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초고] 에너지 본위제와 생태적 통화 개혁을 이야기한 사람들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 AI 동료들
2026-07-17
현대 문명이 직면한 위기의 이면에는 언제나 금융의 기형적 팽창이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 중앙은행과 시중은행이 만들어내는 통화(신용)의 대부분은 토지와 주택이라는 한정된 물리적 공간을 담보로 삼는다. 이러한 ‘부동산 의존형 화폐 발행 구조’는 자산 가격의 거품을 끊임없이 부풀리며 사적 지대(Rent)를 극대화하는 반면, 인류가 당면한 기후·생태 위기를 해결할 실물 인프라로의 자금 흐름은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이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서구의 몇몇 사상가들과 생태경제학자들은 통화의 담보를 사적 자산이 아닌 인류 생존의 물리적 실체인 ‘에너지(Energy)’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안해왔다. 이들의 시도는 하나의 통일된 학파를 이룬 적은 없다. 대개는 단속적이고 주변부적인 발상이었고, 실제로 채택된 적도 없다. 그러나 20세기 초의 대담한 상상력에서 21세기의 블록체인 실험에 이르기까지, 이 흐름을 되짚어보면 지금의 기후·금융 위기를 다시 사유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서두: 니콜라 테슬라의 무선 에너지 비전
천재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는 에너지를 특정 개인이나 기업이 계량기를 달아 파는 상품이 아니라, 지구가 인류 모두에게 무상으로 내어주는 공유 자산으로 보았다. 1901년 뉴욕 롱아일랜드에 착공한 **워든클리프 탑(Wardenclyffe Tower)**은 전선 없이 지구 전리층을 통해 전 세계 어디서나 전력을 공급하는 ‘세계 무선 시스템(World Wireless System)’을 실현하려는 시도였다.
이 프로젝트는 금융업자 J.P. 모건의 투자로 시작되었으나, 모건의 관심은 애초에 대서양 횡단 무선통신에 있었다. 테슬라가 계획을 대규모 무선 전력 전송으로 확장하자 모건은 추가 자금 지원을 거부했고, 탑은 완공되지 못한 채 1917년 철거되었다. “전선 없이 전기를 보낸다면 계량기는 어디에 달아야 하느냐”는 모건의 발언은 이 일화를 압축하는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되지만, 실제로 모건이 이런 말을 했다는 사료적 근거는 없다 — 후대에 만들어져 굳어진 전설에 가깝다. 다만 그 전설이 오래도록 살아남은 이유는 분명하다. 희소성을 인위적으로 만들고 거기에 통행세를 매기는 것이 금융자본의 오랜 문법이었고, 계량할 수도 독점할 수도 없는 무선 에너지는 그 문법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테슬라의 기획은 좌절되었지만, ‘에너지는 공유될 수 있고 화폐의 물리적 기반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씨앗은 20세기 내내 간헐적으로 되살아났다.
역사적 선구자들의 도발적 상상력: 포드와 풀러
-헨리 포드의 ‘발전소 기반 화폐’ 제안
1921년 12월, 미국 자동차 산업의 거두 헨리 포드는 앨라배마주 테네시강의 머슬 숄즈(Muscle Shoals) 수력발전 댐 건설을 둘러싼 논쟁에서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이 댐을 지으려 했으나 월스트리트 금융업계의 채권 발행 요구에 부딪혀 난항을 겪고 있었다. 포드는 《뉴욕 트리뷴(New York Tribune)》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정부가 공공 인프라를 지으면서 금융업자에게 이자를 지불할 이유가 없으며, 금이나 채권 대신 댐이 앞으로 생산할 전력을 담보로 화폐를 직접 발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너지 화폐 체계 아래에서는, 한 시간 동안 발휘된 일정량의 에너지가 1달러와 같아진다”는 것이 포드의 구상이었다. 그는 금이 소수 금융권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 반면, 발전소에서 나오는 물리적 전력은 독점하거나 조작할 수 없다고 보았다 — 그리고 금 본위제의 통제 가능성이야말로 전쟁의 뿌리라고 주장했다.
