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회사 26
(일본의 대한 침략정책과 민족의 수난 2)
3. 러일전쟁과 을사보호 조약
청일전쟁 이 후부터 일본을 견제하던 러시아는
을미사변 이후(명성황후 시해사건) 고종을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오고 (아관파천)
고종은 친러정권을 출범시킨다.
갑자기 러시아의 개입으로 조선에서의 기득권을
상실한 일본은 군비를 증강시키면서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는다.
일본은 조선에서, 영국은 중국에서(청나라)
상호인정하며 침해를 받을 경우
이를 옹호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영일동맹, 즉 조선과 청국에서
기득권을 챙기려는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 후 군사력을 기른 일본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도 없이
러일전쟁을(1905) 일으키는데
이미 1884년과 (갑신정변) 1894(청일전쟁)
두 차례에 걸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조선이지만
아무 이유없이 조선의 국토와 백성은
또다시 어려움을 겪게된다.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한 일본은
일본의 승인 없이는 조선이 어떠한 나라와도
조약을 맺을 수 없다는
한일협정서를 한국 정부에게 강요해 체결하고
미국과는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댓가로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한다는 내용의 밀약을
미국과 맺은 후 조선의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는
을사조약을 조선과 맺는다.
고종은 일본의 부당함을 외국에 알리려
헤이그에 특사를 (만국평화회의) 보냈다가
그 일로 일본에게 퇴위를 당하게 되고 (1907)
또한 일본은 1905년 해양에서
중요한 거점으로 여겨지는 한국의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인 조근현에 편입시켜 버리고
한국의 토지조사를 통해
조선의 많은 토지를 일본인 소유가 되게 한다.
그 결과 1897년 한국에 사는 일본인이
2만명이었던 것이 한일합방 되던
1910년에는 무려 17만명으로 급증한다.
4. 한일합병과 주권상실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 명성황후 시해,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와 을사조약,
1906년 초대 총독 이토 히로부미의 서울 부임,
1907년 고종 퇴위,
1909년 한일 의정서 협약을 통한
국내 통치권 장악과 조선 군대 해산함으로
일제는 한일합방을 용의주도하게 준비해
드디어 1910년 한일합방 비준서가
일본의 삼엄한 경계망 속에서
이완용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의 의결을 거쳐 조인된다.
이 주권 강탈 문서는 일종의 위증서나
다름없는 것으로 일본의 군국주의를
대변하는 매국노 이완용을 위시한
친일 각료들에 의해 조인된 문서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조선의 신민화가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라고 외쳐댔으며
아울러 조선 신민화 작업을 조선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본 조합교회 스스로 나서서 함으로
선교 개시 10년 만에 조합교회 교단은
일본에서 큰 교단으로 성장 하였으며
따라서 일본 조합교회는
조선의 신민화 작업을 위한
일본정부의 시녀 노릇을 충실히 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 가운데는
조국을 지키기 위한 피의 항쟁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또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이 그랬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일제로부터의 민족해방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였다.
*조합교회
1886년 일본의 개신교 교파의 하나로
설립된 교단으로 온건한 복음주의 입장을 표명한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가 대륙침략을 꿈꾸며
전쟁을 시작하고 조선을 합병한
1910년 제 26차 총회에서 조선을
전도지역으로 선정하여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의 일본화 정책에 협조했다.
조선내에도 서울, 평양 등지에
조합교회를 설립하고 조선 복음화의
명분 아래에서 제국주의 정책에 동조했다.
*3.1운동 민족대표 기독교인 16명
^목사: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신석구.
신홍식. 양전백.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김병조
^장로: 이승훈. 이명룡
^기타: 박희도. 이갑성. 박동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