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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렘 띠나술라논 태국 추밀원 의장
Prem Tinsulanonda
푸미폰 국왕의 복심이자 태국 보수정치의 거두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a, เปรม ติณสูลานนท์, [RTGS 표기] Prem Tinnasulanon) [예비역] 장군은 1920년 8월 26일생으로, 1980년 3월 3일부터 1988년 8월 4일 사이에 태국의 총리를 역임한 인물이다. 현재는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태국 국왕의 자문기구인 "태국 추밀원"(Privy Council) 의장을 맡고 있다.
"2006년 군사 쿠테타"로 실각한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전 총리 및 그 지지자들은 쁘렘 의장이 쿠테타를 기획했다며 비난했으며,(주1) 이어진 수라윳 쭐라논(Surayud Chulanont) 총리의 과도정부의 구성에도 그가 관여했다고 주장했다.(주2) 하지만 탁신 총리를 실각시킨 군사정권은 쁘렘 의장이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설을 부인했다.(주3)
쁘렘 띠나술라논 장군은 "추밀원" 의장으로서 푸미폰 국왕이 주창한 이념들을 증진시키고 왕실사업들을 수행하는 데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때때로 그의 언행이 푸미폰 국왕의 의중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는 항상 태국사회가 국왕의 조언을 받들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쁘렘 의장 스스로도 교육, 마약사용 억제, 빈곤층 구호, 국가통홥과 관련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쁘렘 의장은 고향이 태국 남부지방 출신이어서, 태국 남부 이슬람 반군 문제의 해결에 관해서도 개인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쁘렘 띠나술라논 장군은 태국 남부의 송클라(Songkhla, 송카) 도에서 출생했다. 그는 송클라 시에 위치한 "마하 워치라웃 중고등학교"(Maha-Vajiravut Secondary School)에 입학했고, 방콕에 위치한 "수완꿀랍 위타얄라이 학원"(Suankularb Wittayalai School, โรงเรียนสวนกุหลาบวิทยาลัย: 장미정원 고교)을 졸업했다.
쁘렘은 1941년 현재의 "쭐라쩜끌라오 왕립 사관학교"(Chulachomklao Royal Military Academy: CRMA) 전신인 "왕립 태국육군 사관학교"(Royal Thai Army Academy)를 졸업했다.
쁘렘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한 후, 기갑병과 소대장으로서 군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점차로 승진하여, 1959년 기갑학교장으로 임명되면서 대령으로 진급했다. 1973년에는 기계화 보병 사령관이 되었다. 1974년에는 중장으로 승진하면서 "제2군구 사령관"에 임명됐다. 1978년에는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면서 "왕립 태국육군"(RTA)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1959년 "헌법 초안 위원회" 위원으로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968-1971년에 국회의원을 지냈고, 1976년에는 타닌 끄라이위시안(Tanin Kraivixien) 총리의 자문위원으로 임명됐다. 이후 끄리양삭 처마논(Kriangsak Chamanan 혹은 Kriangsak Chomanan) 총리 밑에서 1977-1978년 사이에 내무부 차관을 역임했고, 1979년에는 국방부장관에 임명됐다.
쁘렘 장군은 "태국 공산당"(CPT)과의 협상을 최초로 시작한 인물로 유명하다. 결국 공산반군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져,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비롯한 많은 공산당원들이 귀향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치로 1980년대에 벌어진 정부군과 공산반군의 싸움은 종식되었다.
2. 태국 총리 시절 : 1980-1988
1980년 끄리양삭 처마논 총리가 사임한 직후, 쁘렘은 총리에 지명됐다. 그는 3기에 걸쳐 정부를 구성해 이끌었는데, 때때로 연립정권을 구성했던 정당들을 교체하기도 했다.(주4)
연립 파트너 정당들: Democrat, Chart Thai, 그 외에 Siam Democrat, Ruam Thai, Social Democrat 등의 여러 군소 정당들.
주요 야당: Social Action, Prachakorn Thai
제3차 쁘렘 내각 (1981.12.9. - 1983.4.30.)
연립 파트너 정당들: Social Action, Democrat, Chart Thai, 그 외의 여러 군소 정당들.
주요 야당: Prachakorn Thai
제43기 행정부 (1983.4.30. - 1986.8.5.)
제4차 쁘렘 내각 (1983.4.30. - 1986.8.11.)
