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서원(表忠書院)은 본래 표충사(表忠祠)라고 불렀는데, 임진왜란때 의승장(義僧將) 으로서 구국(救國)의 대공(大功)을 세운 서산(西山), 송운(松雲), 기허(騎虛) 등 3대사(大師)를 향사하는 곳으로서 본래는 무안면 중산리 웅동(熊洞:현, 대법사(大法寺)자리)에 있던것을 서기 1839년(헌종 5년) 정월에 송운대사(松雲大師)의 8세(世), 법손(法孫)인 월파당(月坡堂) 천유(天有)가 당시 영정사(靈井寺:현재 표충사)주지(住持)로 있을 때
밀양부사(密陽府使) 심의복(沈宜復)과 그의 아들인 순상(巡相) 심경택(沈敬澤)의 힘을 빌리고 예조(禮曹)의 승인을 얻어, 현 위치인 단장면 구천리 영정사(靈井寺) 경내로 옮기고 편액을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고쳐 걸고, 절의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본래 서원(書院)은 유교(儒敎)의 사학(私鶴) 시설인데, 불교(佛敎) 사찰(寺刹) 안에 고승(高僧)의 영정(影幀)과 위패를 봉안(奉安)한 사당(祠堂)을 두고 있는 것 자체가 일반적 관례(慣例)와는 매우 이질적이라 볼 수 있다, 춘추(春秋) 2회에 걸쳐 매년 실시하는 춘추향사(享祀)도 승려가 아닌 관리(官吏:대개市長)가 주재하여 올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1871년(고종 8년)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한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따라 이 서원도 향사만 중지되 훼철(毁撤)은 면하게 되었다가 1883년(고종 20년) 사림(士林)의 요청으로 복원(復院) 되었으며 근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는 뒤로 하고라도 확실한 근거 자료는 없지만 나의 소견으로는 억불정책을 피하고 면 해 보기위해 조정의 비위를 맞춰보려고 스님 중 누군가 에 의해 서원을 옮겨와 유.불.선의 사명대사의 주창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행정구역으로는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재약산 아래에 에 있는 사찰. 임진왜란때 법력으로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의 정신을 계승하는 우리나라 호국불교의 근본도량이라 할 수 있다. 신라 진덕여왕 때 창건되어 처음에는 죽림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신라 흥덕왕 4년(829년) 황면선사가 중건하였다고 하며 절 이름이 영정사로 바뀌었다. 절 이름이 바뀐 것과 관련하여 설화가 전해진다.
흥덕왕의 셋째 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의와 명약을 찾던 중 이곳의 영정(靈井) 약수를 마시고 병이 나았다. 이에 왕이 크게 기뻐하여 이곳 절 이름을 재약산(載藥山) 영정사(靈井寺)라 하였다고 한다. 고려 충렬왕 때 일연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탈고하였다. 충렬왕은 이 곳을 찾아와서 천하 명산이요, 동방 제일의 사찰이라며 감탄하였다고 전해진다. 신라와 고려에 걸쳐 보우국사 일연선사 천희국사 등 많은 고승들이 이 절에 머물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을 맞아 승병들이 구성해 위훈대공을 세웠다. 이에 현종 5년(1839년)에 서산, 사명, 기허 3대선사의 영정을 봉안한 표충서원을 사찰안에 두고 표충사라는 휘호를 하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천년의 고찰과 절은 없어지고 스님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임진왜란 후 사찰 복원을 위해 여러 고승들과 신도들의 노력으로 옛모습을 되찾았으나 화재 등으로 사찰 유지에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1926년 대웅전 의중당 서원 사당 등 일부가 다시 불탔다. 1928년에 대광전, 광복 후 서원, 명부전들이 각각 복원되었다. 주요 문화재로 청동함(국보 75호) 3층석탑(보물 467호) 등이 있다.
표충비 임진왜란 때 나라를 분연히 앞장섰던 승병대장 사명대사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선조대왕은 명을 내렸다.
『사명대사에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그곳에 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여 훗날까지 스님의 충혼을 모시도록 해라.』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 산강리에는 사당이 세워지고 스님의 영정이 봉안됐으며, 선조는 이 전각을 「표충사」라 사액했다.
