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터의 고뇌』. 강연 듣고 올린 학생 글. 훌륭합니다. 논술시험이었다면 백점입니다. 논술 출제도 해보고 채점도 해보았죠. 완전한 서술입니다. 논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 나아가 공부 잘하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핵심(어) 발견하기'에 있습니다. 핵심을 발견해내고 핵심을 놓치지 않는 것. 그게 요체입니다. 텍스트를 읽을 때이든 누구 말을 들을 때이든, 듣기 시험에서든, 그리고 그 영역이 국어이든 영어이든, 어쩌면 수학, 과학도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그 안에서 핵심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것, 그것은 해당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의 요체랄 수 있습니다.
핵심을 어떻게 발견하나요? 언어텍스트의 경우 반복되는 용어나 단어, 또는 그 의미군에 속하는 것들이 핵심어입니다. 베르터의 고뇌의 경우, 고뇌, 고통, 불행 같은 것이겠죠. 나아가 그것과 2원적 대립관계에 있는 경쾌함, 행복 같이 역시 핵심어들이고요. 그 용어가 반복되는 것을 눈치 챘으면 그 단어들이 나올 때마다 조금 더 긴장하고, 그와 함께 나오는 문장들을 메모하는 겁니다. 핵심어와 결합된 어휘나 문장이 그것의 내용을 설명하는 술어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이 연습 잘하면 .... 공부 잘합니다. 쉽죠? 참 쉽습니다. 연습이 조금 어렵고 그것을 습득하고 자기 몸에 체화하는 것은 조금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일단 체화가 이루어지면.... 다음부터는 지 몸이 저절로 알아서 그 작업을 합니다. 이게 체화되지 않으면, 산만하죠... 공부 잘하기 어렵습니다. 산만한 사람... 느리게 하는 연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산만한 사람, 대개 급한 성격 사람일 경우 많은 듯하니까요.
하지만 제가 ‘공부 잘하기’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육에서 아쉬운 점, 창의성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창조성이기도하고요. 물론 이것도 핵심 파악 능력, 그 능력의 체화와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창의성의 체화는 사람이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자연'이 가르쳐준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창조성으로서의 창의성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고 그것은 생명의 창조 원리에 충실함으로써 가능해지기 때문이죠.
우리 사회에서 창의성은 상당히 모호한 개념입니다. 돈벌이를 위한 얄팍한 눈속임을 창의성이라거나 무조건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걸 창의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대개는 창의성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채로 그냥 멋있는 말 같아 갖다 붙인 말에 불과하죠. 창조경제는 사람을 살리는 경제일 것입니다. 돈 벌이에 눈이 어두워 사람을 죽이는 경제는 파괴경제입니다. 파괴에 창조를 붙인다고 파괴가 창조로 변하진 않습니다. 그냥 거짓말이죠.
제가 생각하는 한, 창의성의 핵심은 생명을 살리는 원리로 돌아가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파괴한 자연과 우주의 지배적 원리인 자연성을 다시 발견해내고 보존하며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재탄생이란 의미를 갖는 르네상스는 그래서 모든 시대에 적용되어야 할 창조성의 은유죠. 그리고 그 구체적 수단은 자연에 대한 관심, 나아가 자연에 대한 무지를 벗고 그 원칙을 체화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건 자연 체화를 위한 전제에 해당합니다. 아이들은, 그리고 모든 인간은 창조의 질서를 훼손당하지 않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원리를 체화해야 합니다. 창조성은 바로 그 자연 체화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일 거고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천재인 것은 친구도 없던 빈치 마을의 자연을 엄청난 호기심으로 탐구하며 자연의 원리를 체화한 탓이겠죠. 일단 그것이 이루어진 후에는 모든 사물을 창조적 자연의 방식으로 보았을 테고요. 부처나 예수가 성인인 것은 그들에게 자연의 운행 원리가 체화되 그것이 자신과 사람 사이 관계에서 실천으로 나타났던 것은 아닐지... 유추가 좀 과했나요? 하지만 그 경지가 범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일 터여서 그렇지 원리가 잘못된 것은 아닐 겁니다. 자연의 힘을 신뢰하기, 손해날 것 없습니다.)
