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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성이씨 후손들이여 ! 원문보기 글쓴이: 東彦(23世)
[르포] 안동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체험
21세기 기업이 도산서원으로 달려가는 까닭은
⊙ 선비정신과 기업가정신은 공동체 의식이 接點
⊙ ‘敬’ 사상으로 타인을 배려했던 선비들을 본받아야
朴熙錫 月刊朝鮮 인턴기자
퇴계종택의 이근필 주손. 아시아신탁 직원들에게 ‘안동의 선비정신’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선비문화’에 관심을 갖는 기업이 늘고 있다. 이름 있는 기업들이 연이어 경북 안동의 (사)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원장 정관, 이사장 김병일, 이하 선비수련원)에 사원 교육을 맡기고 있다.
2009년에만 총 36회 1293명의 직장인이 선비수련원을 수료했다. KT, 국민은행, IBK기업은행, 인천국제공항공사, 코리안리 재보험, 한국남부발전….
선비수련원의 설립은 2001년 퇴계 탄생 500주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퇴계 후손들이 ‘선비문화’ 보급 방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비롯됐다. 당시 퇴계 종택(宗宅)에서 1억원을 출연했고, 경북 교육청에서 도산서원 부설 기관으로 승인했다.
대구교대 총장 출신인 정관(鄭灌) 선비수련원 원장은 “우리 민족의 전통과 미풍양속(美風良俗)이 변질되는 안타까운 상황을 보고 이를 개선하는 데 미력이나마 기여하고자 개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 원장은 “선비정신은 영국의 신사도, 미국의 개척자 정신을 뛰어넘는 우리의 대표적 정신문화 브랜드”라며 “‘절제’와 ‘배려’의 선비정신을 되살려 확산시키는 것이 선비수련원의 목표”라고 말했다.
2002년 교원 224명으로 시작하여 주로 공무원, 교사, 학생, 군인들을 상대로 교육을 해 왔다. 그러다가 2009년부터는 기업체에도 문을 열었다. 작년까지 교육받은 사람은 총 1만8000여 명. 올해는 더욱 늘어나 4월까지 기업체에서만 1000명 넘게 보낼 예정이라고 한다. 작년 같은 기간의 기업체 수련생보다 10배가 넘는다.
기업, 修己治人에서 새로운 문화 창출 방안 찾아
한국국학진흥원장을 겸임하고 있는 김병일 이사장.
사실 선비정신과 기업가정신은 어울리지 않는다. 선비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재물관을 가지고 있는 반면, 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업과 선비문화의 접점(接點)은 어디일까.
선비수련원 김병일(金炳日) 이사장의 설명이다.
“요즘 기업에서 강조하는 혁신은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팀워크를 중시하는데 이는 공동체 의식 없이는 불가능하지요. 이 부분이 선비정신과 통합니다. 최근의 금융 위기도 사욕(私欲)을 앞세운 결과입니다. 기업들이 수기치인(修己治人·몸과 마음을 닦은 후 공동체에 봉사하는 것)의 선비정신에서 새로운 기업문화 창출 방안을 찾고 있습니다.”
기자도 ‘선비정신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선비수련원이 있는 안동을 찾았다.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정도만 알고 있던 기자의 눈에 안동은 여느 시골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선비수련원에 가려고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는 금세 외지인임을 알아챘다. 그러더니 ‘퇴계 이황(李滉)’부터 ‘이육사(李陸史)’까지 40여 분 동안 거침없이 ‘안동의 인물’들에 대해 얘기했다.
선비수련원은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 내에 있었다. 도산서원과는 차로 5분 거리이다. 국학진흥원은 유교 관련 기록문화재들을 기탁(寄託)받아 안전하고 과학적으로 보존·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96년 3월에 설립됐다. 현재 선비수련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병일 전(前) 기획예산처 장관이 국학진흥원 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선비수련원은 현재 자체 교육시설이 없는 상태다. 국학진흥원과 시설이용에 관한 업무협약을 맺어 국학문화회관을 교육장소로 이용하고 있는데, 현재 9월 완공을 목표로 안동시 토계리 퇴계 종택 옆에 있는 땅에 자체 수련시설을 짓고 있다.
