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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초에 르네상스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혁신적인 젊은 음악가들이 일반 문화예술의 르네상스 정신에 자극되어 새로운 양식, 다시 말해서 화성적인 반주를 가진 단선율의 양식을 장조 하게 되었다. 이것이 모노디아(Monodia)즉 단 음악이다. 이 단음악이 정착 되었을때 르네상스음악이 완성된 것이지만 이 선율음악은 대위법적인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서창적인 선율과 이를 뒷받침하는 단순한 화성적인 반주로 가장 직접적인 표현을 하게 된 것이다. 이는 독창가곡이나 오페라, 그리고 오라토리오로서 나타났는데, 이러한 양식에 의해 근대적인 음악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한편 옛 겹선율에 의한 복음악이 모두 쇠퇴해버린 것은 아니며 당분간 신구 두 개 의 양식이 서로 접촉하고 영향을 주며 사용되었다. 독일이나 네덜란드의 많은 음악가는 그 풍부한 화성적 가능성에서 복음악적인 방향으로 나갔고, 이에 반해 이탈리아의 대부분의 음 악가는 르네상스적인 단음악을 택하고 오페라나 아리아, 그리고 소나타와 협주곡의 양식을 창안 발전 시켰다.
이 두 개의 조류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하이든이나 모짜르트등의 고전음악에서 화해하고 교류하게 된다. 이 르네상스 정신의 최고의 발현시대라고 할 수 있는 17세기부터 18세기 전 반기에 바하나 헨델이 대위법적인 음악을 완성한 복음악의 전성기에 이르는 약 150년간을 바 로크음악시대라고 부른다.
원래 바로크(Barock)라는 말은 주로 미술에서 사용된 시대양식의 개념으로서 스페인의 베라스케스, 네덜란드의 란브란트 등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변화있는 색채, 웅대한 구도, 장식 적인 곡선, 극적이고 정열적인 표현 등이 바로크예술의 특징이다.
바로크 음악은 원칙적으로 저음에 기초를 두어 그위에서 화성적인 성부를 배정해 가는 통주 저음기법을 기반으로 대조적인 협주양식, 즉 강주와 약주, 전 합주와 독주, 밝은 것과 어두운 것과 같은 대비적인 효과를 추구하고 심리적인 감동과 극성을 표현하기 위해 선율울 장식하고 화성에서 으뜸음을 중심으로 힘차고 색채감과 극감을 더해 준다. 그리고 마로크음악의 사회 적 바탕은 절대주의의 귀족 제도로서 주로 극음악과 기악음악의 분애로서 이탈리아가 그중심 이 되었다.
바로크 음악이라고 하면 대체로 극음악이 탄생한 1600년경부터 바흐가 죽은 1750년경을 말하는데 이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에 싹튼 인간중신적 세계관이 팽배해져서 점차 시민계급을 성장시켰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합리적인 관념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로크(Baroque)란 말은 "찌그러진 진주"라는 의미로서 이 시대의 음악은 안정감 대신 약동감을 특징으로 하여 웅장하고 거대하면서도 거기에 다채로운 장식이 함께 가해지는 것이다. 대체로 17세기 전반을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달한 단성음악 양식과 18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한 대위법적 다성음악 양식이 발달한 시대이다.
바로크 음악의 시작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활동한 카메라타(Camerata)라는 문예인들의 새로운 음악 관념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대위법적 음악이 가사의 내용을 전달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가벼운 기악반주 위에서 가사가 명료하게 전달되는 새로운 음악 형태를 탄생시켰는데 이것이 단성음악(Monody)이다. 이것을 적용하여 카메라타 일원인 갈릴레이(V. Galilei, 1520∼1591)와 카치니(G. Caccini) 1545∼1618)는 최초로 반주가 딸린 서정가곡을 만들었다. 단성음악의 선율반주는 저음 현악기로 연주되는데 이것은 작품전체를 통하여 계속되기 때문에 통주저음(Basso Continuo)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통주저음은 저음부 아래에 화음을 지시하는 숫자를 붙였기 때문에 숫자저음(Figured Bass)이라고도 부른다.
