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않아 판잣집에서 도로 나온 그 애가 내게 검은 비닐봉투를 건네주었지. 얼떨결에 비닐봉투를 받아 쥔 나는 허둥지둥 그곳을 빠져나와 내달리기 시작했어.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 몰라. 어둡고 낯선 골목을 돌아돌아 집으로 왔겠지. 다만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 애가 쥐어준 비닐봉투를 꼭 쥐고 있었다고 기억해. 그 애가 준
봉투 안에는, 맥주병 십여 개를 들고 가야 얻을 수 있는 만큼의, 튀김과자가 들어
있었어. 튀김과자. 가위소리가 나면 모아놓은 공병을 들고 뛰어가 소금으로 한 그릇으로 바꾸자는 엄마와 고물상 아저씨를 졸라 한 바가지 겨우 얻곤 했던,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끼고 바라보면 세상을 얻은 듯 흐뭇해지던 튀김과자. 그 애는 고물상집셋째아이였어.
중학교를 그만 두고 리어카를 끄는 큰오빠와 세 살 난 막내를 업고 살림을 맡아하는 언니, 그 애 밑으로 어린 동생이 둘 더 있었지. 신발주머니 속에 든 것을 보아버렸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소주병 하나만 들고 가도 소쿠리 가득 담아주던 튀김과자 때문이었는지, 나는 한동안 그 애 집을 드나들었어. 그 애를 따라 쇳조각을
주우며 방과 후 시간을 보내기도 했던 것 같아. 방학을 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애와 멀어졌고, 지금까지 다시 만난 적도 소식을 들은 적도 없어.
고물상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주유소가 들어섰고, 나는 그 애를 까맣게 잊었어. 하지만 언제부턴가 질 나쁜 기름 냄새만 맡으면, 혼자 길거리를 배회하는 더러운 아이를 보면, 가끔씩 그 애가 생각나. 그 애의 신발주머니 속에 들었던 비루한 쇳조각들과 함께. 아, 그 애가 생각나기 시작한 건 우리 집 앞에 작은 고물상이 생긴 이후야.
그런데 그 애가 신발주머니에 넣었던 것이 한낱 쇳조각에 불과했었을까? 나는 그
애의 신발주머니 속을 보았던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못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빈집이라고 생각했어. 거의 허물어져가는 한옥 집에 누군가 살았다고 생각도 못했지. 나무대문에 묵직한 빗장이 질러져 있을 거라고 믿어버린 것은 그 집 옆 버려진
공터 때문이었는지 몰라. 동네 사람들이 몰래 버린 가구나 쓰레기들로 가득한 버려진 공간. 함부로 뒹구는 타이어 사이로 잡초가 소문처럼 무성하게 자라나기도
했지.
쓰레기로 가득 찬 그 공터에 담이 둘러지면서 공터와 낡은 집은 한 덩어리가 되었고, 도로변 문 앞에는 산청고물상이라는 간판까지 달렸어. 그리고 빈집인 줄 알았던 그 집에서 놀랍게도 노부부와 자식부부와 딸아이가 모습을 드러냈지. 마치 순식간에 공간이동을 하는 먼 외계의 사람들인 것처럼, 한 식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거야. 나는 때때로 고물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우리 집 옥상에 올라가 함부로 던져진 고물들과 고물상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바라보곤 해.
노부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파지나 플라스틱들을 모아와. 할아버지는 제법 많은 고물을 주워오기도 하지만 허리가 심하게 굽은 할머니는 영 시원치 않아. 자식부부는 하루종일 마당 한구석에서 고물들을 분류하고 자르고 떼어내고 옮겨. 남자는 파지 더미에 물을 뿌리거나 전기 절단기로 불꽃을 뿜으며 쇠판을 잘라내. 손수레에 담아온 신문지 무게를 달아 돈을 계산하는 것은 주로 여자가 하 는 일이야.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워 보이는 외모지만 노부부가 리어카를 끌고 대문을 들어서면 스프링처럼 튀어나가 그들을 맞아. 여자에게 리어카를
넘긴 할아버지는 추저울에 앉아 담배를 피우지. 할아버지의 리어카 소리를 잘도
구별해내는 일곱 살 난 여자애가 집에서 뛰어나와 할아버지 품에 안기는 순간도
바로 그때야.
집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유리창이 깨어지고 샤시가 찌그러지고 식기들이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 신경질적인 파열음과 머리를 쭈뼛 세우는 쇳소리들. 그것은 고물들이 집게차에 들려 트럭에 실리는 소리였어. 휑하기만 했던 고물상에 조금씩조금씩 물건이 쌓여갔고, 담을 훌쩍 뛰어넘어 길에 서서도 자전거 바퀴가 보이더니 지붕 위까지 고물들로 가득 찼던 참이었어. 한 켠에 모여 선 고물상집 식구들은 집게차의 커다란 집게를 따라 고개를 움직이고 있었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 꽉
들어찼던 고물상이 구석 장판더미를 제외하고 깨끗이 비워지기까지. 고물상 마당은 허망할 정도로 환했어. 딸아이는 고물을 싣고 떠나는 트럭을 향해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어. 트럭 안에는 바퀴 떨어진 롤러블레이드도 있고, 사골을 고다가 시커멓게 타 버린 곰솥도 들어 있었겠지. 할머니가 욕먹어가며 주워온 생활정보지 무더기와 할아버지가 팔뚝을 긁혀가며 뜯어온 창틀도 있을거야. 남자가 잘라낸 쇠파이프와 여자가 무게를 달았던 알루미늄캔도 있었겠지. 노부부와 자식부부는 휑한
마당을 서성이며 바닥에 흘려진 작은 쇳조각들을 정성스럽게 주워담았어. 쓸모 없이 버려진 작은 쇳조각들이 모여 고기를 굽는 석쇠로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놀이터의 미끄럼틀이 되기도 할까?
그 날 저녁 고물상 빈 마당 한가운데에는 벽돌 몇 개와 찌그러진 석쇠로 즉석에서
그릴이 만들어졌어. 번개탄이 피워지고 노부부와 자식부부와 어린 여자아이가 그곳에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 먹기 시작했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지글지글 기름 타는 냄새를 따라 아이의 노랫소리도 들리는 듯 했어. 고물상에 완전히 어둠이 내리고 밤이 이슥할 때까지 마당에 지펴진 불은 꺼지지 않았어. 첫 집차를 하고 난 그들의 얼굴은 불꽃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어둠 속에서도 분명 불그레 달아올라 있었어.
옥상에 서서 고물상에서 흘러나온 고기 굽는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던 나는 문득
향긋한 기름냄새에 아련해졌어. 그 어느 날 맡았던 기름냄새, 비닐봉투 한가득 든
튀김과자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켰을 때 실컷 맡아졌던 그 냄새가 포록포록 올라왔지. 나는 달콤한 꿈을 꾸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입맛을 다시고 말았지. 고물 속에서 꿈꾸는 사람, 그 매캐하면서 들큰한, 고난하면서 풋풋한 삶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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