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문 타르콥스키를 보는 두 가지 시선
21. 키르케고르는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온갖 희망이 사라진 인간의 궁지를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그는 “절망하라. 그러면 그대 속에 깃들인 경솔한 마음이 그대로 하여금, 요동치는 정신처럼 그리고 망령처럼 그대를 이미 상실된 세계의 폐허 속에서 헤매게 하는 일이 다시는 없게 할 것이다”라고 권했다. 이어서 이성적·도덕적 요청을 따르지 못하는 나약한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죄의식과 자기 부정을 “무한한 자기 체념”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것이, 오직 그것만이 인간이 종교적 단계에 이르러 구원을 받게 되는 마지막 단계라고 규정했다. 이어서 아브라함이 바로 이 무한한 자기 체념 운동을 통해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삭의 생명을 구했다고 진지하게 교훈했다.
39. 동방 정교회에서는 이 신비롭게 은혜로운 과정을 ‘케노시스를 통한 테오시스’ 곧 ‘말씀의 세속화를 통한 인간의 신성화’ 또는 ‘자기 비움을 통한 자기 고양’ ‘자기 부정을 통한 자기 긍정’이라는 다양한 말로 교훈한다. 알고 보면 바로 이것이 부정 신학의 핵심이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무덤에서 부활로, 하나님의 부정에서 하나님의 긍정으로 진행하는 변증법적 신학이 발 딛고 있는 기반이다. 또한 이 책에서 말하는 ‘예언자 신학’ ‘파수꾼 신학’의 본질이다.
1장 이반의 어른 시절 : 이 땅에 고향이 없다
108. 타르콥스키가 볼 때, 현대인들의 정신세계는 날이 갈수록 메말라 가고 있으며, 순전히 물질적인 것들이 제도적으로 탄탄히 자리 잡아 우리들 삶에 근거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물질적 발전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물질문명을 발전시키기에 혈안이 되었고, 모든 인간관계 및 민족, 국가 간 관계가 이기적으로 되었다. 그리고 “물질적 발전 대신에 정신적 발전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됨으로써 다시 고상한 삶을 가능케 해 줄 마지막 남아 있는 가능성”을 상실했다.
115. 서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타르콥스키는 인류의 이상은 사상가들에 의해서도, 혁명가들에 의해서도, 심지어는 교회에 의해서마저도 성공적으로 성취되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는 예술가만이 진정한 예술 곧 “이상을 향한 동경으로서의 예술”로써 이 일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115. “예술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 그러니까 희망, 믿음, 사랑, 아름다움, 기도 또는 인간이 꿈꾸고 바라는 것들을 강화시킨다.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그러니까 그 자신이 아니라 그의 육체가 살아나기 위한 본능적 움직임을 시작한다. 예술 역시 이처럼 물에 빠진 인간의 육체가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을 수행한다. 예술은 정신적 의미에서 인류를 익사시키지 않으려는 본능으로서 존재한다. 인류의 정신적 본능은 예술가에게서 확인되는 것이다.”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282쪽)
2장 안드레이 루블료프 : 믿음이란 무엇인가
148. 타르콥스키에게 있어서 예술가란 시대의 산물이며, 민중의 대변자다. “나는 예술가들이 자신들은 자유롭게 창조 작업을 하고 있다는 의견을 제시할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동시대인들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파악하고 있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232쪽)라고 주장하는 타르콥스키가 위대한 예술가로 남은 루블료프의 삶을 조명하면서 그의 “삼위일체” 성화상을 당시 시대와 민중의 염원이 낳은 산물로서 인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152. 수도사이자 성화상을 그리는 화가로서 살인을 하게 된 루블료프는 스스로 완전히 황폐화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이제 그를 지탱해 오던 모든 것은 무너졌다. 신, 인간, 예술, 이 모든 것에 대한 그의 믿음이 사라진 것이다. 이때 루블료프는 환상 속에서 이미 고인이 된 스승 테오파네스의 혼령과 만나 신념의 본질과 예술에 대해 격론을 벌인다. 그리고 스승의 입을 통해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우리들의 죄를 통해 악은 인간의 형태를 띠고 왔다네. 악과 싸운다는 것은 인간성과 싸운다는 것을 뜻하지. 신은 용서할 걸세. 그러나 스스로는 용서하지 말게나! 앞으로는 신의 용서와 자네 자신의 고뇌 속에서 살아가게.” ...........