연립 파트너 정당들: Social Action, Democrat, Prachakorn Thai, National Democrat (1985년에는 Progressive party로 교체)
주요 야당: Chart Thai
제44기 행정부 (1986.8.5. - 1988.4.28.)
제5차 쁘렘 내각 (1986.8.11. - 1988.4.28.)
연립 파트너 정당들: Democrat, Chart Thai, Social Action, Rasadorn
주요 야당: Prachakorn Thai, United Democratic, Ruam Thai, Community Action, Progressive
(주4) Suchit Bunbongkarn, "The Military in Thai Politics, 1981-1986", the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1987.
3. 쿠테타 시도의 극복
1981년 4월1-3일 사이에 "영 턱스"(the Young Turks: '개구장이들'이란 의미)라고 불리는 군부 내 대령 그룹들이 방콕에서 쿠테타를 시도했다. 총리였던 쁘렘은 푸미폰 국왕 및 시리낏(Sirikit) 왕후를 호위하여 나콘 라차시마(Nakhon Ratchasima: 코랏)으로 이동한 후 쿠테타 지도부와의 협상을 시도했다. 쿠테타 세력의 주요 지도자들은 결국 4월3일에 자신들의 "만우절 쿠테타"를 끝내기로 동의했다. 일부는 해외 망명을 허락받았다.
1985년 9월 9일에도 또다른 쿠테타가 발생했다. 이 쿠테타의 지도부는 1981년 쿠테타에도 가담했던 이들이었다. 쿠테타 병력이 정부의 정보센터에 총격을 가하면서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태에서 호주인 언론인 및 그와 함께 있던 음향기사가 사망했다. 이 쿠테타를 지원한 이는 사업가였던 에까윳 안찬붓(Ekayuth Anchanbutra, เอกยุทธ อัญชันบุตร)이었는데, 쁘렘 정부가 금융범죄를 금지하는 새로운 입법안이 통과시키자 해외로 달아났던 인물이다. 쿠테타 발발 당일 오후가 되지 반군들은 정부에 투항했다. 에까윳을 포함한 대부분의 쿠테타 지도부는 해외로 도피했다.
4. 암살시도
쁘렘은 1982년에만 최소 4차례의 암살 표적이 되었다. 암살시도에 대한 수사 결과, 1981년 쿠테타에 가담했던 장교들과 쁘렘의 공산당 사면 정책에 반대하는 전직 공산당원들이 연구되어 있었다. 1991년에 발생한 쿠테타 지도부는 이러한 일들을 자신들이 봉기한 전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5. 공산 반군과의 협상
주로 "태국 공산당"(CPT)이 이끌던 태국의 공산반군은 1960년대부터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1976년 10월 "탐마삿 대학"(Thammasat University)의 학생시위가 학살사태로 끝난 후, 학생들이 공산당으로 합류하면서 북동부 농촌지역에서 반군들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쁘렘 총리는 1980년대에 공산 반군들에 대한 정책을 바꿨다. 쁘렘은 먼저 중국에 특사를 파견하여 태국 공산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달라고 설득했고, 중국은 이에 동의했다. 그리고 법률적으로 "공산 테러리스트"라 불리던 모든 공산 반군들에 대해 사면을 시키는 새로운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정글로 들어갔던 수천 명의 전직 학생들이 공산당의 강력한 근거지를 이탈했다.(주5)
1988년 정치 소요가 끝난 후, 쁘렘은 의회를 해산한 후 새로운 총선실시를 요구했다. 총선 후 승리한 정당들의 지도자들이 쁘렘에게 계속해서 총리를 맡아달라고 했지만, 쁘렘은 이를 사양했다. 결국 "찻타이 당"(Chart Thai Party) 당수인 찻차이 춘하완(Chatichai Choonhavan)이 새로운 총리로 선출됐다.
1998년 9월 4일, 푸미폰 국왕은 "추밀원" 위원에서 물러나는 산냐 탐마삭(Sanya Dharmasakti, Thai สัญญา ธรรมศักดิ์) 전직 총리의 후임으로 쁘렘 장군을 지명했다.
쁘렘은 1992년 5월의 정치 위기인 "피의 오월"(Black May: 검은 오월) 와중에서 군대의 시위진압을 중단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바 있는데, 그러한 움직임은 폭력과 유혈을 종식시키고자 한 푸미폰 국왕과 상의한 것이었다.
