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에 청나라군대도 주둔해있고 일본군도 함께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조약을 맺어서 우리 다 양국 군대를 철수시키자 하고 협약한 것이 텐진조약(天津條約)이다.
조약을 맺는 자리에서 리홍장(李鴻章, 1823~1901)이라는 중국 대표가 "일본이 호시탐탐 조선을 빼앗으려고 한다. 당신네 나라에 있는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1836~1908)라는 사람이 쓴 책을 보면 '조선을 빼앗아버리자'라고 책까지 써서 발표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이토 히로부미가 말하기를 "일본은 이제 독립국으로 자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다. 뭐 좋은 게 있다고 저 빈약한 조선 따위를 빼앗을 마음 따위를 품겠느냐 일본 사람 중에 조선을 병합해 버리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일본의 정치를 쥐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현재 조선 침략의 원흉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라고 이야기하는데, 이토 히로부미라는 사람은 조선을 일본에 병합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던 사람아다.
이토 히로부미처럼 외교를 잘 알고 있는 문관그룹 사람들로서는 괜히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방하면 쓸데없이 외국의 간섭을 불러올 우려가 있으니 우리는 조선을 합병하지 말고 어떡하든 조선이 스스로 자기 나라를 지켜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이 개혁되어야 하는데, 그 개혁 하는 것을 우리가 앞장서서 도와주자. 그래서 일본이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미개혁 등 당시 통감부 통치 시절에 조선 독립을 유지하려고 큰 노력을 한다.
그런데 고종과 민비는 일본이 자기네 왕권을 뺏어가려고 한다는 공포감에서 러시아를 한반도에 끌어들여 끝없이 일본에 저항한다. 그러다 보니 당시 영국은 러시아가 부동항 확보를 위해 태평양에 진출하는 것을 막는 것이 러시아와의 그레이트 게임에서 대영제국 제일의 목표인데 고종과 민비가 계속 러시아를 한반도로 끌어들이니 일본을 이용해 러시아를 너희들이 좀 막아라. 그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러일전쟁' 이다.
일본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러시아에 들러붙고 또 조선의 개혁이 불가능하니까 러일전쟁을 일으켜서 러시아를 조선에서 쫓아내 버린 다음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이 가지고 어떡하든지 자립시킬 방안을 마련하자' 이것이 통감부 통치라는 것이다.
일본은 러일전쟁 때 쓴 전쟁 비용 때문에 파산 일보 직전에 처하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병합 신중론자들의 입장에서는 "지금 우리가 대한제국을 합방시켜서 대한제국을 먹여 살리려면 엄청난 투자를 해야 하는데 이러다가는 우리 일본도 함께 망한다. 그러니 지금은 우리가 대한제국을 합방할 때가 아니다. 어떡하든지 일단 자치 통치가 가능하게끔 이 사람들에게 맡기자. 합병은 나중에 필요하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자"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즉 이렇게 이토 히로부미라는 사람은 가장 합병을 반대했던 사람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이야기까지 했느냐 하면 이런 발언을 했다. "한국민족 정도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나라를 경영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지금 상황이 나쁜 것은 국민 때문이 아니라 정치 때문이다. 합병은 매우 성가신 일이다. 한국이 자치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자" 이런 얘기를 끝없이 했다. 그래서 본인의 소신을 입증하고자 1906년 3월 초대 일본 통감으로 부임하여 조선의 관세를 담보로 하여 차관을 천만 엔 도입했다. 그 돈으로 근대적 행정기법을 동원해 개혁을 추진, 한국 사람들 스스로 자치 통치를 할 수 있는 통치기반 구축을 위해 무진 노력을 다한다. 그래서 사법 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은행을 창설시키고, 공립보통학교를 만들어서 국민교육을 하고, 산림법을 만들어 산림녹화도 하고….
여기에 대해 일본 와세다 대학교수인 아사노 토요미(浅野豊美) 같은 사람은 "일본이 조선에 5년간 통감 정치를 시행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했던 통감 정치는 한국을 독립국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치 육성정책' 이었다"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군부에서는 어떡하든지 "우리가 빨리 한국을 합병해서 러시아가 다시는 일본을 넘보는 일이 없도록 이번 기회에 확실히 대한제국을 합병 해버리자" 이렇게 주장하고 나섰다. 즉,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을 빨리 합병하자는 일본 군부의 입장과 이토 히로부미를 정점으로 하는 병합 신중론을 펼치는 문관그룹이 정치적으로 대립 격돌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1907년 고종이 저지른 '헤이그 밀사사건'은 이토 히로부미의 한반도 자치육성 정책에 결정적 타격을 주게 된다.
