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믿음이 자라고 싶다면 ‘언행일치’ 하라!
본문 : 사도행전 27장 25절
그러므로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 <새번역>
한 때 정치권으로 승마선수들을 보내야 한다는 강력한 청원이 생긴 적이 있습니다. 반드시 승마선수들을 국회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승마선수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저 우스갯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떤 마음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으십니까? 이런 논리라면 승마선수들이 교회에도 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승마선수가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떤 칼럼을 통하여 이런 예화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가뭄이 심했던 해에 한 목회자가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성경 말씀을 함께 나누고 이어서 중보 기도를 했는데, 그중에 가뭄이 심함으로 오늘은 꼭 비를 허락해 주시길 기도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다시 교회로 가는 아버지 목사에게 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우산을 가지고 가셔야지요?” 아버지는 “안 가져갈건대 왜?” 그러자 아들은 “비가 내릴 거니까요!” 아버지는 “아들아 무슨 이야기야? 지금은 비가 안 오잖아” 그렇게 대답하고 집을 나서는 아버지를 본 아들은 고개를 숙이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럼 아까 기도는 왜 했을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이 바로 ‘언행일치’입니다. 내가 말 한 대로, 행동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중요한지는 매일 매일 더 깊숙이 와 닿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언행일치’를 보여주지 않는 이들을 대할 때에는 분노하면서, 나의 ‘언행불일치’에는 관대한 모습을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언행불일치’에 대해서는 조금은 관대해 지면서, 나의 삶이 ‘언행일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말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어리석은 합리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자신이 기도한 대로 살 자신이 아직 없어서 기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그 분의 말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디서든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될 때 언제나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공부를 시작하면 수많은 도전들이 있을 것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배우신대로 행동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고백한 대로 삶에서 실천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배우신대로 행동하지 않고, 고백한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진짜 성경 ‘공부’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공부는 실천하기 위한 적용을 배우는 시간이지 절대 지식을 쌓기 위한 학습의 시간이 아닙니다.’ 물론 늘 제 자신에게 먼저 하는 말입니다.
모든 재판이 끝나고 이제 바울은 이탈리아행 배에 오르게 됩니다. 바울과 몇몇 다른 죄수들은 황제 부대의 백부장 ‘율리오’라는 사람의 손에 넘겨지게 되었고, 로마의 행정 구역이었던 아시아 연안의 여러 곳으로 항해하는 아드라뭇데노호를 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배에는 바울의 좋은 동역자인 데살로니가 출신의 마케도니아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배에 승선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 바울이 로마에 가게 되면 큰 힘이 되어줄 동역자입니다. 그렇게 항해가 시작되었고 다음날 시돈에 잠시 대게 됩니다. 그 때부터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친구들에게로 가서 보살핌을 받는 것을 허락해 주게 됩니다.
다시 시돈을 떠나 항해가 시작되었지만 맞바람 때문에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기에 키프로스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서 항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앞 바다를 가로질러 항해하여 루기아에 있는 무라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서 백부장은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서, 바울 무리를 그 배에 태우게 됩니다.
알렉산드리아호로 배를 옮겨 탄 바울 무리는 여러 날 동안 천천히 항해하여 겨우 니도 앞바다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거기서도 계속 맞바람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서, 크레타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 살모네 앞바다를 항해하여 지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크레타 남쪽 해안을 따라 겨우겨우 항해하여, 라새아 성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미항, ‘아름다운 항구’라는 곳에 닿게 되었습니다.
참 꼼꼼하게 기록되었음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사도행전 27장 초반에서 이 항해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의 로마행에 대한 ‘진실’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마치 항해일기를 쓰듯 사도행전 저자가 꼼꼼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로마’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저자는 자세히 기록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항해 일지를 기록함에 따라 항해 기간 동안 겪었던 모든 일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계속 항해가 이어지던 중 문제가 하나 발생하게 됩니다. 꽤 큰 문제였습니다.
