전을 빼면 사진이나 전시관의 기록물을 통해서만 염전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이제 인천은 소금과 별 관계가 없는 도시가 돼버렸지만, 한때를 풍미(風靡)했던 소금밭의 기억은 ‘짠물’이라는 별명 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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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ᄇᆞᆰ’ 사상과 ‘배달 민족’
앞에서 ‘주안’ 이 라는 동네 이름을 만든 것이 주안산 때문이며, 이는 ‘ᄇᆞᆰ은 산’이라는 뜻이라고 설명 했다. 그런데 국어학자들 사이에서는 이와 다르게 ‘주안’이라는 이름을 ‘붉 사상’
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붉’ 계통 땅 이름들과의 비교 연구에서 나온 것이다. 이곳 주안산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내용은 알아둘 가치가 있어 이를 따로 소개한다.
‘붉 사상’의 ‘붉’은 ‘밝다’는 뜻으로, 우리 민족 전래(傳來)의 광명(光明) 사상이나 태양 숭배 사상을 말한다. 이를 주창(主唱)한 사람이 육당 최남선이다.
그는 자신의 대표 저서인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에서 백두산(白頭山)처림 우리나라에 ‘백(白)’ 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산 이름이 무척 많음을 지적하며 이 같이 설명한다.
“지금의 조선어에서 ‘붉’은 단순히 광명을 의미하는 것이나, 그 옛 뜻에는 신(神), 천(天:하늘) 등이 있고, 神이나 天은 그대로 태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지금 친제(天帝:하느님)를 칭하는 하날님 이란 말도 고대에는 태양에 대한 인격적 칭호에 불과했던 것으로, 태양이야말로 세계의 주(主: 주재자)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대에는 특히 종교적으로 하날 또는 그 인격형인 하날님보다도 ‘ᄇᆞᆰ’ 또는 그 활용형인 ‘ᄇᆞᆰᄋᆞᆫ’ 또는 ‘붉ᄋᆞᆫ애’가 이 태양을 부르는 성스러운 말로서 오히려 많이 사용된 듯하다. 백(白)이란 곧 이 ‘ᄇᆞᆰ’의 대자(對字: 대응하는 글자)였던 것이다.
…(중략)… 옛날에는 산악 그 자체의 승배도 행해졌을 것이나, 지금 우리가 소급할 수 있는 시한 내에서는 조선에서의 신산(神山)이란 절대 다른 경우에서와 같은 통례의 산악숭배가 아니라 천계(天界)의 인간적 존재 또는 태양의 권현(權現:화신) 혹은 그 궁거(宮居:궁궐)로서의 그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와 같은 의미인 신체(神體: 신의 몸)로서의 산이 ‘ᄇᆞᆰ, ᄇᆞᆰᄋᆞᆫ, ᄇᆞᆰᄋᆞᆫ애’로써 호칭됐던 것이다. 신(神)의 산, 신인 산이란 의미이다. 이에서의 ‘ᄇᆞᆰ’은 단순히 신(神)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시방의 광명의 의미와는 직접 관계없음은 물론이다.
…(중략)… 대저 ᄇᆞᆰ산이 그 토지의 주민에게 절대적인 숭경(崇敬)을 받음에는 또 하나 고대인의 신앙과 관련되는 충분한 현실적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ᄇᆞᆰ산이 생명의 사신(司神: 신을 관장하는 존재)으로서 그들의 수요화복(壽夭禍福)을 좌우하는 권위자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광명이세(光明理世)’ 사상과 통하는 것이다. 고조선의 건국이념이기도 한 이 광명이세 사상이 바로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갖고 있는 ‘ᄇᆞᆰ 사상’이다. 이를 신(神)과 같은 자격을 갖춘 산(山)에서 제사를 지내는 형태로 표현했다. 각 부족마다 그런 신격(神格)을 갖춘 산, 즉 ‘ᄇᆞᆰ산’이 있었다. 그리고 그 ‘ᄇᆞᆰ산’을 한자로 표현할 때 ‘ᄇᆞᆰ’을 ‘白(백)’자로 썼다. 그래서 조선 땅에는 이 ‘白’자가 들어간 산 이름이 많다는 얘기다.
