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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여행자들의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카푸치노
1.중국 영화의 시작
중국에서 최초로 영화가 상영된 것은 1896년 8월 11일 상하이에서였다.
당시 중국은 서구 열강들의 침탈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고, 제국주의 국가들이
중국 내에 조차권을 하나씩 가질 때마다 중국의 산업경제 체제와 정치권력 체계는
붕괴의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중국 영화사에 반영된다. 1911년 만주왕조의 몰락 이전에도
미미하나마 중국인들의 영화작업이 있었다. 그러나 1911년 이전의 대부분의
영화제작과 상영은 외국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간혹 영화를 보여주었던
상하이 등지의 극장들은 모두 외국인 소유였으며, 최초의 영화 전문관을
개장한 사람도 외국인이었다. 그리고 영화의 제작도 제임스 리칼튼(James Richalton)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1897년 에디슨의 단편 영화를 중국으로 들여왔고,
그 해의 에디슨 회사의 카탈로그를 위해 열 편 이상의 영화들을 찍었다.
이 초기의 작품들은 거의 기록영화나 뉴스영화였으며, 중국에서는 그 어느 것도
상영된 것 같지는 않다고 한다.
중국인들도 점진적으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1903년, 북경에서 중국인
린 츄샤우(Lin Chushau)가 만든 영화가 처음 상영되었으며, 중국 최초의
극영화가 그 이듬해 북경의 펭타이 사진관의 직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러한 초기의 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 영화 제작의 중심이 된
아시아 필름 컴퍼니(Asia Film Company)가 미국인 벤자민 브로드스키
(Benjamin Brodsky)에 의해 그 당시 세워진 것이다. 브로드스키는 1913년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그 회사를 중국인에게 넘겨주었다.
2.제 1세대의 시대(~1949년,중화 인민공화국 수립 이전.)
1949년 10월 1일 중화 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까지 정치,경제적인 격동기에
영화산업은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항일 무장 투쟁기(1937~1945)에
활동한 영화 관계자들은 대부분 5.4 운동에 영향을 받은 중하층 소 부르주아
지식인들이었는데, 이 5.4 운동 세대들이 해낸 전통에 대한 비판과 외국 문물에
대한 개화 등은 중국 공산당 형성에 많은 기초를 마련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1942년 마오쩌뚱이 이들을 가리켜 "전장 없는 영웅들"이라고 부르며 나약한
인텔리겐차를 비난함으로써 이들의 지위는 급속히 쇠락하였다.
3,40년대는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층도 영화를 만드는 예술가들만큼이나
제한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주로 상하이 같은 개항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1949년 이후 영화 예술가들에게는 그들의 지적,문화적 배경을 부인할 것이
요구되었던 것과 동시에 영화관객을 전국적인 범위로 확대하려는 정책이
시행됨으로써 초기의 이러한 제한된 영화인구는 상당히 광범위한 것으로 변화된다.
영화미학적으로 볼 때, 이 시기는 연극과 영화의 유사성이 강조되었던 때로서,
특히 1930년대에는 작가나 연출가 혹은 배우들 자체가 위의 두 예술 쟝르를
겸하거나 넘나드는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1932년 공산당은 문학써클의 전위조직의 하나로서 최초의 영화조직을 건설하였다.
좌익 작가연맹이 영화집단(디아닝 주 Dianying zu)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들이
영화의 대중적인 힘을 정치적 도구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조직에 속한 진보적 영화 지식인들은 당시의 사회문제를 다룬
'진지한' 영화들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의 이러한 변화들의 중요성을
1949년 이후의 시각으로 과장되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의 공산당과
진보적 영화 제작 담당자들이 영화산업 자체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중에야 '진보적' 혹은 '좌익'으로 일컬어진 영화 예술가들도 반드시
당시의 공산당 이데올로기나 당의 지도력에 대해서만 묘사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중요성은 결국 무성영화에서 사운드 영화로의 전환과,
영화제작자-관객의 계급적 변화 같은 기술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발전이었다.
1920년대에 중국 영화 산업은 미국 영화가 거의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29년 중국에서 제작된 영화는 50편을 넘지 못했고, 이 영화들이
경쟁해야 했던 영화시장에는 450편으로 추산되는 수입영화들(이 중 90%가
미국영화)이 있었다. 1933년도 이와 비슷하게, 중국 영화사가 자체적으로
만든 영화는 67편(이 중 14편이 무성영화)이었고, 500편의 미국 영화와
100편의 다른 나라 영화가 수입되었다.
