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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자료 스크랩 한국 장로교회와 러시아 침례교회
김철훈 추천 0 조회 11 08.10.12 12: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 장로교회와 러시아 침례교회
    (러시아 선교사가 본 조국 교회)

나는 여러 교단을 섭렵할 기회를 얻었다.  나의 신앙 삶은 주정적(主情的) 성향이 강한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시작하여  20년 넘게 그 교회를 다니며 신앙심을 길렀다.  그러나 신학은 주지적(主知的)인 성향이 강한 장로 교단에서 배웠고 장로 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했다.  이런 섭렵 과정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곳 러시아에서 6년 넘게 선교사로 주재하며 나는 한국인 목사로써는 처음으로 러시아 복음주의 기독교 침례교단 소속 현지인 교회의 담임목사로 일할 기회를 가졌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장로 교회는 칼빈주의를 주장하며 러시아 침례교단은 인간의 의지(意志)를 강조하는 웨슬리안주의에 속한다.  그러므로 현지인을 위한 나의 목회는 한국 장로교 목사로서 한국 감리교 또는 침례교에서 담임 목사로 일한 것과 같았다.  한국에서 불가능한 일이 러시아에서 선교라는 이름으로 가능했다.  자연히 교리와 전통이 전혀 다른 러시아 교회에서 일한 것은 나에게 특이한 경험이었다.
내가 이렇게 교리와 전통이 다른 교단에서 협력 선교하고자 하는 이유가 있었다.  선교사가 개척한 현지 교회의 장래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교사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교회를 선교지에 개척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교학에서 외국인에 의한 선교는 죽고 현지인에 의한 목회는 살아야 한다고 흔히 말한다.  러시아인의 민족 정서를 무시하지 않는 교회를 개척할 때 이 목표가 가능할 것으로 나는 생각했다.  또한 지상의 모든 교회는 교단과 교파를 떠나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에 속한다는 원칙에 충실하게 선교하고 싶었다.
한편 이 특이한 경험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깨닫도록 해 주었다.  사람은 항상 고정 개념에 묶여 살기 마련이다.  그것을 깨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나의 선교 즉 나의 목회 환경의 변화는 나에게 그런 고정 개념을 깨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장로교에서 신학을 배운 나는 오로지 칼빈주의에 입각하여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했다.  그러나 침례교회에서는 같은 성구를 달리 해석함을 알았다.  이것은 동일한 성구를 새롭게 보도록 도왔다.  그리고 왜 그들이 그렇게 해석하는가 하는 이유를 알았을 때 다른 쪽의 세계를 알게 되며 내가 사는 세계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조국에만 머물러 사는 사람은 자신의 조국이 어떤 나라인지 잘 이해할 수 없다.  여행이나 체재을 통해 다른 나라를 자세히 접할 때 비교와 대조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조국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원리대로 하늘 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 정의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잘 아는 신자만이 세상 나라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고 그 결과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살 수 있다.  이 때문에 칼빈주의에서 하나님 지식은 곧 인간 지식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 사랑은 곧 인간 사랑이라고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될 때 그 만큼 더 잘 인간을 이해하게 되며 사랑하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을 부정한다면 인간을 정확히 알 방법을 상실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비교의 대상을 통해서 더 바른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이에 바탕하여 더 정확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
마찬 가지로 러시아 침례교회에서의 사역은 장로교를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제공했다.  이 경험을 사례별로 쓰고자 한다.

한국 장로교회와 러시아 침례교회
러시아 침례교회는 독일의 침례교의 영향을 처음부터 받았다.  한국 개신교의 도입과 비슷한 시기인 19세기 말 러시아 정교회의 형식적인 예배에 싫증을 느낀 한 러시아인이 혼자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중 리투아니아 출신 독일인 목사의 도움으로 공부한 후 침례를 받았다.  그는 러시아 최초의 침례 교인이 되었다. 
독일 침례교는 재세례파에서 기원한다.  재세례파에서 전통적으로 허락된 카도릭 교회의 유아 세례는 인정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신앙을 고백한 성인에게만 침례를 허락한다.  그리고 재세례파는 목회자와 신자사이 평등권이 강조되는 회중 교회에 속한다.  국가의 교회 간섭을 반대한다.  독일 침례교회의 이런 전통이 러시아 침례교회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장로 교회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존 녹스'에 의해 세워졌고 유아 세례가 인정되며 반드시 침례를 행하지 않고 장로에 의한 공화정치 제도를 취한다.
이 둘 사이 역사상으로 화해가 거의 불가능한 사건이 있었다.  개혁가들은 재세례파가 주장하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인들은 순례자들이며 그리고 교회는 영구적인 나그네들의 모임이라고 주장하고 교회와 사회의 분리를 주장했고 그리고 신앙만 아닌 윤리적 삶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개혁가들은 제네바의 경우처럼 교회와 사회는 분리하여 존재하지만 기독교적 가치관을 사회에 심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신칭의를 외쳤으므로 윤리를 주장하는 재세례파 교인들을 위험한 집단으로 간주하고 사회와 교회에서 축출하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개혁 교회들도 카도릭 교회와 연합해 과격한 재세례파들을 25년간 박해하며 수천명을 살해했다고 한다.  한국 침례교회의 목회자에게서 이 불행한 사건에 대해 들었을 때 나는 몹시 놀랬다.  그 목회자는 이 때 종교 개혁가들이 카도릭 교회보다도 더 많은 침례 교도들을 죽였다고 말했다.  이렇게 이들 침례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카도릭 교회보다 개혁주의 교회가 더 형제적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 당시 역사적인 상황에서 이 사건은 불가피했을지 모르나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개혁주의 교회도 카도릭 교회처럼 큰 죄를 범했다.  최근 교황이 과거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했다.  비록 회개가 제도적 개혁의 뒷받침을 받지 못해 공허한 것으로 끝나겠지만 개혁 교회도 과거 잘못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설사 이단이라해도 종교 재판식으로 함부로 교인들을 다치게 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무지(無知)했던 덕분에 장로교 목사로서 나는 러시아 침례교단과 협력 선교를 대담하게 시도했다.  그러나 나중 이 불행한 사건을 안 후 그들이 알미니안이라거나 웨슬리안이라는 사실만으로 그들을 배격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이들 침례 교회들은 아직도 개혁주의 신학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헨리 미터'가 쓴 '칼빈주의'라는 책에서 저자는 개혁 교회 입장에서 여전히 이들을 비판했다.  이 책을 읽은 러시아 침례교 지도자가 격분하는 것을 보았다.  이 때 깨달은 사실은 교단 지도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이단(異端)과 사이비(似而非)를 가르는 중요한 교리(敎理) 문제가 아니라면 다른 교단을 함부로 비판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헨리 미터'는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유명한지 모르나 바울처럼 선교사는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가장 개혁적임을 보이려고 논리적으로 교리를 주장하는 교회들과 교단이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를 종종 훼손시킨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옳고 정당한 교리를 주장하면서도 이견이 있을 때는 비판에 앞서 상대편에 서도록 노력했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함이었다(고전9:19절 이하).  선교사 바울은 광대한 지역을 선교 여행한 사도로서 지역마다 같은 신앙도 달리 표현됨을 보았다.  그러므로 자신과 다른 것을 배격한다면 보편 교회가 깨질 것을 그는 알았다.
