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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왕십리 기사가 있어 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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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는 당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였는데 1번과 13번을 보면 인기가 없는 공공재인 가축시장과 중독자치료원이 왕십리로 이전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개발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데 2번 9번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왕십리를 검색했을 때 가장 많이 나온 기사들은 범죄, 방화, 자살, 화재등를 비롯한 부정적인 내용들의 기사였다. 당시 자살은 가난의 이유가 가장 많았고 또 얼어죽는 일도 종종 나왔다. 이런 기사를 통해 한편으로는 왕십리가 얼마나 낙후된 동네였는지를 알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화 진행 과정에서 탄생한 언론의 시선이다. 현재의 언론들은 냉철한 객관성을 중시하지만 이 시대의 언론들에게는 동정과 연민이 느껴졌고 또한 문학적인 기사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16번 17번을 보면 기사 내용은 유쾌하지 않은 것이지만 글은 문학적인 비유가 많다.
또한 전근대적인 사고를 가진 조선인들에게서 근대적인 기차를 보면서 생기는 사고 및 이 사고를 접하는 언론의 태도도 흥미롭다. 11번 기사를 보자. 아이가 기차에 돌을 던져 유리창이 깨지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 것은 현재에 일어나기는 어려운 일이며 일어난다하더라도 이렇게 아이의 이름과 집 주소가 기사에 실리지는 않을 것이다.
1.1937년 10월 17일 동아일보
가축시장 왕십리로 이전 결정 동부발전에 방해된다고
경성부에서는 중앙선과 경순철도의 완성후 동부경성의 발전을 예상하고 보건위생상 견지에서 동대문의 부영가축시장과 도축장을 경원선왕십리 역부 근으로 이전코자 금년도 예산에 용지매수비 십사만원을 계산하여 이미 그 일부를 매수하기에 착수하였는바 평년 도에는 이전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2.1937년 7월 25일 동아일보
경상->이천 환기전차
동대문 -> 왕십리간은 고가선 복선
천만 원의 철도회사계획
전천상차량씨를 중심으로 자본금 일천만원의 성동철도회사 설립의 계획이 진설되고 있는데 이는 경성 동대문 이천사이의 육십키로에 팡궤전차철도를 부설하려는 것으로서 동대문, 왕십리 사이는 일부 고가선 복선으로 하고 왕십리 이천사이는 단선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고 동회사는 이천의 온천을 이용하여 일본내지의 보총식 유원지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전천씨는 이미 철도국의 내연가를 얻어 불원정식연가신청을 한 모양이다. 이 회사 설립 후에는 현재의 경성궤도를 흡수합병하기로 되었다.
3. 1925년 10월 23일 동아일보
구십노인자살 오늘아침 왕십리서 생긴 일
원인은 생활고난
부외하왕십리 구십삼번지허덕순을 이십이일 오전 열시 이십분 자택에서 목을 매어 죽었는데 원인은 생활난인 듯 하다고 한다.
4. 1934년 11월 14일 동아일보
기동베고자다 주객이 비참하게 죽음
왕십리경남쪽에서
기차궤도를 비고 자다가 기차에 치어 죽은 실없는 사나이가 있다. 그는 부외 행당리 백이십팔번지의 박유길로 십이일 오후 열한시 이십이분 경에 술을 과히 먹고 왕십리 남쪽에 있는 행당리 신호소부근에서 궤도를 비고 자다가 마침 지나가는 북행열차에 치어 무참히도 즉사하였다는데 소관 동대문 서에서는 방금 그 진상을 조사 중이라고 한다.
5. 1932년 12월 16일 동아일보
기동차 충돌
금십오일 오전 여덞시경 왕십리 뚝섬 간을 왕복하는 궤도차의 기관차 일호와 객차십사호가 왕십리 역구내에서 충돌하여 열한시경에 복구되었는데 다행히 인측의 상해는 없었다고 한다.
