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5. 05. 10
■ 충북의 독립운동가
1.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생졸년] 1870년(고종 7)∼1917년. / 향년 47세
이상설 선생의 본관은 경주, 자는 순오, 호는 보재로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다.
아버지는 행우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이고, 7세에 용우에게 입양되었다.
이상설 선생은 일찍이 신학문에 뜻을 두고 영어·러시아어·법률 등을 공부하면서 1894년 신년문과에 급제, 1904년 보안회 후신인 대한협동회 회장이 되었고, 1905년에는 법부협판·의정부참찬을 지냈다.
을사조약 체결 직후 조병세·민영환·심상훈 등 원로대신들을 소수로 백관의 반대 상소와 복합항쟁을 벌이도록 주선하였고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서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에 그쳤다.
1906년 이동녕 등과 노우키에프스크로 이주하여, 원동임야회사를 세우고 간도 용정촌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설립, 교포자녀의 교육과 항일민족정신 고취에 진력하였고,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참석,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국력의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 때 이준은 자결을 단행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본국에서는 일본의 압력으로 궐석재판이 진행되고 이상설 선생에게는 사형이,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그 후 이상설 선생은 귀국을 단념하고 다시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성명회를 조직하고 국권침탈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각국에 발송하는 등 세계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이며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7년 3월 러시아의 니콜리스크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 신규식(申圭植),
[생졸년] 1880년 ~ 1922년 / 향년 42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에 크게 기여한 독립운동가. 구 한말 계몽운동을 펼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 당하자, 이에 분개하여 자결을 기도, 그 여파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상해로 망명,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1912년 이후 동제사, 신한혁명당 등 각종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 주도하였고, 1917년에는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발표하였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충청도 의원으로서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법무총장을 역임하였다.
특히 1921년에는 국무총리 대리겸 외무총장으로서 손문의 광동정부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초기 임시정부의 활동에 크게 기여하다가 이듬해 상해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한민족의 혼을 강조한『한국혼(韓國魂)』을 저술하였다.
묘소는 사후 상해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다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봉환하였다.
3. 손병희(孫秉熙),
[생졸년] 1861년∼1922년 / 향년 61세
▲의암 손병희와 부인 주옥경
민족종교인 동학(東學)의 제3세교주이며 천도교(天道敎)의 창시자로서, 3·1독립운동을 지도한 의암(義菴) 손병희는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의암. 어려서부터 남달리 의협심이 강하였으며, 동학에는 22세인 1882년 입교하였다.
지성으로 교단활동에 전념하여 2년 뒤인 1884년부터는 교단인 북접(北接)의 중심간부로서 교조신원운동, 보은집회 등을 이끌었으며, 1894년 동학농민군의 2차봉기 때에는 북접 통령(統領)의 자격으로 공주 우금치전투를 직접 지휘하였다.
1897년 최시형으로부터 도통(道統)을 이어받아 동학의 3세교주가 되었으며, 1901년부터는 동학의 교세만회와 방향정립을 도모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여 신문명을 시찰하였다.
이 과정에서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교유하면서 새로운 문명학술 도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동학의 방향을 개화·계몽으로 전환하였으며, 그 국내운동단체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진보회의 국내 책임을 맡고 있던 이용구(李容九)가 친일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1906년 귀국하여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이용구계열과의 분리를 시도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후에는 보성학교(普成學校)·보성사(普成社) 등을 설립하여 교육·언론활동을 통한 구국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3·1 운동의 분위기는 1914년 천도교 구국단을 결성한 이후 제기된 민중봉기론을 1918년 최린(崔麟)·권동진 등이 건의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1919년 1월에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의 3대원칙을 결의하였고, 2월 중순에는 학생층까지 합류시킨 통일전선을 이루어냄으로써 3·1운동의 준비를 완료하였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泰華館)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자진하여 일경에 체포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하던 중 1922년 5월 19일 62세로 서거하였다.