예전 '존 스타트'목사가 내가 사는 '노보시비르스크'시를 방문하여 세미나를 인도한 적이 있었다.  이 때 다른 전통과 교리 문제에 관해 질문이 나왔을 때 그는 신앙의 내용이 나라마다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면서 다른 전통과 교리에 대해 평하는 일에 조심하여야 한다는 대답을 주었다.  이 점에서 '헨리 미터'는 미국에 머물면서 개혁 교회을 기준으로 다른 교회를 쉽게 비판하는 잘못을 범해 보편 교회를 나누는 잘못을 범했다.
선교사 훈련을 받으면서 강의하는 선교사들이 한결같이 교리보다도 교회 개척에 더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본인도 선교지에서 그렇게 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본적으로 선교사는 특정 교단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선교지에 파송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교사는 피선교지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도록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여야 한다.  그렇게 선교사는 보편 교회를 세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점에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목회적 관점이 아닌 선교적 관점에서 바울 서신들을 비롯한 다른 성경들을 연구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사도 바울은 신학자와 목회자였지만 선교사로 사역을 하며 일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그는 특정 지역이나 나라에 맞는 교회가 아닌 만민에게 맞는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서신들을 썼다.
더구나 우리는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다.  금세기는 인터넷을 통한 정보 혁명으로 세계화가 더욱 가속화되며 지구는 하나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목회적 관점은 목사로 하여금 지교회의 성장이라는 좁은 목표에 항상 머물게 만든다.  설사 목표를 높히 정해 사회나 민족 복음화로 정해도 목회자는 여전히 정신적으로 지교회의 성장이라는 좁은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선교적인 관점은 교파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를 세우는 보다 넓고 높은 목표를 지향하도록 돕는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를 이 땅에 세운다는 목표아래 지교회의 목회를 생각하게 돕는다.  그러므로 선교 마인드로 신구약을 다시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만민을 대상으로 항상 일하시기 때문이다.
장로 교회의 대표는 아니지만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도록 겸손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먼저 찾아가 협력 선교를 요청했지만 이를 허락한 러시아 침례교회가 개혁 교단보다도 더 통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노회장인 '겐리흐 에두아르드'목사는 영국과 미국에서 각성 운동을 위해 함께 일하다가 나중 격렬한 교리 논쟁 후 헤어진 칼빈주의자 '죠지 휘트필드'와 수정된 알미니안 추종자인 '죤 웨슬레'의 이야기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핏속까지 칼빈주의가 흐르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교단 목사 회원으로 받아주었다.  물론 조건은 자신들의 전통과 교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 나는 그가 이미 한국 장로교 선교사와 협력한 사실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양측의 주장은 달랐다.  그는 한국 장로교 선교사의 성격때문에 협력 선교가 깨어졌다고 말했고 한국 장로교 선교사는 침례 교회가 칼빈주의를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라 말했다.  여기서도 칼빈주의자가 속 좁은 인간으로 보여졌다.  그들은 보편 교회를 세우기 위해 교리적 위험을 감수하며 한국 선교사의 협력 선교 제의에 호의적으로 응했다.  물론 그들에게는 외국 교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렇지만 칼빈주의자들은 진실로 속이 좁은 신자인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겐리흐 에두아르드'목사는 자신들이 칼빈주의자도 그리고 알미니안주의자도 아니라고 자주 말한다.  그 중간에 자신들이 위치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를 함께 주장하고 싶다는 것을 뜻한다.  이로 보아 이들은 칼빈주의자들이 지나치게 하나님의 은총을 주장하므로 구원에 있어 인간의 노력을 경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이들은 인간의 의지를 지나치게 주장하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무시하고 싶지도 않는다. 
그러나 목회자에 따라 알미니안에 가깝게 인간 의지를 주장하는 경우를 나는 보았다.  이 때마다 이들이 해당 성구들을 문맥에 따라 온당하게 취급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마11:28절)이 보편 구원과 구원에 있어 인간 의지를 강조하는 근거 구절 중 하나로 이들은 말한다.  그러나 문맥에 의하면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받았으나 현재 고난을 당한 자들에 대한 초청(25-27절)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을 통한 초청은 보편적이어야 하므로 이들의 주장 틀렸다고 칼빈주의자가 말한다면 좁은 속마음을 보인 것이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 중에 택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학을 배운 목회자들도 문맥을 무시하고 자기 주장을 위해 성구를 인용하기는 마찬 가지다.
이렇게 교리와 전통이 다른 교회에서 사역하며 평상시 칼빈주의 관점에서 당연하게 이해하던 성구들을 그들의 관점에서 다시 재해석해 보는 재미있는 연구를 자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칼빈주의자인 '나' 자신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교단에서 일할 때 얻는 특별한 경험이며 특권이다.

교회 조직
러시아 침례교회는 회중 교회이다.  한국 침례교회도 초기 이런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신학을 졸업한 신자만 목회자가 된다.  아직도 러시아에서는 목사나 장로가 성경을 잘 알고 잘 가르치는 경건한 형제들 중 선출된다.  이들 교회는 안수 집사와 장로라는 이직분 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며 장로 중 선임 장로가 담임 목사가 된다.  이들 모두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먼저 '형제들 모임'(남성도들 중 세례자들의 모임: 한국 교회의 제직회와 다르다)에서 추천되고 그리고 '세례 교인들의 모임'(한국으로 하면 공동의회)에서 동의를 얻어 신자들 중 안수 집사와 장로로 세운다.  이렇게 지교회에서 안수 집사와 장로 그리고 담임 목사를 자체적으로 선출하고 노회에서 사후 승인된다.
설교자들은 신학에 대해 대체로 무지(無知)하다.  한 때 이들은 신학은 인간 학문으로 취급하며 무시했다.  그러나 성경은 반드시 해석되어져야 하며 그 결과 교회 안에서 신자들에 의해 공인되는 교리가 세워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신학이 세워지는 과정이다.  이들은 아직도 이런 과정으로 성경을 함께 연구한다.  성경을 비교적 잘 아는 남자 신자들이 순번에 의해 강대상에서 말씀을 전한다.  교리나 중요한 전통도 형제 모임에서 해당 성구들을 함께 연구하며 결정한다.  그렇게 목사나 장로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식으로 교리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이들은 다만 자신의 경험을 들어 형제들이 알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므로 형제들로 하여금 이를 수용하여 해결하도록 돕는다.  이렇게 침례교회는 아주 민주적인 교회이다. 
이 때문에 세례 받은 후 1-2년 지나면 강대상에서 설교할 수 있고 성경 공부에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담임 목사도 자신의 생업을 갖고 정해진 순번대로 강대상에서 말씀을 전하며 형제 모임에 함께 참여하여 교회 일을 살핀다.  어찌 보면 담임목사는 유대인 회당의 회당장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장로교에서 온 목사라고 특별한 존재로 취급되지 않는다.  한 형제 그리고 같은 동료일 뿐이다.  한국 교회의 목회자였던 나는 한 동안 심리적 갈등을 느꼈다.  이제 믿은지 얼마 안되는 젊은 형제들이 겁없이(?) 자신의 교회 담임목사인 나를 아주 쉽게 대했기 때문이다.
