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 2:1~5(728) 내 얼굴에 있는 깊은 수심(愁心) 2024. 7. 28.
6월 중순 경에 제가 교회에 도착하여 열쇠로 문을 열고 있는데, 계단에서 사람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서 계단 아래를 쳐다 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학원에 올라오는 아이들이라 생각했는데,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분이 가방 하나를 메고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고, 그 분은 저를 보면서 ‘교회 목사님이세요?’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는 순간 속으로 그 분의 옷차림과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을 보고 교회에 돈을 얻으러 오는 노숙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머리 속에 재빠른 회전을 하면서 어떻게 말해야 하나?를 고민했습니다. ‘교회 목사라고 말하면 바로 구걸할 터인데 어떻게 할까? 그냥 교회 나오는 교인이라고 말할까?’ 생각하다가 목사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미 문을 열고 교회당 안으로 들어와 있었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교회당 입구에 있던 그 남자 역시 교회당 안으로 발을 들이 밀었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2천원을 드리면서 ‘작은 교회 목사라 돈이 여유가 없어서 더 드리지 못하니 이해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돈을 받으면서 가방을 열더니 가방 안에 있는 볼펜, 때밀이 수건 등을 꺼내면서 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전 구걸하는 노숙자가 아닙니다. 제가 물건을 팔고 있으니 목사님이 필요한 것 하나 가져가십시오’고 말합니다.
그때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막무가내로 들어와서 돈 달라고 생떼 쓰는 노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돈 천원 건네주면 적다고 말하면서 ‘이것 가지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2천원 달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노숙자들도 많습니다.
이런 막무가내 생떼 쓰는 노숙자들과 구걸하는 사람들이 싫어서, 제가 교회당 안에 머물 때는 아예 교회당 문을 잠가 버립니다. 그래서 교회당 안에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여지게 만들어 구걸하는 사람들이 한 두 번 문을 두들겨 본 후에 돌아가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남자 분은 일방적으로 구걸하지 아니하고, 물건을 파는 행위를 하면서 자신의 노력의 댓가를 거두는 것이 팜으로 신선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3천원 건네면서 떼밀이 타올 하나를 구입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떼밀이 타올 하나 가격이 얼마 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가격 보다는 비싸게 구입하였다고 하더라도 제 마음은 속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더 도와 주고 싶었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제 마음이 참 편안했던 감정을 가졌더랬습니다.
땀 흘려 노력하지 아니하고 다름 사람이 이루어 놓은 것을 가로채려는 악한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각종 사기 수법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교해지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사기 당하여 통장이 털리고 돈을 빼앗긴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체 돈을 강탈당하는 세상입니다.
‘정상에서 만납시다(See You at the Top)’의 작가 지그 지글러(Zig Ziglar 1926~2012)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을 가지고 책을 쓴 내용이 있습니다. 지글러 박사가 뉴욕의 지하도로 들어섰는데, 한 청년이 연필을 팔고 있었습니다. 지글러는 다른 사람들처럼 1달러를 주고 나서 동정하는 마음이 생겨 연필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돌아와서 “연필을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이상히 여긴 청년이 연필을 건네자 지글러가 ‘당신은 연필을 강매하면서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라, 연필을 파는 사업가’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지글러 박사는 연필 하나를 받아 들고 지하철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훗날 시간이 흘러 지글러 박사가 병환 중에 있을 때에 말쑥한 정장을 입은 사업가 한 명이 병실을 찾아 옵니다. 지글러 박사는 그 사람을 전혀 모른다고 주변 간호인들에게 말하지만 그 사업가는 지글러 박사를 아주 잘 아는 관계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병실에 방문한 사업가는 ‘자신은 십 수년 전에 뉴욕 지하철에서 연필을 팔았던 사람’이라 말하고. 자신더러 구걸하는 걸인이 아니라 연필을 파는 사업가(Business men)라는 말에 자신이 충격을 받아서, 그 날 이후로 ‘나는 사업가’라는 말을 수 십번 되내이면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다고 말합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지글러 박사를 향해“당신의 말 한 마디가 내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연필을 받지 않고 1달러만 주었기에 나는 얻어먹는 자화상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당신은‘나를 걸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업가’라고 말해주어 나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생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가 거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다른 사람의 동정심을 유발하여 더 쉽고 편하게 구걸할 생각만을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불쌍하게 보이고 안타까움을 유발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면서 노력합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를 거지라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 도리어 큰 불쾌감을 가집니다. 