유해는 수유리 봉황각(鳳凰閣) 녹지에 안장되었다. 1961년에는 향리인 금암리 대주촌(大周村)에 충북문화재보존회에서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1980년 청주시 우암산 삼일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주요 저술로는 무체법경(無體法經)·삼전론(三戰論)·대종정의설(大宗正義說) 등이 있다.
4. 권동진(權東鎭),
[생졸년] 1861년 ~ 1947년 / 수 86세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안동. 호는 애당(愛堂)·우당(憂堂). 천도교에서의 도호(道號)는 실암(實菴)이다. 서울에서 성장했다.
육군 초관으로 3년간 근무한 뒤, 함안군수를 1년간 역임했다.
1895년(고종 32) 거문도첨사로 있을 때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일본으로 망명한 뒤 11년간 도쿄[東京]에 머물렀다. 1906년 대한협회 부회장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에서 사귀었던 손병희(孫秉熙)의 영향으로 천도교에 입교해 도사(道師)가 되어 전도에도 종사했다.
1919년 3·1운동 때 천도교측 15인 중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이때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한 뒤에는 천도교에서 발간하던 잡지 〈개벽〉의 편집진으로 활동했고, 1927년 신간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대연설회 강연 연사로 내정된 것이 발각되어 다시 1년간 복역했다.
1945년 광복 후 신한민족당 당수, 민주의원 등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5. 권병덕(權秉德),
[생졸년] 1867년(고종 4)∼1944년. / 수 77세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충청북도 청원(淸原)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 인이다.
18세에 동학교도가 되고, 1894년(고종 31)의 동학농민운동 때 손병희와 함께 6만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하여 진압 당한 후 전국 각처를 방랑하였다.
1908년(융희 2)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이에 입교하여 전제관장(典制觀長)·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금융관장(金融觀長)·보문관장(普文觀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25일경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한 그는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을 만나, 3·1독립만세운동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 달 27일 최린·오세창·임예환·나인협·홍기조·김완규·나용환·홍병기·박준승·양한묵 등의 동지와 함께 김상규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사람 중에서 지방에 거주하는 길선주·유여대·김병조·정춘수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모였다. 그는 이 때 민족대표의 1인으로 참여하여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中央敎會 審計院長)·감사원장(監査院長)·선도사(宣道師)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조선총사(朝鮮總史≫·≪이조전란사(李朝戰亂史)≫·≪궁중비사(宮中秘史≫가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6. 신석구(申錫九),
[생졸년] 1875년(고종 12) ~ 1950년 / 수 75세
평양 교외의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은재(殷哉). 아버지는 재기(在綺)이다. 1907년 7월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미국 선교사 왕영덕(王永德)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으며, 서울의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목사가 되었다.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 등지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신앙을 통한 민중계몽에 힘썼다. 1919년 2월 12일경 오화영(吳華英) 목사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협의한 뒤 민족대표로 3·1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일경에 구금되어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재판과정에서 조선독립에 대한 열렬한 의지를 표명했다.
1921년 2월에 출옥했고, 그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여 여러 차례 구금을 당했다. 1930년대 중반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구호로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을 추진하면서 그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종교단체들은 처음에는 이에 반대했으나 점차 일제에 굴복하기 시작했는데, 감리교단도 총리사 양주삼(梁柱三)의 명의로 1938년 9월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그는 감리교단 지도부의 결의를 거부하고 신사참배반대운동에 가담했으나 천안에서 검거·투옥되었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뒤에는 신사가 없는 평안남도 용강군 신유리교회에서 시무했다.
1945년 2월 일제의 태평양전쟁에서의 승리를 기원하는 '전승기원예배'를 거부하여 용강경찰서에 3개월간 구금되었다.
해방 후에는 북한정권에 반대하여 반공운동을 전개했는데, 3·1절 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구금되었다.
