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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어: 꿈, 끈, 끼, 깡, 꼴, 꾀, 꾼, 끝
위 단어들을 한 번 이상씩 포함하는 작문을 작성하시오.
* 지금도 작성하고 있는 분들은 늦더라도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평가 대상 글에 포함하겠습니다.
올린 글은 미리 읽고 오늘 줌 강의에 참여해주세요.
# 1.
[질병관리청 정례 브리핑]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정례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져 긴급 대책으로 ‘사회적 거리 좁히기’를 시행하려고 합니다. 3단계로 세분화해 상황에 맞게 시행할 예정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회적 거리 좁히기 1단계 : 교육 격차 심화 시>
교육 격차가 심해졌다고 판단될 때 사회적 거리 좁히기 1단계 조치를 시행합니다. 소득 수준에 따른 교육 격차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코로나19 확산으로 더욱 심해졌습니다. 고소득층 아이들은 최신 디지털 기기로 수업을 듣고 사교육을 통해 교육 공백을 채우는 반면 저소득층 아이들은 변변한 기기조차 없습니다. 끼니를 걱정하는 형편에 사교육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학교 교육 이상의 교육을 받을 방법도 마땅치 않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꿈을 이룰 수는 없지만, 적어도 꿈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기회의 끈은 모두에게 공정히 주어져야 합니다. 사회적 거리 좁히기 1단계에는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시행됩니다. 비대면 수업 시 저소득층 아이들에 디지털 기기 보급, 대학 입시 저소득층 특별 전형 확대, 국가장학금 제도 개선 및 적용 대상 확대, 양질의 인터넷 강의 무료 제공 등입니다.
<사회적 거리 좁히기 2단계 : 주거 격차 심화 시>
주거 격차가 심해졌다고 판단될 때 사회적 거리 좁히기 2단계 조치를 시행합니다. 계속되는 집값 폭등으로 다주택자만 부를 불리고 저소득층은 임대 주택을 전전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부동산으로 큰 돈을 벌려는 꾀를 가진 투기꾼들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서민들에게 ‘내 집 마련’은 꿈 같은 이야기가 되었고 전세 매물조차 나오지 않아 주거불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 좁히기 2단계에는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시행됩니다. 다주택자에 대한 보유세 강화, 매물 공급 확대, 서민층의 주택 구입을 위한 대출 규제 완화 등입니다.
<사회적 거리 좁히기 3단계 : 부의 대물림 심화 시>
사회적 거리 좁히기 1단계인 교육 격차와 2단계인 주거 격차가 심화되면 부의 대물림 현상으로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집니다. 이 때 사회적 거리 좁히기 3단계 조치를 시행합니다. 다주택자들은 부동산을 그대로 자녀에게 물려주는 반면 임대로 사는 저소득층은 물려줄 것이 없어 빈부격차가 다음 세대로도 이어지는 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소득층 아이는 양질의 교육을 받는 반면 저소득층 아이는 양질의 교육을 받지 못해 개천에서 용은 더 이상 나올 수 없을 겁니다. 현재와 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극소수가 부를 독점해 저소득층은 깡으로 버텨도 평생 부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3단계에는 교육과 부동산으로 대표되는 부의 대물림 수단들이 그 목적을 잃을 수 있게 하는 조치가 필요합니다. 부동산 보유세와 상속세 대폭 인상, 공교육 강화 및 대학 입시의 근본적 개편 등입니다.
이상으로 브리핑을 끝내겠습니다.
# 2.
“꿈이 없어요.” 초등학교로 진로 강의를 나갈 때면 꼭 듣는 답이다. 꿈을 질문하면 없다고 답하는 아이들은 어디를 가나 꼭 있었다. 고등학생이면 좀 다를 거라 생각했으나 사정은 비슷하다. 꿈이 없다는 아이들에게 구태여 하고 싶은 것 혹은 재밌는 것도 없냐고 묻는다. 고민 끝에 억지로 꺼내 놓는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싸늘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젓는다. 더 이상 답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꿈을 억지로 캐묻는 나는 억지꾼이 된 기분이 들곤 한다.
왜 꿈이 없을까, 고민하는 꼴이 우습단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학창시절 나도 마찬가지였다. 초중고를 거쳐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주어진 대학교 목록에는 관심 가는 분야가 없었다. 스케치를 좋아해 순수미술을 공부하고 싶었던 적이 있긴 했다. 화가는 밥 한 끼 벌어먹기도 힘든 직업이라며 어른들에게 짓밟히기 전까지는 말이다. 반박해볼 깡도 없었다. 부모님의 그늘과 선생님의 조언, 학교와 집이라는 생활반경이 내 시야의 전부였기 때문에. 좁은 세상에 갇혀서 뻗어나갈 수 없던 꿈은 종적을 감췄다. 결국 대학교 서열 순위와 취업이 유망한 학과로 대학 지원 란을 가득 채우고 말았다.
대학교에서 다시 꿈 찾기에 나섰다. 좌절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대학과제를 할 때 발표를 두려워하는 결핍에서 찾은 꿈이었다. 연설을 업으로 삼고 싶어! 사람들 앞에서 자기소개조차 못해 잘 읽은 사과가 되는 내가 쉽게 꺼내 보일 수 없는 꿈이었다. 아이들에게 꿈을 물을 때도 비슷했다. 잔꾀를 부리며 대답을 피하던 아이가 본래 꿈은 의사였다고 어렵게 밝혔다. 성적이 나빠서 힘들다는 말을 끝에 덧붙였다. 판사, 약사, 연예인 등 보이는 가치가 높은 직업, 깜냥이 안 되리라 판단되는 일은 허황된 꿈이라 공격받을 거라고 생각한다. 차가운 현실 앞에 상처 받은 꿈은 모습을 감춘다. 꿈은 또 다시 남의 눈치를 본다.
꿈이란 ‘가치’를 느끼는 데서 시작한다. 그런데 그 가치에 대한 기준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시작은 사실 소박하다. 나 역시 그저 그림 그리는 게 재밌었기 때문에 순수미술을 공부하면 어떨까, 정도였다. 혹은 결핍 딛고 성장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정도였다. 소소하게 시작된 꿈에 특정 가치 판단을 내린 것은 우선 사회였다. 통상적으로 사회는 명예로운, 돈을 잘 버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일을 좇으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현실을 고려해 본인의 위치를 알라고 한다. 부모님의 영향, 지인의 의견, 주변 환경과 끝없는 상호작용 끝에 개인의 가치 평가 기준에 사회적인 잣대가 생긴다. 그 후 나 자신이 특정 가치를 붙든다. 남들에게 얼마나 대단하고 멋지게 보이는가, 타인의 가치가 부여된 평가의 끈을 놓지 못한다. 그러면서 나의 미래 가능성을 타인의 시선에서 평가 절하한다. 도전하기 전에 섣불리 겁먹고 안 될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포기한다. 현실과 이상, 사회와 개인 사이의 괴리 속에 꿈은 점점 작아진다. 내 꿈을 없앤 것은 끝내 나 자신이었다.