많은 시일이 흘러서, 금식 기간이 이미 지났으므로, 벌써 항해하기에 위태로운 때가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충고하였다. <사도행전 27장 9절, 새번역>
항해하기에 위태로운 때가 되었다는 것을 여러 번 선교여행에서 배를 탄 경험이 있었던 바울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이야기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보기에, 지금 항해를 하다가는 재난을 당할 것 같은데, 짐과 배의 손실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까지도 잃을지 모릅니다." <사도행전 27장 10절, 새번역>
하지만 이런 바울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율리오 백부장은 항해를 강행하고자 하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게 됩니다. 어쩌면 당연합니다. 바울보다는 전문가였던 선장의 말을 믿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꾀를 써서 로마에 천천히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곧 후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아름다운 항구는 겨울을 나기에 적합하지 못한 곳이므로, 거의 모두는, 그 곳에서 출항하여, 할 수 있으면 크레타 섬의 항구로 서남쪽과 서북쪽을 바라보는 뵈닉스로 가서 겨울을 나기로 뜻을 정하게 되었고, 그렇게 항해를 강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의 경고와는 달리 때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어오므로, 백부장과 선장은 뜻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닻을 올리고서, 크레타 해안에 바싹 붙어서 항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백부장과 선장은 자신들이 폭풍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서, 유라굴로라는 폭풍이 섬쪽에서 몰아쳤다. 배가 폭풍에 휘말려서, 바람을 맞서서 나아갈 수 없으므로, 우리는 체념하고, 떠밀려 가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27장 14~15절, 새번역>
떠밀려 가던 배는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쪽을 따라 밀려 갈 때에, 다행히 그 섬이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으므로 간신히 끌고 가던 거룻배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원들은 거룻배를 갑판 위에다가 끌어 올리고 밧줄을 이용하여 선체를 동여 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리비아 근해의 모래톱으로 밀려들까 두려워서, 바다에 닻을 내리고, 그냥 떠밀려 가게 내버려 둡니다. 선원들은 계속되는 폭풍에 몹시 시달리게 되자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짐을 바다에 내던지게 되었고, 3일이 더 지나서는 자기네들 손으로 배의 장비마저 내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쯤 되니 율리오 백부장도 바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대해서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바울이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인지 궁금해서 물어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폭풍 속에서 계속 머물자 배에 탄 모든 이들은 이제 희망을 점점 잃게 되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거센 바람만이 심하게 불었으므로, 우리는 살아 남으리라는 희망을 점점 잃었다. <사도행전 27장 20절, 새번역>
설상가상 사람들은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입니다. 일촉즉발의 순간, 배에는 두려움과 긴장감이 가득 했습니다. 바로 그 때, 정적을 깨고 바울이 서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에 바울이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 여러분은 내 말을 듣고, 크레타에서 출항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이런 재난과 손실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기운을 내십시오. 이 배만 잃을 뿐,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 21~22절, 새번역>
갑자기 죄수 한 사람이 일어나 이런 말을 하면 ‘네’하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바짝 긴장하고 있을 배에 오히려 찬물을 끼얹어 더 난폭하게 만들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어서 이야기합니다.
바로 지난밤에, 나의 주님이시요 내가 섬기는 분이신 하나님의 천사가, 내 곁에 서서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반드시 황제 앞에 서야 한다. 보아라, 하나님께서는 너와 함께 타고 가는 모든 사람의 안전을 너에게 맡겨 주셨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7장 23~24절, 새번역>
사실 바울도 두려웠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편으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약속을 지키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 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 <사도행전 23장 11절, 새번역>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눈에 보이는 폭풍과 죽음이 드리워진 배를 보고 있자니 바울 역시 자꾸만 믿음이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욱 기도에 열중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며칠째 하나님이 아무런 대답도 없으셨습니다. 그렇게 바울 역시 희망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딱히 새로운 말씀을 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셨던 말씀을 더욱 확실하게 붙들도록 동일한 내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반드시 황제 앞에 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바울뿐 아니라 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희망이 사라져감과 동시에 믿음마저 사라져가고 있었던 바울은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어나 이렇게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어떤 섬으로 밀려가 닿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 25~26절, 새번역>
하나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하나님의 음성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확신에 차서 곧 어떤 섬으로 밀려가 닿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까요? 아니면 여전히 죄수 한 명이 이야기하는 쓸데없는 소리라고 외면하게 될까요?
