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강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고 안수함
성경본문: 사도행전 16장 1절~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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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베에 이르렀다가 거기서 떠나 그 다음에 도착한 곳은 루스드라입니다. 루스드라는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바울 선생이 지난번 제1차 여행 때 돌로 맞아서 죽었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로 바울 선생이 다시 갱생(更生)해서 지금 큰 사명을 가지고 다시 이 땅을 밟게 됐지만 그런 여러 가지 기억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몸에는 아직도 그 흔적이 굵게 남아 있습니다.
일찍이 청년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유대인의 전통을 무시한다고 해서 그들을 죽이는 일에 가편(可便) 투표를 하고(행 26:1), 또 여러 사람들이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스데반을 돌로 때릴 때에 그 옷을 벗어서 보증으로 혹은 담보로 자기 앞에 놔두게까지 했던 바울 선생으로서는, 자신이 돌로 맞을 때 그때까지 자기에게 굵고 깊게 박혀 있었던 스데반의 인상, 곧 그의 마지막 부르짖는 상태나 그의 숭엄한 상태에 대한 깊은 인상이 되살아났을 듯합니다. 루스드라는 그에게 그런 것을 연상케 하고 연관짓게 하는 자리였습니다.
바울 선생이 그러한 자리에 이르렀을 때, 그때는 자기가 아무 기망(冀望)이 없이 죽고 마는 것 같았지만, 여기서 큰 수확을 얻게 된 것은 디모데라고 하는 젊은 사람을 만나서 그의 여러 가지 가적(家嫡)과 현재의 상태를 바라본 결과, 자기의 여행길에 비서로 혹은 수종자나 동역자로 데리고 가는 것이 좋은 줄로 알고 디모데를 선택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노인 바울과 젊은 디모데가 성경의 기록에 나타난 대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의 매임으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매임으로 매이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때 이래로 바울 선생이 젊은 디모데를 늘 진실로 또한 순결하게 늘 사랑한 증적(證迹)이 성경의 여기저기에 많이 나타나 있는 것을 여러분도 다 아실 것입니다.
디모데가 언제 어디서 예수님을 믿게 됐는가, 어디 사람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분명히 말하기 어려우나 대개 루스드라 사람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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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디모데는 지난번 제1차 여행 때 바울 선생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었을 듯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유대 여자이고 아버지는 헬라 사람인데, 이렇게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라고 한 것을 보면 바울 선생이 제1차 여행 때 데베와 루스드라 지방에서 전도했을 때 복음을 받고 믿는 여자가 된 줄로 생각합니다. 그 이전에 무슨 특별한 기회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우니까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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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에 대해서는 성경을 잠깐만 찾아봐도 많은 것을 볼 수 있지만, 우선 바울 선생과 여행을 떠나기 전 디모데의 상태를 잠깐 찾아보겠습니다. 바울 선생이 디모데를 극진히 사랑해서 이후에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고전 4:17)라고 말한 것을 보면 ‘믿음의 아들’이라고 해서 디모데가 바울 선생의 복음 전파에 의해서 믿음으로 얻은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디모데는 바울 선생의 복음 전파로 믿음이 생겨난 사람인 듯합니다. 또 ”믿음 안에서 참아들 된 디모데“(딤전 1:2)라고도 했습니다. 어떻게 아들이라고 이야기했겠는가 할 때 단순히 연령의 차이로만 그렇게 이야기했다거나 또한 그의 봉사나 그 후에 바울 선생에 대해 아들과 같이 극진하게 베푼 그의 여러 가지 도움이나 수종만을 가지고 아들이라고 했다기보다는, ‘믿음의 아들’이 됐다고 할 때는 믿음에 의해서, 즉 말씀을 전해서 복음으로 낳은 자식이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도 ‘믿는 유대 여자’라고 해서 제1차 여행 때 바울 선생이 전도를 해서 믿은 듯한데, 그때로부터 한 3 년에서 5 년 사이에 이 땅을 다시 찾아온 것이니까 이제는 벌써 믿음을 가지고 자라 있을 때입니다. 어머니의 이름은 유니게이고 그 어머니의 친정어머니는 로이스인데, 디모데후서 1장 5절에 “네 어머니 유니게와 네 외조모 로이스 안에 있던 그 거짓이 없는 믿음이 네 안에도 있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디모데는 그 거짓이 없는 믿음이 들어간 청년이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4, 15절에서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하고 말한 것을 보면 디모데는 유대 여자의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히브리 성경을 교육받았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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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전 {사도행전강해 제7권: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제2강]에서.
* <디모데의 회심>이라는 글 제목은 제가 지었습니다.
첫댓글 {양무리 마을} 이른바 “연속적인 중생관 실전 예제”에 등장했던 성경의 인물 가운데 한 분이 바로 ‘디모데’ 선생님이었습니다.