그리 거창할 이유도, 못 이룰 거라 단정 지을 명분도 없다. 즐거운 일,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일이 무엇이든 우리는 ‘꿈’이라 칭한다. 현재의 꿈은 미래의 나를 만드는 발판이다. 꿈을 위해 흘리는 땀과 눈물은 성장의 과실로 맺힌다.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꿈을 좇아 얻은 가치를 함부로 논할 수 있을까. 꿈은 그 자체만으로 오롯하다.
# 3.
엄마는 너를 꿈많은 애로 키워내고 싶었단다. 아니 사실 내가 꿈이 많았다. 하고싶은 것도 많았고 되고싶은 것도 많았고. 그래서 너는 날 닮아서 그럴 줄 알았다. 나는 하고싶은 게 많았던만큼 해보지 못한 게 많았었으니까. 나도 좋은 부모를 만났으면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부모를 원망하기도 했고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고 또 자꾸 무언가를 원망하던 내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원망하기도 많이 했었지. 그래서 뭘 해보고싶다고 하던지 다 시켜주고 싶었단다. 네가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고 엄마가 늘 품고 살았던 원망의 마음 같은 건 가지지도 않고 존재조차 모르길 바랐고.
넌 어릴 때 끼도 참 많았었거든. 친척들 앞에서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노래하고 춤추며 재롱을 부리던 너를 볼 때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고 밖에서 일을 하다가도 네 얼굴만 떠올려도 가슴이 벅차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도 많았지.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지만 어쩜 이렇게 이쁠 수 있을까 싶고 주변에서 자식이 그렇게 예쁘냐고 물을 때면 난 세상에서 다른 거 다 필요없고 내 자식만 있으면 된다고 답하기도 할 정도로 네가 좋았지.
그래서 네가 뭘 원하던 간에 믿고 응원하려고 노력했단다. 네가 어릴 때부터 항상 꾀를 부려대고 공부를 열심히 안해도 언젠가는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믿었고, 새로운 일이나 조금이라도 힘든 일이 생기면 피하려고 할 때도 얘는 왜 이렇게 깡도 없고 누굴 닮아서 이렇게 소심한가 싶다가도 너의 타고난 성정이려니 하고 이해하려고 했지. 네가 부족한 점이 있는만큼 너에게는 장점도 많았으니까 모든 걸 다 잘하길 바라는 건 엄마의 욕심이려니 하고.
물론 엄마도 네가 꼴 보기 싫을 때도 많았지. 엄마의 조언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엄마를 마냥 잔소리꾼으로만 치부하고 문을 쾅쾅 닫아댈 때면 내가 뭘 위해 이렇게까지 하고 있나하는 생각도 많이 했단다. 그러면서 매 번 더 이상 네가 뭘 하건 간에 신경쓰지 말아야지. 자식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지만 자식이 그걸 원하지 않으면 그만둘 줄 아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다. 라고 혼자 되뇌이면서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한 적도 부지기수였고. 근데 부모자식의 끈이라는 게 얼마나 무섭고도 끈질긴지 돌아서고 나면 또 잔소리를 반복하게 되더구나.
오늘 어깨가 축 쳐져서 들어오는 너를 보면서 무슨 말을 해줘야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엄마의말이 또 너에게 잔소리로 들리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기도 하고. 사실 어떤 말을 해도 지금의 너에겐 위로가 되진 않을테니까. 그래도 엄마는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고난에도 끝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오늘의 탈락이 너를 규정짓는 게 아니라는 것도 잊지 말고. 엄마는 네가 끝까지 잘해내리라고 믿어. 엄마가 너 대신 아파줄 수 있었다면 당연히 엄마가 아파주고 싶고 너 대신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해줬을거야. 그런데 이건 오롯이 너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일이니까. 네가 한 발짝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성장통 같은 거니까. 다만 그 힘든 기간동안 엄마가 항상 네 옆에 있다는 사실만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 4.
존경하는 변호사님께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누군가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배움도 짧고 글재주도 없는 사람인지라 내용이 뒤죽박죽이더라도 변호사님께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변호사님께서 처음에 절 변호하기를 원치 않으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살인마를 돕고 싶은 사람은 아마 없을 터이지요. 그렇지만 끝까지 못난 저를 지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어요. 사람은 누군가의 온기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변호사님 덕분에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고아원의 아이들은 뒤에서 수근거렸습니다. “쟤는 엄마가 낳고 싶지 않았는데 강제로 낳은 애래” 사랑이 아닌 폭력의 결과로 만들어진 아이, 그게 저였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절대 치유될 수 없는 상처. 아이는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곤 했죠. 이때 제가 엇나가지 않게 도와준 사람이 고아원 원장님이셨습니다. 제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학교도 잘 가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신 원장님은 저를 방으로 자주 부르곤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저의 눈을 보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너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아이의 치유되지 못할 것만 같던 상처는 원장님의 조건 없는 사랑으로 인해 조금씩 아물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다짐했습니다. 내 앞에 무엇이 놓이든, 악으로 깡으로 버티겠다고. 이겨내겠다고.
그렇게 저는 성인이 된 후 바로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일은 고되었지만, 제가 직접 번 돈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단칸방 월세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때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제 삶은 달라졌을까요? 저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서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그녀. 그 상냥한 미소와 꾀꼬리 같은 목소리에 저는 생전 처음으로 사랑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녀를 만나고 저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가족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나에게 없었던 화목한 가족. 새로운 가족과 함께 사랑으로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사람에게 이는 너무 큰 꿈이었었나 봅니다. 태어날 아이와 살아갈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출산 예정일조차 공장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쉬는 시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연 휴대폰에는 산부인과에서 온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이 있었습니다. 다시 걸려오는 전화에 별일 아닐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이를 받았습니다. “산모가 위독하십니다” 사실 그 이후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공장을 뛰쳐나와 택시를 잡고 산부인과로 달려갔습니다. 이미 늦었더군요. 그녀는 어린 시절 받았던 학대로 인해 몸이 약했습니다. 그 약한 몸으로 아이를 품고 낳는 것이 너무 버거운 일이었었나 봅니다. 산부인과 복도에서 주저 앉아 오열하다 그대로 혼절해 버렸습니다. 눈을 떠보니 병실 침대 위였고, 간호사 한 분이 옆에 계시더군요. “아버님, 비통한 마음 너무 이해 갑니다. 그래도 아기 얼굴은 보셔야 하지 않겠어요?” 간호사를 따라 비틀비틀 걸어가 신생아 병동으로 향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아기를 원망했습니다. 아기가 없었다면 그녀가 살아있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제 이름과 그녀의 이름이 나란히 쓰인 푯말 위의 아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기에 대한 미움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때 직감했습니다. 나는 이 아기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겠다는 걸.
