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내적인 부르심이 확실한 사도입니다.
그걸 요즘 말로 하면 내적소명 곧 주관적인 소명이라 하겠지요.
거기다가 고린도교회를 향해 너희들이 바로 내가 사도라는 증거라고 하므로
객관적인 소명이며 외적소명 또한 확실한 사도입니다. 제자가 제자를 낳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가심을 따라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산 소망을
가지고 진리를 순종하므로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제자도가 없는
사람이 다른 이들로 하여금 자신과 같은 길을 걷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죄에서 자유와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어 주의 이름을 담대히
부르는 자격지심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바울과 같이
복음을 위해 주의 보내심을 받은 주의 종이라고 자신 있게 천명할 겁니다.
2절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인친다고 하는 개념은
인정, 보증, 곧 도장을 찍는 것 곧 날인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말씀을
증거하여 낳은 고린도교회가 바로 바울이 사도된 것을 보증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개개인의 신앙이 바울같이 스스로 인증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베이스캠프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정체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교회가 어느 정도 부흥은 되고 말씀이 좋다 병을 고쳤다 등은
일어나는데 왜 성도들이 성경적인 구원의 감격과 간증이 없는가에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말씀을 통해 성경에 기록이 된 구원이 실제로 일어나는 순간부터
나도 된다는 자신감 곧 말씀의 사역자로서 정체감을 갖게 된 적이 있습니다.
3절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힐문하는 자들에게 곧 심판, 비판, 판단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자신을 변명합니다.
그의 변명은 바로 2절입니다. ‘나는 확실한 사도이며 그 인증서가 바로 너희들이다’
라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름을 받은 것만 자랑하면 안 됩니다. 사실 가룟 유다도
부름을 받았습니다. 바울처럼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담대하게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4-5절은 먹고 마시는 권리 그리고 결혼할 권리가 없겠느냐? 반문합니다.
사실 신부나 수녀의 독신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 당시 모든 사도들이
다 아내와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다만 바울만은 독신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6절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일하지 않을 권리가 왜 없겠느냐? 그 당시 교회의 총 지휘부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리고 선교현장에 사도들이 나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도
다른 이들과 같이 지휘부에 있을 자격이 없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군대 같으면 행정반이며 회사 같으면 공장이 아니고 사무실을 말합니다.
바울도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총회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적은 있지만 선교보고 차 갔을 뿐입니다. 오직 바울은
소아시아를 3번을 돌았습니다. 아마 로마시민권이 매우 유용했을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미국 시민권 같은 정도보다 훨씬 더 유력한 신원보증입니다.
7-10절의 내용 중에 이런 것들은 지극히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밭가는 자들의 소망은 소출과 함께 하기 위하여 일하는 보람입니다.
그런데 사역을 통해 육신의 것을 많이 거두는 사람은 위험하다고 보면 좋습니다.
경영을 잘 하는 사람은 사역자냐 사업가냐 대답을 분명하게 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14절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시는 뜻입니다. 일꾼은
일을 하면 먹을 것이 있습니다. 마10: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와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하십니다.
15절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이는 사도
바울이 자랑하는 것을 자신을 인정하는 것으로 돌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대접해 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합니다.
바울의 자랑은 고후12:10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
또 고후11:30절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합니다.
그의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진리 때문입니다. 그 분이 자신을 통해 나타나셔야
하는데 자신의 육신이 강해서 자신을 드러낼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경외감이며 경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경외이며 자신을 위해 오로지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것이 바로 경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의 사역의 정신이 바로 고전9장입니다.
그의 근본 속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입니다.
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사실 주의 일꾼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화가 됩니다.
왜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할 내용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에게 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맡겨진 일이므로 부득불 필연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런 사명감이 없으면 화가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17절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직분 자체가 상이 됩니다.
맡겨진 일이 바로 주님의 상입니다. 만약 임의로 직분을 맡으면 그건 자신이
자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학생들이 제가 반장을 하겠습니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임의로 행하는 사람들은 그의 상이 언제나 미래에 있다고 생각하고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직분을 맡은 사람은 직분 그 자체가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18절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내 상이 무엇이냐? 조건 없이 복음을 전 할 수 있는 복이 바로 바울의 상입니다.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받았다는 그 자체로 감사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에게 복음과 함께 능력이 나타나는 건 당연합니다.
19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자유자이면서 종입니다.
눅15장의 큰 아들은 종노릇하는 아들이고 탕자는 아들로서 종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자유자이면서 종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종이 됩니다.
그러나 맏아들처럼 얽매어서 의무로 일하는 것은 아들이면서 일하는 종입니다.
20절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같이 된 것을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아래에 있지 않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것처럼 이는 수영할 줄 아는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것과 같은 이칩니다. 율법주의자들에게 새 언약을
가진 바울이 가면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 율법이 완성되고 있음을 그들이 압니다.
표면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이면적인 그리스도인이 도전하고 부끄럽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미숙한 사람들은 자기 입장만 세우느라고 서로 변론을 하다 맙니다.
자유자는 할 수도 있고 아니 할 수도 있으나 스스로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고전9:23절) 말합니다.
자기와 같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얻고자(획득)하는 거랍니다.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운동장에 달음질 하는 선수들처럼 상을 얻도록 달음질 하라
야구의 도루를 하듯이 달려야 합니다. ‘상 얻는 자는 하나’ 오직 한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오셨다가 다시 돌아가시므로
구원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목표와 방법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과
하나 되어 2인3각의 경주처럼 그 분을 의지하고 달려 나가면 그 분의
이김에 동참하고 그 분의 상에 동참하게 되는 겁니다.
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여기서 말하는 절제는 인고가 아니라 자신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능력에 의해 절제와 통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27절 바울의 두려움이 무엇인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간 남에게 전파할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니라” 사역자들은 자기 자신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이 될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스스로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큰 불행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자책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소금의 효용은 소금이라는 그 이름값이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한 능력입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26절처럼 열심은 있으나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향방 없이 달리고 허공을 치며 싸우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며” 바울은 9장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을 당시의
다메섹의 체험을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인 표지라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의 사역의 내용이 바로 그가 사도인 증거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장사꾼이 이익만을 위하면 큰 성공을 하지 못하고, 농사꾼이 소출만
바라고 농사를 지으면 얼마가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주의 부름을 받고
사도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 자신의 유익만 위하여 그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