1949년 남포에서 반공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50년 11월 평양 교외 비류강(沸流江) 강변에서 총살당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7. 신홍식(申洪植),
[생졸년] 1872년(고종 9)∼1937년 / 향년 65세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35세 때에 청주북감리교회에서 미국인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1913년 서울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서 공주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17년 평양 남산현 교회(平壤南山峴敎會) 목사로 옮겨 재임하던 1919년 2월, 동지의 규합을 위해 평양에 온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3·1운동의 계획을 전해 들었다. 그는 곧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상경하여 기독교계 동지들과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2월 28일, 독립선언식에 참가하기 위해 다시 상경한 그는 손병희(孫秉熙)[1861~1922]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을 상의하기 위한 최종 회합에 참석하였다.
3월 1일, 그는 동지들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일제에 피체되었다. 그는 법정에서도 일제가 제시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의 허구성을 질타하며 독립에 대한 확신을 피력하였는데, 결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인천과 원주 등지에서 종교 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 있다.
8. 홍진(洪震),
[생졸년] 1877년(고종 14)∼1946년. / 향년 69세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면희(冕熹), 일명 진(鎭). 호는 만호(晩湖·晩悟). 충청북도 영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다.
1898년 대한제국의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를 졸업한 뒤 한성평리원(漢城平理院) 주사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평리원 판사로 승진하였고, 1905년 충청북도 충주재판소 검사로 전임되었다.
1910년 8월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자 검사직을 사임하고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뒤, 1919년 2월까지 독립운동가를 위해 법정투쟁을 계속하였다. 그 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가담하여 충청북도 청주군 연락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인천시 만국공원에서 비밀리에 13도 대표들과 국민대회(國民大會)를 열고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를 조직한 뒤 법무차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상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의원·법제위원장(法制委員長)을 지냈고, 또한 충청북도 충주군 조사위원과 충청도선거위원장으로도 활약하였다. 1921년 4월 상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단장에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으며, 8월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를 조직하여 간사장에 선임되었다.
다음 해 7월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조소앙(趙素昻)·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노백린(盧伯麟) 등 1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회 간의 반목·갈등·마찰을 해소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92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된 뒤 내무총장·외무총장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926년 7월 국무령에 임명되어 김응섭(金應燮)·이유필(李裕弼)·조상섭(趙尙燮)·조소앙·최창식(崔昌植) 등과 국무위원회(國務委員會)를 조직하였고, 9월에는 외무총장까지 겸임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시정 3대 강령을 제시하였다.
1923년 10월에는 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오동진(吳東振)·조성환(曺成煥) 등을 국무원으로 보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1927년에는 유일당운동에 앞장서서 상해·베이징(北京)·광둥(廣東)·우창(武昌)·난징(南京) 등에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를 조직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11월 각지 대표연합회 예비회담을 상해에서 개최하고 유일당을 조직하게 하였다.
1927년 말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동북 지방에 파견되어 3부(신민부·정의부·참의부)와 교민단 등 여러 단체의 지도자들을 설득하고 회합을 가져 의견을 교환한 뒤 큰 단체를 형성하였다. 이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그 당수로서 군민회의(軍民會議 : 위원장 김동삼)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김동삼이 붙잡히고 김좌진이 살해당하여 군민회의의 활동이 침체되자 이를 수습한 뒤, 황학수(黃學秀)·지청천(池靑天)·신숙(申肅) 등과 함께 당세를 확장하여 한국독립당을 민족 대당으로 발전시켰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당군(黨軍)을 한국독립군으로 개편하고 총사령에 지청천을 선출, 항일 중국군과 연합전선을 펴 치열하게 싸웠다. 한편 경혜춘(慶惠春) 등 여러 동지와 함께 만주중동선 연변 동부 일대의 교포들을 설득하여 무장 독립항전에 적극 가담하게 하였다.
1932년 일제가 만주국을 세우자 1933년 난징으로 가 산해관 이남과 미주·노령 등지에 흩어져 있는 각 혁명단체들이 하나로 합쳐 항일전선을 펼 것을 절규하였다. 1934년 동삼성에서 조직된 한국독립당과 난징에서 조직된 한국혁명당을 통합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재조직하고 조소앙과 같이 지도하였다.