사람의 아기는 참 손이 많이 가더군요. 저도 제가 어떻게 성인이 되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수입은 고정되어 있는데 입이 하나 더 느니, 생활비가 빠듯했습니다. 집에 아기가 있으니, 하루종일 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그래서 저는 좀 더 높은 시급을 받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공장 일 중에서도 사고율이 높아 사람들이 꺼리는 일이었죠. 그렇지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벼운 생각이었습니다. 사고는 정말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더군요. 저는 처음에는 사고가 발생한 지도 몰랐습니다. 저 멀리 날아가 있는 저의 왼손을 보고 나서야 끔찍한 고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변호사님, 지난번 제 왼쪽 팔을 보시며 많이 고통스러웠겠다고 말씀하셨죠. 맞습니다.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변호사님 신체적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가난의 고통입니다. 그리고 더욱 고통스러운 건 가난한 아버지로서의 고통입니다. 오른손 하나만으로는 공장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였죠. 제가 굶는 건 상관없었지만, 아기를 굶게 둘 수 없었습니다. 변호사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유해 보이는 중년 남자의 뒤를 쫓았습니다. 칼을 들이대면서 가진 것을 모두 내놓으면 보내주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주더군요. 제 몇 달 치 생활비를 지갑 속에 넣고 다니는 그 남자의 삶은 어떠한 삶이었을까요. 지폐를 받아서 가려는 순간, 그 남자가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한심하고 더러운 족속들, 자식 새끼가 불쌍하네.” 그 말에 발끈해 남자와 실랑이를 벌였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아아 변호사님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정말 끔찍한 삶이었는데도, 수십 번 나의 존재를 부정했는데도, 막상 끝이 다가오니 눈물이 흐릅니다. 정말 꼴사납기 그지없지요.
원장님의 사랑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은 아이의 삶의 끝은 결국 비뚤어진 부성애였네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어서 잠시나마 행복했습니다. 그 남자 역시 누군가의 사랑받는 남편이자 아버지였겠죠. 제가 지은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변호사님, 편지 끝에 제가 머물렀던 고아원 주소를 적어 놓았습니다. 아기를 그곳에 맡겨주세요. 그리고 제 얘기는 전달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원장님께서 자신이 사랑으로 돌보았던 아이가 사형수가 되었다는 걸 알면 슬퍼하실 것 같습니다. 또, 제 아기가 사형수의 자식이라는 그늘 밑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모든 아기는 죄가 없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으니까요. 이제 두 시간 정도 남은 것 같습니다. 두 시간 후면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변호사님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저 같은 사람이 아닌, 정말 억울한 사람들의 변호를 맡아 변호사님께서 사랑하시는 정의를 마음껏 펼쳐나가시길 바랍니다. 어제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을 적고 편지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보살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사랑으로 살아간다”
# 5.
[아동 방임 피해자 최 씨의 일기장]
‘야, 너 왜 전화를 안받아. 카톡은 왜 씹는거야.’ 난 며칠 동안 내 절친 민희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씹고 있다. 이렇게 내가 친구와 멀어지게 되는 걸까. 이혼 가정에 외동딸이었던 난 매일 같이 술을 마시며 신세 한탄만 하는 엄마와 살고 있었다. 엄마는 자신의 슬픔에 허덕여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매일 우울한 표정을 짓던 나를 같은 반 친구들이 학기 초에 많이 놀렸었다. 그때 민희는 깡패처럼 나타나 친구들에게 날 놀리지 말라고 큰소리로 소리쳤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12년동안 함께 해온 사이인데. 우리 관계에 끝이란 없을 것만 같았고 참으로 끈끈한 사이였는데 말이다.
민희는 내게 늘 행복을 선물해줬다. 학교 끝나고 민희 집에 함께 가면 민희 아줌마는 다정한 목소리로 ‘내 딸들 왔나~’라고 걸쭉한 사투리로 반겨주었다. 그리고는 늘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용가리 너겟을 튀겨주었다. 아줌마 덕분에 끼니를 거르는 일도 없어졌다. 심지어 민희 집에 갔던 첫 날 민희 아줌마는 민희 샤워할 때 같이 하자며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를 씻겨 주었다. 분명 내 꼴이 왜이리 꾀죄죄하냐고 묻고 싶었겠지만 아줌마는 그저 말 없이 내 머리를 감겨주었다.
이 후 민희와는 물론이고 민희의 가족과도 나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민희의 말썽쟁이 남동생이랑은 자주 다투기도 했다. 내 고등학교 졸업 꽃다발을 준 사람도, 대학 졸업식에서 나와 함께 사진을 찍은 사람도 민희 아줌마와 아저씨였다. 내 부모에게서 조차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친구의 부모님에게 느끼고 있었다. 이랬던 민희와 민희 가족을 난 이제 만나기가 두렵다.
며칠 전 취업을 위해 자기소개서라는 걸 처음 써봤다. 처음 마주한 자기소개서에의 1번 문항은 ‘자신의 성장과정에 대해 서술하시오’였다. 나는 별 어려움없이 30분만에 800자를 후딱 채웠다. ‘자소서 별거 아니네’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하려 다시 읽으며 난 나도 모르게 스스로 민희가 되어 글을 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는 따뜻한 가정 속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제 하나뿐인 남동생과는 어렸을 때 많이 싸웠지만 지금은 든든한 동생이 되었습니다.’ 글을 읽으며 나는 미친듯이 눈물을 쏟아 내렸다.
난 사기꾼인건가, 거짓말쟁이인건가. 내 인생은 왜 남의 인생으로 밖에 채워질 수 없을 까.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내 자신이 너무 창피하게 느껴졌고 너무 초라해 보였다. 친구의 인생을 내 인생인 것처럼 떠들어 대다니. 그 날 이후 민희와 연락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민희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내가 부족하고 찌질한 탓이다. 내가 자존감이 낮고 못난 게 잘못인 거다. 내가 민희한테 먼저 연락할 일은 앞으로도 없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난 내 인생의 하나뿐인 친구와 가족마저 잃고 있었다.
# 6.
“야, 나도 한 땐 꿈이 있었어.”
