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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가시리를 거닐다 바다가 있고 돌, 바람, 초록 속을 뛰놀던 유년시절을 나는 사랑한다. 그 시절은 너나없이 맏이의 역할은 동생 돌보는 일이었다. 밭에 가신 어머니의 젖을 물리려고 30분 이상을 걸어서 간다. 애기가 애기 업고 다닌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아직도 손가락 굽힘 힘줄은 한쪽으로 몰려 있다. 그 사실 동생들이 알리는 없지만 길가에 피었던 코스모스, 수선화는 영원히 가슴속에서 피어나고 있다. 또 ‘진섶’으로 ‘탈주맹기’를 만들어 따먹던 산딸기는 최고의 간식거리가 아니던가. 높은 가을하늘을 무대로 한들거리던 핑크빛 코스모스 하도 고와서, 한 겨울 세찬바람 이겨낸 인동꽃 향기 온 섬에 그윽해서. 꽃 한 다발 꺾어 소주병에 툭 꽂아 놓았던 그 추억을 기억창고에서 언제든지 꺼낼 수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인생의 오후시간대인 오십줄에 글을 쓰겠다고 나서게 된 것도. 이만큼이라도 감성이 평생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집 밖만 나가면 성난 물결 일렁이는 바닷가, 풀벌레 우는 소리 가득한 가을 밤, 바람을 달래기 위해 쌓은 돌담. 그 아래 피는 하얀 마늘 꽃. 이 모두 자연이 주는 경이로운 씨앗이 있었기에 오늘 다시 그 자연의 텃밭으로 눈길을 돌린다.
주름진 돋보기, 가시리 찾다 자연에 순응하며 온전히 하늘이 점지해주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농촌의 모든 것을 또한 사랑한다. 그래서 유년시절에 느꼈던 자연의 품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 받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속살이 가시리마을이다. 이 마을을 정한 덕분에 잠간이나마 더듬을 수 있다는 뿌듯함이 앞섰다. 평소 얄팍하게나마 알고 있는 마을정보를 바탕으로 준비할 수 있는 자료를 챙겼다. 아침 7시 반에 제주시에서 출발, 동부산업도로를 가다 정석비행장으로 빠져 가시리마을까지는 40분 정도 결렸다. 아침을 거른 상태이기도 했지만 여행을 가면 그 여행지의 음식 맛보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이리라. 가시리마을에 소개된 식당들은 음식 맛 좋다고 수문 나 있다. 발 닿는 대로 간 곳이 마을회관 옆에 있는 ‘가시식당’이었다. 소문대로 걸쭉한 순대국밥은 예전에 집안 잔칫날 만들어 먹었던 그대로였다. 돼지 잡은 후 대창에 돼지 피와 메밀가루 섞어 삶아낸 순대는 손님접대용으로는 필수였다. 맛있는 식사, 그것도 내가 차리지 않은 아침이니 행복 시~작!. 이다. 9시에 만나기로 한 만남의 장소인 ‘오뚜기 가계’앞에서 일행들과 만났다. ‘따라비 오름 다녀오기’, ‘마을안길 돌아보기’ 등 이틀간의 미션으로 무엇을 보고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등 기본자세에 듣고 나서 바로 따라비오름으로 향했다.
땅할아버지 따라비오름 가는 길에 할아버지란 이름이 붙은 것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오름 군(群) 때문이란다. 알오름을 품고 있는 어머니 모지오름, 장자오름, 새끼오름은 마치 한 가족이다. 만남의 장소에서 성읍방면으로 100m 가량 내려가 왼쪽으로 시멘트 도로를 따라 가면 정상까지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위치한다. 따리비의 마력은 오름 중앙부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 세 개의 굼부리가 서로 중첩되면서 만들어지는 부드러운 곡선의 흐름을 보기 위해 오름꾼들이 찾는다고 한다. 카메라, 수첩 꺼내 들고 시멘트길로 들어섰다. 전날 잠간 내린 비 덕택인가. 가끔 구름이 심술부리다 가버린다. 길가에 잎새들이 먼지 털어내는지 바쁜 몸짓을 한다. 걷기에 최고 좋은 날이다.
