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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서는 용기 신 8:1~10 출처: http://brotherch.com/sermon/2004/1128.htm
서 론
토큰 네 개로 시작해서 연봉 12억을 버는 사람이 있다. 화진화장품의 부회장,
이와는 반대로 더 이상 갈 곳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을 벼랑 끝에 세우고 운명에 정면 승부를 거는 사람은 그 마음가짐이 다르고 눈빛에서부터 비장함이 넘친다. ‘운명아 비켜라! 아무리 네가 나의 길을 가로막더라도 나는 너를 밟고 지나가야겠다! 나에게 더 이상 퇴로는 없다! 너에게 결코 굴복할 수 없다!’ 이러한 각오 앞에서는 운명도 길을 비켜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날마다 목숨을 걸면 불안해서 어떻게 살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목숨을 걸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그리고 목숨을 거는 것이 안전하다. 사람들은 욕심 없이 안일하게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언제 생각지도 않았던 불행이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이런 예측하기 힘든 불행에 대비할 수가 없이 고통스럽더라도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본 론
새 중에 제일 볼품없는 새가 참새다. 작고, 예쁘지도 않고, 소리도 시끄럽다. 비둘기 같은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과 비교한다면 방정맞을 정도로 날갯짓을 한다. 참새를 잡아 새장에 가두면 성질도 급해서 얼마 못가 죽어버리고 만다. 새 중에 제일 못난 새가 참새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렇게 못나고도 못난 참새를 향하여 성경은 말씀한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라도, 하나님께서는 잊어버리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눅
걱정하는 새를 본 적이 있는가? 이마에 주름이 깊이 팬 새를 본 적이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재정 문제를 직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려고 새를 예로 드셨다.
“이 모든 것은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마
하나님은 믿든지 믿지 않든지 실제로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은 내가 얼마만큼의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와 상관없다. 그렇다면 자기 생각은 무시하고 불가능한 상황처럼 보이는 절벽에서 몸을 내던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 믿음인가? 그렇지 않다. 키에르케고르는 ‘맹목적인 믿음의 도약’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맹목’도 아니고 ‘도약’도 아니다. 그것은 ‘빛 가운데서 걷는 것’이다.
히브리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①하나님이 당신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라고 하시더라도 그 일은 결코 어리석은 것이 될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 아는 것이 성경이 뜻하는 믿음의 첫 단계다.
②하나님이 당신에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순종하는 것이다. 성경이 뜻하는 믿음은 행동하는 것이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③당신이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해서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신뢰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그 신뢰하는 대상을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이 행하신 일을 아는 것에 기초한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약속들을 공부해야 한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라는 깊은 확신이 들면 믿음이 생긴다.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 행하실 기회를 드리고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내가 서 있는 나뭇가지를 사탄이 전기톱으로 자르고 있는 것을 볼 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가지 끝에 서서 톱질하던 사탄이 마침내 나무와 함께 쓰러지는 것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뭇가지 위에 선 채로 공중에 있다. 그것이 믿음이다. 나무나 나뭇가지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지키실 분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을 때 발휘된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 바라시는가? 먼저, 믿음으로 사는 것은 우리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액수는 중요하지 않다. 필요할 때에 돈이 없다면 십 달러든 백 달러든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다. 우연의 일치로 보이지만 절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는 모자라는 그 부분을 채워주신다.
쌀이 떨어졌을 때, 문을 막 열고 쌀을 안고 들어오는 일을 경험해 보았는가? 건축하며 모자라는 돈의 액수 때문에 고민할 때 전화기로 다급하게 들려오며 돈을 보냈다는 응답을 경험해 보았는가? 먹을 것이 없을 때 먹을 것을 채워주시는 기적을 체험한다. 입을 것이 없을 때 입을 것을 채워주시는 기적을 체험한다. ‘우연의 일치’라는 행운을 반복해서 경험한다. 이러한 일들을 수십 년 동안 경험해 온 이들도 있다.
“주께서는 그 눈으로 온 땅을 두루 살피셔서, 전심전력으로 주께 매달리는 이들을 힘 있게 해주십니다. 이번 일에, 임금님께서는 어리석게 행동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임금님께서는 전쟁에 휘말리실 것입니다.”(대하
철학적 부정은 증명이 불가능하지만, 철학적 긍정은 증명이 가능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신실하시며,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하지 않으리라고 말한다(시 37:25). 이것은 정말 돈으로 증명이 가능한 철학적 긍정이다. 게다가 매일매일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실천으로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은 진짜가 아니다.