(1) 오페라(Opera)의 탄생
16세기말경 이탈리아 피렌체의 음악애호가 바르디(G. Bardi, 1534∼1562)의 집에 젊은 음악가와 시인들이 모여 새로운 음악을 연구했는데 이 집단을 카메라타(Camerata)라고 불렀다. 1597년에 시인 리눗치니(O. Rinuccini, 1563∼1623)의 대본에 페리(J. Peri, 1561∼1633)가 오페라《다프네(Dafne)》를 작곡하였다. 두 번째 작품도 리눗치니 시(詩)에 페리와 카치니가 작곡한 《에우리디체(Euridece)》를 1600년에 상연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에우리디체뿐이다. 그런데 근대적 개념의 오페라에 접근되는 진보적인 오페라를 만든 사람은 몬테베르디(C. Monteverdi, 1567∼1643)이다. 그는 1607년 《오르페오(La Favola d' Orfeo)》를 상연하였는데 대규모의 합창과 관현악, 무용 등이 한데 어울려 이전의 오페라라는 표현양식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기악의 서주로 시작하였고 댄스음악이 있고 신포니아라고 하는 기악곡이 사이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스카를라티(A. Scarlatti, 1660∼1725)를 중심으로 한 나풀리악파가 생겼으며 프랑스에서는 륄리(J. Baptiste Lully, 1632∼1686)를 중심으로 프랑스 오페라가 생겼으며, 영국과 독일에서도 오페라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2) 오라토리오(Oratorio)와 칸타타(Catata)
오페라보다 조금 늦게 종교음악의 한 형식으로 태어난 오라토리오는 초기의 모습이 오페라와 매우 유사하였다. 오라토리오의 특성은 오페라와 달리 종교적 내용으로 무대장치, 연기가 없다는 것이지만 초기의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연극적인 형태를 모두 갖추었다. 최초의 오라토리오는 카발리에리(Emilo de Cavalieri, 1550년경∼1602년)의《영혼과 육체의 극》인데 성서적 내용이 약하고 연극적인 면이 강하여 오페라와 유사한 점이 많다 하겠다. 그후 카리씨미(Giacomo Carissimi, 1605∼1674)가 쓴 《예프테, Jephte》로써 오라토리오의 음악양식을 확립하였다. 바로크말기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는 헨델(George Friederch Handel, 1685∼1759)이다. 그는 극적 요소를 더욱 강조하여 합창을 증가시켰고, 소재도 성서적 내용이외에 고대 그리이스의 신화적 인물을등장시키는 등 기존의 오라토리오의 음악 양식에서 탈피하여 오라토리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의 불후의 명작 《메시아, Messiah》는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 범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다.
칸타타의 음악형식구조는 오라토리오와 유사하다. 다만 그 규모가 축소되어 전례용으로 사용되기 적합하였다. 17세기중엽부터는 성서적 내용 이외에도 서정적인 세속가사를 사용하여 칸타타의 영역을 넓혔다.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은 200여편의 코랄을 사용한 교회 칸타타를 작곡하여 바로크 칸타타의 최고경지를 이룩했다.
(3) 기악음악
바로크시대의 기악음악은 중세에세부터 내려오는 악기의 발달과 양식의 확립, 새로운 악기의 출현으로 성악음악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건반악기는 독주용악기로도 사용되었으나 통주저음의 필수적인 악기로 어떠한 기악음악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바로크시대에 이르러 최고의 음향을 자랑하는 오르간을 위시하여 클라비코드, 쳄발로 등은 독주나 합주용 악기로 인기가 높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709년에는 크리스토포리(B. Cristofori, 1655∼1713)가 만든 피아노(Clavicembalo col Piano e Forte)가 등장하여 피아노 문헌의 첫장을 열었다. 현악기 부분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는데, 르네상스를 점유했던 비올족이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의 현악기군을 이루는 바이올린 족으로 대치되어 관현악 음악의 중심을 이루었다. 특히 크레모나(Cremona)출신의 아마티(N. Amati), 과르네리(G.B. Guarneri), 스트라디바리(A. Stradivari)등의 바이올린 제작자들이 우수한 악기를 만들어 바로크 현악을 더욱 수준 높은 음악으로 끌어 올렸다. 르네상스를 지배하던 루트는 바로크시대에 들어오면서 그 빛을 잃고 퇴조하여 그 명맥만을 유지시켰다.