1937년 7월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과 미주에 있는 대한독립단동지회·국민회·부인애국단·단합회·애국단 등이 통합하여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조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 단체가 되자 조소앙·엄항섭(嚴恒燮)·조경한(趙擎韓) 등과 함께 직접 선전공작을 전개하였다.
1940년 광복진선의 9개 단체가 통일하여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자 중앙감찰위원장에 선임되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데 전력,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9. 김용재(金用才),
[생졸년] 1900년~1928년 / 향년 28세
▲항일투사 김용재 충의비
어려서 고향을 떠난 뒤, 아버지를 따라 여러 곳을 전전하다 소백산 정안동에 정착하여 숯을 구워 팔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1920년대 초반 독립운동에 투신할 목적으로 만주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1923년 8월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결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에 가입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후 국내에 거점을 두고 군자금을 모집, 송달하라는 참의부의 명령에 따라 국내로 파견된 그는, 어릴 적부터 거주하며 활동하던 소백산에 거점을 정하였다.
이후 김찬섭(金燦涉)·김의엽(金義葉)·김율녀(金栗女) 등과 항일비밀단체를 조직하고 단양·영월·영주 지역은 물론 충청도·강원도·경상도 등을 신출귀몰하게 출입하면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으나, 단원인 김현구(金顯九)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악형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거처를 자백하면서 근거지가 발각되었다.
1928년 9월 일본 경찰 100여 명이 네 부대로 나누어 소백산을 포위하고 그를 체포하기 위한 수색작업을 전개해왔다. 이에 소백산 형제봉 밑에 은신하고 있던 그는 동지 한 명과 함께 일본 경찰을 상대로 총을 쏘며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적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0. 유자명(柳子明).
[생졸년] 1891년(고종 28) ~ 1985년 / 수 94세
충북 청주 태생으로 수원농업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충북대표를 지냈고, 의열단에 가담하여 약산의 참모로 활동하다가 아나키즘에 심취하여 무정부주의자의 대표 인물로 손꼽혔으며, 해방 후에는 호남성 장사시에 살면서 호남농학원 교수를 지낸 유자명(柳子明, 1894~1985)
11. 박자혜(朴慈惠) 여사
[생졸년] 1895년 ~ 1943년 / 향년 48세
역사학자 신채호의 아내 박자혜 애국지사는 어린 시절 궁궐에 들어가 10여 년간 궁녀로 살았다.
1919년 기미 독립 만세운동으로 부상을 당한 사람들을 죽을힘을 다해 간호한 장본인이다.
일본 동양척사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사를 도운 사람도 박자혜 애국지사이다.
박 애국지사가 1936년 여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남편 신채호 선생의 호적에 오르지 못한 기막힌 사연도 전해지고 있다. 신채호 선생은 일제 강점기 때 ‘황국시민이 될 수 없다’며 호적을 거부해 무국적자가 된 독립 운동가였다.
1973년 만인 2009년 법이 개정돼 호적은 되찾았지만 법적으로 부인이 존재하지 않아 아직까지 부부라는 사실을 국가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비록 법적으로는 부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신채호 선생과 박자혜 애국지사의 결혼 사실은 보훈처 공훈 전자사료관에서는 인정하고 있다.
현재 신채호 선생 부부는 고향인 충북 청원군 선산에 합장돼 있다.
대한민국 법에 혼인증명서를 제출해야만 혼인이 성립되는 조항 때문에 박 애국지사가 아직까지 신채호 선생의 아내라는 것을 인정받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이 가슴을 저민다. 법 이전에 보편 타당한 상식의 문제인데도 말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운동가들의 문제이니만큼 전적으로 정부가 나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12. 김재형(金在衡).