『누구든 이 표충사 근처를 어지럽히거나 신성시 하지 않을시는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
친히 사액한 선조는 고을 원에게 이처럼 신신당부하여 사명 스님의 호국정신을 치하했다. 그로부터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설들까지도 그 사당 앞을 지날 때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올렸다.
그렇게 백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 스님의 5대 법손인 남봉선사는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때는 영조 14년, 1738년이었다. 표충비를 세울 돌을 고르기 위해 경상도 경산까지 가서 높이 3.9m, 폭 97cm, 두께 70cm 크기의 돌을 구해온 남봉 스님은 당시 정승 이익현에게 비문을 부탁했다.
『내 본시 승려의 부탁으로 글짓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나 오직 대사님의 사정이 간절하여 이를 물리치기 어려워 특례로 곧 비에 글월을 새기는 것입니다.』
배불숭유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했던 당시의 정승 역시 사명대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표충비가 세워지고 다시 백 년 후, 그러니까 조선 제24대 헌종 5년(1839),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월파선사는 표충사를 밀양 영정사로 옮기고 절 이름을「표충사」로 바꿨다. 표충서원을 옮겨 가자 사명 스님의 고향엔 표충비만 남게 됐다.
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지난 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이 비석은 현재 몸체에 금이 간 채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비석 몸체에 금이 간 것은 일제 때였다. 사명대사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일본 사람들은 잔꾀를 냈다.
『저 비석은 보기만 해도 왠지 섬뜩하단 말이야. 마치 사명대사 귀신이라도 담긴 것만 같으니 무슨 방법을 쓰는 것이 어떻겠소?』
『좋소. 나도 동감입니다. 저 비석 옆에다 담배 창고를 옮겨 짓도록 합시다.』
일본인들이 사명대사의 혈맥을 끊기 위해 비석 옆에다 창고를 세우던 날이었다. 비석은 마치 살아있는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한동안 못 견딜 정도로 몸부림치니 비석 몸체에 마치 피를 흘리는 듯한 형상으로 「쫙」금이 갔다. 일본 사람들이 표충비를 무서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용맹스런 승장의 비라는 점도 없지 않으나 마치 스님의 구국혼이 비석에 어린 듯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면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진 것이다.
예전 것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비석이 세워진 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땀을 흘렸다는 첫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 전으로 되어 있다. 비석이 있는 곳을 지나던 한 아낙은 매서운 겨울 날씨인데도 비석 몸체에서 땀이 흐르듯 물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낙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 역시 가만히 두고만 볼 일이 아니다 싶어 관가로 달려가 고했다. 당시 비석이 흘린 땀이 3말 1되나 된다고 한다. 그 뒤, 군지(郡誌)에 기록된 표충비의 땀 기록은 경술합방 , 기미독립만세운동 , 8·15 해방 , 6·25 동란, 4·19 학생의거, 5·16 혁명 등 여섯 차례이다.
그 중 가장 많은 땀을 흘린 것은 기미년 만세사건 때와 5·16 혁명 때로 기미독립운동 때는 19일간에 걸쳐 5말 7되를, 5·16 혁명 때는 5일간 5말 7되를 흘렸다. 군(郡)의 공식 기록은 없으나 육영수 여사가 입적한 다음 날도 비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듯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면 미리 땀을 흘려 어려움을 예고 해 주니, 마을 사람들은 비석의 영험을 받아들여 대소사에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6·25 동란 때는 전쟁이 일어나기 25일 전부터 3말 8되나 흘려 표충비가 땀을 흘린다는 소문이 동네에 나돌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아무래도 무슨 변이 있을 조짐인 듯 하다며 양식이며 비상약품 등을 준비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선 사명대사의 구국 충혼이 이 표충비에 서려 있다고 믿고 매년 관광철이면 이 비석을 보려고 1백 여 명의 관광객이 들르는데 주민들은 너나없이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강조하며 자랑스럽게 안내한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 주민들은 사명대사의 정신을 이어 대체로 정의감이 강하다는 소문이다. 비석이 땀을 흘릴 때는 사람이 땀 흘리는 형상과 똑같아서 앞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뺨으로 흘러내리는 듯 비석 전후면 머리 쪽에서 땀이 나와 비문 글귀 사이를 타고 흘러내린다고한다. 외지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기후·습도 운운하지만 여러 차례 땀 흘리는 광경을 목격한 주민들은 사명대사의 충혼이 서리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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