같은 교리 문제를 해결할 때 교회마다 성경 해석의 차이로 인해 다른 내용의 교리가 정해질 수 있다.  물론 나중 장로들과 안수 집사들의 모임에서 이를 다시 조정하여 통일된 교리를 내놓을 수 있다.  이렇게 침례교회는 지교회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한다.  옛날 정부가 감독 기관으로 교회를 간섭하던 전례에 대한 거부감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이 결과 중앙에서 일괄되게 정한 교리집이 이들에게 없다.  불문율같은 전통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같은 내용의 신앙 문제가 반복적으로 제기되며 의논되는 경우도 자주 보았다.  그 때마다 이들은 새롭게 지교회의 형제 모임에서 의논하며 해결하곤 했다.  자연히 지교회의 형편에 따라 같은 문제도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침례교회에서 통일성이 결여될 수 있다.
신자도 강대상에서 설교를 할 수 있으므로 아직 부족한 성경 지식으로 말씀을 잘못 해석할 수 있고 그리고 겸손을 상실한 신자의 경우 주관적인 해석을 고집할 수 있다.  세례를 받고 난 후 강대상에서 설교하는 것이 영적 성장의 징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무리하게 설교하려고 대드는 경우도 발생한다.  세례 받은 후 1년 지난 새파란 청년이 설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강대상에 고정적으로 서게 되면 이 청년은 장로의 치리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곳 지도자들에게 청년들을 좋은 일군으로 기르고 싶다면 너무 서둘러 강대상에 세우지 말고 대신 주일학교 선생으로 일하도록 하라고 개인적으로 충고한다.  너도 나도 강대상에서 장년을 상대로 설교하려고 하기 때문에 주일학교에 여자들만 교사로 일하는 기이한 현상이 보여지고 있다.
신학을 배우지 않은 이들의 설교는 상식 수준을 넘을 수 없고 자연적으로 구원에 관한 설교가 많고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이들은 동의어 사전의 도움으로 제목 또는 주제 설교를 주로 한다.  본인의 입장에서 볼 때 신선한 설교를 듣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러시아 교인들은 반복되는 설교도 묵묵히 잘 듣고 호응한다.  이 때문에 러시아 침례 교회에서는 강해 설교를 들을 수 없고 구약보다도 신약이 주로 설교된다.  이제 곧 신학교가 개교되므로 향후 이런 사정도 많이 개선될 것으로 본다.
한국 장로교의 정치는 선출된 장로들에 의해 공화 정치이다.  그러므로 공화정은 목사 장로와 다른 장로 사이 평등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장로 교회는 목사, 장로 그리고 안수 집사라는 삼직분을 주장하며 목사 장로를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생각한다.  흔히 장로교에서 목사는 당회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목사는 당회라는 비상설 기구의 모임이 있을 때만 당회장으로 당회의 사회자와 인도자에 지나지 않는다.  당회 이외 다른 때는 목사나 장로 모두 동일한 권한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 당회장은 마치 상설기구의 의장같은 권위를 갖는다.  거기에 유교의 가부장적인 권위가 더해져서 모든 장로들은 목사 장로의 권위아래 절대 순종하여야 한다.  교회의 모든 행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하므로 가르치는 장로가 다른 장로들 보다 권위를 갖게 됨은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지체론에 의하면 모든 지체는 다 중요하며 동등하다.  그러므로 목사 장로와 다른 장로사이 권한 상의 차이를 두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이 말은 공화정이 의미하는 대로 당회에서만 의장으로 권위를 행사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장로들과 함께 동일한 권한을 가져야 함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의 장로교회는 일인 목사에게 모든 권한을 집중시키는 감독 교회의 모습을 보이며 공화정의 성격을 갖는 장로 교회의 본래 정치 제도에서 많이 이탈했다.  목사는 다른 장로와 함께 교회의 동일한 지체로 다만 목회의 전문가로 교회에 남아 일할 뿐이다.  전문가라고 다른 장로들의 의견과 생각을 무시하며 단독으로 일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그도 교인에 의해 신자들을 대신하여 일해 달라고 선출된 장로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위임 목사를 비롯한 모든 장로들은 일정 기간 지나면 재신임을 교인에게서 받아야 한다.
목사의 권위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에서 가장 잘 들어난다.  그러므로 유교적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설교 강대상을 다른 동역자들에게 개방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만 지교회의 최고의 존재로 군림하려고 한다.  자연히 자신의 선포와 다른 말씀 해석을 싫어한다.  그 결과 혼자서 일주일에 10번 이상 설교를 한다.  결국 설교의 내용에서 다양성을 볼 수 없고 내용의 부실화를 초래시킬 수 있으며 그 결과 신자들은 항상 한 음식만 섭취하는 결과 영적으로 영양 결핍증에 걸릴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을 세워주는 부흥사를 좋아한다.  물론 이는 성경적으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권위의식에 빠진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보편 교회의 신자나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성숙한 제자로 세우기보다도 자신에게 충성하는 신자로 만들려 한다.  이렇게 한국 교회에서 장로교회의 대의 정치(代議 政治)는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  러시아 침례교회의 민주적인 교회 정치를 보면서 본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훨씬 깊이 깨달았다.
러시아 침례교회의 민주적 성격은 교회 행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들은 비록 조직적으로 일을 진행시키지 못하지만 모든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한국 장로 교회의 행사는 조직적이지만 교인들의 자발성이 희생당하는 경우가 있다.  목사 일인의 계획이 아닌 모든 장로들의 의견을 모아 함께 교회의 행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하는 민주적인 절차가 요한다.  다시 말해 신자들의 능력을 믿고 맡기는 자세가 목회자에게 요구된다.  이제 신자들 중 각 분야의 전문가가 많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제 목회자 혼자 팔방미인이어야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한국 교회에서도 권력의 분산을 위한 구조조정이 요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진정한 머리이며 그 외 지체들은 동등하다는 원리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보이는 교회의 질서를 위해 직분자를 세웠다는 원리를 잘 조화시킨 장로교회의 대의 정치(代議 政治)의 본래 의미를 한국 교회가 되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최고의 통치자에게만 특권을 주는 유교적인 사고는 구시대의 유물이며 그런 교회는 다양성을 상실하며 서서히 탄력을 잃어간다.  성경에서 말하는 권리와 권한은 철저한 자기 부정과 희생에 바탕한 봉사와 헌신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한국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예배 형태상의 차이
우선 이들의 예배 시간이 두 시간이라는 사실에 진한 감동을 받는다.  이 동안 설교가 3번 그리고 성가대 찬양도 3번 이상 있다.  주일 두 번 그리고 주중 한번 내지 두번 그렇게 회집한다.  그 결과 한 예배에서 다양한 주제의 설교를 듣거나 한 주제에 대한 설교를 다양하게 들을 수 있다.  공산주의 시절 핍박 때문에 이들은 몰래 집회를 열어야 했고 모인 김에 참석한 교인들은 충분히 말씀을 들어야 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했다.  물론 신학이 없었던 이들에게 설교상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에게는 지루할 수 있다.
내가 받은 또 다른 감동은 교인들이 설교의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교인들은 설교자의 설교 능력을 평가하는 언급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 결과 담임 목사나 형제 설교자 사이 어떤 긴장감이나 우열감도 없다.  담임 목사도 설교자로서 이를 의식하지 않고 설교에 임한다. 