그의 분석대로 우리나라에는 백두산(白頭山)처럼 이름에 ‘白’자가 들어간 산이 곳곳에 펴져 있다.
물론 ‘白’자가 들어간 산 모두를 무조건 ‘ᄇᆞᆰ’ 사상에 따른 이름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당 부분 이와 연관돼 있으리라고 말할 수는 있다. 이런 산에서는 사람들이 제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 산의 지위가 높게 평가되는 산일수록 지배 계층에서 그에 맞는 지위의 높은 사람이 참가해 제사를 지냈을 것 이다.
「삼국사기」 잡지(雜志) 제사(祭祀)편에도 “(신라에서) 삼산(三山), 오악(五岳) 이하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나누어 해마다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를 지냈다”고 나와 있다. 전국적으로 산의 순위(順位)를 정해놓고 그에 맞춰 큰 제사와 중간급 제사, 작은 제사를 지낸 것이다.
이렇게 제사를 지낸 곳의 땅 이름에는 흔히 ‘ᄇᆞᆰ’이라는 말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 ‘ᄇᆞᆰ’은 시간이 흐르면서 ‘박, 밭, 붉, 발’ 등 비슷한 발음의 다른 말로 바뀌곤 했다. 이어 우리말 땅 이름이 한자로 바뀌는 과정에서 다시 한자의 뜻이나 소리를 따서 ‘朴(클 박), 白(흰 백), 培(북돋을 배), 光(빛 광), 明(밝을올 명), 鉢(바리때 발), 不(아닐 불), 赤(붉을 적), 朱(붉을 주), 足(발 족)’ 등의 글자를 가진 이름으로 복잡하게 파생돼 나갔다. 그래서 우리나라 땅 이름에는 ‘발, 박, 밖, 밭’이나 ‘광(光), 명(明), 주(朱)’ 등의 글자가 들어간 곳이 적지 않다.
우리 민족을 가리킬 때 흔히 쓰는 ‘배달민족’의 ‘배달’도 ‘ᄇᆞᆰ 달’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정각이다. ‘달’은 산을 뜻하는 우리 옛말이다.(= ‘달’에 대해서는 동구 ‘송림동 + 수도국산 + 송현동 + 양키시장’ 편 참고)
이런 면에서 이곳 주안산도 그 옛날 같은 기능을 한 산이기에 이들과 똑같은 변천 과정을 거쳐 ‘朱’자, 곧 ‘ᄇᆞᆰ’이 들어간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안’자는 ‘雁’과 ‘安’, ‘岸’이 두루 쓰인 것으로 보아도 한자 자체의 뜻은 의미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는 ‘ᄇᆞᆰ’과 어우러져 ‘ᄇᆞᆰ 은’ 정도로 불리면 이름의 ‘― 운 (은)’을 소리만 빌 려 한자로 옮긴 것이라 해석한다.
이렇게 본다면 추안산은 원래 우리말로 ‘ᄇᆞᆰᄋᆞᆫ산’이라 불렸을 것인데, 이를 한자로 옮겨 ‘朱雁山’이라는 새 이름이 생긴 것이 된다.
하지만 이곳 주안산이 ‘ᄇᆞᆰ 사상’에 따른 제사의 장소여서 ‘ᄇᆞᆰ’의 변형인 ‘朱’자를 이름에 갖게 됐다고 확정지을 수는 없다. 조정(朝廷)에서 나라의 평안과 풍어(豊漁)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 것으로 확인되는 인천앞바다의 ‘원도(猿島―납섬)’ 같은 곳과는 달리 주안산에는 그런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나 증거가 없 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