앞의 글 “문창극과 게으른 인문학”에서 저는 ‘인문학’을 인간의 존엄성 같은, 사람이 살며 새기고 지켜져야 할 근본 원칙들을 확인하는 학으로 규정했지요. 그리고 ‘인문학적 상상력’을 한 사회에서 인간을 차별하는 식의 인문적 원칙이 훼손될 경우 그것의 회복과 정립을 위해 노력하는 능력이라 했고요.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성은 자연으로, 자연 창조의 원리로 돌아가는 데 있을 것입니다.
짧게 한마디만 더 하죠. “오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은, 컴퓨터 같이 정해진 답을 똑같이 반복하지 않는 어쩌면 창조적일 “능력”에 대해서요. 컴퓨터 같이 소위 “정답”을 정확하게 반복하지 않고, 컴퓨터가 오류라고 규정하는 답을 제시하는 ‘능력’이 창의성의 중요한 요소라는 걸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 열심히 오류를 저지르자’는 건 아닙니다. 다만 오류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에 대한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류를 통해 자신이 경험한 대상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테니 사회와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계기도 될 것이고요. 무엇보다 오류라는 규정이 사회적인 것이니 혹, 그 오류가 자연 질서에 더 부합하는 진리일 수도 있고요.
오류를 찬양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오류나 실수 때문에 기죽거나 스스로를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비하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큰 창조적 지혜는 삼라만상이 스스로 존귀하며 우주의 움직임, 살아있음에 기여하며, 그런 의미에서 쓸모있다는 의식을 체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원리에 어긋나는 사회와 세상에 부정적 반응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을 제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 능력이 창조적 지혜의 근본이요 실천인거죠.
오류가 문제라고 ‘오류의 능력’을 단순히 무능으로만 치부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컴퓨터보다 열등할 수밖에 없겠죠. 그런 의식을 강요하는 경직된 사회에서 ‘지식인’은 ‘편협한 인간’일거고요, ‘지도자’는 ‘자기주장만 하는 사람’의 호칭일 겁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경제를 창조경제라 우기면 안 되죠. 사람을 죽이는 일에다 창조를 붙이면 .... 말이 화냅니다. 그게 혼돈이죠. 말이 혼돈 상태에 빠지면 세상이 혼돈에 빠집니다. 그건 죽음으로 가는 길이죠.
창조적일 필요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으로 다시 탄생하게 하는 ‘르네상스’에 기여한다는 의미에서요. 자연으로 들어가야죠. 자연을 회복해야죠. 밖에 있는 자연 뿐 아니라 내 안의 자연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자연의 창조성을 우리 몸에 체화해야겠습니다. 우리 삶에서는 그게 핵심입니다. 자연 체화, 자연 회복, 창조 상태의 사람 회복, 회복!!!!! 회복!!!
첫댓글 학교때 서양사 교수님이 항상 말씀하셨던 "자연" 이라는 말을 듣고, 그 단어와 의미를 제가 참 좋아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교수님도 독일에서 유학했었던 것 같다고, 제 친구랑 옛기억을 되짚어 보기도 했고요 ㅎㅎ 이 글도 퍼갑니다 ^^ 핵심 짚어내는 글 읽기, 쓰기 방법 팁도 주시고, 감사합니다.
이거슨 그 어떤것과도 바꿀수 없는 글쓰기 비법인거죠!
저두 따로 가져가서 밑줄그으면서 되새김질 하렵니다.
늘 아낌없이 퍼주시는 교수님~
넘 멋지십니다~^^
교수님 감사드립니다...금과옥조로 새겨 저의 글쓰기에도 적용하겠습니다.^^
우왕 이런 비법이~~~읽고 읽고 또 읽고 해서 맛있는 글 써불랍니다...감사합니다 교수님!!!
교수님의 강의와 글에서 늘 "자연"을 발견합니다. 자연을 회복하는 것,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마음 속에 늘 새겨두겠습니다.
글쓰기의 키~~~~ 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