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경상도 어른 답게 늘 말을 아끼신다. 과묵한 표정에 두루마기 옷고름이 바람에 날려 내 가슴팍을 치기라도 하면 뒤를 따르던 어린 나는 깜짝깜짝 놀랐다. 늦가을 찬바람이 부는 날 진주시장을 들러 이것저것 살림살이에 필요한 것을 사고 흥정 한푼 없이 그냥 셈을 하신다. 어린 나이에 진주 시장을 따라 다녔을 때 간직하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따라 오너라. 밥이라도 먹고 가야지 않겠느냐"
검소함이 지나쳐 가족들은 여러 차례의 제사나 큰 일이 있는 날이 아니고는 기름진 고기 반찬으로 포식하는 일이란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았다. 집에 기숙하며 일을 거드는 일꾼이 서 넛이 있었는데 늘 남루한 옷차림에 소박한 찬으로 끼니를 떼우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 일꾼들은 어린 내가 그 앞을 지날 때면 뭐라뭐라 아버지에 대하여 수근거리곤 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도 집안의 식솔들에 대하여는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했다. 40년대 진주의 소학교를 다니던 내가 학교에서 돌아 왔던 봄날 집안의 제일 나이 많은 일꾼 아저씨가 큰 지게에 뭔가를 지고 하얀 바지 저고리를 입고 눈물을 흘리며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다른 일꾼들에게 물어 보았다.
"진영 고향에 사시는 어머님이 병으로 돌아 가셨는데, 어른께서 소고기와 옷감 그리고 노잣돈을 챙겨 주셨단다"
진영은 진주에서 강을 따라 난 길로 200 리를 가는 그런 거리였는데 아버지께서 마련해준 장사를 지낼 물건을 잔뜩 지게에 지고 가신 것이다. 밥 한그릇 입는 옷 하나에 검소함을 따지던 당신이었지만 식솔들의 큰일에는 큰 인심을 베풀었던 그런 분이시다.
[진주 남강 논개 바위에서 뷰티플임]
시장통의 밥집으로 나를 데리고 밥집에 들어 서면 아버지를 잘 아시는 분들이 식사를 하다가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신다.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뻣뻣한 자세로 자리를 잡고 앉아서 비빔밥 두 그릇을 주문하신다. 진주 비빔밥이라고 알려진 육회 비빔밥과 고깃국이다. 평소에 집에서 자주 먹지 못하는 그런 음식이다. 부들부들하고 입에 살살 녹는 듯한 고기 비빔밥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고 있으면 근엄하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밥그릇에서 크게 한 숫가락을 덜어 내 그릇으로 담아 주신다.
"체한다. 고깃국물도 같이 마시며 천천히 먹거라"
세월은 그로부터 많이 흘렀다. 진주가 고향이던 지인(知人)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가끔 들었는데 그랬던 이야기가 이 곳 진주 땅에 들어서니 다시 생각났다.
남도(南道)를 돌아 가는 여행 길에 진주 촉석루를 둘러보고 이곳 천황식당을 들렀다. 80년도에 내가 들렀던 그곳은 변한 것이 없이 기와 지붕이고 가게 안에 횟칠이 칠해져 깨끗한 느낌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 창살을 그대로다. 그리고 한 번쯤은 바꾸어도 될 것 같지만 식당 안의 식탁과 의자는 남루한 모습이다. 서울의 번듯하고 깨끗하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곳에 비하면 형편이 없는 그런 모습이다. 80 여년이 되었다는 전통을 기념하여 한국관광공사에서 붙여 놓은 듯한 역사적 표지석과 같은 안내문이 붙어 있다. 그리고 내가 찾은 이 날이 평일이었는데 이미 점심 때를 놓친 시간이라 밥집은 한가해져 있었다. 아마 많은 손님들로 한바탕 전쟁을 치렀을 것이다.
