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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가시더라"(προάγων)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한 자발적 결단을 나타낸다.
예수는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알고 걸어가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B. 구체적인 수난 예고 (33-34절)
마가복음의 세 차례 수난 예고(8:31, 9:31, 10:33-34) 가운데 가장 상세하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십자가 사건이 임박했음을 강조한다.
예수는 영광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가고 계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이 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긴장은 곧 이어지는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에서 드러난다.
II. 야고보와 요한의 오해 (10:35-4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영광의 자리를 요구한다.
A. 영광을 요구하는 제자들 (35-37절)
당시 좌우편 자리는 왕국에서 최고의 권력과 명예를 상징한다.
수난 예고 직후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제자들의 영적 둔감함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B. 예수의 반문 (38-40절)
잔(cup) =*하나님의 진노와 고난의 운명
세례(baptism) =*죽음 속에 잠기는 고난의 경험
제자들은 가능하다고 대답하지만 그 의미를 모른다.
C. 다른 열 제자의 분노 (41절)
열 제자가 분노한 이유는 영적 통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도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D. 참된 위대함에 대한 교훈 (42-45절)
| 세상 방식 | 하나님 나라 방식 |
| 다스림 | 섬김 |
| 권세 행사 | 종 됨 |
| 높아짐 | 낮아짐 |
절정: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45절)
"대속물"(λύτρον, lytron)은 노예나 포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마가복음 전체의 중심 구절로 평가된다.
제자들은 영광을 원하지만 예수는 십자가를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구하지만 예수는 종의 자리를 가르치신다.
예수께서 보여 주실 왕권은 지배의 왕권이 아니라 자기희생의 왕권이다.
III. 바디매오의 치유 (10:46-52)
여리고에서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께 치유를 받고 제자가 된다.
A. 맹인의 부르짖음 (46-48절)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 칭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눈먼 사람이 예수의 정체를 가장 정확하게 본다.
B. 예수의 부르심 (49-50절)
겉옷은 당시 거지의 중요한 재산이었다.
이를 버린 행동은 믿음과 결단을 상징한다.
C. 믿음의 응답 (51-52절)
예수:
바디매오:
예수:
결과:
"따르니라"(ἠκολούθει)는 마가복음에서 제자도를 나타내는 중요한 동사이다.
단순히 시력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한다. 바디매오는 눈이 없으나 본다.
제자들은 예수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광을 구한다.
반면 바디매오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하고 믿음으로 나아온다.
치유의 결말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길에서 예수를 따름"으로 끝난다. 이는 참된 제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마가복음 10:32-52는 "누가 참으로 보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락은 예루살렘 입성 직전, 마가가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제자도의*최종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의 길은 영광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라, 섬김과 희생을 통과하여 영광에 이르는 길이며,
바디매오는 그 길을 가장 먼저 깨달아 따른 모범적 제자로 제시된다.
눈을 뜬 사람, 길을 따르는 사람
마가복음 10:32-52
사람들은 흔히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말합니다. 직접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으로 확인한 것을 믿으려고 합니다. 현대 사회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중요하게 여기고, 눈에 보이는 성공을 부러워하며, 눈에 보이는 결과를 따라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보고 있는가?"
눈으로 본다고 해서 다 보는 것은 아닙니다. 가까이 있어도 보지 못할 수 있고, 오래 함께 있어도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눈으로는 보지 못해도 진실을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의 사랑은 매일 곁에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건강도 잃어보기 전에는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누리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의 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눈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예수님께서 어떤 길을 걸어가셨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는 눈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영적인 시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계십니다. 이제 십자가가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닥쳐올 고난과 죽음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날을 기대하며 높은 자리와 영광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한편, 길가에는 눈먼 거지 바디매오가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볼 수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정확하게 알아보았습니다.
마가는 이 두 모습을 나란히 보여 줍니다.