167. 그렇다! 그는 마침내 알았다. 믿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루블료프는 드디어 깨달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묻겠다! 당신은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번지점프를 해 본 적이 있는가? 분명 없을 것이다. 그럼 삶의 벼랑에서 안전장치 없이 추락하고 있다고 느껴 본 일은 있는가? 그래서 몸서리치게 하는 공포와 치아가 맞부딪치는 전율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적어도 한두 번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당신은 아는가? 하나님은 천 길 벼랑으로 추락하는 어깨에만 날개를 달아 주신다는 것, 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야 길을 터 주신다는 것, 소망이 끊어진 곳에만 소망을 이어 주시고, 희망이 사라진 곳에서야 희망을 열어 주신다는 것을? 무한한 자기 체념이 있는 곳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을? ............
3장 솔라리스 : 양심이란 무엇인가
186. 후기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섭리에 대하여>에서 로고스가 가진 강제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선한 사람이 할 일이 무엇이겠소? 자신을 운명에 맡기는 것이오. 우리가 우주와 함께 휩쓸려 간다는 것은 그나마 큰 위안이오. 우리더러 그렇게 살라고, 그렇게 죽으라고 명령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똑같은 필연성으로 신들도 옭아매고 있소. 신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나아가기 때문이오. 만물의 창시자이자, 조종자, 운명의 법을 만들어 정하신 그분도 그것을 따르고 있소. 그분은 단 한 번 명령하고는 늘 복종하지요”
187. 자, 여기서 주목하자! ‘저쪽’과 ‘위쪽’이라는 구별에 가치판단이 들어 있다. 요컨대 스토아 철학자들은 스스로 고통을 극복했기 때문에 고통을 아예 모르는 신보다 더 우월하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논리에서 세네카는 참된 스토아 철학자를 ‘신들 위의 신’이라고도 불렀다.
이 얼마나 엉뚱하고 대담한 생각인가! 하지만 이러한 이유에서 스토아 철학은ㅡ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보여 주었듯이ㅡ인간으로 하여금 삶에서의 모든 욕망과 쾌락 그리고 죽음에서 오는 공포와 불안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서구에서 기독교와 오랜 세월 동안 경쟁하며 또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206. 그러나 크리스는 이들과는 달리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곧 하리로 현전現前하는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그 자신의 삶의 의미와 인간성을 회복하고 질환으로부터 치유되려는 방법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결국 그것만이 올바른 방법이었다!
208. 이런 하리를 크리스는 예전에 그가 아내 하리에게 대했던 것과는 전혀 달리 따뜻하게 배려하고,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랑을 고백한다. 이것이 크리스가 하는 ‘자신의 과거와의 화해’다. 크리스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 내면의 죄의식을 치유하고 인간성을 회복해 간다. 즉 사랑이 그의 현재를 구속하는 과거 곧 ‘시간 이하’의 삶으로부터 그를 구원하는 것이다! ..............
210. 이제야 크리스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과학적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신비이고 사랑이며,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210. “이 같은 사랑과 몰아적 헌신이야말로 현대의 불신과 냉소주의 그리고 공허함에 대치될 수 있는 마지막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작가와 [과]학자 역시 결국은 이 현대 세계의 희생자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안드레이 타르콥스키, <봉인된 시간> 252쪽)
212. 그 후 크리스는 하리와 다투고 헤어지는 원인이기도 했던 자신의 어머니와도 꿈속에서 조우하고 화해하게 된다. 이제 그는 하리와, 이뿐만 아니라 그를 구속하던 모든 과거와 화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를 구원한다.
212. 영화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크리스의 집 앞이다. 물풀들이 춤추는 호수를 지나서, 집에 도착한 크리스는 창문 너머로 아버지를 바라본다. 밖으로 걸어 나온 아버지 앞에서 크리스는 하리에게 그랬듯이 무릎을 꿇고 아버지를 감싸 안는다. 이제 그 누구와도 화해할 수 있게 된 그가 그의 아버지와 화해하는 것이다.
그러자 타르콥스키의 카메라가 갑자기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고도가 높아져 감에 따라 크리스의 집은 점점 작아지고 시야는 넓어진다. 여기에서 영화감독으로서 타르콥스키의 천재성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놀라운 진실! 크리스의 집이 바로 솔라리스의 바다 한가운데 놓여 있다!
