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나씨아줌마 촬영 나주 보산동 장골
海崙
<비문 전면>
成均館進士 松島羅州羅公海崙之墓
(성균관 진사 송도 나주나공 해륜지묘)
配宜人光山金氏(배 의인 광산김씨)
配宜人南平文氏(배 의신 남평문씨)
<비문후면>
옛 조선왕조 인조 때에 나라가 거듭
난을 당하여 나공해륜(羅公海崙)께서
의병을 재창(再唱)하여 피가 끓어 하늘에 맹서(盟誓)하고 급난(急難)에 나아가니 난(難)이 평정되매 군병(軍兵)을 파(罷)하고 화친이 이루어져 공열(功列)이 당세에는 이루지 못하였으나 천지가 뒤바뀜에 절통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늠늠한 기상은 도해(蹈海)의 위풍이 있고 그 정신은 후세에 온 천하에 드러났으니 어찌 위대 하지 아니한가. 공 의 자(字)는 응숙(應淑)이요 호(號)는 송도(松島)시니 나주인이다. 고려감문위상장군 부(富)가 시조요 입조선(入朝鮮)하여 진(璡)이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제수되었으나 의(義)를 들어 벼슬을 하지 않았다. 고조는 일손(逸孫)인데 기묘명현(己卯名賢)이요 증조는 창(昶)으로 한림(翰林이)요 조(祖)는 사음(士愔)이니 주부(主簿)요 고(考)는 덕겸(德謙)으로 참의(參議)를 증(贈)받았다.
비(妣)는 풍산홍씨(豊山洪氏)로서 참의(參議) 한신(漢信)의 따님이다
공은 상모(狀貌)가 기위하고 문예(文藝)가 조취(早就)하여 수은(睡隱) 강항(姜沆)선생에게 수업하였다. 나이 15세에 정묘왜란(丁卯倭亂)을 만나 양친을 모시고 피난 중에 참의공(參議公) 병환으로 우간(牛肝)을 원하시니 옛집에 가서 송아지를 끌고 오다가 적에게 잡혔는데 친환(親患)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이 같이 되었으니 나를 해치지 말라 하니 적추(賊酋)가 감복하고 말하기를 참으로 효자로다 하였다. 1616년에 참의공(參議公)께서 병이 위독함에 정성을 다하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슬퍼함이 예제(禮制)에 넘쳤으며 3년 여묘(廬墓)를 마쳤다. 1624년에 진사가 되고 이괄(李适)의 난에 의거하여 맹서(盟誓)했던 사적(事蹟)이 갑자(甲子) 모의록(募義錄)에 실려 있다. 1636년 겨울에 금국(金國)이 침입하여 임금이 피난하니 공(公)이 또한 모의(募義) 하였는데 목사(牧使) 오준(吳竣)이 공(公)으로 의병장(義兵將)을 삼으니 민망(民望)을 따른 것이다. 차자(次子) 경(儆)으로 군관을 삼아 군병을 통솔하고 격문을 도내에 전하니 열사들이 운집하였다. 1637년 정월에 공주(公州)에 이르니 의병도원수 정공홍명(鄭公弘溟)이 유진(留陣)하여 같이 군무를 논하였는데 모든 의병장이 공과 같다면 적을 토평(討平)하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 하였다. 1640년에 효목(孝睦)참봉을 제수 하였으나 불취(不就)하다. 인조(仁祖)께서 승하(昇遐) 하심에 조석으로 곡(哭)하고 굵은 옷을 입고 마대(麻帶)를 하여 부모상(父母喪)과 같이하니 신자(臣者)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1659년 12월22일에 졸(卒)하니 1583년 만력(萬歷) 계미(癸未) 7월14일에 출생하심으로부터 수(壽)가 77세이다. 나주의 서쪽 장흥동(長興洞) 자좌원(子坐原)에 장사(葬事)를 지냈으며 부인 김씨(夫人 金氏)와 쌍조(雙兆)이다. 