통통해진 몸에 짧은 파마머리를 했어도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청년 시절의 푸른 내가 감돈다. 타고난 끼는 없지만 무거운 엉덩이라는 끈기 만큼은 충분했던 그녀는 반도체학과를 나왔더란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학원 강사를 했다. 맞선을 통한 결혼 후에는 세탁소를 차렸다. 아이 하나는 등에 업고, 하나는 배 속에 담은 채로 다림질을 하고 재봉틀을 돌렸다. 지금은 유아용 학습지 교사 일을 하고 있다. 인생이 그녀를 어느 길로 데려갈지 몰랐지만, 도착한 그 곳에서 그녀는 언제나 치열히 살아냈다.
“이것도 나름 깡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야. 알아?”
대형마트 입구, 공원, 놀이터.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녀의 회색 승용차가 달려갔다. 뒷좌석에는 항상 자질구레한 장난감, 학용품들이 박스 채 실려있었다. 야외에 테이블을 깔아놓고, 싣고 온 학습지 전단과 장난감들을 올려 둔다. 거기에 아이들의 관심이 팔린 사이, 그녀는 재빨리 입을 놀린다. 만 4세부터 5세가 교육에 가장 중요한 시기예요, 어머님, 타고난 지능 테스트 무료로 검사 받아보세요, 어머, 저희 이번에 나오는 전집 세트가 딱 호영이가 좋아할만한 거네, 서울대 박사님 감수를 받은 건데, 아유 할부는 당연히 가능하죠, 수업 스케줄은 제가 연락드릴게요.
“나 이런 꼴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들 있긴 해. 근데 난 신경 안 써.”
흰 머리가 하나 둘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엔 버석한 주름이 지고 잡티가 생겼다. 그녀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맨 얼굴이 가장 편하다며, 아이들과 놀기에 이 편이 좋다고 말했다. 동료들보다 훨씬 많은 나이지만 새빨간 코트를 입고 출근하는 것을 즐겼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성취였다. 지점의 최고 매출왕이 됐다며 춤추는 이모티콘을 보내오는 그녀의 발은 언제나 퉁퉁 부어있었다. 수업 한 건당 금액이 지급되는 시스템 때문에 최대한의 시수를 맞추느라 끼니를 거르기도 일쑤였다. 그래도 꾀를 부리기보다는 정직한 길을 선택했다. 누구에게 꾼 돈도 한 푼 없다. 그래서 벌이가 이랬다 저랬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돈을 모아 어느 새 자기만의 공부방을 하나 마련했다.
“나중에 여기서 동네 아이들 모아놓고 같이 책 읽고, 놀고… 그럴 거야.”
자기 인생이 끝날 때, 후회가 없을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등에 매달린 자식새끼들을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바쁘게 키워내고 나서도, 그녀는 자기를 잃지 않았다. 그녀 인생의 목표는 자식들이 아니었다. 새빨간 코트를 좋아하는 나, 공부방 선생님이 될 나를 위한 삶이 그녀의 삶이었다. 내 어머니의 멋진 삶의 태도다.
# 7.
항상 후드티에 슬리퍼를 신고 추레한 꼴로 다니던 내가 코트를 입고 구두도 신었다. 학과 선배님이 후배들에게 점심을 사주신다며 호텔 일식집으로 부르신 것이다. 약속이 잡힌 건 학과 송년회 자리였다. 학과 회장이었던 나는 행사에 참석해 분위기를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선배님들이 돌아가며 건배사를 하셨다. ‘후배님들, 꿈을 크게 가지고 학교의 이름을 빛내 주십쇼! 끼가 있는 분들이니 미래가 창창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한 60대 남성. 행정고시에 일찍 합격해 주요 부서에서 차관직을 맡았고 지금은 장관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술을 연이어 마시던 그는 잔뜩 취해 자리에 있던 재학생들을 불렀다. ‘너희들은 내가 밥 사줄게! 연락해~’
그렇게 성사된 약속이었다. 우리는 약속시간보다 30분 일찍 호텔에 도착했다. 너무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으나 그는 이미 예약된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그의 동기라는 선배님 두 분도 함께였다. 나를 포함한 재학생 다섯 명은 식탁에 둘러 앉았다. 그는 학생들 개개인에게 큰 관심은 없는지 질문을 하고는 듣지 않았다. 행정고시에 합격했다는 한 선배의 말애는 조금 흥미를 보이는 듯 했다. ‘우리 학교 후배들은 깡으로 버티면 금방 붙는다’며 웃었다. 옆 자리 선배님이 ‘머리 좋은 사람이라 쉽게 말한다’며 한 마디 거들었다.
그는 밥을 좀 시키자며 벨을 눌러보라고 했다. 종업원이 펼쳐주는 메뉴판을 보며 익숙한 듯 주문했다. “몬테스 알파. 셋.” 그는 명사로만 말하는 때가 잦았다. 점심이니 와인이나 한 잔씩 하자고 했다. 다음 번에 학교 앞에서 만나면 폭탄주나 한 번 말자고 했다. 남자 종업원이 와인 두 병을 두고 나갔다. 그는 짜증내며 소리쳤다. “아저씨! 와인! 병 안 따고 어디가!” 종업원은 잔을 가져오려했다고 답했다. 화를 내다가도 자신의 동기가 늘어놓는 그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즐거워했다. 가끔 자기 칭찬이 나오면 아주 좋아했다. 국회의원도 자기 앞에서 쩔쩔 맨다고 말하며 취한 얼굴로 허허 웃었다. 웃을 때마다 입에선 밥풀이 튀어나왔다. 권력에 원만히 탑승하려면 아첨꾼이거나 허풍꾼이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하나 싶었다.
술을 마시던 그는 종업원에게 ‘야채같은 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종업원은 지금 ‘야채같은 것’이 없다고 했다. 대신 요즘 과메기가 좋으니 과메기를 올려드리겠다고 했다. 그는 과메기를 김에 싸서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나는 정적이 생기면 할 말을 쥐어 짜내려고 꾀를 쓰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행정고시에 붙은 선배가 ‘선배님이 근무하시는 부서에 지원하고 싶다고, 정말 보람찰 것 같다’고 한 마디 해주어 긴 정적을 면했다. 식사가 끝나고 집에 가며 선배에게 정말 거기 지원하는거냐 물었다. 선배는 진짜겠냐고 답했다. 거기 가면 일주일에 한 번 퇴근한다는데 거기 사람들은 왜 안 죽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코스로 알밥과 꽃게탕이 나왔다. 그는 소량의 밥을 빠르게 해치웠다. 그가 이미 밥그릇을 다 비웠을 때쯤 국그릇이 놓였다. 그러자 종업원에게 ‘눈을 빠릿빠릿하게 뜨고 똑바로 서빙 해야지 왜 이렇게 굼뜨냐’며 소리쳤다. 그러다가도 재학생들을 보며 다시 웃음을 지었다. 재빠른 감정 변화가 봐도봐도 놀라웠다. 그는 우리더러 자신을 아버지처럼 생각하라고 했다. 이제 선후배 간의 끈을 계속 이어가자며 소리내 웃었다. 와인 세 병이 다 비자 학생들은 이제 돌아가보라고 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선배님들과 악수하며 연신 감사하다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는 후배들이 이뻐 죽겠다며 시뻘건 얼굴로 웃으며 배웅해주었다.