이렇게 되니까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과 일본 군부에서는 "대체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저 사람은 너무 유약한 사람이라 안된다."라는 식으로 끝없이 공격 한다.
그래서 1909년 4월에 일본 총리 가스라 다로(桂太郎)가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일본으로 불러서 "선배님 더 이상 한국병합을 반대하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반대하면 나는 책임 못 집니다" 이렇게까지 경고한다. 그러니 이토 히로부미가 "아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은 내 주장을 하지 않겠다." 하며 침묵한다. 그런 직후 군국주의자들이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 자리에서 내쫓아 버린다.
그 뒤의 1909년 6월 부통감에서 2대 통감이 된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1849~1910) 통감인데 이 사람도 이토 히로부미와 똑같이 "한국은 자치에 맡겨야 한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되니까 합병을 주장하던 일본 군부에서는 " 큰일이다. 이 사람도 이토 전 통감과 똑같은 주장을 하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지?" 하고 전전긍긍하는 와중에 소네 아라스케 통감이 위암에 걸렸다. 이런 와중에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 협상을 해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하얼빈에 갔는데 안중근이 그곳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서 암살해버린다.
즉, 안중근은 한일병합에 가장 온건론을 주장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므로 인해, 일본 정계에서 한국을 병합 해버리자고 하는 강경 급진론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상황을 없애버린 것이다. 그래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결과 무단파(武断派)를 견제할 문치파(文治派)세력이 사라져서 한국병합론은 장애물 없이 급물살을 타게 되었고 이윽고 바로 합방이 된 거다.
이런 와중에 위의 소네 아라스케 2대 통감이 암에 걸려서 1910년 1월에 위암 치료를 위해 도쿄로 갔고 이러다 보니 통감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지 않겠느냐 해서 1910년 5월 통감 자리에서 물러나고 군부의 핵심 중의 한 사람이자 한국 병합론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1852~1919)가 당시 내각의 육군 대신이었는데 이 육군 대신이 대한제국 3대 통감을 겸직하면서 바로 합병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만길 교수와 같은 부류의 한국 내 학자들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통치하면서 엄청난 수탈을 했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수많은 서양의 기록에 의하면, 특히 영국의 총영사가 본국 정부에다 보고한 보고문에 의하면 "조선은 착취할 것조차도 없이 가난한 나라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착취할 것조차 없이 가난한 나라인데 그런 곳에서 일본이 무엇을 착취해 갔을까??
일본 정부의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합병 신중론자들인 문치파 들의 주장은 "대한제국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현재 폐가나 다름없는데, 폐가나 다름없는 그런 나라를 일본이 합병해서 인수하면 거기에 철도 새로 건설해야지, 도로 깔아 줘야지, 전기도 들여줘야 하고, 병원도 없어서 전염병 돌면 사람들 떼죽음을 당하는데 병원 세워줘야지, 이 사람들을 또 먹여 살리려면 농업을 일으켜야 하는데 농업 일으키려면 볍씨 개량을 해야지 저수지를 파야 하고…. 해줘야 하는 일이 태산과도 같은데 그 많은 돈이 조선에 어디 있느냐? 그러면 전부 그런 것을 일본 돈으로 해 줘야 한다. 따라서 합병은 시기상조다." 그런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만만치 않게 많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에 부임하기 직전 일본 각료들에게 한국 내에서 드는 비용은 어떡하든지 한국에서 나오는 세입으로 커버해서 일본 국고에 누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막상 와서 뚜껑을 열고 보니까 이게 도저히 안 되었던 거다. 그래서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35년 수개월 동안 조선을 통치하는 기간에 조선에서 거둬들이는 세금만으로는 도저히 조선총독부의 행정이 유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정부로부터 끝없이 보조금을 받았다.
