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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빳사나 수행법 6번째 법문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닷사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닷사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닷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 모든 번뇌 소멸하신 분, 스스로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여섯 번째 위빳사나 수행법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신·수·심·법 4가지 대상을 사띠하는 수행입니다. 이 중에서 법은 너무 어려우니 나중에 보기로 하고, 분명한 몸과 느낌과 생각(신수심) 세 가지에, 집중하는 게 아니고 사띠하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는 수행은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 즉 집중해서 번뇌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수행입니다. 집중하는 대상도 위빳사나처럼 신수심이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낸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죠. 몰입해서 거친 번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수행이 사마타 수행이고, 위빳사나 수행은 그런 마음이 만들어낸 대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인 신수심에 사띠하는 수행입니다.
우리는 일단 신수심이라는 대상을 알지 못합니다. 평소에 신수심이라는 대상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그리고 집중은 해봤지만 사띠는 해보지 않았습니다. 집중은 우리가 세간의 일을 하면서도 집중해서 합니다. 사마타 수행, 관음정근(‘관세음보살’을 계속 염송)하는 것도 집중하는 겁니다.
이 신수심이라는 대상을 사띠하는데, 사띠는 명칭과 집중 두 개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는 번뇌가 들어오지 않게 하는 사마타 수행이나 다른 세간 일을 하면서 집중해서 번뇌에서 멀어지는 것은 한 가지 대상에 계속 몰입해서 번뇌로부터 멀어지는 거죠. 힘든 생각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사마타 수행이고, 세간의 일을 하면서 번뇌로부터 멀어지는 것, 위빳사나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 몸과 느낌과 생각이라는 대상을 보고, 그 대상에 명칭을 하면서 명칭 하는 그 순간에 집중합니다. 집중하는 것은 사마디 이것은 그 대상에 계속 쭉 머물러 있으면서 계속 들어갑니다. 사띠는 명칭 하는 그 순간 머뭅니다. 명칭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명칭은 명칭하는 순간에만 있습니다.
명칭은 대상에 짧게 집중하면서 동시에 집중을 방해합니다
“오른발, 왼발, 생각, 생각, 통증, 통증,”이라고 명칭 할 때 그 순간뿐인 거죠. 그 순간에만 대상에 집중하는데 명칭이라는 것 자체가 한 대상에 묻히듯이 들어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명칭은 생각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잠들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도 있고 알 때도 있는데, 명칭도 그것과 똑같은 생각인 겁니다. 생각인데 그냥 평소에 하는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명칭은 이어지지 않죠. 명칭 한 번 할 때마다 문장이 아닌 단어로 생각을 새로 일으키는 겁니다. 이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완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생각이 지속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명칭을 쓴다는 것은 계속 집중을 방해하고 있는 상태인 겁니다.
위빠사나의 대상 몸과 느낌과 생각이라는 것이 움직입니다. 몸이라는 대상도 움직이고, 느낌이라는 대상도 계속 변하고 생각이라는 것도 계속 변합니다. 계속 다른 생각들로 바뀌고 있어요. 이어지기도 하지만 이어졌다가 또 다른 생각하고 계속 변합니다. 위빳사나의 대상이 계속해서 변합니다. 계속해서 변하는 이 대상 중에 몸은 움직이죠. 행동할 때도 움직이고 앉아서 좌선 할 때도 배가 부풀고 꺼집니다. 느낌도 계속 바뀌죠. 저리다가 마비되다가 둔해지다가 아프다가 감각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좋아했다가 싫어했다가 기분 좋았다가 나빴다가 계속 변합니다. 수행하면 자기 느낌이 계속 변한다는 걸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느낌도 계속 변하고 생각도 계속 변하고, 이 세 가지 대상이 다른 속도로 변합니다. 몸은 일단 물질이니까 둔해서 느리겠죠. 그리고 느낌에는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이 있습니다.
이 3가지 대상이 다르게 서로 다른 속도로, 다른 방향에서 생겨납니다. 다르게 변하는 이 대상을 명칭 하는 거죠. 몸이라는 대상이 있고, 느낌이라는 대상(몸의 느낌, 마음의 느낌)이 있죠. 생각이라는 대상이 서로 순간순간 다르게, 동시에 존재하는 대상이죠. 몸이 있고 몸이 움직이고 느낌이 그리고 또 그걸 보면 느낌과 생각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동시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제일 강한 대상에 명칭 합니다. 명칭 하는 그 순간에 짧게 집중합니다.