# 8.
“끼이익..끽..끼익”
트럭이 왔다. 한번에 최대한 많은 돼지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짐칸을 2층으로 불법 개조한 트럭이다. 녹슨 쇳덩이가 쉰소리를 내며 짐칸이 열린다. 오늘도 한 무더기 돼지가 도축장으로 끌려갔다. 매주 보는 광경이다. 벌써 이곳에서 일한 지 3개월째니 이제는 좀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악몽을 꾼다. 피떡 칠을 한 꼴로 돼지들은 매일 밤 꿈으로 찾아온다. 염증으로 붉게 충혈된 눈알을 굴리며 울부짖기만 한다. 그게 다다. 물지도, 잡아먹지도 않는다. 공포에 질린 눈빛과 악에 받친 비명만으로 나는 쉽게 무력해졌다.
또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아침을 맞이했다. 양돈장 문 앞에서 오늘은 꼭 그만두겠다고 말하자 다짐한다. 축사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 아저씨가 어린 돼지 목에 끈을 맨 채 용을 쓰고 있다. “이놈 코 봐라. 삐뚤어졌지? 이런 놈은 골골거리기만 하지 돈이 안 돼.” 이따금 있는 일이었다. 선천적으로 코가 삐뚤어져 위축성 비염을 가진 새끼들은 공장식 축산에서 도태된다. 돼지와 아저씨의 줄다리기가 격해지자 뒤편에서 세워졌던 쇠빠따가 ‘깡’ 하고 둔탁한 파찰음을 내며 바닥에 넘어진다. 아저씨는 어린 돼지를 단번에 후려쳐 솜씨 좋게 멱을 딸 것이다. 몸서리를 치며 눈을 돌리려던 찰나, 줄에 목을 묶여 불거진 눈알과 마주쳐버렸다. 어젯밤 꿈에서 본 그 눈알이었다. 순간 꾀가 떠올랐다. “아저씨 제가 할게요. 들어가 아침 드시고 오셔요.” 아저씨는 의아한 눈치였으나 아침부터 질긴 싸움으로 지친 탓에 쉽게 수긍했다.
아저씨가 나간 뒤 돼지를 트럭에 태웠다. 냅다 산턱을 올랐다. 산 중턱쯤에 버려진 닭장에 돼지를 풀어줬다. 그날부터 돼지를 돌보기 시작했다. ‘삐용이’란 이름도 붙여줬다. 피떡이 된 눈을 닦아주고 상처에 연고를 발라줬다. 삐용이는 새 이불과 짚단, 땅콩과 영양식을 먹으면서 고통스럽지 않게 살을 찌웠다. 농장에서 임신한 돼지들을 비좁은 스툴에 가둘 때, 죽음을 향해 살을 찌워가는 돼지들에게 밥을 줄 때, 또다시 트럭이 왔을 때. 그럴 때마다 삐용이를 찾아가 더 정성스럽게 돌봤다. 내가 오면 삐용이는 잠을 자다가도 신나서 달려와 박치기를 하기도 했고 간식을 보고 꿀꿀거리며 서둘러 달려오기도 했다. 이불을 개켜 놓으면 코로 펴 눕고, 이불 속에 파묻혀 만족스럽게 그르렁거리며 잠을 청했다. 존재 자체만으로 기특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한 달 반 뒤 삐용이는 죽었다. 감기몸살이었다. 수의사를 불러 주사를 놓고 약을 먹이고 했으나, 기운을 못 차릴 땐 집 안으로 데려와 재우기도 했으나, 그걸로 삐용이의 명줄을 잡아둘 순 없었다. 삐용이가 오래오래 살았으면 했다. 몸집도 더 커지고, 수명을 다 누리길 바랬다. 순전히 내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코가 삐뚤게 태어난, 몸 약한 어린 돼지가 꽃샘추위에 죽는 것은 이상한 이야기가 아닌 자연스러운 것일테니. 삐용이를 데리고 온 뒤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았다. 특별한 돼지였다. 소중한 만큼 깊게 애도했다. 봄이 오고 진달래가 피는 양지바른 땅에 삐용이 무덤을 지었다. 누군가 그가 존재했음을 기억하고 슬퍼하는 자연스러운 끝을 맞이했으니, 삐용이는 다행히 고기가 아닌 ‘돼지’로 살았다.
# 9.
당신은 틀렸습니다. 언론인이라면 마땅히 권력의 시녀가 되었어야 하지요. 그게 우리 대한민국 언론 역사 100년을 되돌아봤을 때 그러하고, 그에 합당하지 못한 자들은 시대의 뒤편으로 밀려났습니다. 언론의 본분이고, 기본자세가 그래 왔습니다. 그게 언론인의 굴레입니다. 당신의 문제는 언론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유를 위한 투사가 되려고 한 것에 있습니다. 당신은 역사를 배웠습니다. 오히려 역사를 가르칠 정도지요. 자유라는 기치를 든 작자들이 결국 어떤 꼴이 되었는지 잘 아실 겁니다. 독립 운동가들이 어떤 말로를 겪었는 지 모르십니까? 6.25전쟁에 꿈을 가진 청년들이 어떻게 바스러졌는지 정녕 모르신다는 말씀입니까?
자유가 진정 존재한다고 보십니까? 자유는 관념적 측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구태의연한 생각일 뿐입니다. 이런 구시대적 발상에서 벗어나십시오. 끝까지 살 길입니다. 자유를 주면 어찌할 줄 모르는 대한민국의 노예들을 보십시오. 독재의 맛을 보고 잊지 못하는 국민들의 깡을 보십시오. 자유보다 통제해주기 바라는 게 국민들입니다. 누군가를 추종하고, 찬양하고, 고무되는 게 본성입니다. 자유로울 수 없고 권력에 복종하는 게 인간입니다.
권력은 틀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돈이 나오고, 명예가 나오며, 일신의 안위를 보장해주는 겁니다. 자유라는 철 지난 가치가 밥 먹여줍니까? 전남매일신문사 기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광주민주화운동을 목도하고 펜을 놓은 기자들, 모두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유는 절대 등이 따듯하여 잠이 솔솔 오고, 당신의 아이들과 어머님에게 따듯한 밥과 국을 먹여주지 않습니다. 다시 잘 생각하십시오.
