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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종군로를 걷는 방법
1. 백의종군로 형황
사람들은 높은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백의종군하겠다.’고 흔히 말한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백의종군’이 사람들에게 긍정적 메시지를 전달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의종군이 지도자 아닌 민초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충무공의 백의종군 사실을 안다. 그러나 충무공의 백의종군 행적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만일 그 행적을 잘 안다면 백의종군이 주는 가르침을 보다 잘 마음에 새길 것이다. 그리고 충무공을 본받는 삶을 살려는 생각을 좀 더 할 것이다. 나는 길을 걸으면 과연 충무공의 삶을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게 되는지 실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년 동안에 백의종군로를 순례하기 위해 자료를 찾고 실제로 걸어본 다음에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1. 옛길은 대체로 신작로, 국도, 고속화도로가 되었고 백의종군로도 그러하여 걷기에 불편한 곳이 많다. 경상남도는 백의종군로를 처음으로 고증하고 개발했다. 그러나 아직 일부 구간만 걷기 좋게 꾸몄고 차로가 그대로인 구간이 많다. 전라남도도 백의종군로 표지말뚝을 박아 안내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자동차 길이고 구간별로 갓길을 걷기 좋게 꾸미는 중이다. 경기도는 의왕, 수원, 오산 구간 35 킬로미터의 “삼남길”을 개발했다. 그러나 과천, 오산, 평택, 온양 구간은 미완성이다. 서울시, 충남, 전북 구간은 백의종군로 표지가 아직 없다.
2. 차도를 피하여 농로, 하천변, 산길 등, 사람이 다니기 좋은 길을 찾아서 백의종군로 안내표지를 하는 것이 좋다.
3. 길을 걸으면 국토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지방의 민속을 체험하므로 즐겁고 긍정적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며, 완주하면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백의종군로 순례는 충무공의 삶을 마음에 새기는 좋은 방법이다.
4. 백의종군로를 걷도록 안내하는 책은 아직 없다. 백의종군로 홍보는 중요하며 개인이라도 나서는 것이 가치 있다.
나는 걷기 시작한지 1년 후에 동료들에게 순례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동료들의 요청도 있었기에 현수막과 깃발을 디자인하여 일러스트레이터 파일로 만들어 제작회사에 보냈다. 나는 출력된 현수막의 한쪽 끝 부분을 잘라 깃발도 만들었다.
2. 수도권은 전철을 이용해 접근
서울에서 온양까지의 백의종군로 구간은 전철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백의종군로가 전철 노선에서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다. 노 작가는 은평구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하고 전철을 탄다. 그녀는 세계의 곳곳을 찾아다녔고 간 곳도 여러 차례 다니면서 600여 편의 동영상을 찍어 TV와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다.
“일찍 서두르는 것이 나의 버릇이여요. 여행을 많이 하다 보니 이런 버릇이 생겼나 봐요. 출발지에서 늑장부리는 것 보다 도착지에 빨리 내려 그곳을 더 많이 보는 것이 좋아요.”
집이 분당이라면 버스로 수원까지 가서 전철을 타면 된다. 인천의 김 여사는 간석역에서 출발하여 구로역에서 갈아탄다. 청담동에 사는 지명해설자는 7호선을 타고 이수에서 4호선 환승 후 금정에서 국철로 갈아탄다. 온양에 살고 있는 후배는 전철로 출발지까지 와서 순례자를 만나 함께 걸어 내려간다. 그는 젊고 건장하므로 늘 큰 배낭에 음식을 푸짐하게 짊어지고 참가한다.
3. 중방포와 게바위: 충무공이 모친의 상여를 따르며 통곡하던 길
난중일기에는 아산 곡교천 중방포와 게바위 기사가 있다.
4월13일,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니를 마중가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홍찰방집에 잠깐 들러 (중략) 변흥백의 집에 이르렀다.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곧 갯바위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다 적을 수 없다. (뒷날에 적다)
4월16일, 궂은비 오다. 배를 끌어 중방포로 옮겨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며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비는 퍼붓고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뒷날에 적다)
게바위는 해암(蟹巖)이다. 갯바위(海岩)일 수도 있고 개바위(犬岩)일 수도 있는 지명이다. 대동여지도에는 곡교천 남쪽 천변에 개바위를 의미하는 견포(犬浦)가 있다. 해암은 충무공이 모친의 시신을 붙들고 통곡한 곳이므로 백의종군로 중에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다. 이곳을 가려면 온양온천역에서 아산 대교를 건너 곡교천변으로 내려가야 한다. 곡교천 서쪽 둔치에는 아직 자전거 도로 등이 없다. 순례자는 둑길을 가야한다. 뚝 넘어 북편은 넓은 평야로서 사각형으로 곧게 정비된 논이다.
“저 평야는 이 둑을 만들어서 농지가 된 거야.”
지명해설가가 설명을 시작했다. 그곳에 원래 약간의 논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천수답이고 비가 오면 홍수로 작물을 망치는 땅이었다. 삽교천 막기 전에는 흔히 바닷물도 넘쳐들어 오던 곳이었다.