관악기는 여전히 정립되지 않았으나, 관현악에서 그 중요성이 더 새져서 악기의 사용 빈도수가 높아갔다.
바로크시대의 작곡가들은 르네상스시대에 유행했던 몇몇 기악형식을 여전히 사용하였고, 아울러 새로운 음악형식을 개발하여 근대적인 기악 음악으로 그 모습을 점차 바꾸어나갔다. 르네상스의 기악형식이었던 푸가(Fugue)는 바로크시대에 와서는 독립된 기악작품은 물론 성악, 합창곡에서도 그 기법이 사용되었다. 모음곡(Suite)은 무곡을 여러 개의 부분으로 확대해서 독주와 합주용의 기악 음악형식으로 사용되었다. 모음곡은 주로 같은 조성의 알르망드(Allemande), 쿠랑트(Courante), 사라반드(Sarabande), 지그(Gigue)를 주로 하여 그밖에 지그의 앞과 뒤에 미뉴에트(Minuet), 부레(Bouree), 가보트(Gavotte)등이 삽입되기도 하였다. 바로크시대에 와서 르네상스의 세속 성악음 들을 성악과 기악의 혼합 내지는 악기만으로 연주하는 형태가 흔하였는데 이것이 다악장 형식의 소나타(Sonata)라는 이름으로 흡수되었다. 많은 바로크 소나타는 두 개의 바이올린과 콘티누오를 위하여 작곡되었는데 이것이 트리오 소나타이다. 다른 형태의 소나타로 (Sonata da Camera)와 교회소나타(Sonata de Chiesa)라는 두 종류로 분류지었고 일반적으로 같은 조성의 4악장으로 구성된다.
바로크시대의 협주곡은 합주협주곡(Comcerto Grosso)과 독주협주곡(Solo Concerto)의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합주협주곡의 확립자는 코렐리(Arcangelo Corelli, 1653∼1713)이고 독주협주곡은 3악장 형식으로 오늘날의 협주곡 악장의 구성원리를 제공하였다. 대표적 작곡가는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로서 근대적 개념의 협주곡 완성자이다. 관현악을 의미하는 신포니아(Sinfornia), 서곡(Overture), 협주곡(Concerto) 등이 있었으나 용어의 구분처럼 음악적 내용의 구분이나 표준은 서 있지 않았고 관현악의 형태도 아직 악기의 구성이나 기준이 일정치 않았다. 관현악의 주된 악기는 현악기였고 관악기나 타악기는 간헐적으로 사용되었다.
1) 안토니오 비발디 - Antonio Vivaldi [1678-1741]
2)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 - Georg Friedrich, Handel [1685-1759]
3) 요한 세바스찬 바하 - Johann Sebastisn Bach [1685-1750]
-綠香-
1. 바로크 음악 양식 및 배경
바로크 음악은 1600년경에 시작되어 1750년 바흐의 죽음에 이르는 약 150년 동안의 음악에 적용되는데, 17세기에서 18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대를 음악사에서는 바로크(baroque)시대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 시대의 그림과 건축에서 엿볼 수 있듯이 풍부하고 고도로 장식적인 처리방법을 특징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크(baroque)라는 용어는 당시에 보석으로 많이 쓰인 <일그러진 모양의 진주, 또는 비뚤어진 진주>를 뜻하는 포루투칼어의 "barroco"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처음에는 균형감과 형식미를 존중하는 르네상스 미술에 대립된다고 보고 가치를 저하시키는 의미로 쓰여졌었다.