그 사람은 권력의 개, 권력의 시종입니다. 그자의 명령이 곧 권력의 명령이지요. 그런데 그걸 거역하려 한 것은 당신이 현시대 언론인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개가 아닌 인간이 되려한 점, 그게 자격미달 사유입니다. 언론인라면 정치인의 감시견이 되어 국민을 향해 짖었어야 지요. 반(半)정치인이 되어 권력의 끈에 잘 붙어있어야 했습니다. 훌륭한 연기력을 가져 국민을 희롱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진심으로 국가와 국민을 걱정하고 정의를 구현하려 한 점. 그래서 진실을 보도하려 한 점.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지키려 한 점. 이런 부분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당신이 틀렸다는 겁니다.
당신이 존경하던 선배들 모두 어디 갔습니까? 당신이 참 언론인이라고 믿었던 그들. 한 명씩 한 명씩 언론계를 떠나 정치로 입문했습니다. 당의 중책을 맡으며 위선적인 꾀와 달콤한 말로 국민들을 꿰어내고 있습니다. 당연한 수순입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끼를 숨기지 못하고 당에서 한 자리하는 게 뭐가 문제라는 말입니까? 언론과 정치는 한 맥입니다. 그 둘 다 권력을 추구한다는 것에서 본질과 궤를 같이 하지요.
아직 멀었습니다. 언론에 종사하며 언론은 정치의 모사꾼일 뿐이라는 본질을 깨닫지 못하시고 있습니다. 기자 명찰을 매일 차면서 권력의 목줄임을 알지도 못하고, 당신의 펜으로 매일 기사를 쏟아내며 권력의 칼임을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이제 알게 되겠지요.
# 10.
[전문] 에이미, ‘K-아이돌 스타’조작 논란에 심경 고백
‘K-아이돌 스타’에 출연한 에이미가 해당 프로그램을 둘러싼 논란에 관해 직접 심경을 밝혔다. 어제 오후 에이미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에 장문의 글을 남겼다. 해당 글 속에는 ‘K-아이돌 스타’ 조작 논란, 갑질 의혹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무대 장인. 무대 장인은 저의 꿈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나는 가수다’와 같은 경연 프로그램을 보고 자라며 선배님들처럼 청중을 사로잡는 목소리와 가창력으로 마음까지 어루만져주는 그런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꿈이 너무나도 간절했던 것일까요. 제 꿈을 담보로 세상은 저의 삶을 이리 저리 흔들어 놓았습니다. 제대로 된 소속사 한 번 가져본 적 없었고, 기껏 키워주겠다고 약속해 들어간 회사는 7년 동안이나 저를 방치했습니다. 하나의 꿈만을 보고 달려온 인생인데 그렇게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돈이 없어 며칠을 굶기도 하고 거리에 나앉아 미친 사람처럼 엉엉 울기도 했지만 오직 그 꿈 하나와 깡으로 버티고 버텨온 삶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유튜브에 올린 제 노래를 사람들이 알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방송사에서 새로운 가수 경연 프로그램을 하는데 저를 캐스팅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이제서야 나에게도 제대로 된 기회가 찾아오는구나, 섣부른 기대인걸 알면서도 그 전화 하나에 미친듯이 행복했습니다. 휴대전화를 압수당한 채 촬영 전일을 갇힌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피부병이 나고, 식사도 제대로 제공받지 못해 굶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꾀병으로 외출해 옷 안에 음식을 숨겨들어왔을까요. 이마저도 몸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빼앗기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불평, 불만이 쏟아져 나왔지만 저는 그게 분에 넘치는 소리라고 무시하기도 했죠. 처음으로 저의 팬이 생기고, 방송에 설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그런 것쯤은 제게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경연 날이 찾아왔고, 저는 긴장되는 마음에 잠들 수 없었습니다. 복잡한 마음에 숙소를 나오는데 제작진 사이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에이미 걔가 끼는 있는데 위에서 반대한다’며 말입니다. 울음을 삼키며 미리 준비한 탈락 소감을 간신히 얘기하는 저의 꼴이 참 우스웠습니다. 원치 않는 짧은 치마를 입고, 립싱크를 하면서도 언젠간 무대 장인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제가 제 분수를 몰랐습니다. 무대장인은커녕 노래쟁이, 춤꾼도 못되는 주제에… 경찰 조사가 진행 중이라며 여러 언론에서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사실 제게는 이제 그 여부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꿈 하나만 보고 달려온 인생인데 이제야 끝이 보이네요.
# 11.
왼쪽으로 기우뚱. 오른쪽으로 기우뚱. 서른이 되기 전에는 자전거를 배워야 할 것 같다며 찾아온 친구에게 일단 타보라 말했다. 안장에 앉아 발을 들어 올리자 몸이 휘청거린다. 깡 없고 겁많은 친구는 너무 흔들려서 넘어질 것 같다고 울상을 지었다. 쉽게 페달을 밟고 나아가지 못하는 친구를 다독이기를 10분째, 나는 8살 때 배운 아버지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일단 밀고 끌며 앞으로 가는 것이다. 자전거는 가만히 서 있으면 넘어진다. 흔들리고 불안해도 일단 앞으로 나아가야 균형을 잡을 수 있다. 뒤에서 천천히 자전거를 밀자 친구는 곧잘 균형을 잡고 페달을 밟았다. 핸들의 방향을 정하고 브레이크를 고쳐잡는 건 출발하고 난 뒤의 일이다.
일단 앞으로 나가가야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게 자전거뿐일까. 단순히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탈바꿈 중인 세상에서 멈춰있는 제도들이 있다. 국회에 계류된 혹은 그 문턱조차 넘지 못한 법안이 끝도 없이 많다. 특히 차별금지법이나 생활 동반자 법처럼 소수자들의 인권과 관련한 법이나 정책은 이미 오랫동안 그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시행에 있어서 끈을 쥔 책임자들은 머뭇거리며 ‘사회적 합의’라는 미명 아래 숨고 있는 꼴이다.
“우선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라는 얕은꾀는 이제 식상할 만큼 들었다. 사회적 합의는 간단하고 허울 좋은 마치 정답인 것처럼 들리는 핑계다. 여기서 합의는 주로 다수결이라는 뜻으로 오용된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려면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야 하고 다수의 사람이 같은 의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합의는 자전거가 출발한 뒤 방향과 속도를 정하는 과정이지 자전거를 출발조차 하지 못하게 끌어내리는 과정이 아니다. 주 52시간 근무제, 호주제 폐지 등 여러 제도가 처음에 큰 반발을 불러왔지만, 결국 사람들끼리 적절한 방법과 타협할 지점을 찾아냈다.
