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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25년 보고서
한 정희
25년 전 우리는 같은 시대와 같은 문화 속에서 같은 경험을 한 친구이자 동지로 만났다. 이러한 만남은 물론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장애를 가지고 동시대를 살아온 비슷한 연령의 여성이며 전문직을 가지고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몇 가지 공통점으로 인해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임을 통해 특별하게 장애인인권운동을 전개하거나, 그 당시 활발하던 여성운동에 부응하여 장애여성운동을 실험하면서 앞장서 나가지 않았다. 그저 생활의 일부분에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주어진 능력을 발휘하고 그것을 활용하여 후배 장애인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도모하고자 겨자씨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란 더 배우고자 하는 장애인에게 공부할 기회를 제공하여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겨자씨 회원들은 이 작은 일에 동참하면서 겨자씨와 더불어 각 개인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았고, 장애로 인해서 겪는 문제와 아픔들을 함께 동감하면서 열악한 상황들과 사회인식에 맞서서 현재를 살아냈다. 그리고 사반세기라는 시간이 흘러간 이제 겨자씨 창립 25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짧지 않은 시간 속에서 몇 몇 친구들은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고, 어떤 친구들은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먼 이국땅에 정착하여 살고 있으며, 또 어떤 친구들은 소식이 두절되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지만, 마음으로 이어지는 공동체 의식은 더욱 돈독해져 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지난 25년 동안 함께한 겨자씨 회원들의 삶의 애환을 정리하고 또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탐색하기 위해, 처음 모임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겨자씨와 함께 해 온 한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희미해져 가는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온 수많은 경험의 기록을 통해 다른 장애인에게 도움 및 정보를 제공하려는 의도로 작성한 이 보고서의 내용은 제1장 겨자씨가 시작되는 시기의 시대적인 배경과 상황, 제2장 겨자씨의 초창기(1983년부터 1988년까지), 발전기(1988년부터 1998년까지), 안정기(1999년부터 2007년까지)의 활동 내용, 제3장 겨자씨 회원의 미래 즉 장애인의 노후 삶의 방향과 과제를 보고하는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겨자씨 회의록, 장학생들의 편지, 개인이 소장했던 사진, 겨자씨 회원들의 증언 등의 자료를 수집하면서 잊혀졌던 삶의 흔적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함께한 신현임, 의견을 제시하며 문맥을 교정해 준 조성인, 양진숙, 임현주, 김혜원, 강은자, 박현숙, 이승연께 감사하며 겨자씨와 더불어 살아온 지난 25년간의 삶이 겨자씨 회원 모두에게 의미있었음으로 자리매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Ⅰ. 태동
1. 시대적 배경
겨자씨 회원의 대부분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태어났다. 이 시기는 전쟁 이후의 민족적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수난과 복구의 시대였으며, 생존을 위한 제도나 정책에 힘을 기울이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빈곤층에 대한 최소한의 조치로 ‘생활보호법’이 제정(1961년)되어 장애인도 이 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동법에서는 장애인의 의료재활 및 직업보도를 목적으로 ‘재활시설’을 규정하였지만 실제로는 수용만 하는 형편이었고 최소한의 의료적, 교육적 제도의 지원마저 어려운 시기였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보호나 지원이 없었던 이러한 상황에서 장애아 개인의 성장은 가족의 보호 아래에만 맡겨져 있을 뿐이었고 방치되거나 버려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이 성장하여 대학에 진학하게 되는 1970년대를 전후하여 ‘장애인’이라는 그 하나의 이유로 대학입학이 거부되는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이로 인해 장애의 문제가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아주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던 그 당시에는 장애인 당사자 또는 그 가족 개인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사회문제화 되었던 장애인 입학거부사건의 피해자들 중에는 약학대학을 지원했던 지체장애 학생들이 많았다. 이때 필기시험 성적에서 상위를 차지하여도 지체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낙방을 경험하거나 또 다른 불이익을 경험한 학생들은 제도적인 모순과 인권침해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다. 하지만 장애인들이 자신의 문제를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는 주체적인 움직임을 시도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물론 그들 중 일부는 장애인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적 움직임을 꾀하기도 했지만, 많은 장애인들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편입되어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 장애로 인해 당면하게 되는 문제를 각 개인의 단위로 해결하면서 장애인의 권리에 관한 관심을 표출하며 살았다.
1976년에 UN이 1981년을 ‘세계장애인의 해’로 지정함에 따라 국내에서도 장애인의 권리에 대한 관심이 크게 부각되었다. 또한 서울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고, ‘88서울장애자올림픽’이 함께 예정되면서 장애인복지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국내외에서 변화를 맞는 1980년대는 장애인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면서 많은 장애인단체들의 결성이 이루어진 시기다. 그러나 도처에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존재했고,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장애문제와 대응하며 살고 있던 장애인 당사자들의 개인적인 만남들은 크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 깨어나는 의식
1977년에 약학대학을 졸업한 양진숙은 바로 약국을 개업하고 있던 터라 대학정립단(지체부자유대학생들의 모임)의 선후배와의 만남에 나가 후배들을 위한 진로 상담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신현임과 조성인을 만난다. 1978년 신현임은 병원약국에 실습근무하면서 이지은을 만난다. 이지은은 한정희와 양진숙의 약대 후배다. 이렇게 상호 연결되어 있는 다섯 명은 모두 소아마비 장애여성 약사들로서 약국 또는 약학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정보교환을 나누며 친밀해졌다. 이후에도 약대 후배들이 졸업을 하여 소아마비 장애여성 약사들은 수를 더해 갔고, 장애를 가진 여약사들의 직장문제 등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실습과정 등을 통해 친분이 두터워졌다. 또한 먼저 개업한 약사가 자신의 약국에서 후배에게 실습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고, 약국을 개업하기 전에 사전준비로써 소아마비 수술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앞서 경험한 건강관련 정보를 전해주었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정서적인 지지를 상호 주고받으며 관계를 유지해 나가다가 81년 겨울에 양진숙의 집에서 10여명의 약사 선후배들이 만났다. 무엇인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해 보고자 하여 만남을 가졌지만 아직 통일된 관심으로 이끌어가기에는 시기상조였다. 이 후에 이들은 모두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며 지내다가 83년 모임을 재시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사회에 발을 내딛고 어느 정도 적응하여 경제적인 독립이 이루어져간다고 여겨졌을 때였다. 장애라는 공통의 경험을 통해 의기투합 하면서 상호부조와 사회의 환원을 위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 모였고 그것이 현재 ‘겨자씨’ 모임의 시작이 되었다.