새 수련원은 5140m²(약 1555평)의 면적에 2층 한옥으로 짓고 있으며 약 50억원의 건설비가 출연됐다. 새 수련원에는 다례(茶禮), 전통제례(傳統祭禮)를 실습할 수 있는 다목적 체험관과 100명을 교육할 수 있는 강의실 등을 갖출 예정이며, 숙소 건물엔 방 20개를 마련, 80명이 한꺼번에 생활할 수 있게 할 예정이다.
기자가 도착했을 때 IBK기업은행 신입행원 200여 명이 2박3일간의 수련을 마치고 퇴소를 준비하고 있었고, 코리안리 재보험의 신입사원 20명은 이틀째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상태였다.
코리안리는 1963년 국영 재보험사로 설립된 이후 1978년 민영화돼, 현재 재보험업계에서는 세계 13위, 아시아 1위에 올라 있는 기업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신입사원 20명을 보내 교육시키고 있었다.
도착과 동시에 코리안리 신입사원들과 같이 강의를 들었다. 강사는 김창회 전(前) 의성도서관장이었다. 그는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선비정신과 직장예절’이라는 주제로 선비정신을 풀어갔다. 강의를 하는 노유(老儒)의 모습에 저절로 자세가 고쳐졌다.
김 전 도서관장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초년생들에게 선비들의 행적을 소개하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 것을 당부했다.
“요즘 사람들은 사유(四維)가 부족합니다. 사유란, 예의염치(禮義廉恥)입니다. 예의, 정의로운 마음, 청렴한 마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공동체의 기강을 유지하는 덕목입니다. 이 덕목들을 기르도록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선비문화 체험한 후 직원들 많이 달라져
선비체험을 하고 있는 직원들을 방문한 코리안리 박종원 사장.
강의가 끝난 후 ‘퇴계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즐겼다’는 정심투호(正心投壺) 놀이를 하러 국학문화회관 지하 강의실로 이동했다. 투호는 화살을 통에 넣는 놀이다. 코리안리의 신입사원들은 종일 딱딱한 강의를 듣다가 ‘놀이’라고 하니 휴식시간이라 여겼는지 환호를 했다.
하지만 권영길 연수부장은 “여기는 선비문화를 체험하는 곳”이라며 “선비답게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 달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모두 정좌(正坐)를 하고 정숙한 분위기에서 ‘놀이’를 진행했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가 보니 코리안리의 박종원(朴鍾元) 사장이 신입사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서울에서 3시간30분을 달려와 앉아 있었다. 박 사장은 코리안리가 선비수련원에 해마다 신입사원 연수를 맡기는 이유에 대해 “업무도 중요하지만 직원들이 집안에서 효부터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업가의 입에서 효(孝)얘기가 나오다니. 뜻밖이었다. 박 사장의 설명이다.
“효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부모는 자신의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항상 자식을 걱정하고, 희생할 각오가 돼 있는 분도 부모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부모에게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잘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부모에게 잘하는 사람이 조직에도 충성하고, 열심히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선비문화체험을 한 직원들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선비문화체험 교육을 받은 코리안리 신입사원들은 회사간부와 노조대표가 참석한 확대회의에 초청돼 차례로 소감 발표를 해 큰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박 사장은 참석자 전원에게 “부모님께 안부전화를 드리는 것부터 반드시 실천하자”고 제안했다.
박 사장은 “경영자의 의지와 신입사원들의 수련 경험이 합쳐져 긍정적인 분위기가 사내에 확산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경험으로 코리안리는 2009년에 이어 올해에도 ‘선비문화체험’을 신입사원 교육에 포함시켰다. 박 사장은 “이번 수련도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 복귀해서도 지속적인 피드백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로그램은 밤에도 계속됐다. 분임토의가 11시까지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선비정신 실천하기’라는 주제로 가정과 직장에서의 선비정신 실천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김병일 이사장은 “분임토의는 변화를 위한 공감대 형성과 자기성찰 과정”이라며 “실천과제는 앞으로 변화될 자신의 모습”이라고 소개했다. 기자는 김병일 이사장, 이광욱 부원장과 함께 각 분임을 방문해 토의상황을 지켜봤다.
