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환 시조집, 『혀』, 책만드는집, 2019.
□ 경북 선산 출생, 영주문예대학 수료, 2017 제29회 신라문학대상 시조 부문 수상
2018 《월간문학》 등단, 2018《좋은시조》 신인작품상, 봉화제일의원 원장
입춘(立春)
봄은 드는 게 아니라
반듯이 세우는 거
그 두께를 이겨낸
당신을 반기듯이
쓰러진
그리운 것들
반드시 일으키는,
비웠을 때 오히려 내일이 넉넉한 거
씨앗 속 들여다보면 이 강산 푸르디푸른
청靑사진
하나 품었다가
넉넉하게 펼치는,
<박영교 해설>
최 시인의 작품은 언제나 싱싱한 푸른 나무와 같다. 이 시도 시원하고 싱싱하게 느껴지는 작품 중의 하나다. 봄은 “드는 게 아니라” “세우는 거”라고 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넉넉하게 살아가야만 좋은 일상이 되고 마음도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가 살아도 햇볕을 받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자연의 섭리가 그렇고 계절의 변화도 그렇다. 절로 오고 절로 가는 데는 인간의 초조한 마음이 필요 없다. 다 비우면 채워지는 것이다. 새로운 씨앗으로 새로운 세상을 푸르게 가꿀 너그러움을 표출하는 것이 바로 시인의 입춘이다.
별똥별
-호킹 박사를 추모하다
보이는 게 보인다고 모두가 아니듯이
안 보이면 안 보여 의미 없음 아니다
존재는 거짓 중 하나
내게 던진 화두다
누구나 죽는다는 걸 남을 통해 익히지만
내가 죽는다는 것은 ‘모르는 체’ 살아간다
모르고 살아가는 게 오히려 절망인데
밤하늘 네 주검이 총총히 빛나는 건
남은 자에게 보내는 마지막 작별 인사
불살라 한순간이라도 사랑할 수 있다면
혀 1
1.
꼬여서 아름다운
필름마저 끊겨버린
비 젖는 거리마다
그리워 서성이는
달곰한 요령 울릴 때
촉수 곤두서는.
2.
열려야 쏟아진다
거짓이거나 진실이거나
새빨개야 더 믿는다
확신에 찬 위장이여
경계는,
튀기는 파편
자가당착 빠지지 않기
3.
그대여 닫지 마라 금 아닌 침묵 앞에
묵은 것은 외려 썩어 악취 진동할지 몰라
나만의 주문을 왼다
“열려라 참깨, 참 깨!”
<박영교 해설> 최 시인의 작품 「혀 1」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사람들은 세 치밖에 안 되는 혀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예부터 내려오는 말에 “혀 밑에 도끼가 들어 있다”라는 말이 있다. 세 치 혀로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첫째 수에서는 비가 오는 거리에서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둘째 수에서는 진실이든 거짓이든 말할 때는 진실인 것처럼 알아듣게 해야 하며 말과 행동은 일치해야 함을 강조한다. 셋째 수에서는 “침묵은 금이다”라고 하지만 그것은 옛말이니 말은 알맞게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을 시인이 독자들에게 일러주고 있다.
소녀상을 그리다
호골산 정상에서 만난 때 이른 진달래야
얇은 볕에 피었다가 넋까지 얼었구나
꽃 필 날 아직도 먼데 홀로 봄을 꿈꾸었나
엿서넛은 되었을가… 떨리며 톺던 동공
세태에 발가벗겨 파르르 깨문 입술
툭, 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까 애달프다
몰아치는 삭풍이 내 볼살 에는데
저리 여린 꽃잎은 잔설을 견뎌낼까
한 살이 산다는 것은 홀로 서는 아득한 길
□ 호골산 : 경북 봉화에 있는 야트막한 산.
<박영교 해설> 「소녀상을 그리다」는 봉화 읍내에 소재한 호골산을 등반하면서 그 산행에서 얻어진 작품인 것 같다. 이 시는 제29회 신라문학대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호골산 정상에서 “때 이른 진달래”가 피었다가 얼어버린 것을 보고 떠올린 작품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간 우리나라 어린 소녀들의 아픔 삶을 생각하면서 쓰였다.