그 때 함께 모였던 다섯 명의 장애여성은 장애로 인한 부정적인 사회경험을 통하여 장애의 문제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들은 다른 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인 사회운동의 차원으로 전개시키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삶의 한가운데에서 자신과 또 다른 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펼쳐나가기로 다짐했다. 이들의 관심은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 가난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 학생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부모의 지원으로 교육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음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장애학생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애아에 대한 교육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현실적이고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결국에는 장애와 가난으로 인해 이중의 고통을 받고 있는 장애학생을 위한 장학금의 마련을 위해 공동기금을 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Ⅱ. 변화와 수호
겨자씨는 모임의 목적을 ‘회원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장애자 자립을 위한 사업을 위하여’라고 명시했다. 여기에서 ‘친목도모’란 회원간의 상호부조를 통해 서로를 지지하자는 의미이며, ‘장애자 자립’을 위한 사업이란 경제적으로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함으로써 배움의 기회를 주어 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자는 의미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내부로는 회원간의 우애를 다지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외부로는 복지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장학사업을 전개했다. 이러한 두 축에 의거한 작은 실천을 장기적으로 유지해 가기 위해서는 내부 회원들의 결속을 통한 모임의 수호와 외부 사회를 향한 변화의 시도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정기모임, 야유회, 여행, 문화활동, 송년회, 선물교환, 경조사 참여 등을 실행하는 한편, 사회적 자립을 준비하는 장애인 학생을 찾아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보장구들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에게 그것을 마련해 주는 사업을 실천해 나갔다.
1. 1983 - 1987 : 초창기
1983년 5월 양진숙, 조성인, 신현임, 한정희, 이지은과 그의 남편 김동화 이상 6인이 첫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서로 도우며 지지함으로써 힘을 주고받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실천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를 위해 월 1회의 정기모임을 갖기로 하고, 월회비 1만원을 납부하여 일정기간 동안 적립하기로 결의했다. 총무직으로는 신현임을 추천하여 창립총회를 준비하기로 하였으며, 약국을 개업하고 있는 회원들의 협찬을 받아 장애인자립시설인 ‘명휘원’과 ‘사랑의 집’에 살충제를 기증하는 첫 사업을 통해 겨자씨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초창기에 회장단을 이끌었던 임원들은 신현임, 조성인, 양진숙, 한정희. 이춘우, 김동화, 장은수 등이었고, 회원으로는 배경희, 민은기, 안경숙, 오은경, 이은자, 전은혜, 김혜원 등과 후원회원으로는 고평임, 김미숙 등이 활동하였으며, 주로 창립멤버들과의 관계로 이어진 약사들이 주축이 되어 약사회원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1) 정기모임
장애인 시설에 관심을 둔 첫 번째 사업을 마친 이들은 1983년 9월 새터에서 야유회로 모여 친목을 도모하면서 우의를 다졌다. 그리고 10월에 낙엽 지는 대학로에서 모임을 갖고 제1차 정기 총회를 개최하면서 겨자씨 회칙을 제정하였다.(*8310 총회)창립총회에서 선출된 초대회장 신현임은 다양한 방법으로 정기모임을 전개해 나갔다. 매년마다 송년회를 열며(*8312 송년), 회원의 집, 조용한 레스토랑, 음식점 등을 모임장소로 하여 식사와 함께 대화의 시간을 가지면서 우애를 나누었다. 명휘원사업과 연결되어 낙선재 마당에서 야유회로 모여 친목의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8405 낙선재)
초창기에 활발한 활동을 주도하던 양진숙 총무가 약국을 정리하고 1986년 결혼 후 도미하였고, 장은수 회장의 임기가 지난 후 겨자씨의 방향전환을 모색하면서 조성인 회장으로 이어졌다. 겨자씨는 모임의 활성화를 위해 장애인 자조모임인 청지기의 전 회장 신창덕씨를 초청하여 의견을 듣기도 하며 방향을 모색했다. 이 때에 모임의 규모를 확산시키는 것보다는 내실을 기하여 장애인을 위한 순수한 사회단체로서의 기량을 키워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의견을 모으면서 1987년 12월 제6차 정기총회에 이르기까지 기초를 다지는 초창기의 활동이 이어졌다.