1945년 일본군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까지 중국 본토에서의
영화산업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그곳 특유의 영화를 내놓았다. 제이 레이다
(Jey Leyda)가 말한 것처럼, 그러한 예외적이고 쓰라렸던, 또 어렵고도 때로는
피나는 상황들이, 이전에 나온 영화들보다 우수하고, 동시대의 주류 영화들보다도
우수하며, 또 많은 점에서 중국혁명의 승리 이후에 만들어진 어떤 영화들보다도
우수한, 가장 흥미 있는 불굴의 영화들을 내놓은 것이다. 원시적인 기재들과
내전, 일본의 침공, 기아상태 속에서도 연간 물밀듯이 들어와서 보여지는
헐리웃영화에 영향을 받아, 서구화된 취향이 여기에 가미된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자매꽃Sister Flower>은 공산당과 결합해 있던
좌익 예술가들이 활동하던 밍씽 스튜디오(Mingxing Studio)에서 만든 대중적
장편 영화였는데, 이 영화의 여주인공 후디에는 쌍동이 자매 역할을 1인 2역으로,
서구적이며 현대화된 도시 여성과 전통적인 시골 처녀로서의 이중 역할을
훌륭히 연기해 내었다.
이 영화의 특색이자 당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 영화가 다른 생활방식,
즉 현대와 전통의 다른 특징들을 대조시킴으로써 극적 재미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중국 영화들은 서구의 취향이나 장르,
심지어 음악까지도 그대로 따랐으며, 그래서 1949년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당의 공식 영화 미학으로 확인되기 전까지는 이 모방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무관할 수 없었던 좌익 지식인들의
영화에의 참여는 가장 민족적인 영화의 생산으로 기울었으며, 그래서 당시에
나온 리얼리즘 영화는 비록 멜로드라마의 이야기 구조를 갖기는 했지만 농촌의
피폐상이라든가 도시 빈민의 생활 등의 예를 들어 1933년에 만들어진
<봄누에春蠶>(쳉 부가오 연출)는 누에치는 농부의 삶을 꾸밈없이 묘사함으로써
기록영화의 미학에 가까운 터치로 영화 자체의 강렬함을 더하였다. 이 영화는
5.4운동 세대의 대표작으로서 마오 둔(Maodun)의 단편 소설이 주는 암시를
시각적 표현으로 전화시키는데 성공한 작품이다.
<봄누에>와 함께 1930년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영화는 <신녀神女>
(우 용강 감독,1934)와 <한길大路>(쑨 유 감독, 1934)이다. 창녀의 삶과 죽음을
다루었다기보다는 당시의 외곽지역의 도덕상을 보여준 <신녀>는 흔히 대중적인
소설이나 드라마에 채택되는 아들을 둔 어머니\창녀를 등장시켜 이 여인을
생각하는 다른 인물들의 편견과 탐욕을 통해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여인의
투쟁을 상징화했다. <한길>은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쑨 유가 씨아 얀과 공산당
영화집단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영화로서, 작가 자신의 자의식을 독특하게 반영한
작품이었다. 6명의 젊은이들이 상하이에서 실업 상태를 피하여 변두리 시골의
도로공사에 참가하면서 이 영화는 시작한다. 일본의 공습이 있던 당시의 분위기가
길바닥에 내버려진 이들의 모습에 위기감을 더해주지만, 이들 여섯 명 사이에
이루어지는 우정의 교감은 육체적인 움직임을 통해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는 항일 감정을 고양시키는 주제를 가졌지만, 당시의 검열관이자
일제의 앞잡이였던 지앙 제쉬(Jiangjieshi)의 비난을 피해 불명확한 적과 싸우는
이들 모습을 그려냈으며, 결국 생존한 4명의 젊은이들이 도로를 완성하는 모습 위로,
죽은 두 명의 동지들의 그림자를 이중인화하는 기교까지 부린 당대의 역작이었다.