폭풍에 시달린 지 14일째 밤이 되었을 때에, 배는 아드리아 바다를 떠밀려 다녔습니다. 바울의 선포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빈 말’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바로 그 순간 선원들은 배가 어떤 육지에 가까이 이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물 깊이를 재어보니 스무길, 열다섯 길로 점점 얕아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 암초에 걸리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고물에서 닻 네 개를 내리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침을 기다리면서 선원들은 자신들만 살 궁리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배를 버리고 달아나려고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척하면서 바다에 거룻배를 풀어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바울이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백부장과 병사들에게 말하였다. "만일 이 사람들이 배에 그대로 남아 있지 않으면, 당신들은 무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병사들이 거룻배의 밧줄을 끊어서 거룻배를 떨어뜨렸다. <사도행전 27장 30~31절, 새번역>
배에는 분명히 선원들이 필요했습니다. 이 부분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두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안전하게 로마로 갈 것이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원들이 도망가려고 하는 것을 왜 막았을까요? 설사 도망가더라도 하나님께서 선원들을 대신하여 안전한 항해가 되도록 인도해주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선원들도 필요했습니다. 누구보다 배를 잘 알고 있는 선원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그렇게 선원들이 도망가게 되면 선원들의 목숨이 위험해 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 배에 있는 모든 인원들을 바울 손에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선원들을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선원들은 거룻배가 끊어진 것을 보고서 망연자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훗날 이 항해를 돌이켜보면서 그 배를 타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에 대해 분명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윽고 아침이 밝아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바울의 말에 따라 백부장과 병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자 이제 배에 탄 모두가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율리오 백부장이 가장 먼저 바울의 말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더욱 더 확신에 차서 이제는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날이 새어 갈 때에,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면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오늘까지 열나흘 동안이나 마음을 졸이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고 지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목숨을 유지할 힘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아무도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빵을 들어,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떼어서 먹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27장 33~35절, 새번역>
도무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감사를 드리고 먹기 시작할 수 있는 것인지, 그것도 죄수 중 한 사람이었던 이가 말입니다. 바울의 얼굴에서는 걱정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이 확신한 찬 평안한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바울의 얼굴과 행동을 보면서 바울이 한 이야기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대로 음식을 먹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용기를 얻어서 음식을 먹었다. <사도행전 27장 36절, 새번역>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도전이 되는 구절입니다. 말과 행동의 일치를 통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희망과 용기를 부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행일치의 삶이야 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토대에 바로 ‘감사’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감사가 주위를 변화시킵니다. 그 감사가 희망과 용기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언행일치를 통하여 방금 전까지 지옥이었던 배를, ‘만찬’이 있는 아침밥상이 되도록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배에 탄 276명의 사람들은 모두 배부르게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식량을 바다에 버려서 배를 가볍게 하였습니다. 이것 또한 놀라운 행동입니다. 이제 폭풍우에서 벗어나서 육지에 다다를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식량을 보존하는 것보다 배를 가볍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는 백부장뿐 아니라 선장과 선원들도 바울의 말에 힘을 실어주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배가 분명히 육지에 다다를 것이라는 바울의 도무지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말이 이제 현실이 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모두가 함께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희망을 품은 대로 드디어 저 멀리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새니, 어느 땅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래밭이 있는 항만이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배를 거기로 몰아 해변에 대기로 작정하였다. <사도행전 27장 39절, 새번역>
이제 모두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선포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기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죽은 사람 살려주면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인가 봅니다.
