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수밖에 없는 기간이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성서학당’은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마도 새달 초에는 그 또한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무실 문을 닫아야 할 일이 생긴 다음,
‘청주 지역공동체 시민센터’에서 명상을 이어가기로 했고,
그러면서 그동안 잠들어 있던 이야기들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비교적 편하게 엮어가기로 한 ‘이야기 성서’는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만나는 내용은 ‘예수의 부활’이라고 하는
쉽게 접근하기에는 까다로운 이야기입니다.
단순한 접근을 하는 이들은 부활 이야기를 꺼내면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냐고
정색을 하고 물러서거나 도전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런 사람들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그것을 자신들의 주장을 따라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갖고 있지 않으니
결국은 무지에 호소하거나,
아니면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성서가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남기고 있는 것에는
복잡하면서도 뿌리 깊은 역사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배경이
이리저리 얽혀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단순한 접근 방식으로는
과학적 사고를 한다면 “예수의 부활은 허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합리적이거나 상식의 수준, 또는 과학적 근거들을 들고 나오지만
결국은 그 또한 또 다른 형식의 무지에 호소하는 것이고,
똑같이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것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예수의 부활은 기독교가 갖고 있는 종교적 진실”입니다.
그것이 나오게 된 분명한 지점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를 근거로 하면서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삶과 세계에 대한 성찰의 자료로서의 의미는
충분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만 “예수의 부활을 말할 만한 깊의 성찰을 하고,
그 성찰의 결과인 삶의 성실성이 뒤따른다는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고, 쉽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누구에게도 요구할 수 없으며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비난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예수의 부활”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들을 짊어져야만 한다는 점은 분명해집니다.
그런 “의미의 무게로서의 예수의 부활”이
이번에 나누게 된 ‘이야기 성서 26’이지만
그것을 선명하게 담을 수는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일말의 자책 때문에 부끄럽기도 하지만
아무튼 나누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키작은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