“사실 이 뚝은 동양척식회사가 그들의 자본을 투입하여 만든 것일 수도 있어. 대부분의 우리나라 제방이 그렇게 해서 생겼지. 일제는 일본 내의 쌀 생산이 부족하여 식민지에 농토를 만들기 위해 척식회사를 설립했어. 대부분의 하천부지는 논이 아니었으므로 제방을 쌓고 논을 만들어 자기네 것으로 한 것이지.”
“여기가 이순신 장군이 모친의 상여를 따르기 시작한 중방포일 겁니다.”
“이런 논 가운데가 옛날의 포구였다고?”
“그렇지. 아까 해설자가 설명했잖아. 둑을 막아 생긴 논이라고...”
순례자들은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중방리’라는 표지석에서 인증사진을 박았다.
순례에 참고하기에는 도로지도보다 스카이뷰가 좋다. 지형이 잘 나타나 있어 길 찾기에 더 유용하다.
“야, 이게 뭔가? 아산군수가 세운 표지석이라.”
그림 게바위
그 표지석의 20미터 쯤 아래에 게바위 표지석도 있었다. 순례자들은 안내 표지석 내용을 읽고 게바위로 내려갔다. 그들은 지금까지 바람을 맞으며 5시간 걸어온 보람을 느꼈다. 이순신 장군이 모친의 시신을 붙들고 울었을 그 게바위에서 순례자들은 잠깐 그런 역사를 잊었다. 그냥 힘들게 걸었고 결국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즐거웠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림 게바위에 도착한 순례자
나는 현수막을 펼치게 하고 사진을 찍었다. 순례자들은 바람을 피해 바로 옆의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행동 간식을 먹으려 했다. 마침 농부가 일을 하고 있기에 허락을 받았다.
“추워도 그냥 밖에서 잠깐 앉읍시다. 이 좋은 공기, 이 넓은 벌판을 보면서 앉는 게 어때요?”
순례자들은 노 작가의 권유를 따랐다.
“아저씨,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답사할 거예요. 그때가 되면 이 비닐하우스에서 좌판 놓고 막걸리 파세요.”
노 작가가 앞날을 예언했다. 해암2리 버스 정거장은 5분 거리에 있다. 이곳에서 온양 가는 버스의 배차 간격은 1시간이다.
“동네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매시 30분에 도착한다면서 25분쯤 나와 있으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의 설명대로 버스는 31분에 도착했다. 시골의 버스는 한번 놓치면 1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도시 생활에 익숙한 순례자들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질 만도 하다. 버스는 순례자가 5시간 걸은 거리를 30분 만에 원점으로 복귀시켰다. 18킬로의 거리면 버스로 20분이면 충분하지만 시내구간에서 정체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뒤풀이 후 18시 20분발 전철로 상경했다.
4. 온양에서 순천까지의 여정
충무공은 온양에서 순천까지를 9일 만에 갔다. 이 구간을 기록한 난중일기를 보자:
4월19일,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했다. 천지에 나 같은 운명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먼저 조상의 사당에 아뢰고, 그 길로 보산원에 이르니 천안군수가 먼저 냇가에 와서 말에서 내려 쉬고 있었다. (중략) 일신역에 이르러 잤다. (뒷날에 적다)
4월20일, 아침에 공주 정천동에서 밥을 먹고 니성에 가니, 이 고을 원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후략)
4월21일, 일찍 떠나 은원(논산군 은진면 연서리)에 이르니 김익이 우연히 왔다고 한다. 임달영이 곡식을 사러 은진포로 왔다고 하는데, 그 꼴이 몹시 궤휼하다. 저녁에 여산 관노의 집에서 자는데, 한밤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생각에 견딜 수가 없다.
4월22일, 오전에 삼례 역리의 집에 이르렀다. 저녁에 전주 남문 밖 이의신의 집에서 잤다.(후략)
4월23일, 일찍 떠나 오원역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저물어서 임실현에서 잤다.(후략)
4월24일, 일찍 떠나 남원 십리 밖 이희경의 종의 집에 이르렀다.