근데 우리가 평소에는 신수심이라는 대상을 보지 않고, 하고 있는 일인 밖의 대상을 보고 있습니다. 신수심이라는 대상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동안에도 펼쳐서 긴장하며 보고있습니다. 신수심이라는 대상을 지켜본다는 게 집중을 하는 거죠. 집중을 하는데 세 가지 대상들이 각각 다르게 변화무쌍하게 바뀝니다. 다른 속도로, 각각이 다른 방향로 변화합니다. 세 가지 대상의 크기가 다르고 속도도 다르고 계속 변화무쌍하게 각자 제 나름의 속도로 움직이는 와중에, 그 순간 강한 것에 명칭하며 집중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몸이 강하고 다른 경우에는 느낌이 강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생각이 강합니다. 이렇게 강한 것이 계속 바뀝니다. 바뀔 때마다 바뀌는 대상에 빨리 가서 명칭 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행선을 하고 있으면 발이 움직이죠. 팔은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발이 움직이는 동안에 움직이고 있는 발에 명칭 합니다. 명칭 하면서 집중하는데 다른 대상인 발의 느낌도 있고 생각도 있습니다. 발을 움직이게 하는 그 의도가 아닌, 또 다른 생각들도 있습니다.
동시에 존재하는 것들 중 가장 강한 대상에 명칭 합니다
움직이고 있는 발에 집중하고 있고, 그 느낌이 어떤지도 계속 보면서 집중하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계속 봐야 됩니다. 생각에도 집중이 가야 되는 겁니다. 3가지 대상을 다 지켜보고 있는 동안 집중하죠. 지켜보고 있으면서 그 순간 가장 강한 것에 빨리 더 힘을 실어서 명칭 하는 것, 명칭 하니까 거기에 순간 더 집중이 되는 겁니다. 잠시 더 집중합니다.
걷고 있는 동안에는 몸이 가장 분명하기 때문에 몸에 명칭하고 집중해야 되는데 그동안 그걸 하는 동안의 느낌(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을 잊지 말고 계속 봐야 됩니다. 그 느낌과 생각이 강하게 드러나면 그리로 빨리 가서 명칭 해야 됩니다. 그걸 보고 있지 않고 발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발의 느낌이나 생각들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나중에 알거나 아주 커지고 난 뒤에 알게 됩니다.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지켜보고 있다가 들어오는 순간 잡아야 됩니다. 들어오는 순간 세워야 됩니다. 지나가고 난 뒤에 검문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미 말 타고 지나갔으면 놓쳤습니다. 지나가는 그 순간 세워야 됩니다. 지켜보고 있어야 되는 거죠. 딴 데 보고 있다가 놓칠 수 있으니까 발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다른 더 빠른 대상인 느낌과 생각이 들어올 때 알지 못하고 놓쳐버립니다. 그래서 계속 몸 느낌 생각 즉 ‘나’가 대상인 거죠. 이것을 지켜보고 있어야 됩니다. 지켜본다는 게 집중인데 하나에 빠지는 집중이 아닌 3가지 대상에 펼쳐서 신경 쓰고 있는 긴장인 겁니다. 그것도 평소에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몸 느낌 생각이라는 대상을 지켜보면서, 그중에서 강한 것이 순간순간 바뀌는데, 그럴 때마다 빨리 빨리 거기에 더 무게를 실어서 명칭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완전히 몰입해서도 안 됩니다.
발 움직이는 동안 발에 완전히 집중하면 안 됩니다.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계속 봐야 합니다. 그리고 느낌이 어떤지도 계속 살펴야 됩니다. 발 하나를 움직이면서 발에 명칭을 하면서도 발의 느낌이 어떤지 계속 살펴야 되고, 그러면서도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 또 내 기분이 어떤지도 계속 살펴야 됩니다. 발에도 명칭 해야 됩니다. 움직이고 있는 발에 명칭 하다가 기분이 좋아지면 빨리 기분 좋음이라고 명칭 해야 되고, 희열이 느껴지면 희열이라고 빨리 명칭 하고, 지루하면 지루함이라고 빨리 명칭 해야 되고, 생각하고 있으면 생각이라고 빨리 명칭 해야 되고, 그리고 다시 움직이는 발로 돌아와서 발에 명칭하고, 발의 느낌이 어떤지도 계속 살펴야 됩니다.
