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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향기를 따라서
오 윤정
2005. 09. 12
여름방학 초에 계획했던 백제기행을 드디어 떠나게 된다. 교장 선생님께 급하게 자료만 받고 실행을 못해 여름 내내 영 개운치가 않았는데 드디어 숙제를 마치게 되었다. 자료집도 두툼하고, 체력도 길렀고, 일행도 정예부대로 선발했고, 이만하면 백제인들과 상봉할 준비를 제대로 한 것 같은데… .
이번 주 식구들 일정을 대충 정리하고 금요일 늦은 밤에 집을 나섰다. 구리를 거쳐 판교를 지나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안성 근처 까지는 순조로이 갔는데 갑자기 차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길가에 나와 있는 운전자도 보이니 이 길로는 못 갈 것 같다. 살짝 왼쪽을 보니 서해안 고속도로 입구다. 그래 결정이다. 오늘은 아산에서 묵고 내일을 기약하자. 온천물에 담그고 자서 그런지 일찍 일어났다. 컨디션도 그만이다. 가자 백제로! 원래 예정지는 부여뿐 이었으나 공주 무령왕릉과 박물관을 놓치면 바보일 듯싶다.
송산리 고분군이다. 공산성 아래 맞은편 높이 130m 남짓한 나지막한 둔덕에 능을 썼다. 현재는 습기와 결로 때문에 모든 고분은 공개되지 않고 모형관만 관람 할 수 있다. 좀더 일찍 이 쪽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면 나도 충분히 실물을 볼 수 있는 세대인데 과거의 무식함을 이제 와서 한탄해 무었하리요. 마음을 돌리려 하는데 조악한 모형관을 보니 또 화가 치민다.
‘용인대학교에 가서 문화재 복원 공부나 할까!’
모형관을 나와 구릉을 돌아보니, 구릉위에 서서 펼쳐지는 시야란…. 묘 자리를 쓸 때 풍수지리가 기본이란 말을 듣긴 했어도 아아 조상들이여 모르긴 하지만 그리 넓지 않은 공주 땅에서 여기처럼 탁 트인 View를 가진 곳이 있을까? 멀리보이는 금강을 임수삼아 그 명당에 누워 호연지기를 기르며 백성들을 굽어 살피고 싶었던 조상들의 마음이 전해지며 좀 전의 나의 울뚝불이 부끄럽다.
국립공주박물관은 송산리 고분군에서 차로 3분 거리에 있다. 걸어가도 충분한 거리지만 앞으로의 일정을 위해 에너지를 비축하기로 했다.
무령왕릉 뒤쪽 기슭에 자리한 국립공주박물관은 일제강점기에 뜻있는 지역주민을 주축으로 한 공주고적보존회를 모태로 선화당 건물에서 박물관 활동을 시작하였고 광복 후 경주, 부여와 함께 국립박물관의 일원으로 탄생하였다. 1971년 세계 고고학사에 길이 남을 무령왕릉의 발굴을 계기로 그 출토품을 전시하기 위해 중동에 새로운 건물을 지어 새로운 출발을 하였으나 2004년 5월 웅진백제의 문화를 주제로 하는 테마박물관이자 지역박물관으로 재탄생해 열린 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정문에 들어서니 살짝 비탈지게 올라가 자리한 집채와 야외 전시장, 왼쪽의 자연학습장까지 그 짜임새가 매우 흡족하다. 야외 전시장의 시스럽지않은, 사랑스런 문화재 앞에서 셔터를 누르다 보니 문득 너무 덥다.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관람권의 디자인도 너무 세련이다.
1층 무령왕릉실에 들어가니 찬란한 유물들이 숨을 멎게 한다. 그 흥분을 애써 누르며 오늘은 탄목금구목걸이, 다리작명은제팔찌, 왕비의 베개와발받침에 대한 감회만 적을까 한다.