이 제안은 즉각 논쟁에 부쳐졌다. 며칠 뒤 《뉴욕타임스》는 포드의 구상을 두고 “금을 에너지 단위로 대체하려는 발상은 그 문턱에서부터 비틀거리다 쓰러진다”는 회의적인 사설을 실었다. 결국 포드는 3년간 머슬 숄즈 인수를 시도하다 1924년 계획을 접었다.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국가 통화의 담보를 부채가 아닌 실물 생산력에 두어야 한다는 그의 문제의식은 이후 에너지 화폐론의 원형으로 남았다.
-벅민스터 풀러의 시스템적 비전
20세기의 시스템 사상가 벅민스터 풀러는 1969년 저서 《우주선 지구호 사용설명서(Operating Manual for Spaceship Earth)》에서 포드의 발상을 훨씬 큰 스케일로 끌어올렸다. 그는 지구를 한정된 자원을 실은 우주선에 비유하며, 인류의 경제 시스템이 열역학 법칙과 물리적 실체에 부합해야 생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 인터뷰에서 세계 폭력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은 풀러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언제나 어떤 도구나 발명을 통해 문제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려 한다. 내 답은 모두가 같은 전력망에 연결되는 세계 에너지 그리드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국제 분쟁 같은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새로운 경제적 기반은 금이나 달러가 아니라 킬로와트시(kWh)가 될 것이다.” 풀러는 금융 화폐를 아무 물리적 실체가 없는 ‘허구적 약속’으로 보았고, 반대로 지구가 축적해 온 에너지 흐름이야말로 진짜 부라고 주장했다. (후대의 일부 저술가들은 이 발상에 ‘대사 화폐(Metabolic Currency)’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이는 풀러 본인이 쓴 용어는 아니다.)
생태경제학의 정교한 경고: 다우트웨이트와 오덤
1970년대 오일 쇼크와 기후위기의 가시화는 에너지 화폐 담론에 학술적 무기를 쥐여주었다. 생태경제학자들은 화폐 발행 메커니즘 자체를 자연의 물리적 한계 안으로 묶어두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리처드 다우트웨이트와 《화폐의 생태학》
아일랜드의 생태경제학자이자 대안 통화 운동가인 리처드 다우트웨이트는 《화폐의 생태학(The Ecology of Money)》에서 현대 금융자본주의의 자기파괴적 본성을 지적했다. 오늘날 화폐 대부분은 시중은행의 대출을 통해 창출되는 ‘부채 기반 화폐’이며, 이자를 갚기 위해 경제가 매년 물리적으로 성장할 것을 구조적으로 강요한다는 것이다. 다우트웨이트는 이 무한 성장의 압박이 생태계 파괴와 기후 파국의 근본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그 대안으로 청정 에너지 생산량과 연동된 **‘에너지 보증 화폐’**를 제안했다. 정부나 지역 공동체가 재생에너지 설비를 확충할 때 그 설비가 미래에 생산할 전력량을 담보로 화폐를 발행하면, 통화 유통 자체가 곧 탄소 배출 감소와 정비례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구상이었다.
-하워드 오덤의 에머지(Emergy) 이론
시스템 생태학자 하워드 오덤은 경제와 생태계를 아우르는 정량화 도구로 에머지(Emergy, Embodied Energy) 개념을 창시했다. 에머지란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만드는 데 직간접적으로 투입된 태양 에너지의 총량을 뜻한다. 오덤은 인간이 아무리 복잡한 기술과 노동을 투입하더라도,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지구와 태양이 축적해 온 에너지 흐름에 의존하고 있다고 보았다.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자산 가치는 투기 심리와 정보 비대칭에 의해 얼마든지 부풀려질 수 있지만, 그 자산이 품은 실제 생태적 가치(에머지)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덤 이론을 통화 개혁에 접목한 이들의 핵심 논지였다.