[생졸년] 1890년 ~ 1966년 / 수 76세
3·1운동 때 청주와 인근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만세시위를 일으키게 한 독립운동가.『매일신보(每日申報)』 판매업을 하고 있던 그는 1919년 3월 1일 광무황제(고종)의 국장(國葬)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을 때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보고, 귀향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귀가 후 강내면(江內面)에서 매일 산 위에서 봉화를 올리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가 계속되자, 거사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서울에서 민족대표 박동완으로부터 수령하여 감추어 두었던 「독립선언서」 5백여 매 중 연기군(燕岐郡) 조치원(鳥致院)에 사는 김재석(金在石)에게 350여 매를 주어 이를 문의면·미원면·보은읍 등지에 나누어 주게 하였다.
또 나머지 150매는 50매씩 봉투에 넣어 강내면에 살고 있는 조동식(趙東植)·김봉회(金鳳會)·박준평(朴準平) 등에게 각각 나누어 주어 각지에 배부케 함으로써, 인근 주민의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궁현리 산 6-1번지에 있다.
13. 신팔균(申八均).
[생졸년] 1882년 ~ 1924년 / 향년 42세
신팔균은 1902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로 강계진위대에서 활약하다가 같은 해 7월 군대가 해산되자 낙향하여 후진육성에 진력하는 한편 1909년 대동청년단에 가입, 안희제, 이원식, 윤세복, 서상일, 김동삼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 남북만주, 북경, 상해, 서백리아 등을 전전하며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에는 동삼성의 지도자로서 여준, 정안립, 박성태, 박찬익, 정신, 김동삼, 손일민, 김좌진, 서일 등 38인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오광선, 이범석, 윤경천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2년에는 의군부·광복단·광한단·흥업단 등 대소 8개 단체가 합류하여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에는 그 사령관에 취임하여 양세봉, 문학빈, 심용준, 박응백 등과 함께 무장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 300여명이 통의부사령부 소재지인 왕청문이도구를 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1924년 7월 부하들을 이도구 높은 산에 매복시킨 후 그들과 결전을 행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전사하였다.
그는 별호를 동천이라 하여 이청천, 김경천과 함께 독립군인제의 삼천(三天)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14. 채찬(蔡燦).
[생졸년] 미상 ~ 1924년 /
백광운으로 불리기도 한 채찬은 1905년 이강년을 따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당하자 남만지역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후에는 합니하 산골에서 백서농장을 만들고 둔전제로 군인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모험대를 조직하고 국내에 진입하여 적기관을 파괴하고 적의 밀정을 처단하는데 주력하였다. 1920년 본부가 길림방면으로 이동한 후에는 신용관, 김유하 등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여 제1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동년 5월에는 강계군 문옥면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동년 7월에는 이덕창을 시켜 친일파인 후창군수 권응규를 사살하게 하였다.
1921년에는 관전현에서 공격해오는 일경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전, 집안, 통화, 임강, 유하 등 각 현에 있는 친일기관인 일민단, 보민회, 강립단 수십개소를 습격하여 제거하였다. 또 의용단결사대 수백명을 조직하여 강계 어뢰면주재소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한편 1922년 김승학 등과 독립신문의 한문판을 발행하는 자금을 제공하였다.
또한 1922년에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제1중대장으로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전덕원 등과 의견의 마찰로 통의부가 분열되자 남만의용군 대표로서 상해임시정부에 파견되어 교섭한 결과 김승학, 이유필, 이종혁, 차천리, 박응백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직할의 육군주만 참의부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참의장 겸 제1중대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4년 5월에는 이의준, 김창균에게 국경을 순시하던 제등실 총독을 저격하도록 지시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15. 이광(李光),
[생졸년] 1879년 ~ 1966년) / 수 87세
1907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11년 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건설운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경학사(耕學社)의 조직에 참여했고 일시 신흥학교의 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이른바 무오독립선언(대한독립선언) 때에는 39인의 대표 중 1인으로 참가하여 서명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었고, 1921년 12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위원으로 북경에 특파되어 교민 보호 활동을 하였다. 1932년 9월에는 남경에서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의 조직에 참가, 간부로 활동하였고, 1944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당원으로서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뒤에는 재중 동포의 보호를 위해 한교선무단(韓僑宣撫團)을 조직하여 임시정부가 환국한 뒤 중국 정부와의 연락업무 및 교포 송환 문제 등의 업무를 맡았다. 광복후 체신부장관, 충청북도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사리현동 93번지에 있다.