1600년 ~ 1750년의 기간은 르네상스의 뒤를 이어서 시민문화의 시대로 접어든 변화와 모험의 시대였으며, 유럽 각지에서는 근대 민주국가의 사조가 예기되면서부터 전제군주제가 강화되었고 ,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상충되는 조류사이에서 개인주의 관념이 촉진된 시기였다.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는 정치적 권위와 권력을 강조한 것으로 음악 자체보다는 무대장치나 의상이 강조되는 궁정 오페라, 중상주의 시대의 부산물인 상업 오페라, 그리고 중산층 오페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오페라가 성행했는데 루이 14세는 왕립음악원을 설립하는 등, 프랑스 오페라 중흥을 위해 대대적인 제도화 작업을 착수했다. 책임자로 륄리를 두었는데 이탈리아 오페라와 구분되는 프랑스식 오페라 양식을 개발하는 등, 루이 14세의 비호 아래 프랑스 전역의 음악생산과 소비를 한정, 통제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여러가지 악기가 현저하게 발달해 있었다는 사실을 묵과할 수 없다.
바로크시대의 개신교 문화는 성서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그 개성의 강조는 개인적인 풍토를 조장하여 바로크에서 낭만적 경향을 강화했다. 새로운 개인주의는 음악 작곡을 포함한 모든 활동에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모든 형식의 예술은 군주나 교회에 의해 강요되는 인습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대신, 세속에 대한 예술가의 개인적인 느낌을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와 헨델(Georg Fredrich Haendel, 1685-1759)은 개신교 정신에 기초를 두고 최상의 음악적 업적을 남겼는데, 종교개혁의 대담한 찬송의 선율들은 바흐의 심오한 정신적 예술관을 확충시켰으며, 헨델의 오라토리오들은 바로크시대의 윤리적 관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2. 바로크 음악의 특징
약 150년 동안의 바로크 시대에 있어 음악은 초기(1580-1630), 중기(1630-1680), 후기(1680-1750)의 3양식 시대를 거치면서 의미있는 변천을 겪었다. 악기들은 구조적으로 발달하여 충분한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고, 장조와 단조의 조성 체계가 완전히 채택되었는가 하면, 기악과 성악이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으며, 오페라가 등장하여 성황을 이루었고, 처음으로 일반 청중을 위한 연주회가 개설되었다. 전반적으로는 음악 창작을 포함한 모든 예술활동에까지 새로운 개인주의가 뿌리를 박고 있었다. 따라서 바로크음악의 여러 주요한 경향 중에서도 기법적인 면을 고려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특성으로 간추릴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초기 바로크시대에 단순한 선율에 화음 반주를 붙이는 모노디(monody)의 발생과 그 영향에 따른 오페라의 출현이고, 둘째는, 건반악기 주자가 주어진 저음 위의 숫자에 의해 화음을 보충하여 나가는 숫자 붙은 베이스(figured bass) 혹은 밧소 콘티누오(basso continuo)의 기법이며, 세째는, 중세 교회선법으로부터 장조와 단조의 조성체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 밖의 특성으로는 연속적인 선율, 일정한 수준의 음향으로 움직이는 테라스식 강약(terraced dynamics), 베이스 성부에서 연속에서 반복되는 짧은 악구인 밧소 오스티나토(basso ostinato), 그리고 기교중시와 즉흥연주 등을 들 수 있다.
(1) 오페라의 출현
르네상스로부터 바로크의 변천과 함께 일어난 중대한 변화의 하나는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몇 개의 독립적 성부로 되는 다성적 짜임새로부터 하나의 선율이 중심이 되는 화성적 짜임새로의 구조적 변화였다. 성악에서 시작된 이 새로운 양식은 <모노디>라고 불리었는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노래>로서 한 사람의 성부와 기악 반주를 위한 음악이라는 뜻이다. 고도로 세련된 상태로, 다성음악은 바로크시대 전반에 걸쳐 지배적인 조직이었지만, 모노디 양식의 출현과 관련하여 1600년에 일어난 오페라의 발현은 모노디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바로크 이론가와 작곡가들은 가사를 음악의 지배자로 취급하였는데, 초기 모노디 음악가들은 가사의 이해를 방해한다는 점에서 다성음악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가사나 대본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모노디 음악을 창조해 낸 것이다.