2) 장학사업
장학금 수여의 대상자는 집안 사정이 어렵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으로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중3학생이었다. 장학생이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고등학교 진학을 선택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고교 전액 장학금을 수여하기로 결정하였다. 1984년 2월 첫 번째 장학생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수여했다. 첫 장학금 수여자인 팽현모는 삼육중학교 졸업예정자로 삼육중학교 교사인 박명자의 추천을 받았다.(*8409 팽현모)이 후 팽현모는 총회 또는 망년회에 참석하여 상호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고, 1987년 원광대학교 한의학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 장애인 학생이 너무 많이 입학한다는 이유로 학교 측의 휴학권고가 있었으므로 휴학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1년 후 학업을 다시 시작한 팽현모는 장애인대학생모임을 이끌면서 활발한 장애인인권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3) 상호부조
회원간 상호부조의 일환으로 상호금고기구를 운영하기로 했다. 3개년의 계획을 세워 목표액 1000만원을 조성하기로 하고, 그 기금을 만들기 위해 공동사업을 추진했다. 양진숙(두별약국), 신현임(공작약국), 조성인(대웅약국), 한정희(주영약국), 이지은(정성약국), 배경희(중앙약국), 안경숙(길약국), 오은경(창원약국), 이은자(선화약국) 등 대부분의 회원이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전문직을 활용하여 약품 공동구매 사업을 수시로 추진하였으며 그 이익금을 적립하였다. 이렇게 마련된 자금은 필요한 회원에게 대출하기로 결정하였고 1987년 까지 공동사업과 대출 제도가 유지되다가 폐지되었는데 상환된 기금은 은행의 재형저축에 가입해 놓았다. 또한 고 이방자여사가 설립한 장애인 직업교육시설인 명휘원의 학생들 작품(앞치마)을 구입하여 분담 판매함으로써 명휘원 학생들의 수익사업에 참여하였다.(*앞치마 사진)
4) 나눔사업
1985년 4월에 보장구 지원을 위한 제1회 사랑의 찻집을 개최하였다.(*8509 사랑의 찻집) 이를 위해 양진숙과 신현임이 기독교방송국 사랑의 꽃다발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홍보하였다. 일일찻집의 이익금으로 휠체어 4대와 목발을 구입하여 기독교방송국에서 추천한 곳, 장애자 재활협회에서 추천한 곳, 명휘원, 사랑의 집에 각기 휠체어 1대씩을 기증하고 목발은 사랑의집에 기증하였다. 사랑의 꽃다발 출연을 인연으로 이스라엘을 여행하고 돌아온 한 청취자로부터 겨자씨를 전달 받았고, 한글 서예가인 샘물 김명수님과 연결되어 겨자씨 회원 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성귀가 적힌 서예품을 선물 받기도 했다.(*할렐루야 액자)
1987년 8월 제2회 사랑의 찻집을 개최하였다. 장학기금 마련을 위한 일일찻집이었고, 목표액을 크게 설정하여 회원 각자에게 할당량을 주었다. 회원들이 운영하고 있는 약국과 거래하는 제약회사의 찬조도 받고, 선후배, 가족 단위로 참여하여 성황리에 마쳤으므로 장학생의 범위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일일찻집에서 이루어진 미팅의 결과로 회원의 친지 중의 한 사람이 결혼에 이르게 되는 경사도 있었다.
5) 분석 및 의미
1980년대 중반까지는 사회적으로 장애인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못하였고 장애인에 대한 복지정책도 열악한 시기였다. 따라서 겨자씨가 친목도모와 장학사업을 모임의 목적으로 둔 것은 의미 있는 귀결이었다고 보여 진다. 초창기의 겨자씨는 장애와 여성과 약사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회원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특성과 기회를 활용하여 사회에 기여하려는 뜻을 품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며 모임을 다져나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겨자씨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장애인이며 여성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부모의 지지로 전문직 교육을 받았고 경제적으로 자립되어 있었으므로 사회의 엘리트계급에 속해있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긍심은 노블리스오블리제의 사회적 책임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사회로 진출하는 후배 장애인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장애를 가진 약사들이 취업을 하기 힘든 상황 하에서 약국개업을 준비한 이들은 후배 약사들에게 약국개업의 정보 및 연수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그 당시 이루어졌던 사회운동과 함께 장애인인권운동을 시작하는 후배들에게는 경제적인 지원으로 격려했다. 또한 장애인이 사용하는 보조장구들을 구입하여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이러한 작은 실천들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 나가는 모범을 보였다.
- 후배 장애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장애를 가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므로써 진학의 꿈을 심어 주었다. 그들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교육을 통해 사회적,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장애인의 직업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 상호금고의 활용은 실패로 이어졌지만 장학사업의 목표는 꾸준히 이루어갔다
장애를 가진 학생에게 장학금을 수여하여 대학에 입학하도록 후원하고, 장애인 자립시설에 구급약품과 보장구를 지원하는 등의 초창기다운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졌지만, 상호금고를 운영하여 상호부조의 방법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는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꾸준하게 목표를 가지고 작게나마 실천하고 있었으므로 그 모습을 통해 장애인의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타 단체 회원의 유입이 이루어졌으며, 겨자씨 또한 타 장애인 단체의 행사에 참여하면서 친분을 넓혀갔다.
- 당당함이라는 장애 문화를 형성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사회인식 변화에 일조했다.