7. 교육사업
쁘렘 장군은 "쁘렘 재단"(Prem Foundation)을 비롯하여 여러 사회사업을 적극적으로 벌이고 있다. 그는 2001년 8월에 치앙마이(Chiang Mai) 도에 "쁘렘 띠나술라논 국제학교"(Prem Tinsulanonda International School: PTIS)도 설립했다. 이 학교는 110만평 이상의 넓다란 캠퍼스를 갖고 있고, 36개국에서 온 400명 이상의 학생들이 60여명의 교사들과 함께 공부하는 보딩스쿨이다. 또한 아시아에서는 드물게 국제 바칼로레아 자격을 수여하는 교육기관이기도 하다.
(동영상) PTIS의 홍보 동영상.
8. 2006년 3월, 쁘렘과 탁신의 정치적 대립
2006년 3월 9일 탁신과 "위헌적 인사"(unconstitutional figure: 쁘렘을 지칭)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는 와중에, 방콕에 위치한 쁘렘 의장의 자택 바깥에서 소형 폭탄이 폭발했다. 지나가던 영국인 관광객을 포함하여 2명이 경상을 입었다. 경찰은 폭탄이 자택 입구의 경비실이 포착하지 못하는 곳에 위치한 석조 벤치 밑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경호원들은 자택 내에 있었다. 주변에 주차된 차량 3대도 파손됐다. 탁신 총리는 이 공격과 자신은 무관하다고 말했다.(주6)(주7)
(사진: Pattaya Mail) 2003년에 거행된 관광스포츠부 장관이었던 손타야 쿤쁠름(sonthaya khunpluem: 신랑)의 결혼식 모습. 뒷줄의 소파에는 좌로부터 쁘렘 띠나술라논 추밀원 의장, 탁신 친나왓 당시 총리, 총리를 지낸 차왈릿 용짜이윳(Chavalit Yongchaiyudh) 장군의 모습이 보인다.
쁘렘은 결코 탁신의 이름을 거론한 일이 없지만, 그가 탁신 정부와 논쟁을 벌인 것은 2005년부터 불거지기 시작했다. 군부에 대해 여전한 영향력을 가진 쁘렘 의장은, 탁신이 군 지휘관들의 승진에 관여한 일을 비판했다. 군 장교들은 공무원이기 때문에 그 임명에 있어서 정치적 영향력이 발휘돼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탁신 총리는 자신의 큰 사촌인 차이야싯 친나왓(Chaiyasith Shinawatra) 장군을 육군사령관에 임명했다. 하지만 차이야싯 장군은 다른 방법으로는 그 자리에 오르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이후 탁신과 그 지지자들은 "헌법의 바깥에 있는" 한 인사(쁘렘)는 태국 정치에 "간섭"하는 일에서 물러서라며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2005-2006 태국 정치위기" 중에, 쁘렘은 스스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여러 대중강연들을 통해 정치인들이 군대를 통제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며 열렬히 비판했고, 대중들이 나서서 부정부패에 저항하고 권익을 지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러한 쁘렘의 움직임이 탁신 총리와 그 행정부를 공격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탁신 총리는 2006년 6월 관리들을 대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연설을 했다. 그는 "초 헌법적인 권위, 즉 인물이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그 인사가 자신의 정부를 해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탁신은 결코 어떠한 이름도 거론하지 않았지만, 탁신의 지지자들은 그 인사가 바로 쁘렘이라고 추정했다.