16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는 르네상스 미술 활동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 있어서도 새 시대의 문을 여는 역할을 담당했다. 음악애호가인 바르디 백작(Giovanni Bardi,1534- 1612)의 저택에서는 시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르네상스 정신에 따라 고대 그리스의 무대예술 음악을 부활시키고자 협력하였다. 이 피렌체의 문필가, 화가, 음악가들의 모임을 <카 메라타(camerata)>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살롱(salon)>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구성원 중에는 천문학자 갈릴레오의 아버지인 빈첸쪼 갈릴레오(Vincenzo Galileo)를 비롯하여 야코포 페리(Jacopo Peri), 지울리오 캇치니(Giulio Caccini) 등의 작곡가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과감하게 모노디 양식을 채택하였다.
오페라는 르네상스의 정신의 훌륭한 결실이지만, 바로크시대에 있어서 오페라의 성립은 크게 두 가지 원천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추릴 수 있다. 그 하나는 이념과 사상의 측면에서 피렌체의 카 메라타 사람들이 인간성의 자유로운 표현과 고대 그리스를 모범으로 시, 연극, 음악등이 종합된 이른바 무대예술을 만들려고 의도하였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중세의 도덕극, 신비극, 수난곡과 같은 종교 생활과 관계되는 연극과 , 화려한 가면극, 목가극 등과 같은 세속적인 연극이 음악을 수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오페라는 1597년 시인인 리눗치니가 대본을 쓰고, 페리가 작곡한 모노디 양식의 << 다프네 - Dafne >>이지만, 그 악보는 대부분이 소실되어 전해져 있지 않다. 그 후 1600년 페리는 역시 리눗치니와 협력해서 고대 그리스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의 신화를 소재로 하여 << 에우리디체 _ Euridice >>를 작곡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남아 있는 최초의 오페라 문헌이 된다. 피렌체 사람들은 고대 연극을 통하여 단지 대사의 의미를 강화시키고 그 진행을 늦춘다는 목적을 위해 음악을 개입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표현 형태는 대사이면서 동시에 노래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에서의 중요한 사실은 오페라에 알맞은 낭송(recitativo)과 극적표현의 수법이 비로소 모습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미 한 성부를 악기의 화음반주에 의해 노래함으로써 독창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2) 숫자 붙은 베이스
바로크 시대의 <숫자 붙은 베이스>의 기법은 통주저음(through-bass), 혹은 <콘티누오(Continuo)>라고 하는데, 그것은 당시 음악가들이 기본적 화성에 익숙해져, 작곡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악보로 나타낼 경우 화음을 전부 기록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작곡가들은 요구되는 화성의 표시를 베이스 음의 위 또는 아래에 숫자를 써넣고, 실제로 화성을 채워서 상세하게 다듬는 일은 연주자에게 맡기 것이다. 숫자 붙은 베이스의 기법은 바로크시대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기 때문에 바로크시대를 흔히 <통주저음 시대>라고 흔히 일컫는다. 숫자가 붙은 베이스를 연주하려면 적어도 두 사람의 연주자를 요하는데, 한 사람은 첼로, 더블베이스, 또는 버순과 같은 저음악기로 베이스 선을 연주하고, 또 한 사람은 하프시코드나 오르간, 혹은 류트나 기타와 같은 화성적 악기로 화음을 채워 넣으면서 연주하는 것이다.
(3) 조성체계의 확립
후기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중세 교회선법으로부터 장조와 단조의 기능적 조성체계가 확립되었다. 음악이 성악적 대위법으로부터 기악적 화성으로 발전되면서, 그것은 화성적 체계의 단순화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장조와 단조의 조성이 확립되면서 중심을 둘러싼 특정의 기능 관계가 성립되었다.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들은 정지적 화음인 으뜸화음(tonic)과 활동적인 화음인 딸림화음 (dominant)사이의 대립을 이용하여 음악을 형성해 나가는 원리를 터득하였다. 따라서 기본조로부터 대조적인 조로 갔다가 다시 기본조로 돌아오는 움직임은 음악적 구조의 형성에 중요한 원리가 된 것이다(예를 들면, 1-5-1, 1-4-5-1, 1-4-1 등의 기본 화성 움직임). 장조와 단조라는 조성의 확립과 함께 이루어진 중요한 기술적 진보는, 근사치의 음정을 실용적으로 고르게 나눈 음률인 평균률이 이루어짐으로써 모든 장조와 단조를 건반악기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평균률은 작곡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화성적 가능성의 범위를 넓혔으며, 요한 세바스챤 바흐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각각 12개의 장조와 12개의 단조로 된 전주곡과 푸가로 된 2권의 <평균률 클라비어곡집>을 작곡하였다. 따라서, 장조와 단조의 조성 체계는 평균률에 의하여 드디어 융통성 있는 표현 수단이 된 것이다.
