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陽 이정(李挺)夫婦 墓所
가 . 李挺 夫婦墓所
<충북 기념물 94호>
1 . 위치 :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 산58번지
구곡리 진천농다리에서 진천읍 중간쯤에 우측에는 영동상회 좌측엔 선일레이스공장이 보이는 좌측에 호암리 돌표지판이 보이는 좌측으로 계속 들어가면 오른쪽 산자락에 동네가 나타났다. 마을 중앙 뒤쪽에 사양영당(思陽影堂)이 서 있고 그 뒤쪽 언덕배기에 양촌 권근선생이 글을 짓고, 그의 아들 이거이(李居易)에 의해 태종3년(1403)에 세워진 신도비(新道碑)가 우뚝 솟아있다. 사양은 이정(李挺)선생의 호(號)이고, 영당은 초상을 모신 사당을 뜻한다. 그 맨 뒤쪽 무척 가파른 곳에 이정 선생 부부의 墓所가 있다.
앞쪽은 부인 경주김씨의 무덤이고, 그 뒤쪽은 이정의 무덤이다. 두 부부의 묘는 각각 흡사한 묘표석과 망주석을 갖추고 있으며 상당부에 구름무늬를 두고, 그 위에 태극문양을 조각하고 있어 특이하다.
<사양영당>

2 . 形氣論
龍脈은 산세를 따라 뻗은 힘이 있게 보이는 辛戌龍脈으로 氣勢가 있고 힘차지만, 너무 급하게 내려와 포근한 느낌을 주지못하며 평탄원만함이 아쉬워지는 穴地로, 이곳은 형세가 매우 강하고 生氣가 약동하여 마치 猛虎가 먹이를 낚아채는 듯, 목마른 말이 강물로 들어가려는 듯 힘이 넘치는 形局이다.
<이정 묘>

이곳 鎭川 지역에서는 이 자리를 복치혈(伏雉穴)이라고 하는데 복치혈은 꿩이 엎드린 形局으로 흔히들 명당중의 명당으로 칭한다. 그러나 伏雉穴이 되려면 꿩을 노리는 매의 형세를 한 매봉이 혈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야 하고, 또 매를 노리는 사냥개 형세를 한 봉우리가 穴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모꼴로 버티고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복치혈 삼금수부동격(伏雉穴 三禽獸不動格)이라 하는데 과연 物形論에서 말하는 그런 形勢일까?.
<부인 묘>

몇년전 傳해오는 이야기가 재미있어 전남 남원시 주천면 범실 마을 伏虎穴을 간산하는 기회가 있었다.마을 뒷산 호랑이가 개를 보고 잡아먹으려 내려오는데 우전방에 사자가 호랑이 쪽을 노려보고 있다. 이에 호랑이가 잔뜩 엎드리게 되면서 3짐승 사이에 적절한 균형과 긴장감속에 범실 마을이 형성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범실마을 "복호혈 삼수부동격(伏虎穴 三獸不動格)"의 대명당으로 항상 생기가 넘치고 약동하는 곳으로 傳해오고 있다.
<안 산>

案山 좌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들이 첩첩이 늘어섰다. 그 줄기들 사이마다 계곡수들이 숨어있으니 六谷九水가 명당에 흘러 들어 富를 이루는 形局으로, 또한 명당이 평평해서 썩 괜찮은 모습같이 보이나, 去水쪽이 좀더 關鎖되었다면 생각해 본다.
그런데 穴場을 자세히 살펴보니 왼쪽으로 살짝 몸을 돌린 것이 아쉽다. 이를 반배(反背)라고 하는데, 이때 左靑龍이 꼬리를 우측으로 감싸주면 얼마나 좋을 가?. 명당이 등을 돌리고 반배를 하면 모인 財物이 흩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案山 너머로 규봉(窺峰)이 몇 개 솟아있으나, 보기에 順하게 보이니 財産을 탐하는 무리의 규봉이 아닌 듯하다.
우리네 인생들이여!. 明堂을 찾는 것은 무엇보다도 선대의 유골을 편안히 모시고자 하는 지극한 孝心이 우선 되어야 할 것이며 , 산과 물이 편안하게 감싸는 곳에 조상의 유골을 모시고 근신하며 성실하게 살면 發福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아닐까?. 後孫들의 富貴과 名譽을 위하여 명당을 찾는게 주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고, 또 銘心해야 할 것이다.
<신도비>

3.理氣論
이 墓는 장방형의 고려 시대 양식으로 龍脈은 신좌을향(辛坐乙向)으로 우수가 좌로 흐르며 우측의 長生水 巽巳와 天祿貴人水 丙午, 관대수 丁未, 임관수 坤申이 함께 艮方의 絶位로 나가므로 正養向이되니 人物과 財物이 왕성하여 功名賢達하고 발복이 계속되는 좋은 理法이라 하겠으나, 靑龍과 白虎가 혈판을 감싸주는 듯 하지만 각기 뻗어내려 原心의 힘이 흩어지는 形勢로 보이는 것이 아쉬울 뿐, 忠孝賢達한 후손이 태어나고 楊公이 말하는 貴人祿馬가 대궐길에 오른다는 좋은 吉地로 양공의 救貧進神水法에 해당되는 곳이라 하껬다.
나 . 이정( 李挺)(서기 1297∼1361)선생
고려시대, 이정(李挺,1297∼1361)은 초명(初名)이 춘길(春吉), 호는 사양, 본관이 청주(淸州)이다.
1325년(충숙왕12) 과거를 거치지 않고(蔭補) 바로 팔관보(八關寶) 판관(判官)에 제수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전법총랑(典法摠郞) 등을 거쳐 1358년(공민왕7)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 등의 벼슬을 역임하고 광록대부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낸후 고향인 사양리로 돌아왔다.
그의 넷째 아들 李居易는 뒷날 조선 건국에 많은 공을 세웠고 領議政에 올라 耆老所에 들어갔으며 후에 3조를 추증할 때에 이정은 西原伯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文簡이라 하였다.-태극풍수학회 丁亥년 4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