이 놀라운 화명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그가 사는 그곳, 아니 우리가 사는 바로 이곳이 ‘혹성 솔라리스’라는 사실이다! 죄의식와 양심이 물질화되어 나타나고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장소,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지 않고는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장소, 자신의 양심을 따라야만 인간성을 구현할 수 있는 장소, 용서와 사랑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인 장소, 바로 그곳이 ‘우리가 사는 세계’인 것이다!
4장 거울 : 욕망이란 무엇인가
232. 우선 두 작품은 모두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을 단순히 아름답거나 또는 고통스러운 추억으로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구원’을 꾀한다. 프루스트는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이 자신의 회상을 따라가는 길’이 바로 ‘자신의 자아를 되찾는 길’이며 ‘부활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233. 작품에서 ‘무의지적 기억’이라고도 표현되는 프루스트의 ‘회상’이 하는 일은 단순히 잊었던 기억의 회복이 아니고, 잃어버린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 주는 것이다. 곧 인간은 회상을 통해서만 자기가 누구였는지, 누구인지, 그리고 누가 될지를 인식하게 되며, 그 때문에 이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프루스트가 만일 회상이 하는 일이 단순히 ‘잊었던 기억’ 곧 망각의 회복이라고 생각했다면, 그의 소설의 제목은 ‘잊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되었을 것이다.
239. 인간은 잃어버린 시간, 놓쳐 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는 말은 인간은 작품 앞에서의 자기 이해를 위해, 그리고 작품을 통한 자기 발전 가능성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는 뜻이다. 즉 “인간은 살아가는 삶의 경험을 얻으려고 영화관에 간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새로운 존재 가능성을 얻고자, 자기 구원을 위하여 영화관에 간다는 것이다.
243. 윌리엄 텐이 지은 소설의 이야기가 정신분석치료와 비교되는 이유는, 예술사학자가 과거로 돌아가 허구적 구성물을 제작함으로써 후세의 진실이 이뤄지듯이 정신분석의는 환자의 내면에 자신의 기대와 욕망을 의도적으로 전이시킴으로써 치유라는 진실을 얻어 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적 용어로는 ‘자기 충족적 예언’이라고 일컫고, 대중적으로는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부른다.
258. 여기에서 드러난 것은, 알렉세이도 그의 어머니 마루샤와 같이 ‘자기중심적’ 인간으로 성장했고, 그 때문에 역시 마루샤처럼 불행한 결혼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그는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감정 곧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녀와의 관계를 좋게 할 수 없다. 게다가 더욱 나쁜 것은, 나탈리아가 맡아 기르고 있는 그들의 아들 이그나트 역시도 점점 알렉세이를 닮아 간다는 것이다.
259. 반영은 일어나지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성립되지 않는 이러한 관계는 물론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대한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재해석에서 벗어나는 ‘예외적’ 관계라 할 수 있다. 라캉은 ‘죽을 때까지의 싸움’을 자아와 대상 사이의 2자적 관계에 내재 된 공격성으로 설명하지만, 타르콥스키는 이들 간에 성립된 이러한 ‘예외적’ 관계는 그들이 서로 상대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데서 온다고 보았다.
타르콥스키가 옳다. 사회적 고용관계 내지 계급적 주종관계가 아닌 바에야, 사랑 말고 그 어떤 것이 진정 자기를 포기하고 상대에게 노예가 되게 할 수 있겠는가! 가족 간에는 특히 그렇다. 상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할 수 없어 서로 ‘죽을 때까지의 싸움’을 하면서도, 동시에 각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는 악순환을 계속하는 것이 자기중심적 인간들이 갖는 가족관계의 전형이다. 영화 <거울>이 바로 이러한 인간들의 고통을 그렸다고 타르콥스키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혔다.
260. 타르콥스키가 여기에서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라는 알렉세이의 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은 그다음 이어지는 장면들, 특히 다큐멘터리 필름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장면들은 예컨대 전쟁 같은 격동하는 역사적 운명과 그 속에 존재하는 개인적 삶의 ‘어쩔 수 없는’ 운명적 비참함과 참혹함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와 전혀 무관해 보이는 전쟁 장면들은 자칫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수 있고, 나아가 이 영화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타르콥스키는 이러한 전혀 이질적인 장면들을 통해 오히려 지금까지 전개되어 오던 이야기가 가진 문제, 곧 자기중심적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파국’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찾아낸다. 따지고 보면 전쟁도 자기중심적 국가들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타르콥스키가 전개하는 이러한 다중 화법을 놓치면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영영 없다.