6. 1933년 5월 18일 동아일보
단두사건과 실종아이
서쪽에는 한명도 없는데 동쪽에는 아이 찾아주
이 사건이 있은 후 서대문 판 내에서는 작금양일에 도모지 길 잃은 아이가 없다는 것으로 예년 같으면 어린이들이 길가에 나가놀다가 집을 잃게 되는 일이 많았을 터인데 이 사건이 발생한 이후 부모들의 감독이 더 엄중해진 것이라 추측된다고 판게 경판은 말하였다. 그날 이후 동쪽에는 집 잃은 아이가 있어 소판 동대문 서에서는 아이 찾노라고 사방으로 수배를 벌여놓았는데 아이는 상왕십리 이육칠번지 송응헌의 삼녀 춘자가 이날 아침 아홉시에 놀러 간이래 저녁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7.1933년 6월 12일 동아일보
도망간 아내를 기습적으로 죽여 놓고 십년의 구형을 받아
버리고 간 아내를 따라가서 가치살기를 말해도 듣지 않는다고 살해하려다 그것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법정에 서서 입회김사로부터 십년의 구형을 받은 일이 팔일 경성지방법원형사법정에서 있었다. 시회 한지면상왕십리 이일팔구 야채상 서광옥은 십년동거하든 그의 아내 김음전이 남편이 게을러 가게가 뜻대로 안 된다는 것으로 작년 시월하순에 달아나고 나서 각별히 살게 되었다. 김은전은 남편을 버리고 가서는 곧 시의 동막리이모의 집에 음식점 작부로 들어갔다가 금년 이월에는 피고와 혼인을 중매한 상왕십리 육오육번지 정운차의 음식점에 작부로 들어갔었다. 서광옥은 이것이 아마 정운자의 사족에 의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정운자와 아해였던 음전을 증오하는 끝에 살해할 맘을 먹고 금년 사월 이일에 전기 정운자의 집에 이르러 준비했는 식도로음전파징운지의 딸 복순을 살해하려는 것이 동리 사람의 제지로 각각 사주간의 치료를 요할 상처를 내고 곧 경찰에 검거 되었다고 한다.
8.1934년 6월 14일 동아일보
돈 요구하다 거절당코 노인이 자결
주머니에 넣고 온 손칼로 목 찔러
작십삼일 오후 네 시 반경 시외 왕십리에 사는 지순기라는 노인이 그의 조카 되는 시내 안국동 삼십팔 번지 지흥근의 집에 와서 돈을 청구하다가 거절을 당하니 그 즉석에서 가지고 왔던 주머니칼로 목을 찔러 자살을 하여 현장에는 유혈이 낭자한데 안국의원 임명재씨가 와서 진찰했을 때는 벌써 사망하였었다.
9. 1932년 10월 16일 동아일보
동대문 왕십리 경기신성개통
경성궤도회사에서 미리 건설 중이었던 동대문 왕십리간 연장선은 요즈음 준공되어 십일일로부터 운전을 개시하였는데 동대문 동독도간 량단역에서 매일오전 일곱 시로부터 오후 열시까지 삼십분마다 발차하고 약 이십오 분마다 전선 한편 길을 운행할 수 있다고 한다.
10. 1934년 4월 17일 동아일보
열차에 뛰어들어 소부가 자살
가정불화로 집에서 뛰어와 왕십리 근처에서 잔인한 사건
십육일 오후 두시 경에 시외 왕십리 역 열차신호기근처에서는 어떠한 방년 여성이 때마침 질주하는 경원선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고 한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는 시외승인면 청량리 이사의 며느리 한정희라는데 십육일 아침 여덞시경에 우연히 집을 나와 그와 같이 자살하였다고 한다. 그가 자살을 각오하게 된 원인은 방금 소관 동대문에서 조사 중이므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 가정불화인 것 같다고 한다.
11. 1932년 12월 6일 동아일보
열차에 투석
부외하왕십리역 육칠 오번지 김봉운 동리동옥 어린 두 명의 소년은 삼일 오후 령서 삼십육분 북행하는 오삼칠호 열차에 돌을 던져 열차의 유리창을 깨트렸는데 다행히 승객은 무사하였다고 한다.
12. 1933년 2월 1일 동아일보
노인입동사
이십구일 오후 다섯 시경 부외한지면 왕십리 구이영번지 부인 집에 나이 육십 가량 되어 보이는 사내거지한명이 얼어 죽은 것을 발견하고 그곳 면사무소에 넘기었다 한다.
13. 1932년 3월 1일 동아일보
중독자치료원 왕십리에 신설
경기도 경찰부 위생 과에서는 금년 예산액 일만 원을 계산하여 마약중독자 치료소를 시외 왕십리 근처에 증설하고 동주독자들을 그곳에 수용하여 치료를 시키는 동시에 목축으로 닭과 돼지를 기르게 하고 야채동속도심에 작업에 관한 취미를 가지게 할 작전이라고 한다. 아직 등예산이 통과되지 아니한 때이므로 된다하면 동종류의 중독자들에게는 그 이상의 행복이 없으리라하며 일종의 명진사와 같이하여 직업에 대한 취미를 가지게 하는 일이 방 중독된 것을 고쳐 추고서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하여 수용기간도 약 이개월로 하고 수용되어 있을 동안에 직업에 관한 관념을 넣어주고 직업에 종사하는 대로 잔돈을 저축하여 줄 작정이라 한다. 물론 수용 중엔 노동의 관념을 넣어주는데 불과하고 강제로 시키는 건 아니한다고 동사 업은 조선 최초의 것이 만큼 노력이 많이 들것이라 한다.