3.바로크시대의 음악가들
(1)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Claudio Monteverdi (1567~1643)
몬테베르디는 순수한 종교음악 창작과 오페라 운동을 위해 일생을 바친 거장이다. 악기의 고장 크레모나에서 태어난 만토바 시대를 거쳐 만년의 베네치아 시대에 이르는 동안, 몬테베르디는 공연음악으로서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기 위하여 온갖 정열을 바친 작곡가다. 그래서 오늘날 그의 이름은 오페라 운동의 시조격으로 추앙되며, 이러한 열정은 대부분 베네치아 시대에 활짝 피워졌다. 그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는 <오르페오>는 이후 무수한 작곡가들에 의해서 시도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채>의 원형으로서 음악사에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죽기 직전에 작곡한 <포페아의 대관>도 초기 오페라 작품으로서 귀중한 실험정신으로 가득 차있다. 종교음악이나 마드리갈 같은 분야에서도 작품을 남기고 있으나, 몬테베르디는 역시 오페라사적인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할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베네치아가 오페라 창작의 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도 몬테베르디가 이곳을 근거지로 활동한 결과다. 그는 결국 이 도시에서 죽어 여기에 묻힘으로써 영원한 베네치아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2)아르칸젤로 코렐리 Arcangello corelli (1653~1713)
비발디가 활동하기 직전에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을 이끌어 나간 최대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로, 17세기 이탈리아의 기악곡의 발달을 얘기할 때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가 코렐리다. 특히 바이올린이란 악기의 근대적인 주법과 작곡법을 정착시킨 장본인으로서 코렐리의 영향은 지대했으며, 그 영향을 받아 바로크 말기와 고전시대의 바이올린 음악이 크게 융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작곡법을 가장 극명하게 집약시킨 것이 12곡으로 되어 있는 바이올린 소나타집(작품5)이다. 이 작품집은 바흐 이전에 쓰여진 가장 뛰어나고 독창적인 바이올린 음악으로, 음악사에 혁혁한 빛을 던져준 걸작 중의 걸작이다. 그 중 끝 곡인 제12번인 <라 폴리아 변주곡>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이에 못지 않게 콘체르토 그로소 (합주협주곡)의 전형을 제시한 작품6도 코렐리가 이룩한 기악음악의 꽃이다. 이것은 협주곡이 점차 독주 협주곡으로 정착되기 시작하려는 무렵에 쓰여진 걸작들로서 코렐리의 음악적 결산을 총괄하는 한 부분이기도 하다. 만년에 로마에서 활동하다가 그곳에서 60세로 별세했다.