16. 한봉수(韓鳳洙),
[생졸년] 1883년~1972년 / 수 89세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투쟁에 나선 한봉수는 1910년 5월 일제에 피체될 때까지 충청북도 일원은 물론 경상·강원지역 등 광범한 지역을 무대로 20여회에 걸쳐 격렬한 투쟁을 벌인 중부지방의 후기 의병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한봉수는 평민으로 구성된 소규모의 부대를 이끌고 민중적 기반에서 호응을 받으며 활동하였는데, 번개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의 명수였다. 그의 투쟁 유형은 일본인 자산가와 친일파 처단, 밀정과 변절자의 응징, 일본군과의 직접 교전, 군자금 모금, 우편행랑의 습격 등 다양하였다.
1910년 체포된 한봉수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합방대사령(合邦大赦令)으로 면소되어 출옥하였다.
이후 1919년 거족적인 독립운동인 3·1운동이 발발하자 4월 1일 고향인 세교리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이튿날에도 내수보통학교 학생들과 장꾼들을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다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학평리에 있다.
17. 곽재기(郭在驥),
[생졸년] 1893년(고종 30) ~1952년 / 향년 59세
의열단 단원으로 의열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일찍이 상경하여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귀향하여 청주 청남학교(靑南學校) 교사로 재직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에 헌신하였고, 해외로 망명하였다가 광복 후 귀국, 사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1909년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의 당원이 되어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지하공작을 전개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1919년 7월 만주로 건너가, 동년 11월 9일 김원봉(金元鳳) 등과 일제의 관리·밀정·관공서 등을 주살·파괴함으로써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무력으로써 독립을 쟁취하고자 강력한 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에 참여하였다.
그는 의열단 투쟁방침에 따라 폭탄을 구입, 비밀리에 국내로 보낸 후 서울에 잠입하여 계획을 실행하고자 기회를 엿보던 중 1920년 7월, 이 사실을 탐지한 경기도 경찰부에 동지와 함께 피체되어 징역 8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0년 다시 국외로 망명하여 만주·상해·노령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귀국하였다. 귀국 후 한국 에스페란토어 학회를 운영하는 한편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18. 김태희(金泰熙),
[생졸년] 1881년 ~ 1937년 / 향년 56세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청주 지방의 항일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일찍이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4년에 청주에 청남학교(淸南學校)를 설립하고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안희제(安熙濟)·김동삼(金東三)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적극 지원하여 1920년 9월 10일 연통제(聯通制)의 충청북도 독판부(督瓣府) 참사(參事)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문서의 배포 등의 활동에 진력하였다. 또한 국민회(國民會) 충청북도지회를 조직하여 그 책임자가 되었으며, 청주청년회(淸州靑年會)를 조직하여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21년 전국의 청년회들을 연합하려는 운동에 참가하여 동지 정규택(鄭圭澤)과 함께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 창립총회에 청주청년회 대표로 참석하는 등 항일투쟁을 주도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운암리 산 36번지에 있다.
19. 서광준(徐光俊)/서병준(徐丙俊)
[생졸년] 1910년~1944년 / 34세
서광준은 강내면 출신의 항일투사 전병수(全炳壽)에게 사사(私師)를 받아 일생을 조국 광복 운동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옥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청주농업학교(현, 청주농업고등학교)를 입학한 그는 3학년에 재학 중인 1929년 11월 광주학생 항일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항일 만세운동의 선봉이 되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초를 겪었다.