물 그림자
물 맑아 물그림자 어리는 게 아니니
섹상 진창 섞이다가 때때로 후회하며
잠잠히 받아들일 때
은혜로 내리는 거
물 흘러 물 그림자 어리는 게 아니니
탁류 따라 떠돌다가 제자리 그리워야
그예, 다
내려놓으며
감사로 그리는 거
가슴에 사는 새
사람마다 새 한 마리 품고 살아가겠지만
어느 한 가슴에서 저토록 힘겨운가
비상은
버릴 수 없는
산 자의 꿈이기에
허공을 가로질러 낙하한 저 새는
제 심장 쪼아 먹어 앓다, 앓다 쓰러지더니
스스로 몸을 던져서
놓아주려 했던 게다
해를 살라먹으며 높이 날던 이카루스도
뜨거운 피 삭여줄 둥지가 필요했어
드높은 비행을 위한 영원한 안식이여
영면으로 놓아준 꿈속의 그대 파랑새
만신창이 남겨두고 영혼만은 숨결하니
다시는 꺾이지 않을
날개 활짝 펴 날다
회전의자
새 한 마리 사나 보다, 깔고 앉은 의자 밑에
그 모습 가뭇없어 목소리만 살아 있는
몸 살짝 비틀 때마다
삐양대는 울음소리
함께 대낀 세월 속에 눈치만은 구 단이라
목청 없이, 나섬 없이 쫑알대는 저 말대꾸
불 켜진 책상 너머로 궁금한 듯 서성인다
나도 한때 귀 어두워 남의 말 외면했지
내 아픔만 아프다고 뭉크의 절규처럼
그 소리 이제야 듣네
남의 가슴 다 찢은 뒤…
<박영교 해설>
최 시인은 빨고 앉은 회전의자가 삐걱서리는 소리(“삐양대는 울음소리”)를 듣고 “가슴 다 찢”어지도록 목소리를 냈던, 그러나 자신이 외면했던 어떤 이를 기억해낸다. 시인이 이 작품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알아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것이다. 남의 아픔을 헤어릴 줄 알라는 교훈이 담겨 있기도 하다.
사진 한 장
엄마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단 걸 잊었었다
빛 바랜 시간 속에서 분주한 여인이여
“오늘이 무슨 요일이나?”
묻고,
묻고,
물으시는
<박영교 해설>
나에게만 젊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어머니의 젊은 날 사진을 발견하고 분주하시던 어머니 생각을 해본다. 최예환 시인은 이제는 다 늙고 힘없는 어머니, 날짜도 요일도 기억 못 하는 어머니, 묻고 또 물으시믄 어머니로 작가의 아픈 마음을 다 내놓았다. 어머니, 누구나 가슴 저리고 아프고 그리운 이름이다. 철이 없어서, 바빠서 늘 핑계만 대다 보니 어머니는 어느 날 훌쩍 이승을 떠난다. 그래서야 아프고 그립다. 그 자식은 부모가 되고 또 그 어머니의 모습이 된다.
<해설>
당당한 삶의 자세와 그의 시적詩的 위상位相
최예환 시인은 의사로서 의학박사이며 봉화제일의원 원장이다. 그는 영주문예대학 7기생으로서 열심히 주경야독했다.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 시조 창작에 대한 열정은 그를 더욱 화려하게 문단文壇에 등단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최 시인은 크리스천으로서 교회 여러 분야에서 봉사활동 등을 할 뿐만 아니라 문학인 선후배 간에 문학적 교류도 왕성하다. 이는 지역 문학 활동이 날로 번창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동기부여가 되고 있다.
문학은 사람이 살아가는 길에 뜨겁고 눈물 있는 정원의 꽃 향기며 춥고 바람 부는 날 따끈한 한 잔의 차와 같은 안식이다. 어려운 세상살이에서 빛나는 언어로 사람들에게 삶의 활력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을 향한 정신적 투혼을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학의 힘이다. 앞으로 훌륭한 작품도 많이 쓰고 봉화제일의원도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