“탄목금구목걸이(왕) : 무령왕릉에서는 100여 점의 검은 색 구슬이 발견 되었는데 지름 0.5~1㎝,두께 0.3~0.6㎝정도의 납작한 물질의 테두리에 금테를 돌린 특이한 형태인데 이 금테의 양쪽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서로 줄줄이 화려한 목걸이로 된다. 이 검은 물질은 탄화목, 또는 탄정이라 불리 는데 석탄의 일종이다. 탄정을 이용하여 만든 공예품은 중국 한나라와 낙랑 무덤에서 종종 발견될 뿐 삼국시대 무덤에서는 보기 힘들다.”
이렇게 설명되어지는 이 모던한 목걸이. 이런 걸 쇼크라고 하겠지. Charcoal Color가 트랜드인 2005년 가을에 만난 1498여 년 전의 공예품.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어찌 이런 완성도를 구현할까? 학창 시절 골 싸매고 흉내 내던 디자인이 결국은 도자인도 제대로 못한 것 인가 싶다. 얼마 전 대영박물관전에서 본 시시한 목걸이를 탐낸 내 자신이 부끄럽다.
“다리작명은제팔찌(왕비) : 팔찌의 안쪽에 경자년(520년) 2월에 다리라는 장인이 대부인 즉 왕비를 위하여 230주이를 들여 팔찌를 만들었다는 기록 이 남아있다 경자년은 왕비가 죽은 병오년(526)보다 6년 전이며 마지막의 230주이는 무게단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 부인이라는 호칭은 왕 비나 왕모 또는 상류층의 혼인한 여자를 일컫는데, 여기서는 왕비이므로 특 별히 대부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듯 하다. 팔찌의 바깥 면에는 머리를 뒤 쪽으로 돌리고 발이 3개인 두 마리의 용이 표현되어 있다.”
이 팔찌의 미적 가치에 대해선 두 말이 필요 없고 왕비의 소장품에 장인의 이름이 새겨지도록 허락되었다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문화를 향유할 수 있고, 그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수준의 척도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선 삶의 여유, 역사, 물질적 풍요 등등 많은 제반조건이 따를 것이다. 1500여 년 전에 장인을 이토록 예우할줄 알았던 후덕한 백제인의 후손인 우리의 기득권은 무엇에 쫓겨 Noblesse Oblige를 잊고 이 시대를 이리 각박하게 살고 있는지… . 잠깐 우울하다.
“베개(왕비):왕비의 베개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금박으로 테두리 선을 돌린 다음 그 안에 같은 금박으로 육각형의 거북등무늬를 연속적으로 표현하였 다. 거북등무늬 안에는 흰색, 붉은색, 검은색의 안료로 비천, 새, 어룡, 연 꽃, 인동, 네잎 꽃 등의 그림을 그렸다. 왕비두침에는 불교색 짙은 각종 그 림들과 봉황과 같은 상서로운 새를 조각하여 왕비에 대한 극락왕생의 기원 을 담고 있는 것이다. 두침 좌우에 있는 봉황 밑에는 갑과 을이라는 행서체 의 붓글씨가 씌어져 있는데 3㎝ 정도의 비슷한 크기의 두 글자가 서로 대 각선상으로 반대방향으로 씌어져 있다.”
“발받침(왕비):크기와 바탕색은 베개와 비슷하다. 전면에 붉은 칠을 하고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금박으로 테두리를 돌린 다음 그 안에 검은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앞뒷면에 모두 그려져 있는데, 연꽃무늬와 구름무늬 등이 표현되어 있다. 윗부분의 좌우에는 철막대가 박혀 있고 이를 중심으로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철막대에는 금제능형장식이 붙어 있는데 대나무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 베개와 발받침을 보았을 때는 발받침의 철막대에 시선이 꽂혔다. 적당히 위태롭게 솟은 막대 끝에 수줍게 비집고 나온 금빛 잎사귀, 묵직한 받침 위에 살포시 앉은 그 조형성은 전율이 느껴진다. 순간 잠깐 육중하게 느껴졌던 베개의 봉황을 보니 이럴 수가! 마주보고 있는 두 봉황은 서로 10˚ 가량 살짝 시선을 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칫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그 찰나를 비켜가는 여유 공간 20˚. 아아! 예술이다. 바라보면 볼수록 가슴이 방망이질 한다.