현대 기술의 융합: 줄 표준과 DeKo
역사적 상상력과 생태경제학의 이론은 21세기 들어 스마트 그리드, 분산형 전원, 블록체인 기술과 결합하며 구체적인 실행 모델로 이어지고 있다.
-브라이언 맥코넬의 ‘줄 표준(Joule Standard)’
2013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브라이언 맥코넬은 화폐 가치의 기준을 에너지의 물리적 단위인 ‘줄(Joule)’에 고정하는 ‘줄 표준’ 개념을 제안했다. 그는 금이든 법정화폐든 정치적·시장적 요인에 좌우되어 장기적으로 가치가 흔들려온 반면, 1줄이 물리적 세계에서 발휘하는 객관적 일량은 변한 적이 없다는 점에 착안했다. 에너지 단위와 1대 1로 연동되는 디지털 화폐를 만들면 정치나 투기로부터 자유로운 ‘절대 화폐’를 구축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DeKo(Decentralized Kilowatt-hour) 모델과 그 이후
2011년, 금융공학자 닉 고거티(Nick Gogerty)와 조지프 지톨리(Joseph Zitoli)는 “DeKo: An Electricity-Backed Currency Proposal”이라는 논문에서, 중앙은행이 국채나 부실 금융자산 대신 실제 전력을 생산·공급하는 자산(표준화된 전력구매계약, PPA 등)을 화폐 발행 담보로 보유하자고 제안했다. 스마트 계측기가 생산된 전력량(kWh)을 실시간으로 검증하면, 그 가치에 비례해 화폐가 발행·유통될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이는 학계에서 널리 주류화된 논의는 아니었지만, 실제로 파생물을 남겼다. 고거티는 이후 온라인 자원봉사 커뮤니티와 함께 솔라코인(SolarCoin)을 만들어, 태양광 발전 1메가와트시(MWh)당 코인 1개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이 아이디어를 실제 암호화폐로 구현했다. 제안에 그치지 않고 작게나마 실행에 옮겨졌다는 점에서, DeKo는 에너지 화폐론이 이론에서 실천으로 넘어간 드문 사례로 꼽을 만하다.
이러한 모델들이 공통으로 그리는 그림은, 화폐 발행의 주체를 중앙은행의 캐비닛에서 햇빛과 바람이 내리쬐는 지역 사회와 시민들의 지붕 위로 분산시키는 것이다. 부동산 소유주가 지대를 취하며 부를 불리던 구조에서, 청정 에너지를 생산하는 시민들이 화폐 발행의 이익(시뇨리지)을 나누어 갖는 방향으로의 전환이다.
‘죽은 땅’의 금융에서 ‘살아있는 에너지’의 금융으로
포드에서 시작해 풀러와 다우트웨이트를 거쳐 오늘의 DeKo·솔라코인으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하나의 완결된 이론 체계가 아니다. 대부분 시대의 주류 금융에 의해 좌절되었거나, 극히 작은 규모로만 실현되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일관되게 던지는 질문은 유효하다 — 인류가 한정된 땅의 사적 독점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담보로 돈을 찍어내는 한, 자산 불평등과 환경 파괴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화폐의 담보를 끊임없이 쏟아지는 햇빛과 흐르는 바람, 즉 지속 가능한 재생에너지로 바꿀 때, 화폐는 지대 추구의 도구에서 생태계를 되살리는 활력소로 성격을 바꿀 수 있다. 물론 에너지 품질의 차이, 계량과 거버넌스의 기술적 난관, 전환 비용 같은 현실적 장벽은 여전히 크다. 그러나 땅문서를 담보로 돈을 찍어온 약탈적 자본주의의 오랜 관행을 넘어, 지구의 순환 법칙에 순응하는 문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단추는 결국 이 ‘통화 담보의 혁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