선비문화 실천방안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주로 가정에서 어떻게 효를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토의했다. ‘한 달에 한 번씩 함께 외식하기’ ‘같이 장 보기’ 같은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 외 직장에서는 ‘전화 빨리 받기’ ‘지각하지 않기’ ‘부르면 얼굴 보고 대답하기’ 등의 의견도 오갔다.
분임토의 과정을 지켜본 김병일 이사장은 “여러분이 부모님께 뭘 해드린다고 말하는 것은 우월한 입장에서 베푼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부모님은 여러분께 다른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건강, 안위를 항상 걱정하고 계십니다. 효도를 하려면 그동안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 드렸거나 상처를 줬던 행동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늦잠을 자거나, 자기 방 청소를 안 하거나, 식사를 거르는 등 아주 기본적인 부분들부터 고쳐 나가야 합니다.”
“새삼 부모님의 마음이 느껴져”
코리안리의 한 수련생은 “어머니께 안동에 도착했다고 말씀드리니 제일 먼저 ‘비누는 있느냐’고 말씀하셨다”며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세심히 걱정하시는 부모 마음을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분임토의까지 마치니 피곤이 몰려왔다. 하지만 60~70대인 김 이사장과 이 부원장은 지친 기색이 없었다. 김 이사장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힘이 난다”고 말했다.
김병일 이사장은 경제기획원, 통계청, 조달청,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거쳐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냈다. 선비문화와는 별 인연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선비문화수련원의 이사장을 맡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학에서 사학(史學)을 전공해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은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퇴임 후 3년간 사서(四書)를 배웠습니다. 그러던 중 선비수련원에서 제게 이사장직을 제의해 왔습니다. 선비문화에 대해 특별히 아는 것이 없어서 사양했지만 계속해서 권유를 하기에 맡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부족한 점을 메우려고 선비문화체험을 직접 하기로 했는데 직접 참여를 하고 보니 너무나 좋았습니다. 뒤이어 저의 아내와 친지들도 참여하고서 ‘매우 유익한 경험’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제야 앞으로 제 할 일을 찾은 것 같아 무척 기뻤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선비수련원을 소개하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선비수련원의 아침은 활인심방(活人心方)이라는 운동으로 시작한다. 활인심방은 퇴계가 저술한 건강 의학서적이다. 책의 서문에는 “항상 모든 사람을 구하고, 사람의 생활을 건강하게 해 오래 살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이라고 나와 있다.
퇴계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책읽기를 좋아하고, 식사도 잊어가며 학문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 과정에서 건강이 많이 상해 몸에 병을 달고 살았지만 활인심방을 통해 당시로는 천수라 할 수 있는 70세까지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활인심방의 강사는 이동한(李東翰) 전(前) 충북대 사범대교수로, 퇴계 15대 종손인 고(故) 이동은씨의 친동생이다. 이 교수는 “현대인은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육체적으로 피곤해 각종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며 “활인심방 운동은 심신 조화적인 건강수련법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활인심방을 마치고 아침식사를 한 코리안리 수련생들의 수료식이 있었다. 수료식은 2박3일간의 교육프로그램을 통해서 깨달았던 자신의 잘못된 점과 실천방안을 정리해 최종적으로 발표하는 자리다. 한 발표자가 부모님께 쓴 편지를 읽을 때는 듣고 있던 몇몇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처음 ‘선비정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 와서 수련원 관계자 분들의 겸손한 언행을 보면서 살아 있는 ‘선비정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퇴계 종택을 방문했을 때는 선비가 옛날이야기가 아닌 제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배지연)
“2박3일 동안 교육받고 분임토의를 하는 동안 부모님께 소홀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의미 있는 반성의 시간이었습니다. 집에 돌아갔을 때 지금 느꼈던 것들을 잊지 않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신석중)
會長 이하 全 직원이 선비정신 들으러 와
아시아신탁 임직원들이 알묘(謁廟)를 하고 있다. 상덕사는 금녀(禁女)의 공간이었다. 2002년에 여성의 참배를 허용했다.