그 당시는 장애인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를 활보하거나 커피숍에 나타나는 것도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 겨자씨 회원들이 함께 모여 당당하게 음식점으로 들어가거나, 여행 혹은 관광을 다니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심지어는 집에나 있지 뭐 하러 나와 다니느냐는 비난을 받는 분위기였다. 이렇게 어두운 사회 환경에서 생활하면서도 사회 속으로 스며들어 정기모임, 야유회, 망년회를 통해 여럿이 함께 만나면서 장애인 집단의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겨자씨라는 공동체 안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가족들에게 자신의 입지를 세웠으며, 장애인으로써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족 구성원에게 일깨워 주었다. 따라서 내부로는 회원의 결속력을 다지고 외부로는 자금 확보를 위한 여러 가지 행사를 도모하면서 움츠러들지 않고 사회 구성원이며 소비 주체로써의 당당한 권리를 찾아 나선 것은 이들이 만들어갈 수 있었던 독특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2. 1988 - 1998 : 발전기
1988년도는 장애인올림픽을 계기로 하여 한국 사회는 장애인에 대한 의식과 정책의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겨자씨 또한 역동적인 시기를 맞으며 광범위한 계층으로 회원의 확대가 이루어지면서 외부와 내부의 발전을 꾀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회장단을 이끌었던 임원들은 조성인, 한정희. 이춘우, 신현임, 김혜원, 이은자, 이은수, 조선경, 강은자, 장연순, 민은기 등이었고, 신입회원으로는 윤성옥, 문성두, 김형기, 박승란, 오은숙, 송미아, 박경희, 김동숙, 김민정, 한승훈 등이 가입하였고, 후원회원으로는 이재강, 장혜순 등이 활동하였다. 특히 장학금 수여자인 팽현모와 정성현이 회원으로 합류하면서 회원의 범위가 광범위해졌다.
1) 정기모임
이 시기에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정기모임을 가졌다. 한정희 회장은 정기모임을 대체하는 장애인 시설 방문의 횟수를 늘렸으며, 이은자 회장, 이은수 회장, 조선경 회장으로 이어지면서 정기모임의 강화를 통해 회원의 결속을 다졌다. 장연순 회장에 이르러는 내부 회원의 복지증진에 관심이 고조되면서 회원간의 상부상조의 일환으로 경조사 참여를 실시하였다. 생일축하, 약사회원들의 한약사시험 응원, 해외여행을 위한 적금 시도 등이 있었으며 가족들과 함께 노래방문화를 즐기며 내부 회원의 유대감을 증진하였다.
모임시 장소의 선택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물론 야유회도 마찬가지다. 이동거리, 편이시설, 화장실, 휠체어접근성 등이 고려되어야 하며, 계단이 많거나 돌들로 장식되어 있는 입구는 우선순위에서 제외되었다. 방배동 백조의 시대에서부터 출발하여 서울교육문화회관, 예술의 전당, 힐탑, 서초동의 예당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남한산성, 천진암 성지,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 전당 미술관, 문호리의 무너미, 포천 다락원, 미사리, 송추, 의정부 빠라디소, 장흥 작은 영토로 즐거운 유람시대가 이어졌다. 송년회는 회원의 집을 방문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선물교환과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9006 천진암, 9104 서울대, 9309 예술의전당, 9312 교육문화회관 송년, 9405 무너미)
또한 초창기 오은경, 배경희의 결혼에 이어 1990년 겨자씨 회원 중에 강은자와 문성두 커플이 결실을 맺고(* 문성두 강은자 결혼사진), 조선경, 김민정, 한승훈, 이춘우, 민은기의 결혼으로 이어졌다. 결혼은 아니지만 또 다른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으로 가는 한정희, 전은혜의 일탈도 눈에 띄며, 조선경이 우리 곁을 떠나는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2) 장학사업
사회적 자립을 위하여 대학교육뿐 아니라 직업교육도 필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직업교육훈련생을 대상으로 하여 교육비를 지급키로 하면서 장학생 대상 범위를 확대하였다.(* 900100 최동락)1988년에 정립회관의 김미선이 추천한 최동락에게 보조금 지급을 시작했고, 1990년도 장학생 석관고교 정성현은 세무대학에 입학했다. 임희석에게 명휘원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방통대 졸업까지 장학금을 수여하는 한편 사회교육종합학교(사회복지사 교육)의 학비 지원 및 지역모임인 ‘샘물회(이동도서 및 장애인심부름센타)’를 지원했다. 임희석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 ‘자랑스러운 한국인상’을 받았다.(*950820 임희석)김동숙회원 개인전 수익금의 일부를 특별장학금으로 기탁하여 와서 임희석에게 수여하고 겨자씨는 휠체어를 보냈다. 10년간 이어졌던 임희석의 지원은 1998년 중지하기로 결의하고 계속되어 오던 재활재단의 지원도 정리하였다. 이후 임희정(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게 장학금을 수여했고(*970120 임희정), 부모가 장애인으로서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 학생 이슬(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에게는 재활자립기금을 수여했다.(*980310 이슬)
3) 나눔사업
이 시기의 중요한 변화는 장애인 시설 방문의 시도다. 시설의 상황을 실제로 보고 듣고 알기 위해 직접 장애인시설을 방문하기로 한 것이었다. 1988년도 첫 시설방문 사업으로 광주 장애인시설인 ‘평화의 집’을 방문하여 구급약품을 전달하고 이어서 보라매공원 안에 있는 재활협회 자립작업장을 방문하여 살충제와 비상약품 전달하였다. 가죽공예 작업을 하는 신내동 ‘밀알의 집’을 방문하여 구급약품을 전달하고 물건도 구입했다. 또한 안국동 ‘라파엘의 집’에 가서 무의탁 아동과 교사들에게 선물과 구급약품 및 모기약 등을 기증했다.