{양무리 마을}<연속적인 중생론>은 ‘회심’을 ‘급격한 회심’과 ‘점진적인 회심’ 둘로 나눕니다. 그리고 ‘순간적인 중생론은 급격한 회심만을 주장하는 중생론이고, 연속적인 중생론은 급격한 회심과 점진적인 회심(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 의미의 중생 사이에 오랜 시간이라는 격차가 있는 회심) 모두를 주장하는 중생론이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디모데 선생님의 경우, ‘김홍전 목사님 이 강설’과 바로 아래 제가 올린 ‘믿음의 씨에 관한 김홍전 목사님 강설’에 비춰보면, ‘급격한 회심(순간 중생)’을 하신 경우일까요, 아니면 ‘점진적인 회심(오랜 시간을 둔 연속 중생)’을 하신 경우일까요?
성경시대는 현재시대와 구원의 서정에 대해서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디모데의 경우는 절반의 유대인(유대인은 모계를 따르지만)으로 경건했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겼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이 기독교인으로 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가 완성된 현재는 유대인과 이방인에서 구원의 서정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구원의 서정의 차이를 잘 분별하는 것을 저는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읽는다고 합니다.
저는 ‘구약성경 시대나 신약성경이 기록되는 시대나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현재 시대나 구원의 서정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대를 크게 구약시대와 (현재 시대를 포함하는) 신약시대로 구별해 생각하고, 다만 이 두 시대의 구원의 서정에서 다른 것이 있다면, 구약 시대는 성신님께서 ‘오실’ 구주에 대한 믿음의 씨를 주입하심으로써 중생하는 시대이고 신약 시대는 성신님께서 ‘오신’ 구주에 대한 믿음의 씨를 주입하심으로써 중생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신 구주에 대한 복음을 듣기 전 유대교인으로서 디모데와 디모데 어머니와 디모데 외할머니의 경건’을 ‘에티오피아 내시와 고넬료와 루디아가 복음을 듣기 전의 경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고넬료에게 성령의 임함의 의미가 없으며, 혹 의미가 있다면 이중세례(second blessing)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구속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어떤 보충적인 사역이 아니라,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역입니다. 님의 견해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분이 없는 구원의 서정이 됩니다.
"믿음의 씨"라는 표현은 중복된 표현입니다. "보혈의 피"라는 표현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요?
“고넬료에게 성령의 임함의 의미가 없으며”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방인으로서 고넬료가 베드로 사도에게 복음을 듣기 전인 유대교인이었을 때 성령의 임함이 있었다는 뜻인지요?
고넬료가 완전하다면 성령 임함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이후 성령의 임함은 성령의 내주를 말하는 구속사적 변화가 있습니다. 오순절 이후 성령의 내주는 확실한 내주입니다. 복음을 듣기 이전에는 성령의 내주가 없었다는 것이고, 성령의 내주가 없으면 구원이라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기 전에 경건하다는 것은 구원받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독특한 구조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구원사의 변이 과정에서만 임시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현재와 동일하게 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전 유대교인으로서 고넬료의 경건을 ‘완전한 경건’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복음을 듣기 전 고넬료를 사도행전 17장 17절 상반절 “회당에서는 유대인들 및 경건한 자들과 함께 토론했고”에서 “경건한 자들”과 같은 선상에서 생각합니다. 바꿔 말씀 드리자면, 복음을 듣기 전 고넬료에게는 “성령의 내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이후 성령의 내주는 확실한 내주입니다.”는 말씀은 ‘오순절 이전 성령의 내주는 확실한 내주가 아니었다.’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 토론이 어려운 점이 있네요,,, 요약하자면,, 저는 1) 구원의 점진성으로 구원의 서정에서 구약과 신약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주에 관련된 것도 있습니다. 이 점이 합의되면 고넬료의 문제는 당연히 해결되는 지엽적인 사안이라 봅니다. 그런데 구약과 동일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고넬료의 문제도 다시 논의되어야 하는 연결된 사안으로 봅니다.
구원의 서정에서 구약과 신약이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인지요? 또한 “성령의 내주에 관련된 것도 있다.”고 하셨는데, ‘구약 성도들 성령의 내주’와 ‘신약 성도들 성령의 내주’는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인지요?
저는 구약 성도들 구원의 서정을 굳이 도식으로 표현하자면 ‘일반 부르심(외소) ->유효한 부르심(내소, 곧 성신님의 내주가 이뤄지는 중생) - 회심 - 성화 ->영화’로 생각합니다.
구약성도들의 구원의 서정은 먼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로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관계가 아닌 믿음의 조상으로써 관계가 있습니다. 물론 구약에서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혈통적 아브라함 후손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기점으로 변화됨을 알아야 성경의 점진성(계시의 점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아담의 시대(노아 시대)와 아브람의 시대가 구분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령의 내주 방식의 차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