그의 독립운동 행적은 청주농업고등학교 교정에 있는 ‘청농학생독립운동기념탑(淸農學生獨立運動紀念塔)’에 기록되어 있으며, 독립기념관 제5관에도 광주학생항일운동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독립운동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한 그는 해외로의 망명을 꾀하였으나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해외 망명에 실패한 그는 국내에 남아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적 역량을 기르는 활동에 전념하였다. 야학(夜學)을 설치하여 미취학 농민자제들을 교육하는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제의 강제 공출에 항거하는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족 경제력 향상을 위해 자비(自費)를 들여 미호천(美湖川) 제방공사를 먼저 시작하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등에 찾아가 공사의 필요성을 적극 진정하여 결국 미호천(美湖川) 제방공사를 추진시켰다. 이로써 지금의 넓은 정봉평야가 형성되어 정봉, 신촌, 서촌 등 인근 지역 주민들의 생활터전이 마련되었다.
제방공사를 추진한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2년 정봉동 주민들이 ‘서광준지사송덕비(徐光俊志士頌德碑)’를 세웠다.
◇단재로(丹齋路)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지북동과 석교육거리 사이에 있는 도로.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언론인이었던 신채호(申采浩)[1880~1936]를 기리기 위해서 그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다.
◇의암로(義菴路)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내덕칠거리에서 주성동의 시계사이에 있는 도로. 독립운동가인 의암 손병희(孫秉熙)[1861~1922]의 출신지인 청원군 북이면으로 연결되는 도로로 손병희의 독립 정신을 후세에 깊이 전승하기 위하여 아호를 따서 그 이름을 지었다.
20.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생졸년] 1880년(고종 17)∼1936년. / 56세
[정의] 역사가·언론인·독립운동가·문인.
[가계]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이다.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大德郡) 산내면(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열혈생(熱血生), 한놈, 검심(劍心), 적심(赤心), 연시몽인(燕市夢人) 등이다. 조선시대 신숙주(申淑舟)의 18대 손이 된다. 고령신씨(高靈申氏)의 일부는 연산군 무렵에 낭성과 가덕 지방에 낙향하여 살았는데, 상당산성 동쪽에 산다고 하여 산동대가로 지칭되기도 했다.
[활동사항]
신채호(申采浩)[1880~1936]의 이름은 청년기까지 한자로 ‘寀浩’로 쓰다가 국외 망명을 전후하여 ‘采浩’로 바꾸었다.
신채호는 어려서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로부터 한학 교육을 받았으며, 아홉 살에 『통감(通鑑)』전질을 해독하고 열 살에 행시(行詩)를 지을 만큼 총명하였다. 열두세 살 때에 능히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독파하여 신동이라 불리었다.
열여덟 살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집에 드나들며 책을 두루 읽으며 그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열아홉 살 때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당시 이름 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 교수이던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김연성(金演性), 변영만(卞榮晩), 이장식(李章植), 유인식(柳寅植) 등과 교유하였다.
이 무렵에 신채호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독립협회 내무부 문서부에서 활동하였다. 스물두 살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申圭植)[1879~1922] 등과 개화와 자강의 교육사상을 펼쳤고, 스물다섯 살 때에는 신규식, 신백우(申伯雨)[1886~1959]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하여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스물여섯 살 되던 1905년 2월에 성균관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에 들어가 논설을 쓰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정간되어 퇴사하고 그 이듬해에 신채호는 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사(大韓每日申報社)에 들어가, 그 뒤 주필이 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더불어 그는 1907년 9월에 그는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여 정치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어 무단통치가 이루어지자 독립운동 기지를 국외로 옮기자는 신민회의 결정에 따라 신채호도 1910년 4월에 망명길에 올라 그 해 여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다.
여기서 그는 윤세복(尹世復), 이동휘, 이갑 등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해조신문(海潮新聞)』의 후신 『대동공보(大東共報)』에도 관여한 듯하며, 이해 12월에 창설된 권업회(勸業會)에서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1913에 그는 북만주 밀산(密山)을 거쳐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였고, 문일평(文一平), 박은식(朴殷植), 정인보(鄭寅普), 조소앙(趙素昻)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1914년에는 윤세용(尹世茸), 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 회인현(滿州 奉天城 懷仁縣)에 가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朝鮮史)』를 집필 발간했다. 이 때 그는 백두산과 광개토대왕릉을 비롯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보며 부여·고구려·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가 한국사의 새로운 체계화를 구상하면서 1916년 3월에는 북경에서 애국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소설 「꿈하늘(夢天)」을 썼다.