허연 양푼 그릇에 소고기 육회가 얹혀 있는 비빔밥과 함께 선지가 들어 있는 고깃국이 세월의 흐름에도 변함없는 그 모습으로 차려져 나온다. 잘게 다져 석쇠에 구운 석쇠소불고기도 빼놓을 수 없는 그런 맛이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에 밥집 안의 소불고기 냄새가 자욱하다. 점심이 늦어 배가 몹시 고팠던 나의 침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내게 진주 비빔밥 이야기를 들려 주던 그 분에게는 그때 그 시절 아버지의 근엄함 앞에 머리를 푹 파묻고 밥을 먹고 있을 때, 그릇이 바닥을 보일 무렵에 아버지께서 밥을 크게 한 숟가락 덜어 주셨지만, 오늘은 주인 아주머니께서 바닥을 드러낸 내 고깃국 그릇을 다시 그득하게 채워 주셨다.
[80년 전통 진주 비빔밥 천황식당] [남루한 식당 내부 모습]
[진주 육회 비빔밥] [선지 고깃국] [비빔밥 이야기]
1593년 6월 진주성 밖엔 왜군 3만여 명이 개미떼처럼 들끓고 있었다. 성 안 조선군은 3천여 명. 나머지는 일반 백성 6만여 명. 전투 직전, 성 안의 군관민은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그릇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릇 하나에 밥 나물 쇠고기 육회를 담은 뒤, 거기에 간장이나 고추장을 쳐서 비볐다. 성은 6월 29일 함락됐다. 6만여 명의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1894년 동학농민군들도 바가지나 그릇에 밥과 온갖 나물을 담아 비벼 먹었다. 이미 큰솥에서 비벼진 밥을 나눠먹기도 했다. 각자 머리띠를 풀어 거기에 비빔밥을 받았다. 비빔밥은 조선시대 야전에서 간편하게 먹는 ‘참살이(웰빙)식 패스트푸드’였던 것이다. (참고: 동아일보)
전주비빔밥은 더운 밥의 양반음식이고, 진주비빔밥은 식은 밥에 내장탕을 곁들여 먹는 서민음식이다. 1593년 6월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전투(1592년 제1차 진주성전투에선 대승)에서 민관군 7만 명이 옥쇄순국하기 직전, 진주성 안의 모든 소를 잡아 골고루 나눠 먹었던 것이 진주비빔밥이다. 이렇게 비장한 이야기를 지닌 음식이 어디 있느냐?” 진주비빔밥은 육회비빔밥이다. 여기에 제철 나물을 얹어 조선간장과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다. 밑반찬은 제일식당의 경우 김치 동치미 오징어채무침 딱 세 가지뿐이다. 여기에 선지해장국이 곁들여진다. 담백하고 깔끔하다. 단순한 맛인데도 여운이 길다. 혀끝에 오래 남는다.
한국을 대표하던 비빔밥으로 해주비빔밥, 전주 비빔밥, 진주 비빔밥 그리고 안동 헛제사밥이 있었다. 그런데 진주비빔밥은 왜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으며 전주비빔밥은 어떻게 시장을 천하통일 했을까? 요즘 진주비빔밥은 진주에서도 귀하여 진주중앙시장의 제일식당(055-741-5591), 천황식당(055-741-2646) 등 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갈 뿐이다. 특히 기름으로 볶은 밥에 닭고기를 얹는 해주비빔밥도 분단 이후에 제 맛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허리 춤에 차고 다니던 책보자기에 넣어 온 도시락을 점심시간에 열어 보면은 김칫국물과 반찬이 이미 조화롭게 범벅된 비빔밥이 되어 있었다. 친구들과 뜀박질을 하며 십리 길을 달려 등교하는 동안 저절로 섞여 ‘비빔밥’이 된 것이다. 저마다 타고난 맛을 잃지 않고 하나가 되어 설움, 고통, 슬픔과 분노를 비벼 풍요로움과 웃음꽃을 피우게 하는 음식. 바쁜 농사철 논두렁에 둘러앉아 허리를 한번 펴고 여유를 가져 볼 수 있게 하는 달콤한 휴식과도 같은 밥이요, 나물과 고추장을 자기 입맛대로 넣어 비벼 만드는 , 저마다 내용은 다르지만 이름이 똑 같은 밥이다. 그래서 비빔밥은 자연이요 조화요 풍요로움이요 평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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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Life is always beautiful ! 원문보기 글쓴이: 뷰티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