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南平文氏 本里世居地
가 . 마을의 위치
대구광역시 민속자료 제3
1 . 위치 : 대구 달성 화원읍 본리동 401-2
월배에서 동국고등학교와 화원초등학교를 지난 다음 천내교 바로 앞에서 왼쪽으로 굽어들어가 천내천을 따라 3km정도 가면 인흥 마을이 나타난다. 왼쪽으로 한옥이 많이 보이는 마을이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이고, 오른쪽으로 300m정도 떨어저 보이는 건물이 仁興書院이다.
행정구역상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이며 이 지역 사람들은 비슬산의 지맥 (地脈)이 뭉친 인흥마을에 대한 자랑이 대단하다.
비슬산은 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도 포산(包山)이라고 불렀는데 삼국유사 권제5 포산이성조(包山二聖條)에 도성성사(道成聖師)와 관기성사(觀機聖師)의 얘기 를 다루고 있으며 지금도 도성성사의 이름을 딴 도성암(道成庵)이 남아있다.
2 . 세거지유래
南平文氏로서 역사상 이름을 가장 널리 떨친이는 高麗末의 衣服의 혁명을 초래한 삼우당(三憂堂),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을 중시조로 모시는 명문가이다.
그는 1363년(공민왕12)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 당시 금수품(禁輸品)으로 지정된 목화씨를 붓대 속에 감추고 들어와서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翼)이 3년만에 목화재배에 성공하여 나라에 보급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목화재배의 시초라는 설이 있다. 남평문씨의 족보에는 시조의 탄강설화가 전하고있다.
<傳 說>
아득한 옛날, 전라도 남평현 장자못(長者池)가에 솟은 천길 높이의 바위에 오색영롱한 구름이 일더니 갓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올라가 보니 붉은 글씨로 `문(文)`자가 새겨진 돌상자 속에 살갖이 백설같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군주는 하늘이 내린 아이라 여겨 잘 길렀다. 아이는 자랄수록 영픅해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고(省) 武藝가 뛰어난지라 `문(文)`이란 성을 내리고 이름을 `다성(多省)`이라 지었다.이 설화 속의 주인공 문다성(文多省)이 바로 남평문씨의 始祖이다.
인산재 문경호(仁山齋 文敬鎬, 1812~1874) 할아버지는 문익점의 18세손이며 높은 풍수지리 안목을 가지셨고 인흥마을터 뿐만 아니라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취수장뒤 본인묘도 직접 점혈하셨다“ 고 일러준다.
낙동정맥(洛東正脈)의 사룡산분기점에서 남서방면으로 분맥(分脈)한 맥(脈)이 지각 (枝脚)을 멀리 개장(開帳)하고 천심(穿心)하여 행도(行途) 하는데 기봉(起峰)시 절절고기성봉(節節高起星峰) 한다.
사룡산(681m), 구룡산(674.8m), 발백산(674.5m), 대왕산(607m), 선의산(756.4m), 남성현재, 팔조령, 삼성산(668.4m), 통점령(706m), 헐티재를 거쳐 좌우 호종사 (護從砂)를 거느린 하나의 성봉이 솟구치는데 비슬산이며 이맥을 비슬지맥 이라 한다.
비슬산이 북쪽으로 크게 과협(過峽)하면서 청룡산(793.1m), 산성산(653.4m), 앞산 (658.7m)을 일으키는데 이 앞산이 대구의 진산(鎭山)이며 청룡산을 솟구치기전 봉요학슬(蜂腰鶴膝)같은 과협처(過峽處)에서 다시 하나의 맥이 분맥(分脈) 삼필봉 (468m)을 거쳐 천수봉(205m)에 이르는데 천수봉(千壽峰) 자락하 폐사(廢寺)된 옛 인흥사(仁興寺)터에 남평문씨세거지(南平文氏世居地)가 자리하고 있다.
담 끝자락에 보이는 콩과에 속하는 회화나무는 우리나라에 처으으로 목화씨를 들여온 고려말의 충신인 삼우당 문익점의 18세손 문경호(1812~1874)가 이 곳에 터를 잡고 정전법에 따라 구획을 정리하고 집터와 도로를 반듯하게 닦은 후 집을 지어 세거를 정한 남평문씨 본리 입향조의 植樹로, 이 회화나무는 일명 선비나무 혹은 학자 나무라고도 알려지고 있으며, 마을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모습은 노거수의 풍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
수령이 300년 정도 된 이 회화나무는 세거지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그 위세가 자뭇 웅장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좋은 곳에 터를 잡아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도록 한 입향조 인산재를 기리기 위하여 '문경호나무'라 이름지었다.