1918년경부터 그는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우거하면서 국사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였고, 그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漢城政府)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해 7월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 겸 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의 노선에 반대하여 이를 사임하였으며, 이어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에 대립되는 『신대한신문』을 창간,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였다.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그 이듬해 초에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는데, 이 선언에서 그는 폭력에 의한 민중직접혁명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해 1월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創造派)의 맹장으로 활약하였으나, 개조파(改造派)와의 대립으로 5월 그 회의가 결렬되자 북경으로 돌아와 석등암(石燈庵)에 거주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그는 아나키즘 사상에도 심취했다.
1927년에 그는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면서 국외에서나마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1928년 4월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대회에 참석하여 활동하는 등 그의 행동투쟁은 점점 거세어졌다. 그러다가 그는 그해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 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되었다.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되어 복역하던 중 1936년 2월 21일 쉰일곱 살에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신채호는 평소 "내 죽거든 시체가 왜놈의 발길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 재를 바다에 띄워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아무도 모르게 그의 유해를 들여와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상당산(上黨山)[419m] 기슭 옛 집터에 암장하였다. 이때 만해 한용운이 돌을 깎고, 오세창이 글씨를 새긴 비석을 신백우가 몰래 세웠다.
[학문과 사상]
독립운동가로서 신채호의 사상은 절대독립론, 무장투쟁론, 민족혁명론(민중직접혁명론) 등 세 가지 형태로 표현된다. 절대독립론은 3·1운동 후에 대두한 자치론, 내정독립론, 참정권론 등 일제와의 타협주의를 분쇄하는 데 큰 공헌을 하여, 비틀거리던 독립운동노선을 바로 잡아주었다.
무장투쟁론과 민족혁명론은 강도와 같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폭력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한 투쟁이 정당함을 가르쳐 주어 그 후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방법적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학자·언론인·문인으로서 신채호의 사관은 그가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의 초창기 사관은 소수의 영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영웅주의 사관이었으나, 그 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는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민족의 독립을 위한 것으로 귀결되므로 결론적으로 신채호의 사상은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저술]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朝鮮史)』를, 국사 연구에 노력하여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를, 한말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면서 썼던 것으로는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이순신전(李舜臣傳)』,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등 많은 저서가 있다.
[작품]
중편소설 「꿈하늘(夢天)」을 집필하였는데, 이는 일종의 환상적인 사상소설로서 그의 애국적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것이다.
[의의와 평가]
첫째, 독립운동가로서 신채호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한 민족주의자였다. 민족의 자강과 독립이라는 사상적 바탕 위에서 한 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의 사상과 행동은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노선을 정립하고, 이후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방법적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 역사학자로서 신채호는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조선사 연구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려 하였고, 조선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냈으며,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하는 한편, 역사연구에 있어서 실증(實證)을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역사학은 우리나라의 근대사학 및 민족주의사학의 출발로서 평가되기도 하나, 민족주의사상의 역사연구에의 지나친 투영이 그의 역사이론 및 한국고대사인식을 교조적(敎條的)·독단적으로 이끌어갔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셋째, 작가로서 신채호는 번안과 여러 장르의 창작 활동을 통해 한국민족문학사를 세우는 데 하나의 디딤돌이 되었다. 그는 우리 신문학 운동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신문학 형성에도 선구적 역할을 했다.
또한 그의 주체적 문학 및 문학론은 조선조와 근현대 문학을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서구화된 근대, 억압된 근대에 맞섰다. 이러한 면을 볼 때 그의 문학은 우리의 민족문학적 위치를 굳건히 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자리매김을 할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