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수리치골과 둠벙이, 그리고 진밭은 박해시대 선교사들의 근거지, 즉 충청도 지역의 선교 중심지였다. 뿐만 아니라 둠벙이와 그 인근의 서재(공주시 유구면 명곡1리) 등은 공주의 국실(공주시 반포면 국곡리), 질울[陶谷](공주시 정안면 고성리) 등과 함께 병인년(1866) 이후의 대박해 때 순교자를 탄생시킨 곳으로 유명하다.
수리치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의 하나이다. 당시 공주 지방에는 국사봉(國師峰)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티, 진밭, 먹방이 등 여러 군데에 교우들의 은거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하고 넓어 많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리치골이 특히 의의를 갖는 것은 1846년 11월 2일 페레올 고 주교님과 성 다블뤼 안 신부님이 박해받는 한국교회와 민족을 위해 성모 성심께 한국과 한국 교회를 봉헌하고 성모 성심회를 조직하셨던 성모성심 신심 발상지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 있다.
성모성심회는 원래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된 신심 단체로 창설자는 파리의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이던 데즈네트 신부이며, 본부는 '승리의 성모 대성당'에 있다. 이 회의 목적은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성모 성심의 전구를 통해 죄인들의 회개를 하느님께 간구하는 데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성모 신심이 유달리 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심은 1835년 말 이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특히 제2대 조선교구장 성 앵베르 주교는 1838년 12월 1일에 조선교구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모시게 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를 허락하여 1841년 8월 22일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聖母無染始孕母胎)를 주보로 정해 주었다.
이에 감사하기 위하여 성 다블뤼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은 1846년 11월 2일 공주 수리치골에서 성모성심회를 창립하고,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보호해 달라고 전구하게 되었다. 수리치골은 당시 교우촌이 아니라 단지 열심한 한 신입 교우 가족만이 사는 외딴 곳이었다. 그런데 다블뤼 신부와 선교사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성모 성심회를 설립함으로써 자연 인근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옛 수리치골 교우촌은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와 '성모성심수녀회'를 창립한 정행만 신부가 오랜 답사 끝에 찾아내게 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 명동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박해 하에 공주 땅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께 조용히 봉헌했다."고 상기시켰고, 다른 여러 교회 내 잡지 등에서도 "한국에 있는 모든 성모 마리아의 단체들에게 수리치골은 하나의 성지가 된다."며 "한국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된 마리아 신심 단체가 그곳에서 생겨났고 티 없으신 성모 마리아 성심에 대한 신심도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수리치골은 한국 교회의 사적지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페레올 고 주교는 성 김대건 신부에게 신품성사를 준 분이다. 현재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가 성지를 관리하고 있다.
○ 한국의 수호자이신,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님,
● 우리나라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순교자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 우리 천주교회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낯설다는 것은 곧 (수리치골에서) <김영수> ▒
깊이 숨어야
깊이 숨쉴 수 있는 것입니까
깊은 고요 찍어 만드는
새들의 기도 속에서
나는 은밀히 전화를 하고 싶습니다
내가 낯선 사람이 되어
낯선 음성으로 전화를 하고 싶습니다
낯설다는 것은 곧
숨은 불빛에 떠는 설렘일 것입니다
빤질한 시끄러움의 상한 눈빛으로는
함께 눈물 섞을 수 없고
누구 하나 깨울 수 없을 것입니다
깊은 곳에서라야 맑게 흐르는 물
나도 나를 버리고 이곳 꼴짜기에 든다면
어느덧 낯선 음성의 눈빛이 되어
눈물 어린 전화 할 수 있을까요
더욱 가난해지려는 사람의 전화는
날마다 걸려 와도
날마다 낯선 미소 밝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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