이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호주머니에 돈이 없어도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반대로 호주머니에 돈이 있더라도 마음의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스스로 움추려 들면서 자신의 인생을 비하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가다가 사람들이‘저 사람은 쉽게 받아먹는 거지 근성이 뼈 속까지 스며 들어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정말로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 최악의 평가가 이런 평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물질의 많고 적음이나 나이가 연로함에 얽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이란 하나님이 이끌어 주셔야만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고,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셔야만 우리는 의미 있는 인생을 같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합시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느헤미야서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의 윤곽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대해 고민하여 안타까워하는 느헤미야의 입장이 잘 드러나는 내용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70년 동안이나 고생하고 있는 동족을 보면서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는 심성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무너져 훼파되어 버린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 위하여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노심초사 고민하던 애국자였습니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가진 물질이 없어서, 재능이 부족해서, 또는 시간이 부족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민과 번민에 쌓여서 어떻게 인생을 풀어 나갈지 모르는 사람들은 오늘의 본문에서 인생의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1. 세상의 근심이 아닌 거룩한 근심을 가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절,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느헤미야가 궁정에 머물면서 당시 모셨던 바벨론의 왕은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Artaxerxes I) 왕이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부왕이었던 크세르크세스 1세가 살해된 후 왕위에 올라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고 바벨론 나라를 안정시킨 명군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의 재건을 도울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면서 비록 노예로 살아가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왕이기도 합니다.
느헤미야는 궁정에서 식음료를 맡았던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닥사스다 왕이 즉위한지 20년 되는 니산월(현대력 3-4월, 유대력 1월)에 왕에게 포도주를 드리는 와중에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한마디 말을 던집니다. 왜냐하면 왕에게 식음료를 대접하는 일개 노예가 얼굴을 찡그리고, 인상을 쓰면서 깊은 수심이 있는 표정이라는 것은 매우 불경스런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식당에 음식 먹으러 갔는데, 식당 주인이나 종업원이 웃지 아니하고 오만인상을 다 찡그리고 여러분을 응대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저는 아무리 그 집 음식이 맛있다고 해도, 이런 집은 방문하고 싶지 않습니다. 음식은 기분 좋게 먹어야 몸에 약이 되는 법인데, 오만인상을 찡그리고 응대하는 식당에서 기분 좋은 식사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무엄하게도 바벨론 왕의 음료수를 대접하는 자리에서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드러냅니다. 수심(愁心)이라는 말은 ‘매우 근심하거나 근심하는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란 말로 매우 큰 근심을 가진 것을 한글에서 표현합니다.
수심이란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로 한글성경에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적 표현은 매우 쉬운 내용입니다. 직역하면‘나는 이전에 그의 앞에서 슬퍼한 적이 없었다(I had not been sad in his presence before)’는 말입니다. 즉 내가 이전에는 왕 앞에서 슬퍼한 적이 없었고 항상 밝고 쾌활한 모습으로 왕의 식음료 봉사를 잘 하였다는 말입니다.
항상 밝고 웃는 모습으로 식음료 봉사를 하던 느헤미야인데, 얼굴에 슬픔이 가득한 모습으로 포도주를 따르는 것을 본 왕이 한 마디 합니다. 2절,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가 포로로 끌려온 유태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항상 밝은 모습으로 생활하는 느헤미야였습니다. 밝은 모습의 느헤미야를 늘 보았는데, 갑자기 슬픔이 있는 것을 보고, 왕은 너가 근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바벨론의 왕으로서 가지는 근심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지만 느헤미야에게도 근심이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근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앞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근심, 먹고 살아가는 근심, 자녀를 어떻게 하면 잘 키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근심, 직장 생활에서 주어지는 근심, 수많은 근심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런 모든 근심은 육체적 근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도라고 할지라도 세속적 근심, 육체적 근심을 할 수 있습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와 인생의 문제를 놓고 근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의 근심이 이런 육체적 근심에만 머물러 버리면, 성도는 성도로서 가져야 되는 본연의 모습을 놓쳐 버리게 됩니다.
세속적인 근심은 성도에게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성도들이 해야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바로 거룩한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죄로부터 멀어지는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인가? 나라를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는 근심을 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가진 근심이 바로 이런 거룩한 근심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먹고 사는 것 때문에 근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어 살아갈 것인가? 이런 문제를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궁궐에서 잘 먹고 안전하게 생활하는데, 궁궐밖에 있는 수많은 동족들이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에 근심하고 슬픔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동족애입니다. 회복되지 못하고 무너져 있는 예루살렘이 빨리 회복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을 두고 느헤미야는 근심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거룩한 근심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캐나다 출신의 의료 선교사이자 부흥 운동가였던 로버트 하디(R. A. Hardie, 1865-1848.한국명은 하리영)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의 주축으로서 대한민국에 기독교가 뿌리 내리도록 큰 활동을 하신 분입니다.