그러나 한국 장로 교회에서 담임 목사의 설교만 듣는데 익숙한 나에게 이것은 하나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러시아 침례 교회의 예배와 설교에는 나름의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에서 한 예배 시간에 담임 목사님과 다른 목사님의 설교가 함께 할 수 있다는 상상은 불가능할 것이다.  교인들이 비교하며 말이 많고 우열에 대해 담임 목사가 지나치게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인들에게 다양한 영적 양식을 먹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한국 교회에서 주일만큼은 시도해 봄직하다.  그리고 한국 교회 교인들은 주일에도 너무나 바쁘다.  주일만큼은 말씀을 충분히 듣고 묵상하며 진리에 감추인 은총을 맛보며 힘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일 교회 행사가 너무나 많아 교인들은 일주일 내내 바쁘다.  이는 장기적으로 영적 쇠퇴(衰頹)를 가져다 줄 수 있다.  말씀을 충분히 들으며 영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쉬도록 해 주어야 한다.
러시아 침례 교인들은 예전 한국 장로교 교인들처럼 경건한 예배를 좋아한다.  그 결과 은사주의에 속하는 교회의 예배 방식에 이들은 참지 못한다.  그 결과 이들은 오순절 계통의 교회를 극단적으로 사이비처럼 생각한다.  아프리카에서 주로 활동한 독일인 부흥사  '라인하르트 본케'가 이곳에서 집회를 열 것이라고 알려졌을 때 이들 지도자들은 이 집회를 막기 위해 침례교 교인들이 금식해야 한다고 결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도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 교인들이 더 많이 회집한다.  신비주의적이며 심리적인 방법도 러시아인들의 정서에 맞는다는 증거이다.  이곳 오순절 계통 교회의 예배 방식은 한국 오순절 교회보다도 더 열기에 들떠 있었다.  이렇게 러시아 교인들도 예배 방식에 있어 극과 극으로 갈라져 있다.  이들의 극단적인 심리가 반영된 결과가 아닌지 생각된다.
이들은 기도할 때 서거나 무릎을 꿇는다.  앉아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불경건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항상 내게 깊은 감동을 준다.  이들은 경외감으로 하나님을 대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에 따라 성경을 읽을 때 일어서야 한다.  앉아서 다리를 겹쳐 놓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은 이곳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서구 교회나 그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는 예수님을 마치 친한 친구처럼 생각한다.  그 결과 스스럼없는 자세로 예배에 임한다. 
이들이 우리와 달리 기도를 마칠 때 성삼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흥미있다.  예컨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물론 이 이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한다는 내용의 기도가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이들은 성자보다도 삼위에게 더 관심을 두려고 한다.  한국과 서구의 개신교 교회에서 모든 일에 예수님에게만 관심을 두는 경향과 비교하면 상당히 독특하다.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이 그대로 전이(轉移)된 것으로 생각된다.  분명한 사실은 이들 러시아인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엄위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경건해야 한다.  러시아인은 서구인이지만 사고는 이렇게 동양적인 면을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예배는 아주 자연스런 면이 있다.
러시아인은 방송 마이크나 텔레비죤 카메라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조금 긴장하는 것뿐이지 한국인들처럼 겁을 먹지 않는다.  본래 수줍음을 많이 타는 나는 이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러시아 교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들은 자신의 장기가 시원치 않아도 그럴싸하게 연출한다.  이렇게 이들은 멍석을 스스로 깔고 연출한다.  그리고 러시아 청중들은 연기의 완벽성보다도 연기 자체를 즐긴다.  그러므로 연기 중 실수가 있어도 이들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인은 연기를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긴장감과 초조감때문에 무대에 나서기를 두려워한다.  그 결과 우리는 멍석을 깔아놓아도 연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두 국민의 이런 기질들은 예배에 그대로 반영된다.  러시아 침례교회의 예배 인도자는 문자 그대로 사회자에 지나지 않는다.  연출은 교인들의 몫이다.  설교도 평신도들이 순번을 정해 담당하며 성도들은 자원해서 특송을 올리거나 성시를 낭독한다.  자연히 예배 프로그램을 사전에 완벽하게 짜는 법이 없다.  예배 중 성도 스스로 자원해서 메모를 올리면 사회자는 시간을 택해 그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한다.  성가대도 자원하는 성도들이 모여 연습을 하고 예배 중 찬양한다.  성도들은 은혜를 받은대로 설교가 끝나면 자원해서 기도한다.  예배 중 어떤 긴장감도 느낄 수 없다.  실수를 한다면 그래도 최선을 다 한 것으로 여겨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움 그대로이다.  여름에는 예배 시간 새들이 날아디나며 그리고 고양이가 강대상을 지나간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예배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전에 짜여진 계획에 의해 빈틈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 전 모든 것을 재확인해야 하며 예배 인도자는 영적 권위를 갖고 장엄스럽게 그리고 거룩하게 예배를 인도해야 한다.  기도자를 미리 정했지만 예배에 출석하지 않는 경우도 생긴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음으로 예배 참여자들은 긴장감으로 예배에 임한다.
러시아 교회에서는 자유스러운 참여 방식에 좀 더 조직적인 성격을 가미시켜야 할 것이며 한국 교회에서는 일인 목회자가 아닌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예배 방식이 요한다.  그러나 이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국민 정서와 관계되며 이 정서는 하루 아침에 바꾸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교인들도 이미 기독교 문화에 젖어 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예배를 유도하도록 목회자는 노력하여야 한다.
반면 러시아 침례교회에서 여성도들의 권리가 지나치게 제한되어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대로 러시아 침례교회에서는 여자들에게 강대상에 서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 점에서 많이 느슨해졌다.  일부 교단은 여자에게도 목사 안수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교회가이 문제에 보다 더 예민한 것은 러시아 여인들의 성격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 일 것이다.  러시아 여인치고 말 못하는 여성은 없다.  그러므로 기회만 주어진다면 남성 영역을 넘어 쉽게 행동할 것을 러시아 교회 지도자들은 잘 안다.
자연히 러시아 교회에서도 여성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지만 여성을 위한 신앙 교육은 별로 없고 남성도와 함께 참여하는 일반적 신앙 프로그램만 있다.  그러나 남성을 가르치는 일을 제외하고 얼마든지 여성 지도자가 여성들을 위해 일하도록 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회에서 질서를 존중하는 한 여성도들도 얼마든지 자신들을 위해 교회에서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되어야 한다.
우리가 알듯이 창세기 1장은 남녀사이 근본적인 평등을 그리고 창세기 2장은 그들 사이 질서상 종속을 기록한다.  이 두 가지는 어느 하나 무시되어선 안된다.  오늘날 군대는 옛날과 달리 재래식 무기가 아닌 전자식 무기로 무장된다.  전자식 전쟁에서는 여성이 더 적합할 수 있다.  싸우는 일 이외 행정적인 일도 얼마든지 군에 있다.  그러므로 여성이 군대에 가지 못한다는 사고는 이미 구태의연한 사고이다.  직업이 세분화된 오늘날 전문 지식과 전문 기술이 요하는 분야에서 여성의 인력도 남성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남자를 주관하는 일이 아니라면 남성의 경우처럼 여성에게도 모든 권리가 차별없이 허락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사회도 성경에서 말하는 남녀 사이 평등를 점점 더 실현시켜 주는 방향으로 계속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 때 교회가 계속 보수적으로 남는다면 여성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지장을 받을 것이다.