나 . 마을의 환경 및 풍수지리
마을 동쪽의 산줄기가 "인(仁)"자 모형을 이루고 동남쪽에 높이 솟은 산이 "흥(興)"자 형국으로 생겨 인흥이라 했다한다. 이곳은 풍수지리상 양택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옛날 인흥사가 있던 명당터였는데, 1264년 일연이 포항 吾魚寺에서 이곳으로 옮겨 절을 중건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리고 황폐화되었던 것을 仁山齋 文敬鎬가 문씨일가의 터로 가꾼 것이라 한다.
南平文氏世居地인 인흥마을은 단정한 무곡금성(武曲金星)의 천수봉 (千壽峰)을 주산(主山)으로 의지하고 있는데 陽宅地 艮坐坤向으로 이루어진 자리이다.
태조 비슬산, 중조 삼필산(三筆山), 소조 千壽峰(鎭山)이다. 千壽峰이 높기때문에 평지를 이루고 있는 본리 마을의 陽宅氣가 山 바로 밑에서 산이 높은 만큼 앞으로 나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南西向으로 앉은 정자(井字)구도의 가옥을 배치를 하고 있으며 마을앞 천내천(川內川)이 비슬산 자락에서 좌득(左得)하여 마을 앞을 돌아 낙동강으로 우파(右破)하니 배산임수(背山臨水)를 갖추었으며 천내천너머 명심보감(明心寶鑑)으로 유명한 인흥서원이 있다.
안산(案山)은 벼슬을 상징하는 말안장 형태의 천마사(天馬寺)이고 그 뒤 함박산(260m) 이 거문성(巨門星)의 토체(土體)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양택지로서는 대형이고 左靑이 壬坎 右白이 乙辰에 艮寅脈이 좋다. 또한 長孫의 興旺地로 보기드문 陽宅地이다.
南平文氏世居地 진입로앞에 돌무더기로 조산(造山)을 만들어 놓았고 마을 바로 우측옆 수구(水口)쪽인 서북방면이 허(虛)하여 멀리 낙동강물이 보이므로 비보(裨補) 차원에서 소나무를 심어 수구막이를 하여 놓은 것이 있다.
지금은 화원읍의 시가지 개발로 인하여 고층아파트가 낙동강을 가리고 있어 더욱 국세 가 안정감 있어 보이고, 主山이 감아주고 案山이 나지막히 朝拜하며 靑龍쪽으로 文筆峰이 바라보이니 한마을을 이루어도 보기드문 陽宅地라 하겠다.
다 . 인수문고. 수정봉사, 광거당
남평문씨세거지(南平文氏世居地)의 12채 건물중 개인주택이 아닌 공공건물의 성격을 지닌 인수문고(仁壽文庫), 수봉정사(壽峯精舍), 광거당(廣居堂)을 보면
1 . 인수문고(仁壽文庫)는 壽峯 문영박선생이 후손교육으로 애국하자는 취지아래 후손 들을 일제의 신식교육기관에 보내지 않고 독자적으로 교육 시키고자 하여 설립한 만권당(萬卷堂)이 그 전신이며 국, 공립도서관 및 대학도서관을 제외한 민간, 문중 보관 장서로서는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지금은 인수문고 옆에 문태갑씨가 조상의 정신을 잇고자 1993년 설치한 중곡문고(中谷文庫)가 하나더 있는데 인수문고가 고서 위주요 중곡문고가 요즈음의 책이다.
2 . 수봉정사(壽峯精舍)는 수봉선생 사후인 1936년 수봉선생을 기리고자 세워진 건물이며 좁은 앞뜰에 조산(造山)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는데 거기에 큰 소나무가 심어져 있어 건물 바로앞 크게 자랄 나무를 심지 않는 우리의 정서나 풍수문화에 맞지 않으나 이곳의 대표적인 건물로 세거지 입구쪽에 위치하고 있어 찾아오는 손님을 맞기도 하고, 문중의 모임을 열었던 큰 건물로서 정원의 꾸밈이 아름답다.
3 , 광거당(廣居堂)은 "ㄱ"자 형태의 건물인데 문을 들어서 하인들이 기거(寄居)하는 문간채와 헛담을 지나면 광거당 누마루뒤의 대나무와 “壽石老苔池館”이란 편액이 눈에 띄는데 수석과 오래된 이끼 그리고 못이 있는 집이란 뜻이나 지금은 찾을 수 없다.
또한 수봉(壽峯)과 더불어 조선의 많은 學者들이 찾아와 광거당에 묵으면서 학문을 나누고 시(詩)를 짓던 건물이며 만권당(萬卷堂)과 함께 남평문씨세거지 (南平文氏世居地)를 전국에 알린 곳이된다.-태극풍수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