263. 우리는 그것을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찾을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희생되는 자 곧 노예는 실존적 무기력에 빠진 주인과는 다르다. 그는 자신의 운명의 주인으로서, 신분을 극복하고 진정한 만족을 얻을 가능성을 획득하며 역사적 발전을 이룩하는 자인 것이다. 그는 희생자이지만 행복한 자이고 승리한 자다.
그렇다! 타르콥스키가 이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본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까지 전개되어 오던 이야기가 가진 문제, 곧 자기중심적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파국’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이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자가 불행한 자이고 패배한 자이며, 희생자가 행복한 자이고 승리자라는 것, 바로 이것이 영화 <거울>의 핵심이다!
264...........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생각해 보자! 이것이 과연 새로운 지혜던가? 이것은 혼인 잔치에 초대되어 가면 상석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며, “무릇 자기를 높이려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복음 14:11)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가? ‘자기 비움을 통한 자기 고양’ ‘자기 부정을 통한 자기 긍정’이라는 부정 신학의 메커니즘과 다른가? 또한 죽음에서 생명으로, 무덤에서 부활로, 하나님의 부정에서 하니님의 긍정으로 진행하는 변증법적 신학과는 생소한 것인가? 또한 이 책에서 말하는 ‘예언자 신학’ ‘파수꾼 신학’의 본질과 동떨어져 있는가?
아니다! “오직 무덤이 있는 곳이어야만 부활이 있다.” 바로 이것이 영화 <거울>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그렇다면 다가오는 종말론적 파국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는 우리 시대의 탈출구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268. 그녀는 이제는 제발 알렉세이가 무엇이든 상대에게 요구하기만 하는 자기중심적 태도를 버리고, 모세와 같이 자기 가정을 이끌어 주길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 남편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녀는 이 자기중심적인 여자에 대한 혐오감을 통해 비로소 자신을 버리고 떠난 남편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69. 이로 인해 자기중심적 인간은 자기중심적 인간을 상대로서 대하게 되고, 희생적 인간은 희생적 인간을 상대로서 대하게 된다. 지배하려는 자(주인)은 지배하려는 자를 상대로서 만나고 봉사하려는 자(노예)는 봉사하려는 자를 상대로서 만난다........... 이는 마치 신을 믿으면 마음의 평안과 안정된 삶을 얻게 되지만, 마음의 평안과 안정된 삶을 얻으려고 하면 신을 믿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타르콥스키적 ‘거울 이론’이다.
270. 노예는 노예로 일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고, 주인은 주인으로 지배함으로써 노예가 된다.
행복은 그것을 초극한 그 어떤 숭고함을 추구할 때 부산물로써 얻어지는 것이지, 그것 자체를 욕망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기중심적이라는 것, 이기적이라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한 환상을 좇는 것인가! 영화 <거울>에서 타르콥스키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271. 알렉세이는 편도선염이 아니고 사실상 죄책감으로 죽어 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는 행복을 욕망했기 때문에, 그리하여 자기중심적 삶의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오직 그 때문에 죄책감을 갖고 죽어 가는 것이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 바로 이것이 원죄다.
271. 뒤이어 알렉세이의 어머니 마루샤와 그녀의 남편이 서로 사랑하는 행복한 시간에 대한 환상이 이어진다. 아름다운 저녁에 마루샤는 남편과 함께 집 근처 숲에 행복에 겨워 누워 있다. 마루샤가 일어나 앉자 남편은 마루샤에게 “뭐가 낫겠어, 아들 아니면 딸?” 하고 묻는다. 이들의 대화는 더 이상 ‘나’에 의한 대화가 아니다. ‘우리’에 의한 것이다. 이로써 타르콥스키는 이제 이들이 욕망하는 것이 더 이상 각자의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알린다.
멀리에서는 할머니가 알료사와 마리나를 데리고 들판을 가로질러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마루샤는 기쁨에 넘쳐 눈물을 흘리며 주변 숲을 둘러본다. 아름다운 저녁 해가 들판 산등성이를 막 넘어가고 있다.
영화 <거울>이 끝났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들여오는 듯한 타르콥스키의 음성!
“그래,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작성 중 )
김신웅 심리상담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