1937년 중반부터 일본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자 <한길>같은 민족적인 항일 영화들이
속출하였는데, 이와 함께 영화산업은 상하이에서 뿐만 아니라 홍콩, 청낑 등으로
퍼져서 발전하였다. 전시 수도였던 청낑은 진보적 영화인들이 상하이의 우익 일변도
분위기에서 도피해 온 집결지였고, 해서 이들은 청낑에서 전문적 활동을 하며
전쟁에 직면한 중국인의 생활에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영화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1년 2차 국공합작이 실패의 길로 접어들 즈음에는 이들도 국민당의
지배하에 들면서 1943년까지 약간의 소강상태를 겪는다. 이와 달리 홍콩은,
상하이가 점령되자 이를 피해 온 영화인들의 힘도 있긴 했지만, 이전부터 영화
제작에 있어서의 잠재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희극, 활극,
일반극 등의 다양한 쟝르를 통해 광동지역을 대표하는 영화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광동 영화들은 상하이의 기준으로 볼 때 그 영세적인 예산에 비해
의심할 것도 없이 훨씬 세련된 것들이었다. 그 영화들은 전통적인 하부
민속 문화의 부산물로서 대중적 수용에 대한 응답이었다.
1940년대 말까지의 중국 영화는 이전 시대에 미약하게 마나 존재했던 예술가의
지적 표현보다는 인민에 대한 항일 무장의 촉구를 중심으로 제작되었고, 그래서
이 시기의 관객-예술가의 관계는 극히 원시적으로 친밀한 때였다. 국민당도
영화 제작에 있어서의 이러한 선전 효과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객-예술가의 강한 결합은 30년이나 지난 뒤에야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봄이 오면 강물은 동으로 흐르고一江春水向東流>(까이 쭈쉥과 젱 준리 공동연출,
1947~1948)는 마치 중국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194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다. 멜로 드라마의 구조를 취하면서도 항일전쟁 시기와 전후의 이상주의를
그려냄으로써 1920년대 이후 면면히 이어 오던 전통 문학의 계보와 중하 층이
즐겨 찾던 대중적 소설을 연결한 것이다. 게다가 3시간이 넘는 2부작 구성으로
한 가족의 역사를 민족적 울림을 넣어 표현함으로서 명실공히 1940년대의
'고전'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 외에도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진 샨(Jin shan)의
<송화강 위에서松花江上>, 씨동샨의 <구름과 달의 8천리 길 八天理路元和月>,
페이 무의 <마을의 봄小城之春>, 린 씨의 <노장과 싸우게 하라>, 왕 빈의 <다리橋>와
자이 찡의 <중국의 딸들中華女兒>등이 있다.
1940년대 초의 항일 무장 투쟁과 중반의 내전은 이처럼 영화에서 미래를 위한
현재의 투쟁으로 드러났고, 그래서 리얼리즘의 원칙에 입각하면서도 그들이
익히 알고 있었던 영화적 환상을 보이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3,제 2세대와 3세대의 시대(1949~1966,문화혁명 이전.)
1949년에 수립된 중화 인민 공화국이 수립된 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에서의 일대 개혁이 이루어졌고 그 여파는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1966년 지앙킹(江靑)에 의해 영화 제작이 중단되고, 1967~69년 사이 연간
제작 편수가 하나도 없게 되기까지 중국의 영화산업은 이 대약진 운동의
일환으로서 사회주의 건설의 기치를 내걸고 창의력과 열성을 지닌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창조해 내는 데 주력한다. 그러나 이야기 내용에 관계없이 대약진
자체만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들은 모두 이전의 리얼리즘과는 무관하게 경직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10년동란'으로 일컬어지는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에는
"민중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호흡하며 그들에게서 배우는 "예술인 형상에
맞추느라, 도식적인 인물 설정과 결말이 어떤 작품에나 의무화된 감이 없지
않았다.
1949년에서 1965년 사이의 대표적인 감독들과 그 작품들을 보면, 앞에 언급된
1949년 작품들과 함께, 주로 공산주의 혁명기에 있었던 지주 대 혁명 당원의
대립과 전통적 노예생활자 대 주체적 새인간형의 대조가 뚜렷이 드러난다.
4.제 4세대와 5세대의 시대(1978~,문화혁명 이후.)
1982년 이후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재 5세대이며, 문화혁명 전에 영화를
공부했지만, 문혁이 끝날 때까지 영화를 만들 수 없었던 이들이 4세대를
형성한다. 이들은 종종 '아카데믹파(Arcademic School)'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영화산업계에 입문하기 전에 이미 영화를 매체로서 형식적으로
공부한 세대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어 데뷔한 때는
이미 나이들이 많이 들어 있던 때이므로, 젊은 영화 연출가라기보다는
새로운 영화 연출가라는 말이 오히려 적당할 것이다.