2층 웅진백제실에 들어섰다. 마한·한성백제 테마에 전시된 한성백제의 유물인 흑색마연토기를 보니 아까 1층 무령왕릉실의 탄목금구목걸이의 Charcoal Color가 되살아난다. 국제도시웅진 테마에 전시된 흑유 계수호와는 확연히 다른 우리의 흑색이다.
2층 불교미술실에 있는 금동관음보살입상과 도제불상대좌를 감상하며
“백제에 불교가 들어 온 것은 침류왕 원년(384)이고 비약적 발전을 보게 된 것은 성왕(523~553)때부터이다. 성왕4년(526)에는 겸익이 인도에 가서 범본오부율을 가지고 와서 백제율종의 시조가 되었고 성왕19년(541)에는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 대승계경인 성반경의류를 들여와 연구케 한 바 있고 위덕왕 때 능천인 현광은 역시 중국에 가서 법화경을 수학 귀국한바 있어 이것이 백제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는 자료를 꼭꼭 씹으며 읽으려 노력해 보았다.
바쁜 일정 때문에 나름대로 웅진백제 이해의 진수라고 선택한 두 곳을 성공적으로 답사하였으니 부여로 향한다.
40분 남짓 달려 부여에 도착하니 또 밥 때다. ‘답사여행의 길잡이4 충남’ 편에 소개된 정림사지 근처의 ‘개성집’을 찾아 갔는데 1인분에 8000원하는 한정식 맛이 그만이다. 배를 채우고 나니 힘이 솟는다.
정림사지에 들어서니 남북 자오선상에 그 기본 축을 두고 2개의 연못, 남문지, 중문지, 석탑, 금당지, 강단지, 그리고 회랑이 구비된 1탑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가람의 모습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할 때 화염 속에 홀로 남아 옥개석의 전각머리를 살며시 치켜든 채 1360여 년을 동그마니 서 있는 5층 석탑을 보니 가슴이 싸하다. 강단지에 자리한 고려 시대 석불 좌상은 대좌의 연꽃과 안상등의 조각을 제외 하고는 오늘 내내 보았던 조형미와는 영 거리감이 있는 형상이지만 이런 저런 역사의 풍파 속에서 속절없이 짜깁기되어진 이 부처님도 우리의 미로 끌어안아야 할 듯하다. 나오면서 설명문을 다시 읽으니 5층 석탑과 석불은 마주 보게 배치되었다고 하는데 그럼 우린 석탑의 뒤통수만 보고 온 것인가?
드디어 우리나라 공예사와 문화사까지도 다시 쓰게 했다는 백제금동대향로를 만날 수 있는 국립부여박물관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왼쪽으로 박물관을 들어서는데 삐죽이 서 있는 솟대 조형물이 낯익다. 공주박물관에서 본 왕비 발받침의 대나무형상물과 비례가 같다. 햇볕이 가장 뜨거운 오후 3시 경이라 야외 전시물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실내에 들어섰다.
제1전시실(고대의 생활과 문화)에 들어서니 다른 박물관에 견주어 청동기 유물을 상당히 소장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부합되게 대전 둔산동, 서산 휴암리, 안면도 고남리, 아산 백암리, 예산 동서리, 보령 교성리, 그리고 부여 송국리·연화리·구봉리·합송리의 유적들이 집중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이 곳의 상설 전시물이 지난 7월에 관람한 국립대구박물관 특별전 “사람과 돌” 전시물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대구까지의 KTX삯이 새삼스레 조금 아깝다.