14. 1930년 9월 25일 동아일보
마차가 살인 마차부는 잡혀
금이 십사일 오전열시경에 시내 모악재 부근에서 시외 상왕십리 박귀봉이가 마차를 몰고 지나든 도중에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외박대석이 가그마차에 치어 중상을 당하고 시내적십자병원에 입원 치료하던 중 정오에 그만 절명되었다는데 마차부 박귀봉은 목하 서대문서에서 취조를 받는 중이다.
15. 1936년 7월 12일 동아일보
용두 왕십리간 인도다리를 만들었다.
이만원의 공사비 던저
경성부 토목과에서는 동부경성에 있어 중추지대인 청량정과 왕십리정 사이의 교통이 대단히 불편하므로 그것을 해소하기 위하여 예산 이만 원을 늘여 용두정과 왕십리정 사이의 청계천 위에 다리를 놓게 되었다고 한다. 그 공사는 이미 입찰도 끝났으므로 곧 착수하리라는데 금년 안으로 준공월터이라 한다.
16. 1933년 4월 14일 동아일보
육십전에 팔린 몸 흙무너져 다리 골절
왕십리 채토장에 생긴 참극
한가족의 생로망년
십이일 오전 여덟시 오십분 시의 왕십리 도로 공사 채도장에서 흙을 파던 노동자 고양군한지편 신량리 칠번지 박현납은 흙이 무너지는 바람에 치어서 왼편다리를 접상하고 목하 제대부속 병원에 입원 치료중이다. 이 박현남은 일급 육십전을 받아 아내와 어린애 하나를 데리고 호구를 이어가는 형편에 있는데 금후 다리 하나가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의 가족 생계도 그 다리와 같이 절단되어 반은 살고도 죽은 몸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17. 1934년 8월 22일 동아일보
바람피운 중년 부인이 정부 따라 절도자살
어제 열한시 왕십리에 참극
친 남편은 시체를 받는 것을 거부
불의의 사랑을 속삭이다가 필경 모두를 망친 청춘남녀가 있다. 이십일 오후 열한시 십삼 분경에 부외 왕십리역 신호소 부근에서 어떤 청춘남녀가 때마침 떠난 북행열차에 뛰어들어 무참히도 죽었다고 한다. 이 보고를 접한 소관동대문에서는 즉시 현상에 출동하여 조사하였는바 그들은 부외 뚝도리 김명옥과 부외 행당리 일백이십팔번지 고용인으로 있는 구용보의 처 유순열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자살원인은 오래전부터 불의의 사랑을 맺어 왔었음으로 유순열은 남편이 있는 몸인지라 자유스러이 살 수 없음을 비관하고 그와 같이 자살한 것이라는데 구용본은 불의의 처 유순열의 시체인수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18. 1938년 3월 5일 동아일보
옆집에 불을 붙인 방화범일 가능성 높아
주민 네명을 엄하게 조절
어젯밤 왕십리 화재사건
삼일 오후 열시 이십 분경 부내왕십리정 이팔오의 육칠 염근택이 집안 식구들과 잠을 자고 있을 때 돌연 뒷벽에서 불이 들어오므로 대소통을 이르켜 부근사람들과 협력하야 오 분 후에 겨우 진화되었다는데 손해는 그다지 크지 않으나 화인이 미상이여 소관 동대문에서는 방화의 혐의가 농후하다하여 전기 염을 위시하야 부근사람을 원한관계를 가지고 있는 세네명을 소환하여 취조중이라고 한다.
19. 1934년 1월 20일 동아일보
경부화상
이웃사람이 동정
구일오후 세시경 시외상황십리 이십칠번지 장성규의 처 김씨는 중상을 입었는데 생명이 구하기 어려우리라 한다. 장성규라는 남자는 가난한 소치로 새벽 일곱시면 야채를 등에 지고 밤에는 새로 한시나 되어 집에 돌아오는데 아들이 하나 있으나 난봉을 부려 나간 지 수년이 되었고 병든 지 오래나 약쓸수도 없는 처지였다는데 부근 사람들은 노부부의 갱상을 심히 가련하다하여 동정한다고 한다.
20. 1933년 8월 5일 동아일보
친남편으로 판명 왕십리녀 시체사건
상왕십리의 여사시사건은 사건발생하든 삼일 반 유력한 혐의자로 인치한 살해된 여자의 남편 이재영을 밤을 새워가며 대구보 박용득 양형사가 준령한 취조를 한 결과 이재영이가 살해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에 많은 피가 묻은 것을 그는 도시 어떻게 되어서 피가 묻었는지 모른다고 하여 피 묻는 손을 씻어 버렸다고 자백하였다가도 다시 번복하여 부인하는 상태로 경찰에서는 사일 중으로 확신할 증거를 수집해 노리라하여 사건은 급전지하로 해결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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