(3) 헨리 퍼셀 Henry Purcell (1659~1695)
17세기후반 영국의 바로크 음악을 이끈 최고의 음악가이다. 바로크뿐만 아니라 영국 음악사 전체를 통 털어 놓고 볼 때도 퍼셀만큼 뛰어난 작곡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36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그의 천재성이 다 피어나지도 못한 상태에서 꺽여져 버리고 만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퍼셀은 여러 장르에서 음악을 꽃피운 작곡가였다. 모든 음악작품들은 1680년부터 죽기까지 15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쓰여졌으며, 이 기간 동안에 작곡가로서의 퍼셀의 능력도 완전히 인정을 받아 영국의 대표적인 음악가로 자리를 잡았다. 그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오페라, 종교음악, 기악곡, 관현악곡 등 다방면에 걸쳐 주목할만 한 작품들을 남겨놓았다. 철저한 폴리포니를 사용한 풍부한 악상과 자유분방한 판타지의 추구는 독특한 바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퍼셀은 당시대의 선구자적인 길을 걸어간 작곡가로 평가된다. 특히 성악분야에서 퍼셀의 능력은 크게 돋보였는데 , 이와 같은 천재적인 작곡가를 영국은 지금까지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
(4) 안토니오 비발디 Antonio Vivaldi (1675~1741)
음악사에 있어서 바로크 시대가 차지하는 영역은 매우 다양하면서도 광범위하다. 이 모든 종합적인 요소들을 총체적으로 마무리 한 비발디의 이름은 곧 바로크 음악의 대표적인 표상이요, 모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비발디 없는 바로크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비발디는 그 직전에 활동한 코렐리의 바이올린 음악을 더욱 확대 발전시킨 공로자다. 그 자신이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여서 유럽 전역을 누비며 순회 연주 활동을 펼쳤고, 대부분의 연주곡들은 비발디 자신이 직접 작곡한 것이다. 비발디는 다양한 실험정신으로 협주곡의 양식을 극한적으로 추구해 나간 작곡자였다. 이러한 결과로 그는 600여곡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협주곡을 남겨 놓았는데, 그것들은 바흐나 헨델 같은 독일 바로크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오늘날 비발디는 주로 기악 작곡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가 활동한 당시에는 오페라와 종교음악 같은 성악곡에서도 훌륭한 걸작들을 남겨 그의 다재다능한 음악정신을 엿볼 수 있다. 화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말년을 고독과 가난으로 이어가다가 빈에서 빈궁하게 객사하고 말았다.
(5)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 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
마그데부르크에서 태어난 독일 바로크 시기의 대작곡가. 1701년에 법률학을 전공하기 위해 라이프찌히 대학에 입학했으나, 음악의 재능을 인정받아 노이에키르헤의 오르가니스트를 거쳐 1704년에 조라우의 프롬니쯔 백작의 악장, 1708년에 아이제나하의 합창장을 거쳐 악장이 되었다. 이 때 바흐와 친교를 맺고, 아들인 에마누엘 바흐의 대부가 되었다. 11년에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의 바르페서 교회의 악장이 되고, 이곳의 콜레기움 무지쿵을 위해 활동한 뒤, 21년에 함부르크로 옮겨 5개의 교회와 시의 음악 감독의 지위를 얻고, 작곡가로서 다방면에 걸쳐 활약했다. 텔레만은 당시 가장 유명한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 그 인기는 바흐나 헨델을 능가할 정도였으며, 또 방대한 수의 작품을 남긴 것으로서 기억된다. 작곡은 종교 음악뿐이 아니라, 오페라, 기악 등 모든 면에 걸쳤고, 작품량도 바흐와 헨델의 전 작품을 합친 것보다 많은 정력적인 것이었다. 종교 음악에서는 수난곡 46곡, 칸타타, 오라토리오 등이 있다. 또 40곡 남짓한 오페라를 썼다. 기악 작품에서는 관현악용 프랑스풍 서곡 600곡 이상 외, 다수의 협주곡, 실내악곡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3부로 된 《타펠 무지크(식탁 음악)》이 유명하다. 주요 작품으로는 수난곡《세상의 죄를 지고 죽으려는 예수》, 오라토리오《최후의 심판》, 오페라《핌피노네》,《타펠 무지크》등이 있다.
(6) 장 필립 라모 Jean Philippe Romeau (1683~1764)
디종 태생인 프랑스의 작곡가. 디종의 교회 오르가니스트의 아들로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으나, 처음에는 화성학과 작곡법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1701년에 이탈리아로 유학하고 돌아와, 고향과 각지의 오르가니스트로 있으면서, 1722년에 《화성론》의 명저를 써서 음악 이론가로 주목을 끌었다. 1723년부터는 무대용 소품을 작곡하다가, 수년 후에는 가극 작곡에 정력을 기울였다. 대표작은 《카스토르와 폴뤽스》, 《에베의 축제》, 《나바르의 공주》등으로, 프랑스 가극사상에 있어서 륄리의 후계자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음악적으로나 내용적으로도 륄리보다 충실하다. 클라브생 음악에 있어서는 《클라브생 모음곡집》등으로 쿠르랭과 함께 그 정점을 쌓아올린 중요한 작곡가로 손꼽힌다. 또 이론서 《화성론》에 의해 '근대 화성학의 아버지'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희가극)가 소개되었을 때, 이탈리아파의 루소와 논쟁한 것은 유명하다. 1745년에는 궁정 실내악 작곡가로 임명되었고, 만년에는 귀족으로 서품되었다. 작풍은 로코코적이나 바로크적인 깊이도 있다. 가극이나 발레에 중요한 작품을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가극 《우아한 인디아인들》,《카스토르와 폴뤽스》, 《에베의 축제》(- 이중에 탕부랭이 유명하다), 《나바르의 공주》, 《클라브생곡집》제1권, 제2권,《큐피》, 《환희》,《경박한 여인》,《암탉》등이 있다.