하디선교사님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여기 저기 시골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불신자들이 교회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종종 발생합니다. 어렵게 교회를 세워 놓았지만 한순간 잿더미가 되는 아픔을 겪습니다.
특히 일부의 사람들이 서양선교사들이 돈이 많다는 것을 알고, 가짜 신자 행세를 하면서 선교사님에게 접근을 합니다. 이 일로 하디선교사님이 여러 차례 사기를 당하면서 조선인들을 경멸하는 마음이 뿌리를 내립니다. 성경을 읽었으나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와중에 성령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조선인에게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사가 조선인을 미개한 족속이라고 폄하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한국인 조사나 권서가 선교사인 저를 높여 ‘양대인’이라고 부를 때마다 당연한 듯 여기는 거만함의 죄를 지었습니다. 몸이 아픈 이들이 찾아와 병을 고쳐달라고 할 때, 순순한 사랑에서가 아니라 마치 시혜를 베풀 듯 환자들을 대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면서 성령의 능력과 도우심을 의지하지 않고 저의 학식과 능력만 의지하는 자만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울면서 회개를 합니다.
이렇게 변화된 하디선교사님을 하나님은 들어 사용하였고, 하디 선교사의 회개는 평양 대부흥 운동으로 꽃을 피우게 됩니다. 암울한 조선을 사랑하면서 복음의 근심을 가졌던 하디 선교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평양 대부흥운동의 발판을 디디게 하신 것입니다.
2. 기도할 때에 사라지는 내 얼굴의 수심
4절,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여기의 ‘묵도하고’라는 말은‘기도하다’는 의미입니다. 왕이 느헤미야에게 ‘너이 근심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도와주기를 원하냐?’라고 물어 봅니다. 자신을 도와 주겠다는 왕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느헤미야는 먼저 하나님에게 기도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진정으로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일반적인 사람 같았으면, 왕의 말이 떨어지자 말자 바로 자신이 필요한 것을 왕에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왕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빨리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해서 나의 소원을 이루어야 되겠다’고 행동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내 생각과 내 판단을 앞세우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깨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명확하게 알고자, 자신의 생각은 접어놓고 먼저 하나님에게 기도로 다가선 것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에게 다가서는 이런 느헤미야의 모습이 하나님에게도 사랑을 받고 왕에게도 인정을 받는 모습이었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표준입니다. 느헤미야는 기도가 응답된 순간에 자기 요구를 왕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우선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놀라운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미국의 기독교 작가이자 복음전파자였던 데이브 헌트 (Dave Hunt, 1926–2013)의 ‘삶과 자유’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기관사가 증기 기차를 출발시키려고 준비를 하는데, 너무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좀처럼 불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자, 화부(火夫)인 짐에게 불안한 마음을 이야기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엔진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증기기차가 출발하여 밤새도록 달려 희미하게 새벽 여명이 밝아올 때입니다. 멀리 철로 앞에서 웬 남자 한 명이 천 조각을 흔들고 있는 것을 봅니다. 비상상황이라 생각하고 급하게 기차를 세웁니다. 기관사가 내려서 보니 남자는 자신의 옷을 벗어서 흔들고 있었으며,‘앞 쪽에 선로가 끊어졌다’는 말을 합니다. 그렇게 대형 사고를 미연에 막은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입니다. 기관사는 남자에게 ‘당신은 어떻게 선로가 끊어진 것을 알 수 있었나?’라고 질문합니다. 이에 남자는 밤에 잠을 자는데 ‘깊은 잠을 들지 못하고, 계속해서 철도 선로에 나가라’는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결국 새벽에 나와서 확인한 상태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기관사가 남자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깨워서 기차가 탈선하지 않도록 우리를 살려셨다’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이 바로 기도가 만드는 기적입니다. 몇백 KM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던 기관사와 화부가 드린 기도를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7월의 마지막 주간이며 금 주간에 8월이 시작됩니다. 장마가 끝났다는 기상대 예보도 있고, 이제 본격적인 여름 폭염과 열대야가 올 것입니다. 이런저런 근심이 많다고 하더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해결되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