믿음으로 사는 첫째 이유가 하나님이 실제로 계심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둘째 이유는 믿음이 자라는 것을 보기 위함이다. 로마서 12장에 따르면 우리 모두 믿음의 분량을 받았다. 믿음은 선물이지만, 사용할 때 자라난다. 믿음을 몸을 단련시키는 것과도 같아서 훈련을 할 때 더욱 강해진다. 땀을 흘리지 않으면 열매도 없다.
살아가는 동안에 어려운 때가 한 번도 없거나, 하나님이 돕지 않으셔도 모든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겠는가? 누가복음
하나님은 하늘에서 먹을 것을 내리시고, 바위에서 물을 내시고, 떨어지지도 않는 옷을 입히시면서 40년간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끄셨다.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너희가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여라. 그렇게 오랫동안 너희를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너희를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너희의 마음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주께서 너희를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너희도 알지 못하고 너희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다.”(신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마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이 그렇게 살기 바라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자기들의 방법이나 세상적인 방법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실제적 공급자이심을 알아야 한다.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혼자 서려고 한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하셨다. 만약을 대비해서 다음 주에 먹을 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우리가 그분 뜻 안에 있다는 것과 그분의 뜻을 따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믿음으로 사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주님은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하늘 아버지가 우리의 쓸 것을 아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를 바라실까? 우리와 대화하는 창구를 계속해서 열어놓고 싶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재정에 대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 그분은 우리의 걸음걸음을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과 자신의 방법과 자신의 힘을 가르치시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께만 집중하도록 하신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행사(acts)를, 모세는 하나님의 행위(ways)를 알았다. “모세에게 주의 길을 알려주셨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의 행적을 알려주셨다.”(시 103:7). 그분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공급받으면서 하나님의 방법을 배울 수 있도록 상황을 마련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물질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을 채워주기보다는 우리의 인격이 자라고 믿음이 커지도록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치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이 돈보다 우리에게 더 관심이 많으시다면 우리는 돈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재정에도 관여하시는가? 아니면 영적인 분야에만 관심을 두시는가?
1달러 지폐는 그저 종이와 잉크일 뿐이다. 돈은 하나의 물건에 불과하다. 이 인쇄된 종잇조각에는 결혼 생활을 깨뜨리고,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즐기며 쉴 시간을 잡아먹고, 심지어 그것을 더 많이 얻으려고 건강까지 해치게 하는 힘이 있다. 부에 대한 욕망은 어린아이들을 포르노로, 법관을 타락하게, 젊은이들을 마약으로 내몬다.
돈은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한다. 한 남자가 피지 섬에 YWAM 부지를 사라고 2천 달러를 헌금했다. 이 돈으로 피지 섬에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유치원 등 많은 일을 했다. 반대로 단돈 8달러로 사람을 죽인 경우도 있다. 빌려준 돈 8달러를 받지 못하자 총을 쏘았고, 그것이 불씨가 되어 48가구가 집을 잃고, 일곱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으며, 한 소녀가 죽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나쁘지,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딤전
돈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 하나님은 돈을 유익하게 사용하신다. 우리를 시험(test)하고 우리의 마음을 보시려고 돈을 사용하기도 하시고 부족하게도 하신다. 우리가 돈을 어떻게 스느냐는 우리가 무엇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느냐를 나타낸다.
복권에 당첨되면 “그 돈으로 무엇을 하실 겁니까?”하고 제일 먼저 묻는다. 하나님도 우리 손에 들어오는 돈 한 장마다 다 그렇게 물으신다. 돈을 사용함은 그 사람의 인격이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냇가로 이끄셔서 까마귀로 하여금 음식을 먹도록 하셨다. 그러나 정해진 때가 있었다. 시내는 말랐다. 엘리야가 의지할 대상은 시냇물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재정적인 샘이 마르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을 의지하길 바라신다.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를 가르쳐서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이끄시는 것이다.