러시아 침례교회에서 여자 성도들은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  이들은 이것이 특정 시대의 문화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로부터 지켜야 할 교회 전통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여자가 수건을 쓰는 것은 이들에게 남자에 대한 순종을 상징한다.  이렇게 이들은 남녀 사이 질서상 종속 관계를 평등보다도 비교적 더 강조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 전통을 사수(死守)하려 한다.
그렇다면 우리들 외국인들이 이들의 전통이 후진적이라고 비웃을 수 있는가?  안된다.그들이 신앙 면에서 이 전통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여 우리도 그들의 전통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문화의 문제로 생각하는 교단이나 교회에서 파송을 받은 외국 선교사들은 이를 쉽게 비웃고 침례교 지도자들을 오히려 설득하려고 한다.  이 때문에 러시아 교회 지도자들은 노하여 외국 선교사와의 협력 선교를 거절하곤 했다. 
이는 선교사의 잘못이다.  최초의 선교사인 사도 바울은 그렇게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앙이 어린 자를 비웃지 않고 오히려 그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쁘게 포기하였다.  이런 마음의 여유가 칼빈주의자에게 부족함을 나는 종종 느낀다.  이렇게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문제로 삼아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를 불필요하게 분열시킬 수 있다.  이런 문제의 해결에는 선교 마인드가 필요하다.
한국 교회에서는 여성도들이 지나치게 화장하고 몸치장을 한다.  주일 예배에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참석해야 한다는 목사의 권면은 주일 교회에서 패션 쇼를 방불하게 하는 광경을 연출시켰다.  이는 다소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신앙을 외적인 면보다도 내적인 면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경건은 반드시 외적 경건으로 표현된다.  이 점에서 화장이나 장식을 하지 않는 러시아 침례교회의 여성도에게서 한국 여성도는 배울 바가 있다.  그러나 러시아 성도들도 수건 대신 아름다운 스카프를 사용하여 여성미를 살리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금 여성도들은 가볍게 화장한다.  아무리 교회 규례가 엄격해도 인간이 가진 본성을 억누를 수는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도 인간의 이런 성향을 인정하셨다.  그 결과 기독교 신앙도 역사적으로 해당 시대의 문화적인 옷을 입고 나타났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첩을 두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지금도 축첩(蓄妾)을 문화적으로 허용하는 나라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아프리카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의 고민거리 중 하나는 남자가 개종하였을 때 회회교의 문화와 전통에 따라 몇 명의 부인들을 두고 그 자녀들을 돌보는 그에게 첩들과 그들에게서 난 자녀들을 버리고 본처와 그의 자녀들과 살라고 현실적으로 권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첩들과 그 자녀들은 거리로 나가야 하며 첩들은 생계를 위해 결국 창녀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신학생에게도 여러 명의 처들이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신앙과 윤리가 분리되면 안되지만 인간이 만든 잘못된 문화때문에 신앙인의 윤리가 때로 불완전하게 표현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문화나 윤리라는 기준으로 사람들을 판단한다면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를 분열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나 선교사는 시대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문화적 또는 윤리적 판단만으로 교회와 교인들을 섬길 수 없다.
이렇게 교리가 아닌 문화와 전통상의 차이로 다른 교회나 교단을 비난하는 일을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교리의 차이도 특정한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상황과 관계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선교사와 목회자는 이런 것들을 초월하고 개교회적, 교권주의적 또는 국수주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교회를 이 땅에 세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례상의 차이
장로교는 구약 시대의 할례 대신 유아 세례를 배풀며 그리고 침례가 아닌 약식 세례를 시행한다.  세례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세례식은 내적 중생의 외적 표현으로 '보이는 교회'의 회원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로교는 세례의 내적 요소를 더 중요하게 보기 때문에 침례보다도 약식 세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장로 교회에서 믿는 자는 누구나 세례를 받기 때문에 쉽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개교회주의 의식이 강해지면서 복잡한 침례보다는 약식의 물세례를 더 선호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세례는 성찬식과 아울러 개신교 교회의 중요한 성례이다.  그렇지만 생각보다도 성례식의 의미가 개혁주의 교회인 장로 교회에서 약화되었다.  한 달에 한번 거행되는 러시아 교회와 달리 한국 교회에서 세례나 성찬은 일년 한번 행사처럼 거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식 세례식이므로 세례받는 자들도 그렇게 큰 감명을 받지 못한다.  또한 세례식은 예배 절차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러시아 침례교회에서는 유아 세례가 인정되지 않고 자의식으로 신앙고백이 가능한 15세 이후 세례를 받을 수 있고 반드시 세례는 침례에 의한다.  침례식은 강이나 수영장에서 거행된다.  자연히 개교회가 자주 세례식을 거행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교단의 시찰회 위주로 합동 세례식이 일년에 한번 거행된다.  이 행사는 교회의 큰 절기와 같다.  각 교회들이 이 일에 심혈을 기우리며 거의 하루 종일 진행된다.  연합적으로 목사님들이 침례식을 거행하므로 반드시 자신의 교회 초신자들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보장은 없다.
침례 후 교회에서 다시 예배를 드린 후 목사님들은 다시 수세자들에게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안수례를 행한다.  신자들 사이 평등성을 주장하는 회중 교회다운 모습이 여기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수세자들은 어떤 감격이 있다.  침례하고 물에서 나오는 것 자체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함께 부활하는 그런 놀라운 체험을 갖게 하며 안수례와 꽃다발 증정과 책 선물은 세례 교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자긍심을 갖게 한다.
세례식 모습은 한국 교회와 러시아 침례 교회사이 차이를 보여 준다.  러시아 침례교회의 침례식은 연합을 고려하지만 한국 교회의 세례식은 개교회와 담임 목사님의 권위를 고려한다.  다시 말해 한국 교회의 세례식은 특정한 지교회의 교인이 되었다는 의미가 은근히 강조된다.  그러나 침례교회의 침례식은 침례 교인이 되었다는 연합적인 의식이 깔린다.  이렇게 이들은 장로교회와는 달리 세례의 내외적 의미를 모두 강조한다.  한국 장로교회들이 무엇을 보완하여야 할 것인가가 여기 발견된다.
장로교는 세례 후 성화를 강조하지만 러시아 침례교는 세례 전 성화를 말한다.  다시 말해 장로교는 영적 중생만을 강조하고 세례를 허한다.  그러나 침례교에서는 세례를 받기 위해 수세자들은 영적 중생만 아닌 자신의 영적 성장을 미리 보여 주어야 한다.  이를 알기 위해 목회자들은 수세자를 심방하여 가족들에게 세례받은 신자의 신앙 에 대한 간증을 듣는다.  그리고 공동 의회에서 수세자들의 신앙 삶에 대한 증언이 확실해야 세례가 허락된다.  목회자가 일방적으로 수세자들을 정하지 못한다.  자연히 침례교회에서는 세례 전 학습에 힘쓰고 수세 후 제자 훈련같은 프로그램이 없다.  그러므로 비교적 쉽게 세례를 받는 장로 교회와는 달리 침례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전통적으로 세례 후 교인들을 위한 양육이나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공산주의 시절 일일이 신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는 마태복음 29장 19절의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본동사가 노어로 '가서 가르치라'는 의미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먼저 가르치고 그 다음 세례를 주는 식의 초신자 양육이 지금까지 지켜졌다.  그러나 성경 원문에서 먼저 세례를 주고 나중 가르침으로 만민을 제자로 삼으라는 뜻이 된다.  역본(譯本) 상의 차이가 또한 각 나라 교회사이 전통상 차이를 가져옴을 우리는 본다.