누군가 꾼 꿈이 다시 ‘사회적 합의’에 가로막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자전거는 아직 멈춰있다. 누가 페달을 밟을 것인가.
# 12.
안녕하세요 36.5MHZ 세상의 온기를 전하는 라디오 DJ H입니다. 오늘은 과연 어떤 따뜻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무척 기대됩니다. 오늘 사연의 주제는 연애 고민인데요, 사연자 소식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얼마전 연애를 시작한 J입니다. 저로 말하자면 솔직히 집도 잘 살고 얼굴도 괜찮고 키도 괜찮은,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직장인입니다. 그래서인지 눈이 좀 높습니다. 왠만한 남자는 제 눈에 들어오지도 않더군요. 학벌, 돈, 외모 다 가진 저랑 걸 맞는 남자를 만나는 게 제 꿈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28년을 모태 솔로로 살았네요. 현실에서는 이 모든 조건을 갖춘 남자를 만나기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소개팅 어플을 깔았죠. 그 이름도 “끼리끼리”. 아니나 다를까 저는 여기서 제 이상형을 만났지 뭐예요? 그 남자는 어플 내에서도 강동원 닮은꼴로 유명했어요. 심지어 대기업 회장 아들이라니! 이 남자야 말로 내 운명이다 싶었죠. 앞으로 이 남자를 동원이라 칭하겠습니다.
저는 어플 내 대화 기능으로 동원이에게 말을 걸었지만 거절당하기를 수십 번. 이런 남자 만나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이상한 깡이 발동해 거의 매일을 그에게 연락했어요, 한 번만 만나달라고. 마침내 동원이는 제 구애를 승낙했고 우리는 금수저들만 갈 수 있다는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만났어요. 식사자리에서 서로의 신상(부모님 직업, 자차 보유 여부, 연봉 등)을 파악하며 천천히 서로를 알아갔습니다. 이렇게 같은 급끼리 만나는 게 어디 쉽나요? 드디어 28년 모쏠 인생에도 봄 날이 오구나! 저는 그 이후 더 적극적으로 그에게 다가갔어요. 언제 다른 여자에게 뺏길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냥꾼을 자처했죠. 저는 동원이와 사귀기 위해 온갖 꾀를 다 부렸습니다.
마침내 동원이와 저는 남부럽지 않은 커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몫에 샀고 소개팅 어플 내에서도 공식 커플이 되었어요. 어플은 고학벌 고스펙 사람들로 넘쳐났고 그들도 끼리끼리 만나서 잘 사귀는 듯 보였어요. 그런데 저랑 모든 조건이 잘 맞는 남자를 만나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마음 한 구석이 너무 허전합니다. 우리는 만나면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공감해주기 보다는 그저 비싼 식당, 비싼 호텔만을 전전하고 있습니다. 더 충격적인 건 동원이는 아직 그 어플을 삭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끝이 보이는 연애가 이런 건가요? 이성간 사랑의 감정을 잘 알지 못하지만 확실한 건 이건 사랑이 아닌 것 같아요.
네 사연자님의 사연 잘 들었습니다. J님께 따뜻한 온기가 필요해 보이네요. 언제부터 연애는 둘 만의 사랑이 아닌 연애시장 속 거래되는 자원이라고 느껴지더라구요. 서로의 조건을 비교하고 나의 조건과 부합하면 만나고. 돈 많은 사람은 돈 많은 사람과 연애하고 지금 당장의 여유가 없는 사람은 연애를 꿈도 못 꾸는 경우가 흔하죠. 이미 사회구조에 고착화된 계급만으로도 충분히 불평등한데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공유하는 연애에도 계급이 생기다니. 사연자님은 대상을 선택하는 일에서 비롯된 연애를 하고 있지만 이를 진정 사랑답게 하는 것은 선택 이후라고 생각해요. 조건과 조건이 맞는 끼리끼리가 아닌 마음과 마음이 맞는 끼리끼리가 되도록 그 사람과의 관계에 더 집중해보는 건 어떨까요? 둘의 마음이 하나의 끈으로 연결될 때까지 DJ H가 응원하겠습니다.
# 13.
‘드디어 이사를 간다.’
미정은 책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쌓아둔 책들을 가방에 옮겨담기 시작했다. 꼭 이사를 가는 것 같다. 이 독서실 자리 한 칸이 미정씨가 배정받은 보금자리였다. 책상에 엎드리면 몸에 딱 맞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미정은 여기서 꿈을 꾸었다. 교사라는 꿈을 꾸며 공부했다. 공부가 힘들고 지칠때면 책상에 잠시 엎드려 꿈을 꾸었고, 무릎에 덮은 담요는 이부자리였다. 앉으면 시선 바로 앞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았던 ‘R=VD 선생님’이라고 쓴 포스트잇을 떼고, 담요를 대충 가방에 구겨넣었다. 한 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간다.
자취를 해본 적은 없지만 작은 자취방을 옮기는 기분이 이런 느낌이겠거니 생각한다. 세어보니 이 독서실을 십년은 다녔다. 12살 때 이사 온 후 쭉 이 동네에서 살았기에, 집 근처인 이 독서실을 계속 다녀왔다. 중고등학생 때는 물론이고, 대학교 4학년 때부터 다시금 독서실에 다닌 미정씨다. 최근 몇 년 간은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독서실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었으니, 사는 곳이 독서실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집 다음으로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이니까 이사가 틀린 말도 아니다.
스물아홉 미정씨는 사범대 국어 교육과를 졸업했다. 3년 간 기간제 교사를 하며 임용고시를 공부했고, 붙기가 어렵자 기간제 교사도 그만두고 1년은 공부에만 전념했다. 교사를 할 때는 몸은 고단했지만, 끼 있고 깡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마음은 즐거웠다. 꾀를 부리며 수업을 흥정하던 아이들은 얄미우면서도 귀여웠다. 자주 해봤는지 익숙한 그 솜씨가 마치 ‘꾼’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저 땐 그랬었지’ 학창시절 기억을 더듬기도 했다.