제2전시실(백제의 생활문화) 백제의 문자 섹션에 있는 부여 금성산에서 발굴 된 벼루는 공주 박물관의 원형무개삼족연과는 왠지 친구 같은데, 형식은 비슷하나 제3전시실의 백자벼루와는 어쩐지 친해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역시 개는 Made in China라고 한다. 백제의 토기 섹션의 부여 신리의 백제6C 그릇받침은 공주 박물관의 공주 송산리 그릇받침과 이란성 쌍둥이 같다. 부여 군수리에서 발견된 남자용 소변기로 보이는 호자는 웃음이 절로 나게 한다. 부여 하황리 은손잡이유리공의 그 유려한 녹색을 보며 금동향로를 향한 기대를 한 템포 조절해 본다.
드디어 금동향로이다. 쓰고 있던 설명 헤드폰을 벗었다. 그저 내 눈으로 향내를 음미하고 싶다.
“백제금동대향로는 한 다리를 생동감 있게 치켜들고 있는 한 마리의 용이 갓 피어나려는 연꽃봉오리를 입으로 받치고 있고 그 위에 박산이 위치하는 형상이며, 꼭대기에는 봉황 한 마리가 비상하려는 듯 날개를 활짝 펴고 서 있다. 향로는 높이 61.8㎝, 몸통 최대지름 19㎝, 무게 11.85㎏으로 규모면 에서도 다른 박산향로와 비교할 수 없는 대작이다.”
이러한 설명 글이 무슨 소용 있을까? 그냥 보고, 느끼고, 감탄하고, 자랑스러울 뿐이다.
제3전시실의 금동관세음보살입상과 반가사유상에서 볼 수 있는 옷자락의 자유로운 흐름에선 한없이 유연한 작가의 정신세계가 배어 나온다.
끝으로 부여 부소산 절터 치미의 빼어난 곡선미를 보는 순간 난 결국 무너지고 만다.
한때 미술학도였고, 지금은 역사공부를 하고, 이 엄청난 조상의 예술세계를 내 나름대로의 감각으로 느끼고, 해석할 기회를 허락하신 신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부소산성으로 향한다. 부소산성입구⇒ 삼충사 ⇒ 영일루⇒ 군창터 ⇒ 수혈식주거지⇒ 궁녀사 ⇒ 송월대 ⇒ 사자루 ⇒ 백화정 ⇒ 낙화암 ⇒ 고란사를 빠짐없이 보고 절벽 아래쪽의 유람선 선착장에서 백마강을 따라 구드래나루에 닿아 오늘의 부여답사를 마친다.
이틀간의 외유를 벌충하기 위해 일요일인 오늘은 일을 해야 한다는 남편을 졸라 돌아가는 길에 논산 관촉사에 잠깐 들리기로 했다. 은진미륵을 보고 싶다. 사찰로 들어서는 길이 완전히 계단으로 승부를 본다. 절 계단을 오르며 학창시절 Chapel이 생각나니 계단의 아픈 추억은 15년이 지나도 생생하다. 마지막 계단 끝의 어색한 해탈문을 들어서니 상상대로 어마어마한 부처님이 내려다보신다. 설명글을 보니 불상비례의 어색함을 운운했는데 내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부처의 큰 갓 아래 보관의 Scratch기법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의 독창성은 가히 피카소가 부럽지 않은 수준이다. 그런 이가 몰라서 어색한 비례를 채택 했을 리가 없다. ‘사자와의 대화’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작가의 육성으로 작품설명을 듣고 싶다.
이상으로 참으로 알찬 백제기행을 마친다.
언젠가 타임머신이 운행되는 그 날, 백제인들과 풍류를 논 하려면 정말 갈 길이 멀고 바쁘다.
공주시사적지관리소 www.gongju.go.kr/historical
국립공주박물관 www.gongju.museum.go.kr
국립부여박물관 www.buyeo.museum.go.kr
참고문헌 : -위례역사문화연구회 2005, 『백제의 역사와 문화』
-한국문화유산답사회 1995,『답사여행의 길잡이4충남』
-국립공주박물관 2004, 『국립공주박물관도록』
-국립부여박물관 2003,『백제금동대향로』
-국립부여박물관 2003,『박물관이야기』
-성주탁 2002,『백제의 사상과 문화』
첫댓글 제가 직접 그 곳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잘쓰셨어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