1976년 마오쩌뚱이 사망하자 중국의 모든 예술쟝르는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1966년 5월에 내린 강령이 문화혁명의 시작을 알렸고, 이를
기화로 전국의 학생들은 자신의 배움터로서 학교가 아닌 삶의 현장을 갖게
될 수밖에 없었던 '10년 동란'이라고 불리는 대소강 상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1984년 첸 카이거 감독의 <황토지Yellow Earth>가 탄생될 때 세계는 이미
이 '새로운 물결'의 시작과 함께 마오쩌뚱의 교조적 정책이 가져다 준 중국영화에
대한 오래된 편견이 깡그리 무너지는 것을 알았다. 이 영화의 감독인 첸 카이거
자신과 촬영을 맡았던 장 이모우가 참석했던 1985년 홍콩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들이 오래 전에 포기했었던 본토 중국에서 새로운 여들이
탄생하리라고 예견하면서 그 걸작에 대해 환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앞서 중국 정부는 이 영화에 대해 상당히 불만을 표했었지만 에딘버러
(Edinburgh)와 로카르노(Locarno)에서의 잇단 성공을 목격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일이라며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문화혁명의 시대에 청소년/청년기를 지냈던 4,5세대 감독들은 이렇게 10대에
가졌던 마오이즘에 대한 환상이 환멸로 끝나는 것을 목격했던 세대이며,
그들이 기대하는 공산주의의 영광이 어쩌면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는
개인적 체험을 겪었다. 또 그들은 학업을 해야 했던 시기에 당대의 농촌,
공장 지역의 실상들에 직면했던 까닭에, 그들의 사회 인식은 책에서 가르치는
것 이상의 강한 느낌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문화대혁명으로 1966년부터 1978년까지 문을 닫고 있었던 빼이징 영화 아카데미도
다시 수업을 시작하였다. 연출, 각본, 촬영, 디자인, 연기의 다섯 학과로
나뉘어 있는 이 학교는 삶의 현장에서 그들의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던
20대 초반의 학생들을 받아들여 전문적인 영화 인력의 충원을 시작했고,
그 동안 영화를 만들 수 없었던 30세 전후의 젊은이들도 대거 영화산업에
유입되었다.
이들 4,5세대의 대표작들로는 첸 카이거의 <황토지>,<아이들의 왕>, <대열병>,
<패왕별희>, 장 이모우의 <붉은 수수밭>, 티엔 주왕주왕의 <도마적>,
장 준자오의 <일인과 팔인>, 우 쯔녀우의 <마지막 겨울 하늘>, 황 지엔신의
<흑포사건>과 <속 흑포사건> 등을 들 수 있는데, 서구의 영화인들은 이 새로운
감독군을 가리켜 '중국의 선봉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20년대 프랑스의
'선봉파(Avantgarde)'나 60년대의 누벨 바그, 70년대 독일의 새로운 영화와
달리 그들은 어떤 '선언'도 한 적이 없다. 그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공통점은
"혁명 후의 사회 현실을 직시하고 과거를 반성하는 것"이며 이와 아울러
역사적인 상황에 의해 좌절되는 인간상, 여성의 지위 향상 문제, 세대간의
갈등,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의 절실한 필요성 등을
담아 내었던 것이다.
이러한 소재와 표현 기법에 있어서 이 시기, 이 시대의 작품들에는 제작 주체
자신들의 현실 감각에서 비롯되는 사실적인 묘사가 주로 쓰인다. 우 티안밍의
<낡은 우물>이나 첸 카이거의 <아이들의 왕>같은 영화들은 일상생활의
세밀한 그 무엇을 아주 담담하게 담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 일상의 연결에서
관객은 비일상의 핵 혹은 시간의 축적에서 우러나는 발견,변화의 순간을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있던 소재나 모티브, 그리고 이야기 구조에 대한
이들 세대의 공통된 불만은 그들로 하여금 전통적 스타일--예를 들면
서사 형식과 연결성을 중시하는 이야기 전개, 유형화한 인물형, 전형성에
기초한 인물의 몸짓이나 말 등--을 비껴 나가거나 거기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관객들에게 당혹감과 신선함을
주고 불가해하다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에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쾌감을 느끼게 되었다. <붉은 수수밭>을 만든 장 이모우 감독은
[월간 이미지 포럼](1988년 5월호)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화는 젊은이의 예술입니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은 영화 속의
창조적인 힘입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영화는 영원히 새롭지
않으면 안됩니다. 언제든지 새롭지 않으면 안되죠."