러시아 침례 교회는 유아 세례를 부인하는 대신 유아축복 기도가 있다.  신앙인 부모가 2살 이하의 어린 아이를 위해 축복해 줄 것을 요구하면 예배 중 목사님은 기도해 준다.  그러나 장로 교회에서는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만 대신 15세 이후 분명한 신앙 고백을 하여야만 유아 세례는 교회에서 법적으로 유효하다.  그러므로 유아 세례자는 더더욱 세례를 받는 감격을 맛볼 수 없다.  신앙고백에 의해 유아 세례의 법적 효력이 확인될 뿐이기 때문이다.
성찬식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예수님의 마지막 성찬식처럼 이들은 한 개의 빵과 포도주 한 잔을 들고 기도한 후 현장에서 분병하고 분잔한다.  그렇게 성찬식중 구속을 위해 예수님의 몸이 쪼개지고 보혈이 흘려졌음을 성도들은 눈으로 본다.  그리고 한 개의 떡과 한 잔의 포도주는 교회가 그리스도안에 하나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갖는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 이미 분병되고 분잔된 상태에서 성도들은 성찬식에 동참한다.  그렇게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라는 느낌보다도 개체가 더 중요하다는 느낌을 무의식적으로 받을 수 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성찬의 신학적인 의미만을 강조하여 형식을 소홀히 했다는 인상을 준다.  그 결과 성찬은 눈으로 보는 설교라는 의미가 약화되었다.  한편 성찬식에 참여하는 교인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그런 편리성을 추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실용성과 편리성을 위해 세례의 경우처럼 성찬식도 형식화되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러시아 침례교회에서는 천명이 넘는 교회도 전통적인 방법을 그대로 고수한다.  담임 목사가 축사하는 동안 장로들도 떡이나 잔을 들고 참여한다.  그리고 분병하고 분잔한다.  불편한 전통적인 방법이라도 편리성을 위해 버리지 않겠다는 우직함이 그들에게 있다.  이는 그리스도안에 같은 형제인 러시아 교회가 한국 교회에게 주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이렇게 결국 같은 내용이지만 나라와 교단에 따라 전통 상 차이를 보인다.  이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 교회의 제도와 규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앙과 전통이 다르다고 교회끼리 그리고 교인끼리 서로를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온당치 못하다.

믿음과 회개
구원의 조건에 있어 한국 장로교에서는 믿음이 그리고 침례교회에서는 회개가 말해진다.  역사적으로 이신칭의 교리 때문에 장로 교회는 믿음을 주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침례 교회는 신앙과 함께 윤리도 강조했다.  그 결과 믿음보다도 회개가 더 많이 외쳐졌다.  그러나 사실 구원을 얻음에 있어 믿음과 회개는 동시에 강조되어야 한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이다.
구원의 서정을 말할 때 장로 교회는 영적 중생의 결과 믿음이 나타난다고 교리적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회개는 믿음의 뒤에 나온다.  장로 교회는 자연히 믿음을 더 강조한다.  영적 중생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다.  영적 중생의 결과는 믿음이다.  이 때문에 믿음은 인간 의지의 소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을 자주 말하는 칼빈주의자들에게는 회개보다도 믿음이 더 마음에 든다.  그러나 장로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지적 확인에 머무를 수 있다.  인격적 변화가 당장 나타나지 않아도 지적 수납만으로 신자가 구원받은 것으로 장로 교회에서는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러시아 침례교회는 회개를 강조한다.  우선 회개는 인간의 의지적인 결단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침례교회는 교리적으로 수정된 알미니안주의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적인 방향 전환인 회개를 더 좋아한다.  회개는 자?하면 단순한 지적 수납으로 끝날 수 있는 믿음보다도 더 인간의 의지적인 결단을 요한다.
나는 이 둘 사이 어느 하나로 치우침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역사한 결과 신앙 고백과 아울러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회개 기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로 교회는 믿음만을 강조하므로 교인으로 하여금 죄에 대한 회개를 소홀히 하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알수록 인간은 자연적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다.  그러나 죄에 대한 회개가 없이 서둘러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하는 것은 교인 수의 증가에는 도움이 되어도 성숙한 성도로 자라게 하는 일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구원의 서정은 중생의 결과 믿음과 회개가 함께 수반한다고 말한다.
침례 교회의 경우 회개만 강조하고 믿음을 덜 강조한다면 사람들은 회개를 그져 하나의 반성으로 여겨 자신의 죄에 대한 심리적인 부담을 덜려는 경향으로 나갈 수 있다.  더구나 러시아는 정교회의 문화권에 속하므로 러시아인들은 모두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 결과 죄를 지은 사람이 신부 앞에 나가 죄를 고백함으로 자책과 죄책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죄의 고백은 도덕적인 반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회개는 과거의 죄에 대한 회오의 감정적 표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게 하는 믿음도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가 알듯이 회개는 과거 지향적이며 단순히 방향을 전환해 주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되돌이켜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하는 문제는 믿음이 해결해 준다.  이 점에서도 회개만으로 불충분하다.  그러나 한편 과거에 대한 정리도 없이 미래로 달려 나가기만 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  잘못된 과거에 대한 정리가 없다면 앞으로 그런 잘못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믿음과 회개는 함께 가야 한다.  그러므로 장로 교회는 회개를 좀 더 그리고 침례 교회는 믿음을 좀 더 강조하여야 한다.
교회와 교인들이 역사적으로 계속 반복하여 실수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것들을 논리적으로 분리시킨 후 그 중 하나만 지나치게 주장하는데 있다.  구원의 서정은 논리적으로 각 단계들을 분리시켜 생각한 것이지 역사적으로 이들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소명,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됨, 성화, 성도의 견인과 영화라는 구원의 서정은 하나의 완성된 그림과 같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그림을 9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교단별로 교회별로 그리고 목회자별로 각자 소지한다.  그리고 그 조각이 하나의 완성된 그림인양 주장했다.  그러나 그 조각은 완성된 그림일 수 없다.
인간이 영화(榮華)에 달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겪는가를 신학자들은 논리적(論理的)으로 생각해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소명부터 양자의 과정까지 아주 짧은 시간에 동시에 일어난다.  그리고 성화와 성도 견인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함께 일어난다.  그 뿐 아니라 칭의와 분리된 성화가 있을 수 없고 성화없는 칭의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어느 교단은 중생이 믿음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교단은 중생은 믿음을 수반한다고 주장하며 다툰다.  어느 목회자는 구원에 있어 칭의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며 다른 목회자는 성화를 수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인격은 지정의(知情意)로 구성된다.  우리는 지정의가 무엇인가 이해하려고 논리적으로 구분하여 지정의를 생각하고 정의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들 세 가지의 유기적(有機的)인 관계에 기반한 종합적(綜合的)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이 세 가지는 절대로 독자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못한다.  다만 인간에 따라 이들 중 어느 하나의 경향이 더 강하게 나타날 뿐이다.  다시 말해 순복음 교회가 주정적이고 기장이 주의적이라 하지만 나름의 신학 지식에 바탕한다.  장로교가 주지적이라지만 장로 교인들에게 감정과 의지가 배제된 신앙 삶은 불가능하다.  감정과 의지가 바른 지식에 바탕한다면 지나치게 주정적이라고 그리고 주의적이라고 남을 비판할 어떤 이유도 없다.