위빳사나의 집중은 하나에 몰입하는 집중이 아닙니다
발이 차가우면 차가움, 따뜻하면 따뜻함, 발을 하나 움직이는 동안 발에 일단 명칭 해야 되고, 움직이는 발이 제일 분명하고, (몸이 움직이는 동안은 무조건 몸에 명칭 해야 됩니다.) 그러는 동안 느낌이 어떤지 생각이 어떤지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계속 주시해야 되는 거죠. 발에도 명칭 하고 집중하고, 느낌 그리고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계속 또 봐야 됩니다. 커닝하는 사람이 커닝하기 위해서 옆 사람의 답안지를 보면서 선생님이 오는지 안 오는지도 봐야 되죠. 이처럼 움직이고 있는 발에 집중하면서, 명칭 하면서, 내 느낌 그리고 내 생각이 어떤지, 뭘 하고 있는지 계속 곁눈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다가 주변 대상들이 더 강해지면, 움직이는 발이 더 강한 게 아니라 기쁨이 더 강해졌다면, 너무 지루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온다면, 빨리 그리로 가서 그걸 명칭 해야 됩니다. 생기자마자 빨리 그곳으로 가서 그것에 명칭 하고, 다시 움직이고 있는 발로 돌아와서 발에 명칭 하면서, 발의 느낌을 또 살펴야 됩니다. 한 번에 여러 가지를 하는 겁니다. 수행하는 수행자들은 발 한 번 움직이는 동안, 한 발이 나가는 동안에 발을 명칭 해야 되고, 발의 느낌을 살펴줘야 하고, 그걸 하면서도 마음의 느낌은 어떤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생각은 하고 있는지 안 하고 있는지, 그걸 계속 봐야 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좋은 생각을 하는지 나쁜 생각을 하는지 이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무슨 생각이든지 하고 있으면, 빨리 가서 잘라 버려야 합니다. 다 번뇌 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 동안, 들어오는 모든 생각은 수행을 방해하는 것, 지혜가 생기지 못하게 방해하는 생각이기 때문에 빨리 가서 잘라야 합니다.
그래서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또 계속 봐야 됩니다. 한 발 나아가는 동안, 발을 들고 나아가고 내리는 동안에, 들고 나아가고 내리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겠죠. 의도까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움직이고 있는 듦 나아감 내림이라고 명칭 하고, 그 발의 느낌, 들 때 나아갈 때 내릴 때 느낌이 어떤지 봐야 되고, 그리고 그때의 기분, 내 마음 상태 그리고 내 생각 이것도 계속 살펴야 되는 거죠. 이걸 이어지게 동시에 해야 합니다.
이 여러 가지를 하려고 하니까 주의력이 많이 필요하겠죠. 그냥 집중만 하는 것도 아니고 명칭도 해야 됩니다. 순간순간 바뀌니까 순간순간 긴장해서 쳐다보고 있어야 되니, 하나에 쭉 붙어서 가는 게 아니라 계속 바꿔 타야 되니, 균형 감각과 순발력이 있어야 합니다. 근데 몸의 균형 감각이나 몸의 순발력이 아니라, 마음의 균형 감각, 마음의 순발력이 있어야 됩니다. 계속 대상 바꿔 타는 겁니다. 순간순간 강한 대상이 바뀌니까 바뀔 때마다 빨리 그리로 가야 됩니다. 강한 대상으로 옮겨가면서 명칭 해야 됩니다. 그 강한 대상에 명칭 하고, 명칭 하는 그 순간만큼은 거기에 더 힘을 실어줍니다. 힘이 실리기는 하는데 명칭이 대상에 딱 붙어서 집중되지 않습니다.
명칭은 대상을 분명하게 하고, 지금 움직이고 있는 발 대상에 명칭을 분명히 붙인다고는 했지만, 그 발이라는 물질 대상에 마음이 어떻게 가서 붙겠습니까? 물질과 정신은 별개이며, 마음은 정신이고 몸은 물질인데, 정신인 마음이 물질인 몸에 딱 붙을 수는 없겠죠. 정신과 물질은 그 생멸의 속도가 다름니다. 정신은 물질보다 17배 더 빨리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없지 않습니까?