기타 후원사업으로는 자선음악회 후원과 함께 영세 재가장애인가정과 결연하여 후원하였고 직접 결연자를 만나 격려하기도 했다. 김동숙회원이 개인전(* 개인전사진)수익금의 일부를 또 다시 특별후원해 주어서 장학금으로 활용하고, 양진숙회원의 특별회비로는 한국재활재단을 후원하고(*9209 김광균), 장혜순후원회원의 기부금으로 유스티나 수녀님이 운영하는 부산의 재활원에 후원했다. 또한 내부 회원의 지원을 위해 논현문화복지회관 7층 예술관에서 한승훈 라이브 콘서트(*971130 콘서트)를 열었고 그 이익금을 영상비디오 제작에 쓰기로 했다.
4) 분석 및 의미
이 시기는 장애인의 운전이 가능해지면서 자동차를 소유한 회원들이 많아졌다. 이로 인해 이동이 수월하여졌으므로 역동적인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회원의 생애주기별 특징과 맞물려 성장기의 자녀들의 참여도가 높았고,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회원들의 가입이 이어져 초창기의 직업 특색을 벗어나 발전기답게 겨자씨의 영역이 확대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 활발한 대내외적 활동을 통하여 회원의 결속력이 강화되었다.
이동이 편리해짐에 따라 장애인 시설방문의 횟수를 증가시킬 수 있었으며 의약품을 수월하게 전달 할 수 있었다. 또한 회원들이 직접 운전을 함으로써 행동반경이 넓어져서 야유회 등 외부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다. 물론 사회 환경적으로 장애인 편이시설이 확보되거나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겨자씨가 직접 편리하게 접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건의하는 노력을 해야 했다. 그리고 화가, 가수, 사업가, 전업주부, 교수,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회원의 가입으로 인해 회원의 영역이 광범위해졌으며 회원의 생일, 자녀들의 입학과 졸업 등의 축하를 통해 친밀감을 유도함으로써 회원의 결속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얻었다.
- 장학금 수여대상자의 확대와 지속적인 지원을 통하여 자립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직업교육훈련생에게도 교육비를 지급하여 자립을 돕고, 장애인가정과 결연, 한국재활재단 후원, 장학금을 수여하는 등 지원 대상의 확대가 이루어졌으며 지속적인 후원으로 사람을 키우고, 자립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보람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내부 회원을 위한 지원을 시도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진행하였다.
- 문화적 욕구의 증대에 따라 활동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여행, 콘서트, 전시회 등에 참여하고 미술관 탐방과 노래배우기를 시작으로 노래방을 순례하며 시대에 맞물리는 분위기속에서 회원들의 문화적 욕구를 채워 나갔다. 그리고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회지발간을 모색하는 등 문화적인 활동들을 시도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는 문화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고, 그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3. 1999 - 2007 : 안정기
1999년 제17차 정기총회에서는 장학생 중의 한사람이었던 팽현모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일은 겨자씨의 첫 장학생이 자립한 후 겨자씨 회원으로 가입하고 이어서 겨자씨의 회장이 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일은 초대 회장이었던 신현임이 2006년 다시 회장으로 선출되어 겨자씨 창립 25주년 기념행사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에 회장단을 이끌었던 임원들은 팽현모, 신현임, 이춘우, 장연순, 최홍림, 장현주, 한정희, 조성인, 임현주 등이고, 신입회원으로는 신동원, 신정애, 김선경, 정은정, 이명미, 김미선, 이성규, 전상숙, 엄선양, 신혜숙, 양만석, 이민형 등이 가입하였고, 후원회원으로는 윤덕희, 이기호, 박동우 등이 활동하였다.
1) 정기모임
팽현모 회장은 정기모임의 활성화를 모색하기 위해 앙케이드를 실시하는 등 다각도의 변화를 시도하다가 카나다로 이민을 떠났고 장연순 회장이 다시 모임을 이끌어갔다. 최홍림 회장은 장애인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상식을 익히고자 하여 김병식, 이성규, 김미연, 임효숙, 배복주 등을 초청하면서 정기모임의 내용변화를 시도했다.(*0206 국립재활원, 0204 김미연, 임효숙, 배복주)또한 다음포탈싸이트에 겨자씨83 카페(cafe.daum.net/kjc83)를 개설하여 운영함으로써 회원간의 유대감과 친밀감을 증진시켰다. 그리고 2006년 제24차 총회에서 신현임 회장이 다시 선출되어 자신의 집을 근거지로 삼고 새로운 살롱문화를 열어갔다. 편안한 장소와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 가정식, 포도주, .. *사진*)의 제공으로 모임의 즐거움과 편리함이 더하게 되었다.
야유회와 송년회는 계속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이어 나갔다. 바다낚시, 교외에서 성악가와의 만남, 웤샾, 어린이들의 사생대회, 노래를 배우며 바베큐파티를 하는 등의 다양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방식으로 이어졌다.(*0302 송년, 0204 가든파티, 0212 노래방, 0504 홍혜경, 06 마현갤러리)또한 각자의 상황에 맞는 해외여행을 시도하면서 장애관련 정보를 주고받기도 하고, 회원 상호간의 이해력 도모를 위해 MBTI 성격유형검사를 실시하기도 하면서 서로 친밀해져 갔다.
