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5살 난 아들 목아(木兒)를 잃고는 임기를 마치고 함양을 떠나면서 영원하게 이 땅에 살아있으라는 뜻으로 심은 목아의 진혼목 학사루 느티나무(2010. 5. 7)
흔히 ‘뼈대 있는 고장’을 말할 때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을 쓰듯, 함양은 안동에 견줄 만큼 학문과 문벌이 번성했던, 이른바 양반의 고장이었다.
지리산과 덕유산의 빼어난 산세는 산자수명한 고장 함양인의 순후함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신라시대의 최치원 선생으로부터 조선시대 김종직, 정여창, 노진, 박지원 선생에 이르는 학문과 문학, 예의와 문화는 찬란한 선비문화로 발전한 고장으로 유명한 지방이다.
신라 때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 태수로 있으면서 당시 함양읍의 중앙으로 흐르던 위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서 물길을 돌려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홍수를 막아 선정을 베풀었으며 이 숲은 우리나라에서 인공으로 조성한 가장 오래된 숲이다(천연기념물 제154호)
조선조 초기의 문신 김종직은 성종 원년(1470년) 노모를 모시기 위해서 임금에게 청하여 함양 군수가 된다. 다음해인 1471년에 부임하여 1475년까지 재임 5년 동안 새로이 차밭을 만들어 조세의 부담을 덜어 주는 등 백성을 돌보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부임한지 오래되지 않은 어느 날 동헌 옆에 있는 학사루에 올랐다.
이 학사루는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재임할 때 자주 들러 시를 지었다는 곳이다.
벽에 걸린 편액을 둘러보던 그가 갑자기 얼굴색이 변하였다. 유자광의 시 한 수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유자광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그가 그 시를 떼 내어 불태워 버리게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유자광은 이를 갈았으나, 임금의 사랑을 받고 있는 김종직을 어찌할 수가 없어 마음속으로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이 두 사람의 갈등은 김종직이 죽자 연산군 때 조의제문을 빌미로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끔직한 비극의 불씨가 되었다.
함양군수로서 임기가 거의 끝나갈 즈음, 그는 마흔이 넘어 얻은 5살짜리 아들을 홍역으로 잃어버린다. 김종직의 시집 '점필재집'에 실린 시 한 수는 읽는 이를 마음 아프게 한다.
‘내 사랑 뿌리치고 어찌 그리도 빨리 가느냐.
다섯 해 생애가 번갯불 같구나.
어머님은 손자를 부르고 아내는 자식을 부르니
지금 이 순간 천지가 끝없이 아득하구나.’
어린 자식을 잃은 다음해인 1475년, 정3품 통훈대부로 승진하여 함양을 떠난다. 그로서는 더 머무르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떠나면서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보내버린 아들 목아(木兒)를 위해 학사루 앞에 천년은 살 수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를 정성들여 심고, 부모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나 가버린 ‘나무 아이’의 짧은 삶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으리라.
그로부터 세월은 흘러 540여년, 나무는 높이 22m, 뿌리목 둘레 12m, 가슴높이 둘레 7.6m의 거대한 크기와 아름다운 수형으로 자랐다.
다른 느티나무에서는 볼 수 없는 뿌리 부근에 두꺼운 책을 세운 듯한
판근(板根)이 발달하여 태풍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함을 나무
스스로가 만들어 천년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다(2016. 4. 20)
이 나무에는 특별한 생김이 있어서 보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나무의 뿌리목 가까이에는 마치 두꺼운 책을 옆으로 세워서 나무를 받치고 있는 것 같은 보기 드문 모양새가 발달한다. 판자모양의 뿌리란 뜻으로 판근(板根)이라 부르는 특수조직이다. 일부는 땅위로 나오고 나머지는 땅 속에 들어가서 옆으로 퍼짐으로써 나무가 바람에 넘어지지 않는 역할을 한다. 가로수에 버팀목을 해주는 것과 꼭 같은 효과를 나무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원래 판근은 열대지방의 나무에 잘 나타난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땅이 무르고 흔한 태풍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다른 느티나무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판근 느티나무’는 한 시대를 풍미한 대학자의 아픔과 학문에 대한 소망을 오롯이 담아 놓은 듯하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군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낸다.
(2014. 2. 14)
함양군민들은 정월 대보름에 군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낸다. 필자가 방문한 2014년 2월 14일(정월 대보름) 오후 2시에 대한노인회함양읍분회가 주최하는 당산제에 참여할 수 있었다.
노인회 회원들은 도포를 차려입고 유건을 쓴 옛 선비들의 의장을 갖추었으며, 일반 시민들도 많이 참석하여 엄숙하게 치루어 마치 김종직의 가슴에 묻은 ‘목아’를 대하듯 ‘학사루 느티나무’를 신목으로 존중하는 모습이었다.
운 최치원 선생이 즐겨 찾아 시를 지었다하여 이름을 붙인 학사루.
함양초등학교 느티나무 옆에 있었으나 1979년 군청 맞은편으로 옮겼다.
이 학사루의 벽에 있던 유자광의 시를 김종직이 떼내어 불태워버린 것이
무오사화의 불씨가 되었다(2010. 5. 7)
나무등급 : 천연기념물 제407호(1999. 4. 6 지정)
위 치 : 경남 함양군 운림리 27-1
나무높이 : 22m
가슴높이둘레 : 7.6m
나무의 특징 : 다른 느티나무에서는 볼 수 없는 두꺼운 책을 세운 것과 같은 판근(板根)이 발달.
가장 두드러진 판근의 길이 1.8m, 판근의 깊이 1.2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