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스물한 번째 이야기
독립운동가 21 지청천 -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출생 - 사망
1888.2.15. ~ 1957.1.15.
지청천 장군은 배재학당과 한국무관학교를 거쳐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근대적인 군사지식을 습득한 군사인재였다. 3.1운동 발발 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으로 취임,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힘썼으며 이후 일제의 독립군 말살 정책이 시행되었을 때에는 서로군정서를 지휘하며 일군과의 교전 최전선에서 활동하였다.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광복군의 총사령관을 맡게 되면서, 명실공히 한국군을 대표하는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화랑정신 구현한 문무겸전의 참 군인
백산(白山) 지청천(池靑天, 1888. 2. 15∼1957. 1. 15)장군은 독립된 조국의 품에서 눈을 감기까지 평생을 조국광복의 일념으로 생활한 참 군인이었다. 또한 광복된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정신까지도 이미 염두에 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화랑도이기도 하였다. 장군은 1888년 2월 15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나 5살에 아버지를 여의어 홀어머니를 모시고 자랐다. 장군의 어머니는 장군이 8세 때 일본인에게 30전짜리 동전을 받자, 자기 힘으로 벌지 않고 얻은 돈은 떳떳하지 못하며 더욱이 나라를 침노하는 천한 일본인의 돈은 받는 것이 아니라고 꾸짖을 만큼 올곧고 강인한 성품을 지닌 여성이었다고 한다. 후일 장군의 행보에서 보여주는 강직하고 곧은 인품은 바로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장군은 서당을 거쳐 지석영선생의 영향으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고. YMCA의 전신인 황성기독청년회 활동에 관련하면서 점차 민족의식에 눈떠가기 시작한다. 토론회에서 "우리 청년에게 총을 달라"고 토로했을 만큼 혈기 방장했던 장군은 이후1904년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일찍이 자신의 행로를 잡아갔다.
그러나 1907년 일제의 한국군대 강제해산을 겪으면서 힘의 부족을 통감한 장군은 훗날 더욱 조직적인 항쟁을 기약하며 신문물을 배운 것을 결심하고 관비(官費)로 일본유학을 떠나게 된다. 일본에서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청도 전투에서 참가하여 실전경험을 쌓았다. 이러한 실전 경험은 이후 독립전쟁을 치르면서 백분 활용할 수 있었으니 일제에게 그대로 갚은 꼴이 되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으로 부임, 독립군 양성을 위해 혼신을 다하다
1919년에 이르러 그 동안 억눌렸던 한민족의 울분이 3·1독립운동의 함성으로 일시에 폭발하자 장군도 드디어 기다리던 조국광복운동의 전선에 나섰다. 그 해 일본군을 탈출, 만주 봉천성에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대열에 합류하였고, 당시까지 사용하던 석교라는 이름도 버리고 새로이 지청천이라고 개명하였으니 이때가 장군이 일생에는 둘도 없는 전환기였다. 한편 봉천성에는 이미 1910년대부터 뜻있는 애국지사들이 모여 한족회를 조직하여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어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때마침 독립군 양성을 위해 근대적 군사지식을 갖춘 인재가 필요하던 한족회와 신흥무관학교로서는 일본 육사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장군의 합류가 커다란 용기와 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장군은 신흥무관학교의 교성대장을 거쳐 교장을 맡아 광복투쟁의 간성이 될 독립군의 양성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개교식에서 행한 "조국광복을 위해 싸웁시다.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시다"라는 연설은 당시 독립군 모두의 의지를 대변한 것이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활동
1937년 일제가 다시 중일전쟁을 도발하자 무장군대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이에 장군은 임시정부 합류,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의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를 독립전쟁의 구심체로 엮어내는 데 힘썼으며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창설에 참여하고 총사령관을 맡아 명실공히 한국군을 대표하게 되었다. 광복군은 중국을 비롯한 연합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벌이는 외에도 대적선전, 포로심문, 선전전단 작성, 암호문 해독 등 다방면에 걸쳐 눈부신 활약을 벌였다.
8·15광복은 결코 우연도 행운도 아니었다. 좌절과 고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독립에의 열망을 실천해간 유명 무명의 수많은 선열들이 이룩한 당연한 결과였다. 일제의 한국 침략이 시작된 이래로 우리 민족은 한시도 일제에 대한 투쟁을 쉬지 않았고 지청천 장군은 바로 그 투쟁의 선두요 최전선에서 민족의 발걸음을 재촉해 왔다.
그러나 광복된 조국의 앞길도 평탄하지만은 않아 남한에 지주한 미군의 반대로 광복군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여야 했고 장군은 1946년 4월 28일, 피와 땀과 고난의 힘으로 이룩한 독립조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장군은 혼란한 국내정세를 바로 할 원동력이 청년에게 있음을 깨닫고 전국적으로 대동청년단을 결성, 조국재건에 힘쓰다가 1957년 1월 15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운명하기까지도 바로 서지 못한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독립을 위해 산화해간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장군의 생애는 오직 민족에 대한 사랑과 충정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지청천 [池靑天] -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