(7)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Georg Fridrich Handel (1685~1759)
바흐와 같은 해인 1685에 독일의 소도시 할레에서 태어난 헨델은 바흐보다 9년을 더 살면서 바로크 음악을 마무리 한 거장이다. 바흐가 평생 동안 단 한번도 독일 바깥을 나서지 않고 생애를 마쳤음에 비하여, 헨델은 거의 전 생애를 떠돌아 살다시피 하면서 유럽 전역을 그의 음악 무대로 살았다. 그가 중점을 둔 분야도 바흐와는 달리 무대 음악에 큰 비중을 두었으며, 만년에는 오라토리오 창작에 전념하여 <메시아>라는 거대하고도 영감에 가득찬 일대 걸작을 남길 수 있었다. 오라토리오 역시 헨델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는 철저하게 무대 음악을 추구한 바로크 작곡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악곡이나 관현악곡에 있어서의 헨델은 성악분야에 비하여 크게 중점을 두지 않았다. 다만 막간에 연주할 목적으로 쓰여졌던 합주 협주곡 같은데서 관현악법을 정확히 구사한 일례를 볼 수 있으나, 이와 같은 형태의 음악이 헨델의 본령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국은 그의 제2의 고국이 되어 죽어서도 유해가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영광을 입었다.
(8) 지우젭페 타르티니Giuseppe Tartini (1692~1770)
이탈리아의 피라노에서 태어난 작곡가이며 바이올린의 명인. 처음에 파도바의 대학에서 법률을 배웠으나, 그 사이에도 바이올린의 기교를 연마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타와의 결혼은 그녀의 보호자였던 추기경의 노여움을 사서, 아내와 함께 파도바에서 도망쳐서 방랑한 끝에 아시지의 수도원에 정착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음향학상의 문제를 연구하여, 바이올린의 구조를 개량하거나, 새로운 이론의 전개를 시도하기도 했다. 유명한 《악마의 트릴》이 작곡된 것도 이 때이다. 1721년에 파도바의 산 안토니오 예배당 관현악단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임명되고, 또 23년부터 25년에 걸쳐 뵈멘의 킨스키 백작의 초청으로 프라하에 체재하여, 궁정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파도바로 돌아간 그는 바이올린 학교를 창립하여, 각지에서 모여든 학생을 가르치면서, 음악 이론의 연구와 작곡에 힘쓰고, 틈을 내어 국내의 연주 여행에도 나섰다. 그러나 건강을 해쳐서 만년에는 작곡에만 전념했다. 연주법의 점에서는 코렐리의 흐름을 잇는 명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새로운 활 쓰기의 용법을 발명, 트릴 주법에 명인기를 발휘했다. 창작 활동은 1712년경부터 60년경까지의 약 50년간에 걸친다. 로코코적인 장식 과잉에서 출발하여, 차차로 청명 단순한 양식으로 향하면서, 실내 소나타, 협주곡, 신포니아 등 약 350곡의 작품을 썼으나, 거의 출판되어 있지 않고, 연주 기회도 별로 없다. 그러나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외에 교육자, 이론가로서도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에 기여한 업적이 크다. 주요 작품으로는 바이올린 소나타 《악마의 트릴》,150곡의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를 위한 소나타, 140곡의 합주 협주곡, 신포니아, 실내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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