닻을 모두 끊어서 바다에 버리고, 동시에 키를 묶은 밧줄을 늦추었다. 그리고 앞 돛을 올려서, 바람을 타고 해안 쪽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두 물살이 합치는 곳에 끼여들어서, 배가 모래톱에 걸렸다. 이물은 박혀서 움직이지 않고, 고물은 심한 물결에 깨졌다. 병사들은 죄수들이 혹시 헤엄 쳐 도망할까봐, 그들을 죽여 버리려고 계획하였다. <사도행전 27장 40~42절, 새번역>
배는 순식간에 환호의 순간에서 아수라장으로 변하게 됩니다. 천천히 안전하게 접근하면 될 터인데, 너무 오랜만에 본 육지라서 그런지 서두르다가 그만 배가 부서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순간에도 차분하게 모두가 살 생각을 해야 하는데, 병사들은 죄수들이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죄수들을 먼저 죽여 버리려고 계획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죽음의 공포로 가득한 폭풍 속에서는 한 배를 타고 서로가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다면, 이제 모든 어려움이 끝나자마자 다시 각자도생의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죄수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이 오해한 것입니다. 병사들은 자신들을 안전하게 이곳까지 데리고 올 수 있게 해준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바울의 언행일치를 통해 완전히 달라진 한 사람이 영웅처럼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을 구하려고 병사들의 의도를 막고, 헤엄 칠 수 있는 사람들은 먼저 뛰어내려서, 뭍으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은 널빤지나, 부서진 배 조각을 타고 뭍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두 뭍으로 올라와 구원을 받게 되었다. <사도행전 27장 43~44절, 새번역>
이렇게 기지를 발휘한 백부장 때문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이 말씀해 주신대로 모두가 뭍으로 올라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은 마치 함께 타고 있는 듯 정말 긴장감과 박진감, 현장감이 넘치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그 긴박한 기록보다도 더 중요하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으로, 이 사도행전 27장 강해를 관통하고 있는 단어는 바로 ‘언행일치’입니다. 폭풍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했던, 바울을 통하여 이 폭풍 속에서의 항해가 절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이 ‘유라굴로’를 만나서 이렇게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살 수 있었던 적은 아마 선장과 선원들도 처음 경험해 본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을 경험하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몸소 실천한 ‘언행일치’의 그리스도인 바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언행일치’를 통해 영향을 받은 백부장의 기지도 한 몫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백부장이 처음부터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이런 고난은 당하지 않아도 되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백부장은 이제부터라도 더욱 더 바울의 말을 신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날로 커지기를 원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소위 믿음이 ‘증폭’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 27장 강해를 통해 하나님이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언행일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들었던 말씀을 말하고, 말한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믿음은 정말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왜 더디게 성장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 말씀을 실천할 마음을 가지지 않기도 하고, 말씀을 삶으로 옮겨가지 못하기도 합니다. 의도적으로 언행불일치를 시도하면서도 그럴싸한 변명을 대며 합리적인 신앙인인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기 때문에 믿음은 늘 더디게 성장하거나 늘 제자리걸음인 것입니다.
폭풍 속에서 감사기도를 올릴 수 있겠습니까?
이집트 노예가 총리가 될 것을 꿈꿀 수 있겠습니까?
여리고 성을 정말 돌기만 해도 되겠습니까?
300명을 데리고 전투에 나가도 되겠습니까?
정말 이 재미난 세상에서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십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이 세상을 포기할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절망과 공포와 두려움과 숨 막히는 긴장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들은 대로, 선포한 대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질문 드립니다.
당신은 믿음이 성장하길 소망하고 계십니까?
그 날의 바울이 오늘의 당신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날 바울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여전히 오늘도 변함없이 저와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오늘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잊지마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그러니 너의 믿음을 내게 보이라!’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할 ‘언행일치’ 신앙의 기본은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언행일치’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야 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장 17절, 개역개정>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선포해야 합니다. 나의 이야기에, 나의 경험에, 나의 방법에 하나님의 말씀을 희석해서는 안 됩니다. 들은 말씀 그대로 선포해야 합니다.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디모데후서 4장 2절, 새번역>
그리고 말씀을 듣고 선포한 후에는 가장 먼저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할 사람은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가 선포한 말씀대로 사는지 체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에게 먼저 적용하십시오. 내가 들은 말씀대로 선포하고, 말씀대로 사는지, ‘언행일치’를 이루고 있는지 먼저 확인하셔야 합니다. ‘언행불일치’가 보인다면 나부터 행동을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서 2장 14절, 개역개정>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당연히 우리의 믿음은 매일매일 자라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사도행전 27장 강해를 통해 하나님께서 좋은 ‘증폭기’를 하나씩 우리에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바로 ‘언행일치’라는 증폭기입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9월, 첫 번째 주일을 보내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증폭기를 장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이 9월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언행일치’가 시작되는 첫 시작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행전 27장 강해를 통하여 각 지역에서 ‘바울’들이 나타나기를 바래봅니다. ‘언행일치’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9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통하여, 우리가 속해있고, 우리가 밟는 모든 땅에 희망과 용기가 생겨나기를 간절하게 소망해 봅니다. 우리의 ‘언행일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시게 되어 절망이 희망이 되고, 눈물이 기쁨이 되며, 한숨이 감사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우리 모두 믿음의 승마선수가 됩시다.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됩시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7장 24~25절, 새번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