물질의 움직임은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손이 움직이고 배가 움직이는 건 볼 수 있지만 마음이 얼마나 빠른지는 안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빠른 마음이 발이라는 대상에 붙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명칭 하는 그 순간만큼은 다른 생각이 들어올 기회를 주지 않는 거죠. 발에 명칭 하는 ‘오른발 왼발 듦 나아감 내림 또는 듦, 듦, 듦, 나아감, 나아감, 나아감, 내림, 내림, 내림 하는 동안은,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게 않고 발에 완전히 붙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붙습니다.
생각이 많이 끼어들면 대상에 완전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수제비를 뜰 때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돌멩이가 수면 위를 폴짝폴짝 뛰어서 가지 않습니까? 그렇게 가듯이 순간순간 붙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발이라는 대상과 명칭하고 있는 마음 사이에, 생각이라는 대상들이 대단히 많이 끼어 있습니다. 많이 끼어 있기 때문에 발이라는 대상에 내가 명칭을 하더라도 발에 생각이 가서 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물질과 정신, 발과 마음 사이에 생각이 엄청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많이 들어가 있으니까 생각에 가려서 물질이라는 발 대상에 완전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물질이라는 대상을 보지 않는 사마타 수행을 하는 게 아니라,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대상도 계속 봐야 됩니다. 발만 보는 게 아니라 다른 느낌이나 생각이라는 대상도 계속 보고 있기 때문에, 생각이 발에 딱 붙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대상에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즉, 생각을 통해 보던 왜곡된 대상을 생각을 걷어내고 깨끗하게 보게 합니다.
명칭을 붙이는 것은 움직이고 있는 (신수심) 대상을 분명하게 가게 하기도 하고, 그리고 명칭 한 번 한 번 한 번 할 때마다 ‘오른발 왼발 듦 나아감 내림 생각, 생각’ 이렇게 명칭을 할 때마다, 그 순간만큼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관념이 제거됩니다. 관념은 실재(빠라맛타 담마)를 덮어 버려서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 관념이 명칭 한 번 할 때마다 제거됩니다. 제거되기 때문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빠라맛타 담마를 빠라맛타 담마로 볼 수 있게 하는 일을 합니다.
명칭을 한 번씩 할 때마다, 그 명칭의 대상이 계속 바뀝니다. 명칭 하는 대상이 바뀌고, 다른 데 가서 균형을 잡으면서 명칭을 해야 되고, 그리고 움직이고 있는 몸에 계속 명칭을 하고 있는 그 동안에도, 명칭을 함으로써 쏟아지는 번뇌를 막습니다. 들어오고 있는 생각을 봤기 때문에 번뇌로 덮여서 제대로 볼 수 없던 대상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만듭니다. 명칭을 하면 ‘내가 분명히 몸이라는 대상을 보고 있다.’라고 겨냥이 분명히 되고, 많은 번뇌를 한 방울씩 증발시키는 역할도 합니다.
번뇌가 걷히면 대상을 분명하게 겨냥할 수 있습니다
명칭이 대상에 분명하게 다가가기도 합니다. 겨냥도 하고 집중도 하고 그리고 제대로 볼 수 없게 덮여 있는 번뇌를 제거하기도 하고, 가끔씩은 신수심이라는 대상에 정확히 맞출 때도 있습니다. 신수심이라는 대상 중에 어떤 거 하나를 정확히 맞출 때는 위빳사나 지혜가 생깁니다. 처음부터 맞추기는 힘듭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간단합니다. 간단한데 각자의 타고난 집중력과 노력과 지혜 믿음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위빳사나 지혜가 생기는 속도가 다릅니다. 다른 속도로 위빳사나 지혜가 생깁니다. 방법은 똑같은데 눈을 감고 귀를 닫고 가는 길, 마음의 힘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조금씩 속도가 다릅니다. 눈 감고 가는 길이기 때문에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계속 점검을 받으면서 가야 됩니다. 안 그러면 엉뚱한 데로 가기 쉽습니다. 눈 뜨고도 길을 잃을 때가 있는데 눈 감고 가면 길을 잃기 쉽겠죠.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다노- 뿐냥 아-사왁카야-와항 호-뚜
이마노- 뿐냐바-강 삽바삳따-낭 바-제-마
삽베- 삳따- 수키따- 혼-뚜
(Idha no puññaṃ āsavakkhayāvahaṁ hotu.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Ima no puññabhāgaṃ sabbasattānaṃ bhājema.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Sabbe sattā sukhitā hontu.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Sādhu sādhu sādhu.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 2022-12-30 인터넷(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스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첫댓글 사두사두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