눈이 있는 제자들은 보지 못합니다. 눈이 없는 바디매오는 봅니다.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던 거지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결국 오늘 본문은 단순히 수난 예고나 기적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누가 참으로 보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앞에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 오래 다닐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을 수도 있습니다. 예배와 봉사에 열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길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을 바로 보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따라가는 참된 제자가 되기를 소망하며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분명히 보고 계셨습니다.
본문 32절은 매우 특별한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예수께서 그들보다 앞서 가시는데..."
마가는 단순히 예수님이 제자들보다 조금 앞에 걸어가셨다는 사실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놀랐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두려워했다고 기록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루살렘은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뒤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장 앞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전쟁터를 향해 나아가는 장군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모두가 위험을 알고 주저하는데, 예수님은 흔들림 없이 앞장서 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난을 피하려고 합니다. 손해 보는 일을 싫어하고, 아픈 일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누구나 편안한 길을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도 종종 "주님, 이 어려움을 없애 주십시오", "이 문제를 피해 가게 해 주십시오"라는 내용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33절과 34절을 보면 예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질 것이요."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요."
"이방인들에게 넘겨질 것이요."
"조롱을 당할 것이요."
"침 뱉음을 당할 것이요."
"채찍질을 당할 것이요."
"죽임을 당할 것이요."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이니라."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내용이 실제로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갑작스럽게 체포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연히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상황에 밀려 희생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죄의 값을 대신 치러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명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가 고통의 자리인 줄 아셨지만, 그 십자가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보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눈앞의 어려움만 봅니다. 그래서 작은 고난만 와도 낙심합니다. 계획이 틀어지면 불평하고, 기대한 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만 보신 것이 아니라 부활도 보셨습니다.
고난만 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도 보셨습니다.
죽음만 보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영혼들도 보셨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걸어가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편안한 길이 아니라 순종의 길로 부르실 때가 있습니다.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희생이 필요한 길일 수도 있습니다. 이해받지 못하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주 묻습니다.
"왜 꼭 이 길이어야 합니까?"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길이 결코 실패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걷는 길은 비록 좁고 힘들어 보여도 결국 생명의 길이며 영광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보다 앞서 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삶보다 앞서 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길에서도 주님은 이미 앞서 걸어가셨고, 그 길의 끝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모든 것을 이해한 후에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가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라."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앞서 가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따라가고 있느냐입니다.
2. 제자들은 눈이 있었지만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향해 담대하게 걸어가시고 계실 때, 제자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35절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참으로 놀라운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전에 자신이 체포당하고, 조롱당하고, 채찍질당하고, 죽임당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의 고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
"누가 더 큰 권세를 가질 것인가?"
"누가 더 영광을 누릴 것인가?"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당시 왕의 오른편과 왼편은 최고의 권력과 명예를 상징하는 자리였습니다. 다시 말해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이 왕이 되시면 우리를 최고 권력자로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길은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맹목입니다.
사실 제자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때로는 예수님보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더 사랑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축복받는 것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내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기도할 때도 종종 이런 모습을 발견합니다.
"주님, 저를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물론 이런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관심이 언제나 '나'에게만 머물러 있을 때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에 있었지만, 제자들의 관심은 자기 영광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십자가를 향하고 있었지만, 제자들의 시선은 왕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이 말씀은 단순한 꾸중이 아닙니다.
"너희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질문하십니다.
"너희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여기서 "잔"은 고난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죽음의 깊은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영광에 앞서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할 수 있나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영광은 원했지만 희생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왕관은 원했지만 십자가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축복은 원했지만 헌신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결과는 원하지만 과정은 싫어합니다.
열매는 원하지만 수고는 싫어합니다.
부활은 원하지만 십자가는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다시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상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
더 많은 사람 위에 군림하는 사람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은 많이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사람은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그렇게 사셨습니다.
본문 45절은 마가복음 전체의 중심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신 분이셨습니다.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병든 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참된 위대함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제자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섬기는 사람입니다.