마찬 가지로 인간의 영(靈)과 정신(精神)과 육(肉)도 유기적인 관계 아래 있다.  이 점에서 이원론(二元論)은 비성경적인 사고이다.  그러나 인간은 기질과 성격에 따라 영과 정신과 육 중 어느 하나에 치우친다.  우리는 다만 영을 중심으로 정신과 육을 통제하도록 성도들을 가르치면 된다.  그러므로 신앙의 기질이 조금 정신적인 면으로 그리고 육적인 면으로 나타났다고 남을 비방하는 일에는 지혜가 요한다.
이렇게 믿음과 회개는 동전의 양면과 같지만 사람들은 그 중 하나에 치중하여 주장한다.  이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다른 쪽을 주장한다고 배척하기보다도 치우침을 방지하려는 노력을 함께 기우리도록 하자!  이렇게 목회자는 균형 감각을 갖고 교리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
칼빈니즘과 알미니안니즘은 서로 상반된다.  그러나 이들이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 화해는 역사적으로 항상 불가능하다.  침례교회에서 인간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자주 들으면서 칼빈주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하고 인간의 의지는 무시하는가?  물론 결론은 그렇지 않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 지식이 곧 인간 지식이라고 말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 사랑은 곧 인간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그럼 이들 침례 교인들은 왜 칼빈주의자들을 혐오하는가?  성경에서 인간 의지를 강조하는 성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의지를 중요하게 보지 않는다고 그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정해진 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며 인간의 의지를 무시한다고 이들은 생각한다.
이들도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인간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거절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전혀 알미니안주의에 속하지 않고 웨슬리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인상은 이들이 인간의 의지도 무시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예정론보다도 예지론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 인간의 역활을 강조하고 싶어함이 분명하다. 
이렇게 러시아 교인들은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고 싶어한다.  자기 주장이 강한 러시아인의 기질로 볼 때 인간 의지에 관한한 알미니안적인 의견이 이들에게 더 마음에 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도 인간이 완전히 부패한 존재가 아니란 주장을 알미니안들처럼 결국 말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려면 이런 결론은 자연스런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침례교회의 목회자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다시 말해 신학이 없으므로 어정쩡한 모습을 보인다.
이들의 주장을 들으면서 왜 성경이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동시에 모두 지지하는 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성경의 두 가지 기록이 사람의 해석에 따라 다른 사상과 교리로 나타남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침례 교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문맥을 무시하고 성구를 인용하는 것을 자주 본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은 나의 보는 관점에서 헛점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연구해 볼 필요를 느꼈다.  이 때 바로의 마음의 강퍅함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성경 기록을 생각했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 것이다고 모세에게 사전에 말하셨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기록한다.  놀라운 사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전혀 충돌되지 않는 것처럼 기록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스스로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중 어느 한 쪽만 보고 그곳으로 치우쳐 자신이 옳다고 주장한다.  칼빈주의자가 볼 때 하나님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바로가 강퍅해졌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는 사실에 더 주목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의 죄에 간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의지 문제는 하나님에게 같은 내용이지만 인간에게는 피를 흘리게 하는 싸움의 원인이 된다.
우리가 알듯이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의지를 강압하지 않는다.  그러면 인간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은 그 공의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가 독자적이란 사실만 강조하면 하나님은 전혀 무력한 존재로 남는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실현시킬 어떤 방법도 찾지 못하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이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렇다면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의지를 주장하기 위해 인간의 의지가 무용한 것처럼 말하면 안되며 침례교회는 인간의 의지를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의지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사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허용(許容)을 교리적으로 주장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피조한 후 그가 하나님에게 불순종할 수 있는 가능성을 허용하셨다.  결국 아담은 자의지로 타락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구원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셨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류는 죄 아래 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의지적으로 사람들을 선택하여 구원의 은총을 허락하셨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종전대로 죄 아래 있도록 놔두셨다.
이제 우리는 바로의 문제로 돌아가고자 한다.  바로는 애굽의 왕으로서 예전 형제처럼 지냈던 모세라 해도 그를 반대하여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모세에게 강퍅하게 대했다.  이 때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으로서 바로의 원대로 모세를 대적하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그를 내버려 두셨다.  이를 우리는 하나님의 허용이라고 말한다.  허용으로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바로의 죄에 개입함이 없이 그를 심판할 수 있었고 그리고 바로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핑계할 수 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허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칼빈니즘을 무조건 반대했다.  이들은 하나님이 바로에게 죄를 허용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고려할 때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두 가지 성격을 갖는다.  성경에 기록된 언약이 약속한 하나님의 은총은 무조건적이면서도 동시에 조건적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들로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는 약속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이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행위와 무관하게 하나님은 그를 큰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이를 보증하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셨다.
그러나 언약은 또한 조건적인 은총을 말한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이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를 떠나셨고 순종할 때는 축복하셨다.  하나님이 조건적으로 그를 대했다는 말이다.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다.  다시 말해 조건적인 언약에 의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연단하여 무조건적인 은총을 받을 수 있는 합당한 상속자로 만들어 가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조건적인 언약에 의해 인간이 언약의 상속자가 될 수 없음을 잘 아신다.  그러므로 인간이 불순종으로 연약함을 보일 때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은총으로 그를 용납하신다.  이 사실은 아버지와 자식 사이 관계에서도 잘 증명된다.  자식은 출생을 통해 무조건적으로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자식을 상속자로 만들기 위해 훈련시킨다.  이 때 아버지는 아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잘 알지만 사랑으로 그를 계속 용납한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의지와 아들의 의지사이 어떤 충돌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사이도 마찬 가지다.  그러나 문제는 무조건적인 은총을 아무나 받지 못한다.  인간이 스스로 원한다고 받을 수 없다.  인간은 아담의 원죄와 본죄로 이미 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은총은 하나님이 택한 자들이 받을 수 있다.  이 때 인간의 의지는 무용하다.  그러나 이 은총을 받은 이후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존중하며 그를 훈련시킨다.
이렇게 본다면 칼빈주의자가 구원의 수혜에 있어 인간 의지의 무용성을 주장함은 타당하지만 구원 이후 이루어야 할 성화에서도 하나님의 은총만 주장하고 인간 의지의 무용성을 계속 주장한다면 구원파처럼 폐율법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을 것이다.  칭의 이후 성화에서 인간의 자발적인 의지는 아주 중요한 역활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는 구원의 수혜에 있어 인간 의지의 무용성을 알아야 하며 구원 이후 하나님의 은총을 무시하며 인간 의지의 유용성만 계속 주장한다면 율법주의자로 전락할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진리는 하나이지만 이를 표현할 때 달리 나타날 수 있음을 우리는 여기서도 본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하나에 치우쳐 있지만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  성경에 기반하여 교리는 항상 수정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  이 점을 장로 교회는 명심하여 쉽게 남을 비난하는 일에 조심하여야 한다.

