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23:9-22절
초실절과 오순절의 구속사적 의미
설교 작성노트
본문은 7가지 절기 중 초실절과 오순절에 대한 규례다. “초실절”은 유월절과, 오순절 두 절기와 관련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초실절 즉 주님의 부활 후 50일 되는 날이 오순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순절에는 “새 소제를 드리되 누룩을 넣어서 구운 떡 두 개”를 드리라 하신다. 이에 대한 구속사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이를 증언하려는 것이 내용 목적이다.
그리고 “누룩 섞인 떡 두 개”와 함께, “번제, 속죄제, 화목제”를 드리라 하시는데 그 의미에 적용목적이 있다 하겠다.
강론
본문은 7가지 절기 중 “초실절과 오순절”에 대한 규례입니다. “초실절”에 대해서는 이미 유월절과 결부해서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주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첫 매”가 되실 것을 “초실절”은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실절”은 오순절하고도 결부가 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부활하신지 50일 되는 날이 오순절이요, 오순절(五旬節)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오순절”의 예표가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요 16: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활하신지 50일 만에 성령은 강림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초실절”은 유월과 오순절 양쪽 절기와 불가분의 관계인 것입니다. 이점을 분명히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① 먼저 “초실절”(출 34:22)에 대해서 간단하게나마 상기를 시켜야하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10) 하십니다. 이것이 “초실절”(初實節)이요,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된 근거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교훈적인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 즉 구속사적인 의미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교훈적인 의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첫 이삭”을 수확하게 되자 우선적으로 하나님 앞에 요제로 드렸다는 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하나님중심의 신앙인 것입니다.
㉡ 그런데 여기에는 보다 더 중요한 구속사적인 의미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점을 밝히 드러난 신약성경이 빛을 비춰주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부활장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고 증언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첫 열매”라 한 것은 본문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첫 열매”가 되심으로 우리에게도,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고전 15:21)한, 부활의 소망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②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첫 이삭을,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11하)라고 지정해주셨다는 점입니다. 첫 이삭을 가져가면 바로 흔들어 드리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라”하시는 것이 무의미한 말씀이란 말인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마 28:1), 즉 “안식일 이튿날”에 부활하심으로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11)라고, “흔들라”하신 것은 환희(歡喜)를 나타내는 동작인 것입니다. 애굽 바로의 노예였던 자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첫 수확을 해서 하나님 앞에 흔들어 드렸다는 것은 감사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기쁨은,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겼다”(눅 24:41)한 주님의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이처럼 기뻐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것이 “흔들 것이라”한 요제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첫 열매”, 즉 초실절의 예표도 실체로 성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③ “첫 이삭”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예표임이 이어지는 말씀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곡식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 일을 계수하여”(15-16상)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지 마시고 음미해보시기를 바랍니다.
㉠ “너희가 요제로 단(첫 이삭)을 가져온 날부터”,
㉡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즉 7×7=49를 채우라는 것입니다.
㉢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일을 계수하라”(16상), 즉 7×7+1=50일을 계수하라 하십니다. 10이 5번이라 하여 오순절(五旬節)이라 합니다. 성령께서는 정확하게 주님이 부활하셔서 첫 열매가 되신 날부터 세어서 50일되는 날에 강림하심으로 이 예표가 성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 이점을 신약성경은,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행 2:1-2)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고만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오순절에 강림하시리라는 점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이점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라는 말씀에 나타납니다.
④ 오순절, 즉 성령께서 강림하시게 되면,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라”(16하) 하십니다. 어찌하여 “새 소제”라 하시는가? 이는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탄생하게 될 “신약교회”에 대한 예표이기에 “새 소제”라 하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말씀을 보십시오.
㉠ “너희의 처소에서 십분의 이 에바로 만든 떡 두 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17상)하십니다. 구약시대는 12지파를 상징하는, “떡 열두 개”(24:5)를 진설했는데 어찌하여 “떡 두 개”를 드리라 하시는가? “떡 두개”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4-15)한,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 사도 바울은, “우리 둘(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고 증언하고 있는데, “떡 두 개”를 하나님께 드리라 하신 예표가 이처럼 놀랍도록 역사적으로 성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떡 열둘”(24:5)을 두 줄로 진설하던 것과는 대조되는 전연 다른 “새 소제”인 것입니다.
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17하)라고, “누룩을 넣어서 구운 떡”이라고 말씀한다는 점입니다. 6절에서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하시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누룩”은 죄를 상징하는데 지상의 교회란 누룩이 섞여 있는 상태로 온전하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고, 받으시게 되는 것은, “너희는 또 이 (누룩을 넣어서 구운)떡과 함께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양 일곱 마리와, 또 숫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며”(18-19)한, “속죄제”와 함께 드려지기 때문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만 합니다.
㉡ 이 자상함을 보십시오. “초실절”과 함께 드리는 제사에는 “번제와, 소제”(12-13)만 있을 뿐 “속죄제”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첫 이삭”은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8-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룩을 넣은 떡”과 함께 드려지는 제사에는 “번제, 속죄제, 화목제” 등이 함께 드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룩이 섞인 떡”만은 받으실 수가 없지만 “흠 없는” 제물로 드리는 “속죄제, 화목제” 등과 함께 드려짐으로, 즉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고 드려지기 때문에 열납이 된다는 것입니다.
⑥ 그리고 하신 말씀이,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22) 하십니다. 가난한 자, 나그네를 생각하시는 참으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형제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어떤 장면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 보아스가 이방 여인 룻에게,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하면서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기를,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룻 2:8,15-16)한 장면입니다.
㉡ 또 있습니다. 주님에게,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한 가나안 여인의 고백입니다. 유월절로 상징된 그리스도의 구속과, 오순절로 상징된 성령 강림이 성취되는 날에는 “이방인들”도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초실절과 오순절의 구속사적 의
미”입니다.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강림함이라
정결한 맘 영원하도록 주의 거처 되겠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 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잠잠하게 되도다.(182장)
첫댓글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