안정기를 맞이한 겨자씨의 회원 중에 조성인은 미국으로 건너가 한의과대학에서 다시 공부하여 현재는 교수로 재직 중이다. 양진숙은 뉴욕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으며, 이명미는 남편의 해외근무로 미국의 장애인스포츠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하면서 지내고 있다. 팽현모는 카나다로 이주하여 한의원을 개업하고 대학에서 강의도 하면서 영어체험기(어학연수가도 못 배우는 Live English)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승훈은 음악피디를 거쳐 부동산중개업을 시작하였으며, 김동숙은 TV 출연 및 수차례의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강은자 문성두 부부는 안경점을 확장하였고, 최홍림은 약국 이전확장 후 현역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신현임은 건강의 악화와 약사의 노동력이 요구되는 의약분업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약국을 폐업한 후 취미활동 및 교회활동을 하면서 건강의 유지를 위해 애쓰고 있으며, 한정희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 장애인복지학을 공부하였고 현재 약사의 업무를 떠나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장애여성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춘우는 남편의 교환교수 연구지를 따라 미국과 독일을 다녀온 후 주말농장도 가꾸며 바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장연순은 남편의 해외 근무로 인해 하와이를 다녀왔고, 오은숙은 교회에서 상담사역을 하고 있으며, 안경숙은 신앙생활을 통해 보람되게 지내고 있다. 김혜원은 일찍이 약국을 접고 약품도매상에 근무하면서 시간의 여유를 갖고 건강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체력증진에 힘씀과 동시에 한문서예에 진력하고 여러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상하기도 하였다. 이지은은 꾸준한 약국경영을 통해 지역주민의 건강증진에 이바지하고 있고, 김민정은 자녀양육과 함께 독서지도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민은기는 자녀교육에 전념하면서 활기차게 지내고 있고, 박경희는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캠퍼스 복음사역에 힘쓰고 있으며, 신정애는 피아노 학원을 정리하고 베드민턴과 탁구 부문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등 장애인체육활동을 하고 있다. 김형기는 이태리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돌아와 의류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성규는 시회복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상숙은 컴퓨터를 활용한 다양한 활동과 함께 교회의 노인대학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으며, 김미선은 에세이집 ‘그 여자가 사는 법’을 출간하고 장애인인권운동을 하고 있고, 임현주는 약국을 폐업하고 약품도매상에 근무하면서 그림전시회 등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기다가 다시 복지선교학을 공부하며 인생 이모작을 설계하고 있다. 그리고 겨자씨 막내인 엄선양은 박태완과 결혼하여 예쁜 딸 부경이를 낳아 건강하게 양육하고 있고, 이민형은 겨자씨 발전을 위한 활발한 의견을 제시하여 활력을 주고 있으며,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양만석은 온라인상으로 중국의 문화를 전하는 등 회원들의 간접체험의 범위를 넓혀주고 있다.
한편 이은수와 이은자는 우리 곁을 떠나갔고, 여러 회원들은 장애로 인한 합병증 및 골절, 고혈압, 척추측만, 골다공증, 심각한 소아마비 후 증후군(PPS) 등을 겪으면서 건강 관련 대화가 집중적으로 증가되었고 따라서 적극적인 대처방안과 더불어 노후 대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2) 장학사업
장학금 수여는 허성현(세종고등학교, 건국대학교 사회복지학과)(*03 허성현), 유연희(청강문화산업대학 에니메이션과), 김영웅(청강문화산업대학 컴퓨터게임과) 등으로 이어졌으며, 이들 중에 김영웅은 LPK(한국작은키모임) 초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장애인인권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적절한 시기에 제도권의 공교육을 받지 못한 장애인에게 대학의 경험과 전문분야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홍혜경(세계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이어(*0412 홍혜경소개서), 이현준(나사렛대학교 사회복지학부)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0702 이현준)
3) 겨자씨 창립20주년 기념행사
2003년 5월에는 겨자씨 창립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80여명의 회원가족과 친지들, 장학생들과 그의 부모들, 후원회원가족들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는 가운데 장학생 중의 한 명인 김영웅이 축사(* 축사내용)해 주었고 한승훈의 축가도 있었다. 특히 19년 동안 회계의 임무를 맡아 온 이춘우 회원에게 감사패를 증정하면서 회원간의 겨자씨에 대한 애정과 결속을 다졌다.(* 사진들)
4) 겨자씨 발전추진위원회 구성
겨자씨는 내부로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사회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려는 노력의 기간을 거치면서 변화를 모색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겨자씨 회원간의 그 동안 쌓아온 신뢰와 우정을 바탕으로 하여 회원간의 공동체 의식을 구체화하고 노후의 풍요로운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일을 계획하기 위하여 겨자씨발전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직과 운영규칙에 대한 논의와 함께 겨자씨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다각도의 모색이 이루어졌다. 위원의 자격은 겨자씨회원 모두에게 해당되었으며, 그 중에서 자원하는 회원으로써 신현임, 임현주, 한정희, 장연순, 전상숙, 최홍림, 김동숙, 김형기, 김미선, 김민정, 조성인, 이지은 등 12명으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0610 겨발추)이후 겨자씨발전추진위원회는 수차례의 논의 끝에 겨자씨의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장애인의 노후’에 초점을 맞추어 의미 있는 일을 실천하자는 내용으로 의견을 모았고, 발전 방향에 대한 논의를 지속시키기로 하면서 겨자씨 창립 25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회로 재구성되었다.