코리안리 신입사원들이 생활 속에서 효를 실천하고 직장생활을 열심히 할 것을 다짐하며 퇴소했다. 동시에 (주)아시아신탁에서 이영회 회장(전 한국수출입은행장)과 전 직원 80여 명이 입소했다. 입소식을 한 다음, 김병일 이사장의 <미래사회 엘리트가 되기 위한 마음가짐-선비정신>이란 강의가 있었다.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닙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선비정신’을 강조하느냐? 그것은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인간의 본성(本性)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고, 좋은 것은 자기가 가지려는 그 본성은 그대로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조상들은 궂은 일은 스스로 먼저 하고, 좋은 일은 남에게 양보했던 것입니다. 선우후락(先憂後樂)을 지켰습니다. 지금 우리는 물질적 풍요를 이뤘지만 조상이 물려준 좋은 정신문화를 잃어버려서 도덕적 해이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 문제에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 ‘선비정신’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수련생들은 ‘선비정신’이 와닿는 듯 끄덕였다.
다음날 아침 아시아신탁 직원들과 차로 5분 거리인 도산서원을 찾았다. 수련생들은 알묘례(謁廟禮)를 하기 위해 전교당(서원의 강당)으로 향했다. 알묘란 성균관, 향교, 서원 등에 모셔진 선현(先賢)의 위패를 뵙는 의식을 말한다. 수련생들은 전통 유생의 복장을 갖춰 입고, 퇴계의 위패가 모셔진 상덕사(尙德祠)에서 알묘 의식을 진행했다.
차가운 날씨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는 수련생도 있었지만 알묘 진행을 맡은 관리인은 “위패에 참배하는 것은 퇴계 선생을 본받겠다는 다짐”이라며 “경건할 것”을 당부했다.
“퇴계 성리학이 오늘날 일본의 기반”
퇴계는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해 ‘동방(東方)의 주자(朱子)’로 불렸고, 일본에서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다. 퇴계 유학은 정유재란 때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전남 영광(靈光) 출신의 유학자 강항(姜沆, 1567~1618)이 일본의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에게 전수하면서 일본에 퍼졌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원래 승려였지만, 강항에게 성리학을 배운 후 유학자가 됐다. 그는 당시 일본의 최고 실권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퇴계학을 강의해 그를 매료시켰다. 에도(江戶) 막부(幕府)는 약육강식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끝내고 안정기를 이끌어갈 통치이념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도쿄대 교수 아베 요시오(阿部吉雄)는 <퇴계와 일본유학>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퇴계의 사상을 평가한다.
“과거 한국의 유학자들 중 퇴계는 일본 메이지 유신의 교육지침을 확립하고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되었던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와 그 학파, 요코이 쇼오난(橫井小南)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들로부터 신(神)처럼 존경을 받았다. 이런 사실을 일본인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을 잊어버린다면 일본문화가 발 딛고 서 있는 기반을 완전히 도외시해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호사카 류지(保坂祐二·세종대 인문학부) 교수도 <조선선비와 일본사무라이>에서 “이황은 에도시대라는 평화시대를 창출한 사상적 원류가 됐다”고 평가했다.
알묘례를 마친 다음, 퇴계의 불천위(不遷位: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가 모셔진 종택으로 향했다. 현재의 퇴계 종택은 경상북도기념물로 지정돼 있지만 퇴계 당시의 가옥이 아니다. 현재 의 건물은 1907년 의병활동 당시 왜경(倭警)에 의해 화실(火失)된 옛 종택 터에 퇴계의 13대 종손인 하정공(霞汀公) 이충호(李忠鎬)가 1926~1929년에 새로 지은 것이며, 총 5동 34칸으로 구성돼 있다.
수련생 일행은 종택 오른편에 있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으로 들어갔다. 이 정자는 숙종 때 퇴계의 제자들이 지은 것이다. 1907년 이 건물도 불에 타 없어졌다가, 그 후 1926년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에서 도회(道會)를 열고 전국적으로 400여 명의 유림과 문중이 비용을 모아 현재의 건물로 중건(重建)하였다.
1년에 1만6000장씩 붓글씨를 쓰는 퇴계 종손
이 정자 안에는 여러 개의 현판(懸板)이 있다. 그중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이 있었는데 퇴계의 경사상(敬思想)과 도학(道學)이 이곳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자의 마루에 오르니 하얀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걸친 백발(白髮) 노인이 공수(拱手)를 하고 서 있었다. 찬 바람이 불었지만 그 꼿꼿함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선비 그대로였다. 퇴계 종택의 주손(胄孫·적자의 맏손자)인 이근필(李根必·79)씨였다.
