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삼각산)
서울 정도 6백년을 맞아 북한산성의 온전한 모습을 기록한 지도와 각종 자료를 담은 <北漢誌>가 최근 영인되어., 주목.
1745년(英祖21년)에 완간된 <북한지> 규격(21cmx 34.5cm)
화엄사 출신 聖能스님에 의해 편찬되어 교계 시선이 집중. 북한지는 온조왕이 쌓은 옛터로부터 북한산성을 쌓기까지의 변천 과정 등 산성 축성(築城)에 많은 양(量)을 할애하고 있다.
지명이나 절의 유래, 풍경을 읊은 옛 사람들의 시문도 수록, 북한산성을 알기에 더없는 귀중 자료, 특히 산성축성 과정에서 유일한 사찰이던 重興寺 외 12개 사찰이 신축되었음을 알려준다.
북한산성은
숙종 37년(1711년)4월3일 부터 10월18일까지 6개월 동안에 많은 반대와 경제적 악조건 속에 축성되었다.
축성에 참여했던 성능스님은 당시 승병의 軍營(總營)이었던 중흥사 주지로서 팔도도총섭을맡아 3백50여명의 승병을 관리.
성능스님은 1712년 이 책의 초고를 완성한 이후에도 1745년 11월 판각될 때까지 30여년간 변화를 첨가수정.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性能이라 쓰며, 호는 柱坡라 하였다
성능(性能)은 화주할 걱정에 대웅전에서 기도를 올리는데 “다음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 문수보살.
그가 다음날, 처음 만난 사람은., 절에 자주 들르는 거지노파.
성능이 시주를 요구하자 노파는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환생하여 큰 불사를 이루겠나이다.”라며 서원을 세운뒤 연못에 몸을 던졌다. 그뒤 성능은 5, 6년 걸식하며 돌아다니다가 한양 창덕궁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유모와 함께 궁밖으로 나온 공주가 그를 먼저 보고 "우리 스님" 하고 반겼다고 한다.
공주는 태어나면서부터 한 손을 펴지 않았는데 성능이 이를 펴보니 그 손바닥에는., ‘장륙전’ 3자.
그후, 숙종은 성능을 도와 장륙전을 완성케 하였고, 사액을 내려 '각황전(覺皇殿)'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뒤 숙종은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 축성을 성능에게 위임.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 직위를 내렸는데 9개월 만에 축성을 완료.다시 화엄사로 돌아온 그는 수행의 여가에 산성기사(山城紀事)를 집필. 그는 이 『북한지(北漢誌)』를 판각하여 1745년(영조 21) 신임 도총섭 서봉에게 인계.
그뒤에도 그는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판각하는 불사 후에도 통도사 석가여래영골사리탑비를 세우고, 계단탑(戒壇塔)을 증축.
성능은 산성 완공 후 산성축성 총본부 중흥사에서 틈틈이 집필하여 약 34년 후에 탈고한 것이.,북한지. 북한산성 축성기록을 전하는 역사지리서 이기도 하다.
북한산성 축성은 '팔도도총섭 성능' 지휘 아래.,축성.
북한지 연혁조에는 북한산성을 쌓기까지 내력이 있다.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 또는 南平壞)이었던 이후에 온조가 쌓았던 옛터에 산성을 쌓기까지의 역대 내력을 기록. 이 기록에 의하면, 북한산성은 백제 온조가 처음 쌓았고 그 이전의 지명은 고구려 "북한산군" 또는 "평양성"이었다.
북한지 산계조에는 삼각산 및 인수봉·백운봉·만경봉 등 32개 봉(峯), 천룡강(天龍岡) 등 3개 강(岡), 의상대(義相臺) 등 8개의 대, 장춘동(長春洞)등 11개의 동, 여기담(女技潭) 등 2개의 담, 국녕폭(國寧瀑) 등 2개 폭포 위치 및 이들에 관한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북한지 성지조에는 성의 둘레·높이, 문의 수와 규모, 장대, 성곽 등 성의 규모와 시설에 관한 내용이 있다.
둘레 7,620보, 성문 14, 장대 3, 성곽 143, 못 26, 우물 9.
북한지 사실조에는 북한산성의 축조과정이 기재되어 있다. 북한산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그 중요성을 재인식.1659년(효종 10) 왕이 송시열에게 명해 산성 수축을 논의 시작.
숙종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축성 계획이 검토되고 1711년 2월 축성 결의, 4월에 축성을 시작, 9월에 완료.
.- 관원조에는 경리청(經理廳)·도제조(都提調)·제조(提調)·낭청(郎廳)·관성장(管城將)의 인원과 임무를 수록하였다.
- 장교조에 경리청·관성소(管城所)·대성문(大成門)·승관(僧管)·훈련도감유영(訓鍊都監留營)· 금위영유영(禁衛營留營)· 호조 등으로 나누어 소속 장교와 이졸(吏卒)의 인원 등을 수록했다..
대서문 → 청계동 → 노적동 → 백운동→ 중흥사 → 태고사 → 귀암봉(천해대) 거북바위가 있어.,귀암봉(龜巖峰 : 520m)
성문과 수문(水門), 장대(將臺), 창고 등을 지키는 승군이 주둔.이 절은 승군이 주둔한 산성 안 11곳 승병 사찰 등을 관장하였다.
왕실에서는 8도의 사찰에 영을 내려 1년에 6차례에 걸쳐 번갈아 의승(義僧)을 뽑아 올리게 하여, 산성 내 11개 사찰에 주둔시켰다.
산성 내 승군의 정원은 360명으로 11개 사찰에는 각각 수승(首僧) 1인과 승장(僧將) 1인을 두었으며, 이들을 총지휘하는 본부로 승영(僧營)을 설치. 승대장(僧大將) 1인을 임명하여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 절은 승병 대장이 머물렀던 북한산성의 승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