1895년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인해서 대만을 획득했다. 그런데 대만은 일본으로 편입된 지 10년 후에 대만에서 나오는 세금만으로도 대만을 유지 운영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해져서 일본 정부 보조금을 10년 후에 끊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일본 정부에 이익을 제공하는 알토란 같은 지역이 되었다. 반면 조선은 1910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3.1운동이 벌어졌던 1919년 단 한 해를 제외하고는 매년 해마다 일본 정부로부터 계속해서 보조금을 받았다. 어느 정도 보조를 받았느냐 하면 일본 정부 총예산의 2.1%를 일본 정부로부터 받아서 운영했다. (이 쯤되면 도리어 일본 본국이 조선에 수탈당한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조선에서 무엇을 수탈했다는 것일까? 우리는 적어도 뭔가 주장을 하려면 근거로 이야기해야 하는데, 특히 대한제국의 고종이 너무나도 나라를 방만하게 운영해서 1910년 한일합방 전까지 외국에서 빌려온 외국 빚이 4,559만 원이었다. 이 채무는 대부분 일본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이 빚은 당시 대한제국 정부 1년 세입의 7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면서 그 어마어마한 대한제국의 국가적 채무는 전부 일본 정부가 떠안았다.
이렇게 되니까 일본에 있는 지식인들은 "아니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합방을 한 것이냐? 우리가 왜 합방을 해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느냐? 일본 국민의 세금으로 왜 조선 사람들에게 저렇게 많은 돈을 줘야 하고 저 사람들을 우리가 먹여 살려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고 "한일합방은 실로 무의미한 합병이다"라는 반발이 터져 나왔다.
대한제국이 폐가나 다름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지도부가 한일병합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기네들 주장으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얘기한다.
" 대한제국은 오랜 기간의 악정으로 인해서 정치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아, 산하는 황폐해지고 민정은 불안해지고 교육 문화와 민생은 최악의 수준이다. 이런 상태로는 일본이 아무리 도와줘도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세상에서 도저히 자립할 수 없다. 자립할 수 없으면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집어삼킬 텐데, 러시아가 한반도를 접수해서 부산에 러시아 제국의 깃발이 휘날리는 날이 곧 일본이 러시아에 침략당하는 날이다. 게다가 한국인들도 스스로 일어나서 운명을 헤치고 나갈 적극적인 의욕도 보이지 않으니 달리 방법이 없지 않으냐…. 우리는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대한제국을 합방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왜 그렇게 러시아를 두려워했냐 하면 사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쓰시마 해전에서 지구를 반 바퀴 돌아온 러시아 발트함대를 거의 전멸 시켰다. 따라서 일본 해군은 러시아 해군을 완전히 전멸시킨 거나 다름없어서 해군은 별문제가 없었지만, 하지만 당시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되어서 이렇게 완성된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서 완전무장한 러시아 육군 80만 대군이 하얼빈에 주둔하고 있었다.
러시아 내에서는 "우리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너무나 억울하게 패배했는데, 이번에는 복수하기 위해서 제2차 러일전쟁을 일으키자!" 하고 러시아에서도 국수주의자들이 계속 선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내에서 공산혁명의 기운이 일고해서 실제 전쟁까지는 가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처지에서 보면 "러시아가 복수하겠다고 진짜로 또 한 번의 제2차 러일전쟁을 일으키면 이건 정말 대책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일찍 서둘러서 한반도라도 막아서 일종의 완충지대를 만들어 놓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 따라서 우리가 저 폐가나 다름없는 대한제국이지만 어쩔 수 없이 많은 부담을 각오하면서라도 우리가 합병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것은 경제적인 부담과 국가안보를 맞바꾼 결정이었다.
요약하면
이토 히로부미를 우리는 '침략의 원흉'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침략의 원흉이 아니라 어떡하던지 이 나라를 한국 사람들이 자치 통치를 할 수 있도록 '한국자치론'을 주창했고 또 그것을 실천한 사람' 이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쏘지 말고 차라리 데라우치와 같은 합병을 강경하게 주장했던 군부 강경인사들을 쐈어야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안중근도 자기 딴에는 본인이 애국심에 불타서 "대한 독립 만세' 하면서 이토를 저격 암살하기는 했겠지만, 그 결과는 한일합방이었다는 거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을지 막막하다. 왜냐하면, 지금 안중근은 건드리면 큰일이 나는 까방권 백만배 신성불가침의 위인 반열에 올라가 있어서 그렇다.
내용이 워낙 스압이라 전부 다 못올렸다 제대로 된 전체내용은 https://blog.naver.com/quixcha/222949118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