재정이 부족한 것도 하나님의 기적이다. 갑자기 엄청난 돈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큼이나 가난도 큰 기적이다. 시내가 말라야만 엘리야가 하나님께 물어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인생에는 광야가 있어야 한다. 내 삶 속에 광야가 있어도 두렵지 않음은 광야에는 하나님의 기적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서도 괜찮다. 나를 안아주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결 론
로랜은 나이든 선교사 부부를 돕기 위하여 선교여행을 떠났다. 선교사 부부는 로랜을 차에 태워 기분 좋게 차를 출발시켰다. 그때 갑자기 타이어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타이어를 교환하려면 45달러가 필요한데, 선교사 부부에게는 그 돈이 없다. 그런데 로랜의 주머니에는 있다. 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정확히 45달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돈으로 닷새 뒤에 비행기를 타야만 하고, 거기서 숙식도 해결해야 한다. 도저히 줄 수 없다고 느끼는 때, 하나님이 로랜의 마음에 주어야만 한다는 압박감으로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로랜은 결국 자기 돈으로 42달러에 타이어를 갈았다.
로랜의 선교사역은 성공적이었다. 금세 떠나기 전날이 되었다. 답답했다. 아무도 자기가 여기 있는 것을 모른 텐데, 무슨 방법으로 여기를 떠나야 할까? 다음 날, 우체국에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그 안에는 150달러가 있었다.
비행훈련을 잘 받은 조종사라도 계기판만 믿고 비행하면 추락할 수밖에 없다. 비행기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거짓일 수 있다. 그 대가는 자기 목숨이다. 재정과 관련하여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려면 스스로 내린 상황 판단에 따르기보다는 바깥 정보원에 의지해야 한다. 그것은 계기 비행을 하는 것과도 같다. 때로 앞이 어둡거나 흐릿하게 보이더라도 올바른 지시를 따르면 바른 길로 갈 수 있다. 바깥의 정보원이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돈에 관해 3,224번이나 말한다.
벼랑 끝에서 이길 수 있는 첫 번째 원칙은 재정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와 같이 재정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은 명백한 명령이다. 이러한 구절이 성경에 백 번쯤 나온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에 대해 우리가 들은 것도 듣지 못한 것도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다. 산상수훈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지는 부분은 돈에 열중하고 걱정하는 부분이다.
걱정하는 것은 사탄을 믿는 것이다. 시 37편은 “불평하지 말라.”고 세 번이나 강조하고, 불평은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고 말씀한다. 내 힘으로 조절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걱정은 잘못된 태도와 행동을 낳을 뿐이다. 걱정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데에는 비행기 조종사가 안개 속을 나는 동안 자신의 감각보다 계기판을 의지하는 것만큼이나 의지가 필요하다.
두 번째 원칙은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어떤 것이든 사람은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자신의 힘과 시간을 들인다.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것이 우리의 결정을 좌우하며 또한 그것은 우리를 가장 흥분시킨다. 주님이 마음속에 주인으로 계신다면 우리는 돈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세 번째 원칙은 책임감을 갖고 부지런하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이 우리가 재정에 관해 책임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게으름은 저주이다. 일하기도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다. 가족에 대한 책임이 있다(딤전
네 번째 원칙은 현명하게 투자하라는 것이다. 달란트 비유는 현명한 투자를 말한다. 갖고 있는 돈을 사용하고 늘려서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는데 써야 한다. 돈을 숨겨두거나 쌓아두면 안 된다. 회사나 투자를 통해서도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과 배가의 은혜를 나타낼 수 있다.
다섯 번째 원칙은 아낌없이 베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아낌없이 베풀어야 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수표를 보낼 수는 없다. 우리가 예수님께 재정적으로 드리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다. 따라서 주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께 빌려 받은 것으로, 우리는 그 돈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현명하게 쓸 책임이 있다.
십일조를 내고 싶은데, 가정 형편상 낼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 목사는 그를 찾아가 먼저 십일조를 드리도록 했다. 모자라는 부분은 자신이 채워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모자란 적이 없다. 목사가 찾아가 말을 한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형제님. 어떻게 하나님은 믿지 못하면서 내 말은 믿을 수 있었죠?”
벼랑 끝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광야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벼랑 끝에서도 나는 승리하는 사람이다. 광에서도 나는 승리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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