기교가 없는 화면의 관계와 균형을 느낄 수 없는 공간 구도도, 이 세대
영화들의 특징이다. 그전 세대들의 영화는 유연한 편집 기술에 구애되어
몽타쥬에 있어서의 연결성-비가시적 편집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작품의
시공간적 내용이 쇼트의 연결에 결정적인 기준이 되었고, 해서 화면구도,
조명, 렌즈의 원근 조작을 위한 선택도 모두 이에 따랐다. 그러나 이 새로운
세대의 감독들은 구도 조형에 있어서의 불균형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박진성'을 더하기위해 다소 모순되는 듯한 '일상'을 구하는 것이다.
<한 사람과 여덟 사람>은 이 세대 영화의 독자성을 드러낸 대표작으로서,
그들의 이 조화의 신념을 구체화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황토지>의 구도에
관해 장 이모우는 "언밸런스라고 하는 수법은 영화 속에서 뭔가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다. <황토지> 중에서 화면에 수평선이 이상하게
높이 설정된 것은 멀리 넓게 보이는 대지에 의해, 대자연이 가지는 일종의
압박감을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첸 카이거 감독의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으로서 '땅의 사람들'을 표현하는 미학적
방법의 하나로 현재 통용되고 있다.
광선과 색채의 독특한 도입도 이 세대 감독들의 특징이다. 그들은 이미
언급되었듯이 전통적인 이야기 서술 방식에 의존하지 않는 시청각적 표현을
개발, 적용시켜 왔다. "종래의 영화는 화면이 항상 너무 밝다."라고 말하는
촬영 감독 출신의 연출가 장 이모우의 말처럼, 이 세대는 지난 세대들이
무의식으로 따랐던 영화적 관행과 인습들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과 비판을
가한다. 그래서 인물이 잘 보이지 않는 정도의 어두움도 과감히 작품 내에
수용하였고, 또 색채에 있는 어떤 의미도 이끌어 낸다. <황토지>의 갈색,
<흑포사건>의 빨강색과 흰색, <붉은 수수밭>의 붉은 색 등은 영화 자체
내에서 고유한 의미로 되살아 나는 것이다.
무명의 신인을 배우로 기용하여 완벽한 소화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이 세대 감독의 특징이다. 그전까지 되풀이되던 '스타'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탈피하여 화면에 전혀 등장해 본 적이 없거나 아주 영화와 무관했던 사람들을
작중인물의 성격에 비추어 과감히 들여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인간관 내지
배우의 역할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기존의 영화체계 안에서는 성취될 수
없었다는 사실의 한 증거이기도 하다.
5.중국 영화의 미래
모든 문화 예술은 해당 사회의 구성 형태와 변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현재 중국의 사회적 흐름과 특수한 정치,경제상의 개혁은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가속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은 일련의 개방정책을 시도하면서 자국의 이데올로기와 국제화의 두
갈래를 접합하려는 노력을 벌이고 있다. 이에 따른 외국 문물,사상의 유입은
다음에 올 6세대들에게 다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현재의 중국 영화산업은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해 있다. 그것은 5세대의 출발과 함께 세계의 관객을
흥분시켰던 예술적 대중성의 문제와 자국의 이데올로기적 전망 속에
이들 작품들을 유입해 넣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그 누구도 이 중의 하나만을 선취해서 해결할 수는 없다.
더욱 가속화될 전망에 있는 개방정책은 중국의 영화산업계에 보다 강한
시장경쟁력을 요구할 것이고, 이에 따라 상업영화의 몫은 더욱 커 갈 것이다.
이는 우리 한국 상황보다는 덜 절실한 것이지만, 그들이 구가한 1980년대의
화려한 결과를 보며 1990년대의 '얼굴'을 기대하는 것은 그들 새로운 세대
(제 5세대)가 보여준 저력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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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여행자들의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카푸치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