흙밭이다. 해변지역모래땅과는 다른 산간지역 흙은 까맣다. 그래서 메밀, 조, 감자를 경작한다. 최근엔 더덕, 도라지, 무 농사를 지어 소득을 올린다. 두어 개 밭 지나자 메밀밭이 보인다. 나무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2천 평, 휴대폰 번호도 적혀있다. 아마 올레꾼들에게 메밀꽃을 보여주기 위해 경관작물로 경작 하는 게 아닌가 생각 든다. 꽃을 보여준 후 익으며 수확한다. 메밀가루로 만든 빙떡과 구운 옥돔이 빚어내는 궁합은 콩잎에 멸젓 궁합과 더불어 제주토속식품에서 최고로 친다. ‘이 땅에 이름 없는 것 하나도 없다’는 말이 있다. 산수국, 개망초, 모시풀, 청미래덩굴, 삘기꽃, 인동꽃 등등 각각의 차림으로 함께 걷는다. 때늦은 들찔레도 동참을 서두른다. 길가 군데군데 대나무 군락이 보인다. 이는 분명 집이 있었다는 증거다. 주인대신 남은 대나무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이 고장은 4·3이라는 아픔이 상처로 6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곳곳에 흐느낌이 있다. 이 대나무도 제 뜻과는 상관없이 죽창이 된 것이 한스러운 마음에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겠지. 갑마장 지나 오름을 오르내리면서 삶을 반추 한다. 인솔 선생님께서 산을 오르면서 뒤를 돌아보라신다. 정상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을 볼 수 있다며. 그렇다. 정상에서 보는 아래, 아주 작게 보인다. 사람도 돈이 많다든지 높은 자리에 있으면 자신 보다 아래를 사소하게 다루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발걸음 하나에도 깨달음 있는 거다. 낮잠을 즐기는 말들이 깰까봐 멀리 돌아 내려와 숙소인 ‘타시텔레’에 짐을 풀었다.
하늘의 언어 받아쓰는 가시리 사람들 2일째, 가름질인 마을 안을 돌아보고 싶었다.이집 저집 기웃거리다 한 아줌마를 만났다.감자농사 지을 씨감자 사러 표선 오일장에 간단다. 오일장에서 씨감자를 판다. 변화의 바람 속에 오일장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대기업 대형마트는 생명산업인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업인을 어떻게 볼까하며 걷다가 한 집 앞에 멈췄다. 담벼락에 수국꽃 파랗게 피어 있는 게 어찌 슬 프게 보여서다. 두런두런 사람소리에 사내아이가 수국꽃처럼 배시시 웃으며 집 밖으로 나온다. 빡빡이 깎은 머리가 지난 초파일 자른 것 같다. 아이 너머 마당동쪽 켠에 할머니가 보인다.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 웃는 모습이 귀여워 길가다 들어왔다고 말씀드리자 “게메 나영은 말 잘허는디 친구들영은 원~ 말을 안핸 걱정이라.”하고 화답하신다. 무엇이 아이의 입을 막았을까. 예전에 농촌지역 조손가정에 대한 활동 경험이 있지만... 아이의 해맑은 미소에 빠져 얼굴만 토닥거리다가 나오고는 아이스크림 사주고 올걸...후회한다. 일부러라도 들러서 꼭 사주고 싶다.
다시 몇 걸음 옮기자 담 너머 호박밭에 한 노인 호박처럼 앉아 일하고 있었다. 호박 한 덩이에 시름 한 덩이 얹혀 플라스틱 방석에 앉히고 있었다. 출하준비 손질이다. 실한 덩이 만들기 위해 필요 없는 가지는 자르고 흙 묻 을까 봐 방석에 앉히는 것이다. “발 내리젠 허민 옆에 풀 한포기라도 남겨 두어사” 하늘 에 순응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천성이었다. “휘리릭, 휘리릭” 두음절로 휘파람새 배웅 받 으며 나온 길에는 개구리 구름안고 개골대고 있었다.
* 2012년 6월 16일~6월17일 다녀왔습니다. "내가 만약 여행작가라면? " 하는 마음으로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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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자장 자장 둘러가는 여행길이었습니다. // 발 내리젠 허민 옆에 풀 한 포기라도 남겨 두어사// 하늘에 순응하며 살아온 그네들이 흙과 함께 굴곡을 넘습니다. 참 아리듯 얼얼한 사람들 그 사람이 있는 곳에 가 보고 싶어집니다.
뒤를 따라 한바퀴 훅 돌고 나옵니다. 이름도 예쁜 가시리... 1박2일은 족히 투자해야 눈을 맞추겠죠.. 다음을 기대해도 될까요 ㅎㅎㅎ
가시식당... 어느 미식가 한 분이 얼마나 침이 마르게 말씀하시던지... 어느 날, 기대 잔뜩하고 순대국밥 먹으러 갔었지요. 근데 저에게 보이는 건 파리떼와 김치 올린 보시기 뿐... 그 미식가는 한 그릇 뚝딱 드시고 제것까지 다~ 드시더군요... 아마 음식에도 추억이 서려 있어야 제맛이 나나 봅니다. 又日님 덕분에 저도 추억 한 조각 더듬어 봅니다. 기회가 된다면 제대로 가시리를 느껴보고 싶네요.
cf. 발 내리젠 허민 옆에 풀 한포기라도 남겨 두어사.... 행간의 의미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