5) 겨자씨 창립25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회
2007년 제26차 정기총회에서 겨자씨는 지난 25년을 함께 지내온 우정과 향후 25년 이상을 함께 살아갈 동지로써 앞으로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신현임, 한정희, 임현주, 전상숙, 김민정, 이민형으로 창립 25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2008년 5월 중에 겨자씨 창립 25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배경은 25주년을 축하하고 오랜 시간 겨자씨에 관심을 갖고 지켜온 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함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이다.(*0702준비위 회의사진)
6) 분석 및 의미
겨자씨가 활동을 시작할 무렵에는 진학하고자 하는 장애인들의 대부분이 대학입시제도의 피해자들이었는데 이 시기에는 장애인을 위한 특례입학제도가 실행될 정도로 사회 환경의 변화가 크게 일어났다. 장애인에 대한 모든 제도가 장애인을 향한 시혜의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장애인의 권리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시기를 맞아 겨자씨는 모임의 안정화를 유지한다. 따라서 외부로의 나눔 사업 보다는 내부 결속과 유지를 위한 모색이 활발해지면서 장애인의 노후 삶에 대한 관심을 표출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 겨자씨 내부의 변화에 대한 모색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회원들은 인생 후반의 전환기를 맞아 각 전문 분야에서 입지를 확고히 하면서 취미생활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이민, 이직 등으로 각자의 못 다 한 꿈을 찾아 나서기도 하면서 개인의 영역을 넓히고 역량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활발한 취미생활과 함께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겨자씨 카페의 개설을 통해 회원간의 연결이 보다 편리하게 이루어졌으며, 겨자씨 창립 20주년행사 등을 치루면서 내부 회원의 결속력을 다졌다. 그 후 겨자씨발전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장애인의 노후’에 대한 미래를 준비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 장애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노후의 삶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겨자씨 초창기 회원들은 어느덧 50대 중반에 이르렀다. 비장애인에 비해 격변기의 적응력이 떨어져서 경제활동을 중단한 회원도 많아졌다. 후반기에는 건강의 악화로 약국 폐업, 학원 폐업, 수술로 이어지면서 경제력의 상실과 빠른 노후를 맞게 되는 변화가 발생했다. 건강과 경제력의 커다란 변화를 겪으면서 비장애인에 비해 좀 더 빨리 노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건강 유지가 최대의 이슈로 떠오르면서 서서히 노후의 삶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따라서 회원 개인의 꿈과 겨자씨의 미래를 연결시키지는 못했지만 각자의 노후 대책을 통해 장애인의 바람직한 노후문화를 형성해 가기로 하였다. 이것은 겨자씨의 미래를 위한 방향의 전환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 장학금 수여의 기준을 삶의 질 향상으로 확장시켰다.
장학사업은 대상자에 대한 기준 변화를 시도하였으며 장학생 심사 관리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면서 효율적인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제도권 내에서의 장애인 장학제도가 확대되었으므로 겨자씨는 장학생 선정의 기준을 변화시키기로 했다. 즉 사회적 자립을 위한 교육뿐 아니라 외부 사회로 진입하여 세상과 소통하는 꿈을 이루기 원하는 장애인에게 장학금을 제공하여 그들의 삶이 보다 풍요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였다.
- 건강한 세대교체를 이루지 못했다.
장학생의 유입이라든지, 새로운 회원의 확보를 통한 양적인 증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애인을 수혜자의 자리에 머물게 하는 제도적 상황에서 겨자씨만의 독특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였으므로 새로운 영역의 회원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젊은 회원을 겨자씨의 중추세력으로 흡수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하여 참신한 세대교체를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기존회원끼리 너무 친밀해져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외부의 도움 없이 중단 없는 모임으로써 순수성을 유지해 온 것은 겨자씨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후배 장애인의 권리를 확장하기 위한 운동을 펼쳐나감을 통해 장애인 당사자들인 장학생들이 사회적 책임을 환원하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될 만하다.
Ⅲ. 준비되는 미래
1. 겨자씨의 현재
현재의 겨자씨는 장애, 성별, 나이의 구별 없이 모여진 공동체다. 이들은 장애의 경중이 다양하여 장애로부터 파생된 문제들에 대한 경험 또한 제각각 다르지만 동시대에 장애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 속에서 겪을 수 있는 사회적 제한들을 고스란히 경험해 온 사람들이다. 장애인에 대한 교육기회의 제한 속에서 차별과 고통을 인내하고 감수하면서 교육을 받았고, 비장애인과 더불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순응하기도 하고 때로는 희생되기도 하면서 삶을 살아왔다. 장애인이면서도 비장애인이어야 하는 차별적 요구 안에서, 장애인도 아닌 비장애인도 아닌 미묘한 경계선에서, 장애극복이 강요되는 장애인의 성공신화를 거부하면서, 인권의 주체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그냥 보통사람으로 살아온 것이다. 따라서 보통사람들로서의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은 겨자씨 전체의 활동 방향의 근간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논의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보통사람으로서의 장애인’이라는 언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합의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여겨지지만, 특별한 혜택을 받고 누린 삶이 아닌 보통사람 장애인으로 살아온 삶이라고 합의한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바로 겨자씨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역할로 인해 겨자씨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즉 겨자씨는 이 사회 안에서 장애인을 위한 제도나 정책이 모색될 때 또는 장애인의 인권을 이야기 할 때 보다 보편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함께 하는 통합사회에 대한 소중한 경험과 시각을 되살려냄으로써 극단적인 장애인 중심 관점이나 극단적인 비장애인 중심 관점에서 벗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의미 있는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합적 관점과 시각을 통해 장애인의 노후의 삶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실용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2. 당면한 문제들
고령화 사회를 맞이하고 있는 겨자씨가 중년의 나이에 노년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절실한 이유가 있다. 현재 경제활동을 하고 있거나 얼마 전까지 경제활동을 했던 보통사람으로서의 중산층 장애인 특히 비혼의 장애인은 전반적인 장애인정책의 사각지대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겨자씨 창립 25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겨자씨 회원들의 노후설계’에 대한 토의를 했다. 겨자씨 회원들은 자신의 노후 대책을 각자가 개인적으로 준비할 의무라고 여기고 있었으며, 노후를 대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건강의 유지, 경제적인 대책, 동거인의 유무라고 지적하였다. 특히 연금지급 개시년도와 노인의료정책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법적연령에 관한 문제들을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지적된 바에 의하면, 장애인은 비장애인 보통사람들의 평균 통계와는 전혀 다른 변수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했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로 인해 발생한 여러 가지 몸의 상태는 노인의 연령에 해당하는 조건으로 다가서 있고, 장애의 후유증으로 발생하는 노동력의 저하로 인해 경제활동에서 일찍 물러서야 하기 때문에 보통사람들 비장애인보다 먼저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사회적 제도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연령 65세 보다 10년 이상 앞당기는 등의 법적 연령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어야 한다.