4월25일, 아침밥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운봉 박롱의 집에 들어가니, 비가 많이 퍼부어서 출두할 수가 없다. 여기서 들으니 “원수(권율)가 벌써 순천으로 떠났다”고 했다. (후략)
4월26일, 아침밥을 먹고 길을 떠나 구례현 손인필의 집에 이르니, 구례현감이 급히 나와 보고는 대접하는 것이 매우 은근했다. (후략)
4월27일, 일찍 떠나 순천 송원(승주군 서면 학구리 신촌)에 이르니, 이득종, 정선이 와서 기다렸다. 저녁에 정원명의 집에 이르니 원수(권율)는 내가 온 것을 알고 군관 권승경을 보내어 조문하고 또 안부를 묻는데, 그 위로하는 말이 매우 간곡했다. (후략)
4형제의 3째인 이순신은 왜란 이전에 부친과 두 형을 여의고 집안의 가장이 되어 있었다. 집안에는 모친과 처자, 그리고 두 형의 처자와 노비 등 70여 명의 식솔이 있었다. 이순신은 죄인의 몸으로서 가장 노릇을 못함은 물론이요 모친의 장례도 치루지 못하고 금부도사의 재촉을 받고 길을 떠나야 했다. 왜란 발발 2년 전, 정읍 현감에 임명되어 많은 식솔을 데리고 부임할 때 남솔(濫率)이라는 비난을 받을까 염려해 주는 친구가 있었다. 이순신은 그런 비난을 받아도 할 수 없다면서
그림 온양-공주-노성-은진
형님의 자식들을 거두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죄인의 몸으로서 식솔을 거두기는커녕 오히려 누를 끼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충무공은 집안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오로지 국가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영웅이었을까? 나는 충무공이 그런 분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난중일기에 보이는 여정을 따라 남도를 답사했다.
우리는 대동여지도에서 일기에 나오는 지명을 대부분 확인할 수 있다. 즉, 온양, 보산원, 일신, 공주, 노성, 은진, 여산, 삼례, 전주, 오원, 임실, 남원, 구례, 송원치, 순천을 확인가능하다.(대동여지도 참조) 이 구간을 1박2일에 갈 수 있는 구간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이 5개 구간이 되어 10일 정도에 갈 수 있다. 즉, 1, 2일: 온양-보산원(1박)-광정, 3, 4일: 광정-공주(1박)-노성-논산, 5, 6일: 논산-은진-여산(1박)-삼례-전주, 7, 8일: 전주-오원-임실(1박)-오수-율현(춘향이고개)-남원, 9, 10일: 남원-밤재-구례(1박)-송치(바랑산)-순천으로 구간을 나눈다.
온양에서 순천까지의 구간을 10일간 쉬지 않고 걸어도 되고 한 달에 1박2일 구간 하나씩 10개월에 나누어 걸어도 좋다. 1박2일로 나누어 걷는 방법은 직장에 나가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적당한 방법이다. 10일을 계속 걸으려면 휴가를 내야하고 그만한 체력이 있어야 한다. 1박2일 방식은 첫날 오전에 현지까지 가서 오후에 걷고 1박하며 다음날 오전에 걷고 오후에 귀가하는 것이다. 2박3일, 3박4일도 가능하지만 1박2일 방식이 가장 좋다. 왜냐하면 하루에 걷는 시간은 6내지 8시간이 한계다. 2박3일을 한다면 제2일 째 8시간 걷고 남는 시간에 할 일이 없다. 관광을 하려도 힘들어 쉬고만 싶기에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이와 같이 여러 날 계속 걷는 경우에 나머지 시간을 활용하기 어려우므로 필자는 1박2일을 권한다.
5. 현대의 주막
2012년 5월 어느 날, 나는 아침 일찍 남원을 출발하여 19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전날 임실에서 남원까지 걸었기에 다리가 많이 아픈 상태였다. 3시간에 12킬로미터 쯤 걸어 밤재 터널을 만났다. 나는 옛길을 찾을 수 없어 그냥 터널을 걸어서 통과했다. 20여 분 동안 시끄러운 소음에 정신이 혼미해 질 지경이었다. 터널을 나오고 나서부터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려는지 아프기
그림 전주-오원-임실
시작했다. 나는 일회용 밴드로 발가락의 아픈 부위를 감쌌다. 내려가는 길은 지리산 자락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구만 저수지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힘든 것을 견딜 만 했다. 광의면 사무소가 있는 마을을 지나니 오후 3시쯤 되었는데 다리가 아프고 목이 말라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구례읍내까지는 아직 2킬로미터 이상을 더 가야 한다. 마침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는 마을을 만났다. 남자 노인 서너 명이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르신네, 말씀 좀 여쭙겠는데요, 어디서 생수를 살 수 없을까요?”
“저기 수퍼에 가면 되오.”
그림 은진-여산-전주, 임실-오수-남원-구례
“아무 가게도 안 보이는 데요.”
“저 모퉁이 집이 수퍼요.”
나는 간판도 없는 집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다. 테이블이 두 개 있고 구석에 잡화가 진열되어 있었다. 작은 냉장고에는 음료수가 있었다. 막걸리를 한 병 꺼냈다. 생수보다는 막걸리가 허기도 채워주고 갈증 해소에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인아주머니가 고추절임과 짠지를 조금씩 썰어 내어 놓았다. 짭짤한 절임을 조금씩 씹으면서 마시는 막걸리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주인아주머니는 방문턱에 앉아서 <은허>라는 소설을 읽고 있었다. 옆 좌석에는 세 사람의 농군이 탁배기를 나누며 농사의 피곤을 풀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손님이 많아 책도 못 읽겠고 좀처럼 손님들의 이야기가 끝날 것 같지도 않으니 아예 가게를 비우고 나갔다. 시골의 수퍼 주막은 이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