퇴계의 16대 종손(宗孫)이지만 아직은 ‘주손’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작년 12월 101세의 나이로 작고(作故)한 15대 종손 이동은(李東恩)씨의 상(喪)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씨는 1958년부터 인천 제물포고 교사로 일했다. 종가(宗家)를 지키기 위해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와 도산초등학교장으로 재직했다.
이씨는 상중임에도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는 연방 “하찮은 말을 들으러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하다”며 허리를 숙였다. 30여 분 동안 이어진 그의 말은 종택의 연원(淵源)과 안동의 선비정신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씨는 효행(孝行)을 강조한 후 방문객들에게 봉투를 나눠줬다. 봉투 안에는 자신이 직접 쓴 ‘예인조복(譽人造福)’이란 글이 있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면 복이 온다’는 뜻이다. 이씨는 방문객들을 위해 1년에 1만6000장 정도 글을 쓴다.
김병일 이사장은 “주손은 7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매일 정좌(正坐)를 하며 40~50장의 글을 쓴다”고 말했다.
“제가 건강이 염려돼서 ‘인쇄를 하자’고 건의했지만 주손은 ‘늙어서 할 일이 뭐가 있느냐. 누추한 곳에 찾아오시는 손님들에게 인쇄물을 나눠주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며 아직도 수필(手筆)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김 이사장은 “자신을 낮추는 ‘경(敬)사상’을 체감하기 위해 퇴계 종택을 방문하는 것”이라며 “수련생들의 후기(後記)를 보면 종택 방문 후에 깨닫는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근필씨의 배웅을 뒤로 하고 이육사문학관으로 향했다.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입구에 위치한 이육사문학관은 이육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04년에 건립됐다. 7603m²(2300평)의 대지에 647m²(196평)의 문학관이 있고, 뒤편에는 육사의 생가(生家)인 육우당(六友堂)이 있다.
2층 세미나실에 올라가니, 육사의 딸인 이옥비(李沃非·69)씨가 있었다. 이씨는 육사가 37세에 낳은 유일한 직계혈족이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이옥비씨는 1999년 남편과 사별한 후 일본에 가서 일본 사람들에게 꽃꽂이와 김치 담그는 법, 궁중요리 등을 가르쳤다. 3년 전 귀국한 이씨는 현재 육사문학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육사 관련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제가 100일 때 아버지가 직접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비옥할 옥(沃)에 아닐 비(非)인데, ‘소박하게 살고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뜻을 담았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이름처럼 살려면 멀었습니다.”
이씨가 4세 때 육사는 중국 베이징에서 옥사(獄死)했다. 이씨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면서 “아이보리색 양복을 즐겨 입으신 멋쟁이라는 것만 언뜻 기억이 난다”고 했다.
육사와 관련된 일화를 설명하던 그는 “문학관에 있으면서 아버지를 더욱 가까이 느끼고 있다”며 “요즘에는 누구보다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라가 위급할 때 떨쳐 일어서는것이 진정한 선비정신
안동은 이육사를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독립운동과 관련한 훈포장자만 해도 326명으로 전국 시군 평균수치의 10배가 넘을 정도로 많다고 한다. 퇴계 묘소 입구에 있는 하계리에서만 국가가 표창한 독립유공자가 25명이나 된다.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은 안동 고성 이씨 종손이다. 당시에 종손이 종택, 사당을 버리고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석주는 조국독립을 위해 안동을 떠나면서 “나라가 없는데 사당의 신주가 무슨 소용이냐”며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었다고 한다.
김병일 이사장은 “유인식(柳寅植) 선생과 김동삼(金東三) 선생 등이 모두 안동 명가 출신인데 나라가 위급할 때 목숨을 걸고 떨쳐 일어서는 것이 진정한 선비정신”이라고 말했다.
“콩나물을 기를 때 물을 부으면 그냥 밑으로 흘러내립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콩나물은 쑥 자라 있습니다. 지금은 선비정신이 겨우 명맥을 잇고 있는 상황이지만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이상 지속해 나간다면 우리 사회에 선비정신이 차츰 함양되리라 믿습니다.”⊙
<월간조선 2010년 0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