"2006년 쿠테타"가 발발하자, 탁신의 지지자들은 쁘렘이 탁신 총리를 몰아내기 위해 배후에서 기획한 일이라며 비난했다.(주1) 쁘렘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추밀원"의 위원인 수라윳 줄라논 장군이 과도정부 총리가 되도록 지원했고, 내각을 구성하는 데도 한마디 거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판자들은 군사정권 하의 과도내각이 전적으로 "쁘렘의 아이들"(Prem's boys)로 조직된 것이라고 비판했다.(주8)(주9)(주10)
2006년에 출판된 한 인터뷰 기사에서, 쁘렘은 자신이 가진 태국 고유의 민주주의라는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가 생각한 제도 속에서는 국왕이 공적 이익의 궁극적 보호자이며 군 통수권을 갖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쁘렘은 경마를 빗댄 은유적 표현으로 군주, 총리, 군대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경마에는 마굿간이 있고, 마굿간의 소유주가 경주마도 소유한다. 기수는 경주를 할 때만 와서 말을 타는 것이다. 하지만 기수는 경주마의 소유주는 아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매우 쉬운 일이다."(주11)
쁘렘이 "2006년 쿠테타"와 그에 이어진 과도정부에 책임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군사정권 대변인 한사람이 나서서 쁘렘이 쿠테타 배후가 쁘렘이 아니라고 부인하기까지 했다.(주12) 이 와중에서 경찰 특수국장인 티라뎃 롯폿홍(Theeradech Rodphot-hong) 경찰 중장은, 온라인 상에서 벌어진 쁘렘에 대한 반대운동은 <왕실모독 처벌법>의 적용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표를 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운동가들에 대해서도 국론분열을 야기할 수도 있는 운동을 자제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주13)
2007년 7월 22일, 대부분 탁신 지지자들로 이뤄진 수천 명의 시위대가 쁘렘이 추밀원 의장을 사임하라고 요구하면서 자택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과격해지자 경찰은 이 집회를 진압하고 몇몇 지도부를 체포했다. 체포된 이들 중에는 실각한 탁신 정부에서 일했던 과도기의 국가 인권위원장과 전직 판사 한명도 포함되어 있었다.(주14)
이후 군사정권 지도자인 손티 분냐랏낀(Sonthi Boonyaratklin) 장군이 쁘렘을 방문하여 시위사태에 대해 사과했다. 다음날에는 과도정부 총리인 수라윳 쭐라논이 국무위원 34인과 함게 쁘렘을 방문하여 사법정의를 지키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수라윳 총리는 시위대들이 태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제도(군주제를 의미)를 폄훼하려 했다며 비난했다.(주15) 정부 대변인인 용윳 마얄랍(Yongyuth Mayalap)은 쁘렘은 시위대가 주장하듯이 쿠테타 배후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쁘렘 의장의 말을 빌어, 쁘렘은 반복적으로 주장되고 있는 쿠테타 배후설이 근거없는 것이며 선동을 위한 것이라 말했다고 전했다.(주16)
(역주) 2006년 쿠테타의 배후에 관해서는 현재 더 많은 정보들이 폭로되어 있는 상태이다. 본 카페 내의 다음 게시물들을 참조하라.
쁘렘은 친-탁신계 "레드셔츠"(UDD) 세력에 대해 명예훼손 혐의로 사법적 고발을 하려고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쁘렘 의장의 한 측근 인사는, 쁘렘이 증거들을 수집했으며 핵심 지도부 9인에 대해 조만간 명예훼손죄로 고발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라 발언하기도 했다.(주17)
군부에 대한 쁘렘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2007년 8월 1일, 아리 웡아랴(Aree Wongarya) 내무부장관과 반얏 찬세나(Banyat Chansena) 부장관은 쁘렘과 대화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쁘렘은 태국 남부 무슬림 반군 문제에 대한 해법을 조언하고, 피해자 가족들을 정부에서 추진 중인 "산짜이 타이 수짜이 정책"(Sarn Jai Thai Su Jai Tai campaign)에 맞춰 지원하라고 말했다.(주18)
(사진: The Nation) 2010년 10월 14일(목), 쁘렘 띠나술라논 추밀원 의장이 "육군 클럽"(Army Club)에서 열린 "제14회 산짜이 타이 수짜이 자선사업" 개막식에 참석하여 행사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는 군과 경찰 수뇌부들도 함께 했다. 우로부터 쁘렘 의장, 수라윳 쭐라논 추밀원 위원(전 과도정부 총리)이 앉아 있고, 한 자리 건너에 쁘라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육군사령관이 앉아 있다.
10. 쁘렘과 2009년 레드셔츠 시위
"2009년의 레드셔츠들(UDD)의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기 전에, 탁신 전 총리는 쁘렘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거론했다. UDD 지도부는 쁘렘이 정치에 간섭한다고 맴렬히 비난하면서, 그를 "암마땨"(ammatya: 배후), "왕실의 꼭두각시"(a royal puppet), "귀족주의자"(aristocrat)라 불렀다. UDD는 쁘렘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가 아니라 국왕이 임명한 인물이기 때문에 하나의 정치적 위협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쁘렘은 이러한 공격에 대해 단 한번도 반응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