임용고시를 막 준비할 때까지만 해도 참 깡이 넘치던 미정씨였는데.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어 준비했던 마지막 1년은 더욱 괴로웠다. 독서실에서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정식 교사가 되어 저런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11월에 임용고시를 치르고, 12월에 결과가 나왔다. 다섯 번이나 반복해 익숙한 일상이었다. 그런데 결과도 익숙했다. 또 낙방이었다. 20대 청춘을 바치며 몇 년 간 이러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1월까지 아무것도 안하고 방에만 쳐박혀 여러가지 생각을 하던 미정씨는 결심했다. 이 길은 어쩜 내 길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이제 그만 보내줘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몇 달 간 취업을 준비했다. 오늘 작은 출판사에 면접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 동안 가고 싶지 않았던 독서실에 드디어 자리를 치우려고 온 날이기도 하다. 빈 자리가 여유로웠는지, 미정씨가 쓰던 자리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정말로 끝이구나,’ 시원섭섭했다. 가방을 들고 독서실 방을 나오는데, 근처 중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을 마주쳤다. 이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 14.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온다. 남색 정장에 갈색 서류가방을 들었다. 서류가방 끈 사이로 삐죽삐죽 A4 인쇄물들이 튀어나와 있다. 분명 직장에서 뽑은 서류들을 급하게 가방에 우겨 넣은 것이다. 서서히 다가오더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심장이 두근거리지만 애써 숨을 쉬어 본다. 그러던 순간 그가 덥석 내 허리를 움켜쥔다. 놀란 나는 토끼 눈을 뜨고 아무 말도 못한다. 속으로 간절히 빌 뿐이다.
그는 내 허리를 꽉 움켜쥐고 이리저리 눈치를 본다. “제발” 나는 속으로 빌어본다. 그는 에헴, 기침을 하며 기둥 끝에 몸을 기대고 할 일이 있는듯 폰을 만지작거린다.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비열한 자식. 그때 기둥 옆의 노란 소파에 자리가 나자, 재빠르게 그러나 여유 있는 척 자리를 차지한다. 꾼이다. 휴, 오늘도 집에 가기는 글렀다. 마음을 접고 나는 내 몸을 그에게 활짝 내어준다. 몇 번 보고 만지다가 놓아주겠지. 체념하며 눈을 감는다.
서점에 처음 진출했을 때 우리는 설레는 꿈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의 따뜻한 집에 가서 그들의 여유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커피 한잔과 함께 진한 감동을, 웃음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예쁜 꼴을 갖추고 매일 반짝반짝 광을 내도 사람들은 보지 않았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이 그래도 궁금은 하니까, 데려가려는 척 꾀를 내어 소파에서 우리를 심사한다. 하지만 소파 단골 손님인 나 같은 애들은 결국 80% 이상 가판대로 돌아온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매장 입구 중앙에 멋지게 진열된 베스트셀러 코너다.
베스트셀러 코너에 앉아 있는 애들은 들어 온지 일주일이면에 대부분 새로운 집으로 스카우트 된다. 1년이 지나 먼지가 쌓여도 그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는 매번 한숨만 쉰다. 그 자리는 부모님이 돈이 많아야 앉을 수 있다. 혹은 돈이 좀 없어도 권력이 있으면 MD추천 도서에 라도 놓인다. 멋지게 시장에 전시된 그들을 구매하면 인기인을 나도 안다는 소속감, 명예감을 얻을 수 있다. 끼와 매력은 비슷하지만 우리가 아닌 그들이 팔리는 이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벽 책장에 꽂혀 있는 나, 우리. 눈을 괜히 더 똘망똘망 뜨고 반짝반짝 광을 낸다. 책장에서 깡으로 악으로 버틴다. 진정한 끼와 매력은 언젠가 통할 것이라고 믿는다. 진실된 능력의 힘을 믿는다. 저 멀리서 대학생인 여자가 보인다. 주변을 신경쓰고 싶지 않은 듯, 아이팟을 끼고 내 쪽으로 다가온다. 지친 기색으로 나를 집어 든다. 손은 한참동안 나를 샅샅히 훑는다. 나의 <자존감 수업>이 통했나 보다. 어느새 그녀의 발걸음은 계산대로 향한다.
# 15.
랭귀지 프렌드는 내가 대학생 때 외국인 학생들과 했던 영어 회화 동아리이다. 한국인 세 명, 중국인 두 명이 모여 격주로 하나의 주제를 정해 이야기 한다. 기억에 남던 그날의 주제는 영화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와 감독에 대해 열심히 떠들었다. 나의 넘치는 ‘덕심’을 영어라는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무척 애썼다. “아이 러브 무비, 마이 훼이보릿 디렉터 이즈 왕자웨이(왕가위), 구로사와 아끼라, 히즈 무비 이즈 쏘 어썸 앤드 아임 빅 팬 오브 레슬리 청(장국영), 매기 청(장만옥).” 얘기를 마치자 중국 친구들이 웃었다. “Seriously, Are you my grandmother?" 한국 친구들도 따라 웃었다. 살짝 삐친 나는 옛날 감성을 이해 못하는 메마른 심장의 친구들을 째려봤다.
레트로 마니아, 나를 보고 웃던 친구들은 이제 복고풍이 그려내는 꿈을 꾼다. 나는 ‘나만 알고 싶은’, ‘나만 알고 있던’이라 생각했던 감성을 이제 온 세상이 떠들어대니 흥미가 깡그리 사라졌다. 불만을 품은 건 나뿐만이 아닌듯하다. 동묘와 황학동 벼룩시장의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혀를 끌끌 찬다. “젊은 애들이 갑자기 우르르 여길 와. 원래 천 원, 이천 원 하던 잠반데 만 원을 달래. 나 원 참, 별꼴일세.” 나도 그들이 말하는 ‘젊은 애들’이지만 어느 정도 공감한다. 얼마 전 동묘에서 시중에는 없는 독특한 패턴의 자켓을 발견했다. 사려고 했더니 7만원을 달라고 하는 거다. 황당해서 주인 아저씨를 쳐다봤다. “아가씨 거기 상표를 봐. 그거 버버리야.” 아저씨의 잔꾀에 웃음이 났다. 역시 벼룩시장도 시장이었다. 레트로 열풍을 타고 수요·공급 곡선의 미끄럼틀에서 벼룩이 날뛴다.
레트로 감성, 이제 이 단어는 그 자체로 ‘힙’한 게 되어 여기저기에서 끝도 없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영화관에서는 ‘재개봉’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옛날 영화를 주구장창 틀어주고, 패션업계는 아예 복고를 ‘디폴트’로 놓고 ‘재해석’만 하고 있다. 어디 그뿐만 인가. 방송에선 추억의 90년대 가수들을 불러 모아 했던 안방 콘서트가 대박나자 너도나도 ‘복고 아이템’을 기획한다. 계속 레트로만 외쳐대는 게 찔렸는지 ‘뉴트로’로 컨셉을 살짝 틀어 여전히 복고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하도 살기 퍽퍽하니깐 그나마 풍요로웠던 90년대를 소환한다.”라는 분석도 레트로, 뉴트로 만큼이나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럼 실천해야 한다. 자, 이제 추억은 그만 놓아주고 퍽퍽한 현실로 돌아와 진짜 창조, 진짜 해석을 해나가 보자. 그때 그 진위를 알 수 없는 버버리 자켓이 만 원이 되는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