부인 광산김씨(夫人 光山金氏)는 주부(主簿) 전(琠)의 따님이며 부호군(副護軍) 부성(富成)의 손(孫)이다. 후배(後配) 남평문씨(南平文氏)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정(僉正) 응연(應連)의 따님이며 강성군(江城君) 익점(益漸)의 후손이요 묘는 동강면(洞江面) 백련산하(白蓮山下) 용호동(龍虎洞) 임향원(壬向原)에 있다. 공께서는 6남3녀를 두셨는데 희(僖) 경(儆) 민(亻黽) 선(僐) 보(保) 근(僅)으로 희(僖)는 생원이요 경(儆) 민(亻黽)은 進士요 보(保)는 통덕랑(通德郞)이고 사위는 문천길(文千吉) 이간(李侃) 정처주(鄭處周)이다. 손(孫) 천로(天老)는 생원(生員), 천정(天鼎)은 진사(進士), 천형(天衡) 천심(天心)은 생원이며 천주(天柱)는 통덕랑, 천우(天祐)는 부사직(副司直)이며 천추(天樞)는 생원, 천위(天緯) 천태(天台)는 통덕랑, 천극(天極)은 증장악원정(贈掌樂院正)이고 증손(曾孫) 이헌(以櫶) 이계(以桂)는 생원으로 이하는 불록(不錄)한다.
슬프다. 公은 군부(君父)를 위해서 칼 날 밟기를 평지와 같이 하니 그 근본이 있음이로다.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 주는 은전과 나라가 제사를 지내주는 공의(公議)가 끝이지 않았는데 이는 公의 지극한 충효에 답함이리라. 公의 7세 손(孫) 석면(錫冕)이 공의 유사(遺事)를 가슴에 안고 와 글을 청하니 병을 떨치고 일어나 명(銘)하노니 당당한 위풍을 떨치는 나씨(羅氏)여, 공을 낳으시니 나라위해 창의(倡義)를 두 번이나 하여 풍절(風節)을 높였는데 공열(功列)은 미쳐 이루지 못하였네. 하늘과 땅이 허물어지고 찢어지니 어데다 한을 씻을 고, 피가 끓어오르도다. 장차 몸을 피하여 허름한 집에 숨으리라.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이라 가르친대로 되나니 시예(詩藝)로서 가문을 창성(昌盛)케 하고 영화(榮華)를 고(告)하니 3자7손(三子七孫)이로다. 하늘의 뜻이 있어 베풀고 보답하니 영원히 덕성(德聲)을 실었네. 충효를 과책(課責)하여 후손에게 끼치니 남국(南國)에 기강(紀綱)이 있어 더불어 짝을 하여 이름을 다투누나. 높고 험한 저 산악 위에 도끼 같은 무덤이라 글을 가다듬고 사실을 기록하여 현편(玄扁)에 새겼도다. 힘쓸 지어다 선비들이여, 공(公)이 다니시던 길을.......
숭정기원(崇禎紀元)후(後)4병오(丙午) 서기1846년
추기, 공의 6주갑(甲)인 1943년 7월14일 개비후연구각결(改碑後年久 刻缺)하여 구명(舊銘)을 국역하였으나 장문(長文)으로 중략(中略)하였다.
이번에 모든 후손들이 모선숭조(慕先崇祖)의 헌성(獻誠)을 모아 공의 7주갑(週甲)년 생일에 삼가 이 비를 세운다.
대한민국 85년 계미 서기 2003년 8월 11일 음 7월14일
방(傍)후손 종관(鍾官) 국역
전주후인 이규형(李圭珩) 근서
나주나씨 송도공(松島公)후손일동 근수(謹竪)
첫댓글
송도공 1583~1659 配 광산김씨 1594~1660
송도공파 누리님 !!! 늦게야 작성 했습니다.
우리 나주나씨 내력이나 뿌리얘기는 구도의 길에 자세히 올려져 있습니다
남평문씨 계축(1613~계미 1643)
세고집에 준 할아버지가 광산김씨 할머니에 대한 만시를 보면 남평문씨가 일찍 죽었음을 알 수 있다.
송도공파 새족보 9권 p4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