구원의 영원성과 상실성
침례 교회는 구원의 상실 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장로 교회는 구원의 영원성을 말한다.  침례교회 목회자들의 말을 빌리면 칼빈주의자들에게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  처음 이들의 주장이 칼빈주의자인 내게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이들이 상대적으로 인간의 의지를 보다 더 주장하기 때문에 구원의 상실성을 말함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믿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인 상황을 자주 접했다.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심할 때인 공산주의 시절 이들 침례 교인들은 많은 신실한 신앙인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들에게 이것은 구원의 상실을 뜻했다.  이렇게 본다면 장로 교회는 성경의 변할 수 없는 원리에 근거하여 구원의 영원성을  말하며 침례 교회에서는 항상 변할 수 있는 역사적인 상황을 근거하여 구원의 상실 가능성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 해석의 두 가지 큰 흐름을 본다.  하나는 하나님 측면에서 본 성경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측면에서 본 성경 해석이다.  칼빈주의의 구원관과 알미니안주의의 구원관이 하나님 측면과 인간 측면에서 각각 본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들 침례교회의 목회자들이 나를 그들의 협력 선교사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갈림길도 바로 이 질문이었다.  당신은 한번 받은 구원이 영원하다고 보는가?  이 때 나의 대답은 이랬다.  하나님에게는 한번 구원이 영원하지만 인간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이들은 나의 대답에 반발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해석자의 기본 입장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성경 해석은 달라진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만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리다고 우리는 주장할 수 있는가?  하나는 신학적인 원리로써 맞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또한 맞을 수 있다.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그가 결국 구원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버림을 당할 것인가에 대해 하나님 이외 인간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버림 당할 사람들도 있고 구원 받을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입장만 고집하고 인간의 역사적인 상황을 무시한 체 구원의 상실 가능성을 비성경적이라고 무조건 공격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와 상황을 절대로 무시하지 않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목회자와 선교사는 성경에서 동시에 말하는 하나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을 모두 수용하여 지혜롭게 인간의 구원 문제를 이해하고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선교를 위해 또는 보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서로를 수용하고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와 주님으로 선포하도록 협력하는데 우리는 더 힘써야 한다.

결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요단 강에 오시기 전부터 그의 초림을 외쳤다.  그 때 그에게 이미 제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고 부활한 이후 이미 세례 요한의 역활이 끝났지만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들 끼리 모여 하나의 파를 구성하여 남았다. 
초림의 주님을 외치며 그를 맞을 준비를 하라고 외쳤던 세례 요한처럼 지상 교회는 재림할 주님을 외치며 그를 맞을 준비하라고 사람들에게 말해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주님은 이 지상에 교회를 세웠다.  이렇게 주님이 바라는 교회는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 교회는 '보이지 않는 참 교회'이다.  그러나 이 보편 교회는 나라와 민족에 따라 지상에서 달리 나타난다.  그렇게 나타난 교회들을 우리는 '보이는 교회'라 부른다.  이 교회들이 각 나라와 민족에 따라 교단을 구성한다.  교단이 커감에 따라 자체의 필요에 따라 움직인다.  점차 지상의 교회들은 교회의 본래 사명보다도 교단 자체를 위해 존재한다.  그 결과 같은 기독교 단체들이지만 서로 달리 다투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기독 교회들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여전히 활동한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교회 역사는 다음의 사실을 가르친다.  불완전한 지상 교회를 영적으로 각성시키고 또는 교회의 부족한 것들을 보충시키려고 하나님은 때에 알맞게 탁월한 인물들을 세우셨다.  마틴 루터는 종교 개혁의 선봉으로서 개척자적인 기질이 요했다.  개척자들에게는 감정적인 열정과 의지적인 결단성이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칼빈을 세우셔서 이미 시작된 종교 개혁를 신학적인 원리에 의해 정착되도록 하셨다.  그에게는 탁월한 지적 능력과 의지력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이 후 하나님은 경건주의자들을 일으켜 주지적이지만 냉냉한 독일 교회들을 각성시켰다.
나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한국 교회에도 이런 일이 이미 일어났다.  한국 장로 교회들이 지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알고 감정적으로 메말라 신앙의 열기를 잃었을 때 하나님은 오순절 계통의 교회를 통해 성령 운동을 일으킴으로 신앙에서 성령의 역동성과 감정의 중요성을 일깨우셨다.  그리고 감리 교회와 한국 기독교 장로회는 보수 교단에서 소홀히 하는 사회 윤리 문제를 강조해 주는 중요한 역활을 했다.  그 결과 한국 교회들은 균형 감각을 가지려고 이 세 가지를 모두 수용하려고 노력한다.
또 다른 예를 든다.  에베소서 1장 3-14절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알려 준다.  우리의 구원은 성삼위 하나님의 종합적(綜合的)이며 유기적(有機的)인 사역을 통해 일어난 결과였다.  이를 강조하려고 사도 바울은 12절로 구성된 성구들을 한 문장 안에 기록했다.  이렇게 하여 사도 바울은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이 논리적(論理的)으로 구분될 수 있지만 역사적(歷史的)으로 구분될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장로 교회는 성부 하나님의 예정론과 성자 아들의 구속론을 말하지만 성령의 역동적인 인침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인상을 준다.  반면 감리 교단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아들의 구속론에 치우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은 지나치게 성령의 역동성에만 관심을 가져 자? 성자의 구속론과 성부의 예정론이 갖는 신학적인 의미를 약화 또는 왜곡시킬 수 있다.
이런 불균형을 수정하려고 하나님은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이나 단체들을 시기에 알맞게 쓰셨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처럼 완전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우리들은 이들을 전적으로 숭배하고 따를 수 없다.  오히려 이들 사이 비교와 대조를 통해 보완하면서 보다 성숙한 신앙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밖에 없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시대 요구에 맞게 각각 다르게 특정 인물을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처럼 행하지 말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나가자!  이 때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 건설은 가능하다.
그럼 우리들은 나라와 민족 그리고 교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 신앙의 전통과 교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통일성 안의 다양성으로 이해하자!  그러면 우리는 다양성을 통해 성경의 진리를 보다 더 종합적으로 그리고 진리에 보다 더 가깝게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예수님은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권면했다.  이 사랑은 원수에 대한 자세한 지식을 요구하며 그리고 그 지식에 따라 원수의 부족함을 채워주려는 노력에서 이 사랑은 실현된다.  이런 노력은 원수가 가진 생각과 사상을 배워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을 버리도록 돕는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우리가 전혀 보지 못한 부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더 넓은 세계에서 살 수 있다.  이와 아울러 신앙과 인격의 성숙을 함께 기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 역사는 정반합의 원리에 의해 또한 진전된다.  그렇다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무조건 배격하는 자세는 하나님 나라를 다양하고도 종합적으로 세우는 일을 방해한다.  하나님 나라는 천편일률적인 사람들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만이 옳다는 아집을 버리자!  자신도 불완전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우릴 수 있는 여유를 갖자!  이 때문에 모든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선교적 마인드로 무장하여 타문화와 타교단을 알고 이해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 때 지상 교회들은 그리스도가 주신 선교 명령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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