또한 사회적, 경제적 활동이 가능한 미래에 대한 계획은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서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즉 현재 가정을 이루고 있는 회원들은 경제적인 부분과 부부의 건강 유지에 관심이 많았고, 독신으로 살고 있는 회원들은 경제적인 준비뿐만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관계 형성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가족과 같은 친밀한 동거인을 필요로 했는데 그 이유는 경제적으로 서로 보완하려는 의도뿐만 아니라 치안과 건강상의 위기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후까지 연결해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운동방법이 개발되어야 하고, 장애인 각자에게 맞는 운동방법의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도록 의료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또한 웰빙, 실버문화 등과 이어져 있는 개념으로써의 여가활동을 하면서 장애인의 아름다운 노후를 준비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지원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경제적 활동이 불가능해질 미래에 대한 계획은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여 졌다. 유료 양로원이나 요양시설 등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일반 실버타운을 선택하는 경우에 같은 비용을 들이면서도 스포츠시설이나 또 다른 부대시설들을 활용할 수 없는 불평등에 관한 문제들을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경제적인 면을 고려하여 도우미 또는 동거인의 공동고용 방안을 검토하여야 하고, 공동시설의 의료시설과 물리치료기구 등을 이용할 때에는 장애가 고려된 공동서비스 제도를 활용할 수 있도록 기초요양보장서비스 내용이 다양화되어야 한다.
3. 장애와 함께하는 아름다운 노년
겨자씨는 지나온 25년의 기간을 통해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고민하고 실천하면서 살았다. 이제는 남은 시간의 흐름을 보다 풍요롭고 의미 있게 대처하기 위하여 장애인의 노후에 대한 연구와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장애와 함께 하는 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 보통사람으로 살아가는 장애인의 노후 삶의 모델을 제공하거나, 다양한 사례를 남기는 것은 중요하다. 따라서 겨자씨는 다음과 같은 노후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먼저, 겨자씨가 사회에 기여하는 노후문화를 이루어간다.
장애인으로서 긍정적으로 살아온 삶의 경험을 통해 젊은 장애인에게 건강한 정신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장학사업의 지속은 물론 그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겨자씨는 장애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통로가 되어 우리 사회뿐 아니라 제3국에 있는 장애인들에게도 보조 장구를 지급하고 교육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여야 한다. 또한 회원 각자가 속해있는 사회와 단체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장시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아름다운 노후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다음은, 겨자씨 각자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존중하며 지지한다.
다양한 영역의 회원 확보를 통해 취미생활과 여가를 활용하는 방법, 건강을 유지하며 관리하는 방법 등을 공유하여야 한다. 또한 서로 간에 정서적인 지지를 아끼지 말아야 하며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정보를 나누고 현재 생활을 즐기며 여유롭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겨자씨에게 맞는 노후 삶의 모델을 만들어 간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맞는 새로운 형식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겨자씨는 이러한 형식으로 세워진 실제적인 노후 공동체 모형을 개발하여 제시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다양한 시설의 형태들을 열거하여 본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정서적 지지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특히 비혼인 경우는 서로 지지하고 살 수 있는 유사 가족 공동체와 같은 그룹이 더욱 필요하다. 그러므로 현재는 물론 노후의 생활을 위해 정서적인 지지공동체를 형성해 두어야 한다. 또한 3세대 동거 개념의 주거형식으로써 자신의 집을 이웃에게 대여하여 아이들, 젊은이, 노인이 함께 살 수 있게 되는 공간적 지지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안락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호스피스 개념의 공동체 모형을 준비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실천을 통해 겨자씨는 보다 건강하게, 보다 감사하게, 보다 행복하게 노년의 삶을 영위하면서 장애인의 노후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을 펼쳐 나갈 것이다. 그리하여 건강한 삶을 통해 모범적인 영향력을 끼치며 각 개인의 자아실현 단계까지 이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 참고 >
겨자씨, 겨자씨 25년간의 회의록(1983 - 2008)
겨자씨, cafe.daum.net/kjc83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한국사회 장애민중운동의 역사(2005)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2004 한국장애인 리더쉽 포럼 자료집(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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