참된 제자는 사람들보다 앞에 서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낮은 자리를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나는 주님의 뜻보다 내 성공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십자가 없는 영광만을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제자들은 눈이 있었지만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보고, 예수님의 길을 보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3. 바디매오는 눈이 멀었지만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본문은 매우 극적인 반전으로 마무리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길에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바디매오였습니다.
본문은 그를 "맹인 거지"라고 소개합니다.
당시 맹인은 정상적인 경제 활동이 어려웠기 때문에 대부분 구걸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소외된 사람이었고, 경제적으로도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존재였습니다.
반면 야고보와 요한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수많은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직접 들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제자들이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놀라운 대조를 보여 줍니다.
눈이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눈이 없는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크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윗의 자손"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이것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그는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적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신앙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진리를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디매오를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말했습니다.
"시끄럽다."
"그만 외쳐라."
"네가 감히 예수님을 부르느냐."
그러나 바디매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합니다.
참된 믿음은 장애물을 만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멈추지 않습니다.
상황이 어렵다고 물러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간절히 주님을 붙듭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다양한 방해를 만납니다.
환경이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본문 49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요한 길 위에 계셨습니다.
곧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사람의 부르짖음 때문에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함성을 들으신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의 간절한 외침을 들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세상은 힘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성공한 사람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처 입은 사람을 보십니다.
외로운 사람을 보십니다.
눈물 흘리는 사람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말합니다.
"안심하라.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그 순간 바디매오는 즉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던집니다.
이 장면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당시 거지에게 겉옷은 가장 중요한 재산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낮에는 깔고 앉고 밤에는 덮고 자는 생존의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그것을 내버려두고 예수님께 달려갑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을 만나면 더 이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붙들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기대와 믿음이 더 컸습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흥미롭게도 이 질문은 앞에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셨던 질문과 거의 같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영광의 자리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단순하게 대답합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는 권력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명예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특권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즉시 그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문장이 가장 중요합니다.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마가는 "보게 되었다"보다 "따랐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단순히 시력을 회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은 어디로 향하는 길입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십자가입니다.
고난의 길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그 길을 따라갑니다.
앞에서 제자들은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눈이 열린 후 예수님의 길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문제만 해결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무엇을 받을 것인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어디로 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정말 예수님이 누구신지 보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복만 원하는가, 아니면 예수님 자신을 원하는가?
바디매오는 눈이 열린 후 다시 길가에 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가장 큰 은혜도 바로 이것입니다.
눈을 뜨게 하시고, 주님을 보게 하시고, 마침내 주님의 길을 따라가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기도가 바디매오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눈이 열린 후에는 주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는 참된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 10장 32절부터 52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세 부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분명히 보고 계셨습니다.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아셨고, 배신과 조롱, 채찍질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담대하게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다음으로 제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예수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를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서 왕좌를 꿈꾸었습니다. 섬김을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서 높은 자리를 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디매오를 보았습니다.
그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믿음의 눈은 열려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눈을 뜬 후에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누구의 모습에 더 가까운가?"
나는 예수님을 오래 믿고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여전히 제자들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주님보다 주님이 주시는 복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십자가 없는 영광만을 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섬김보다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주님의 뜻보다 내 계획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나라를 세상의 방식으로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높아지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많이 소유하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신앙의 열매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주십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섬김의 길입니다.
희생의 길입니다.
겸손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받은 가장 큰 축복은 눈을 뜬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병 고침을 받은 것보다 더 큰 은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었고,
눈을 회복한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제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건강이나 물질이나 성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지만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했지만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것을 가졌지만 영적으로는 눈먼 상태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을 봅니다.
눈물 가운데서도 주님을 신뢰합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따라갑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눈을 뜬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주님,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주님,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우리의 기도가 바디매오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뜻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보게 하여 주십시오.
십자가의 의미를 보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눈이 열렸다면 이제는 일어나 따라가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길가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 위에 섰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 안에서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사업장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바디매오처럼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눈이 더욱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눈으로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만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외면하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디매오처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보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참된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