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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차마 말 못해]
1.
덜덜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겨우겨우 꾹꾹 번호를 누른다.
손가락을 따라 옷 소매자락으로 시선을 돌리면 젖은 옷에서 물방울이 뚝뚝.
습기 찬 공중전화 박스에 가까스로 기대고 서 있는 이 사람은, 그러니까 서지훈은.
비를 잔뜩 맞은 채로 방금 실연 당했다.
-여보세요
“… …”
-여보세요?
“… …”
-여보세… …서지훈?
“정석아…”
-어…임마, 전화를 걸었으면 말을 해야지! 웬 전화야?
“또…”
뭐라고 말을 하려던 지훈의 입술이 한참 씰룩이다 결국 ‘으아아앙’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어 수화기 건너편에서 정석이 당황한 듯 버벅대는 소리가 들리고, 등 뒤에선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래야 정석이 조금이나마 덜 당황할텐데…
그렇게 생각함에도 밀려오는 서러움에 지훈은 더욱 크게 울기 시작했다.
-그,그러니까…또?
“정석아아- 흐아아앙 또, 흑, 아아…흐흐흑 엣취! 흑 가방, 흐흑… 말…”
-지금 갈 테니까… 가만히 있어. 어? 지금 간다!
“끊지마아- 끊지마아아아아-”
-야, 나는 상관없는데 너 공중전화…
아니나 다를까.
공중전화라서 금방 전화가 끊길 거라는 정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뚝 목소리가 끊긴다.
전화가 끊기자 벙해진 눈으로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 바라보던 지훈은 조금 전에 질 새라 더욱 서럽게 울어 재끼기 시작했다.
“흐아아아- 박정서억-”
이젠 공중전화 박스에 예의상으로나 남아있는 긴급통화 버튼을 꾹꾹 누르면서 펑펑 우는 비에 젖은 서지훈은-
…조금 전 대화에서 봤다시피 오늘도 ‘또’ 차였다.
2.
“너 생각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어…뭐?”
“아무리 비가 와도 그렇지, 사람을 한시간이나 기다리게 해?”
“…무슨…”
“그래, 그 길 한번 건너는 게 그렇게 싫었냐? 넌 비도 맞으면 안되는 사람이야?”
자신보다 한참이나 큰 그를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는 지훈의 얼굴에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손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뜨거울 정도로 우릿한 얼굴 한 쪽의 고통에 지훈은 고개가 비틀어진 그대로 굳을 수 밖에 없었다.
“…왜…?”
“씨발, 꺼져! 사내새끼가 좀 곱상해서 재미 좀 볼라 했더니… 별 또라이 같은 게…”
“뭐,뭐? 무슨 소리야?”
“사람 말귀를 왜 못 알아 들어? 안 그래도 니 하는 족족 마음에 안 들었는데… 헤어지자는 말이야, 호모 새끼야!”
지훈이 자신의 팔을 잡자 더러운 것이라도 털어내듯 그는 확 지훈을 밀쳤다.
젖은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어이없는 나머지 한숨조차 내쉬지 못하는 지훈을 그렇게 둔 채로 빗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남은 것은 와중에도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 한 방울과 욱신대는 얼굴의 고통, 그리고 수군대로 지훈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
생각나는 사람은 정석 외엔 없다.
*
“그 사람은 1시간이구…난 더 오래야…”
“… …”
“왜…내가 비 맞기를 싫어한다는거야…”
무릎사이에 고개를 묻은 채로 훌쩍이는 지훈 옆에 서서 우산을 받쳐 든 정석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어찌나 세게 따귀를 맞았으면 입가가 부어버렸는지 보자마자 헉 하고 놀라버렸다.
가뜩이나 비에 젖은 바람에 옷이 착 붙어 마른 몸이 드러나 버려서, 서지훈은 한도 없이 불쌍해 보인다.
“…또 오펠리 ‘앞에서’ 만나자고 한 거야?”
대답은 않고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지훈의 옆에 또 한숨을 쉬며 쪼그려 앉는다.
아직도 공중전화 박스 앞에 있는 이 두 사람, 쪼그려 앉기엔 우산이 좀 좁다.
“말 했지, 내가.”
그럼에도 어깨는 누구 하나 젖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지훈의 어깨 위로 올라간 정석의 팔이 조금 힘주어 둘이 밀착했기 때문에.
지훈이 차이거나 고백을 거절 당할 때면 언제나 이 공중전화 박스에 와 정석에게 전화했고 비가 오든 날이 좋든 언제나 이런 자세 였기 때문에 이젠 익숙하지 싶다.
“다른 사람들은 ‘오펠리 앞’이라고 하면 가게 문 앞에서 기다린단 말이야… 너 처럼 ‘건너편’에서 기다리지 않아.”
“하지만…하지만 내가 ‘앞’이라고 했어…”
“그 ‘앞’은 문 앞인 게 좀 더 일반적인거야.”
어느 새 자연스럽게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오는 지훈을 토닥토닥 손으로 위로하며 우산을 좀 더 지훈 쪽으로 기울였다.
지훈은 말 없이 그저 작은 훌쩍임과 함께 멋적은 손장난을 칠 뿐이었다.
꽤 오랜 시절부터 친구인 지훈은- 정석에게 조금 각별한 녀석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친구라기 보단 연인이고 싶은 사람. 좋아하는 사람.
지훈이 스트레이트인 것은 아니고 사춘기 시절 정석이 지훈을 보고 조금씩 가슴이 뛸 그 무렵 불쑥 커밍아웃을 했다.
그렇다고 부모님과 지인들에게 ‘나 동성애자에요’ 라고 밝힌 것은 아니고, 그저 가장 친하고 자신을 받아줄거라 생각된 듯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어디서 마시고 와서는 정석에게 메달려 ‘난 남자가 좋아!’ 라고 소리친 게 전부지만은.
…그리고 그 후부터는 계속 실연이다.
몇 년 째인지, 그리고 몇 번째인지 세는 것도 지친다.
또 언제나 이럴 때면 정석에게 이 공중전화 박스에 와서 전화를 걸며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을 배열했다.
아까 배열한 단어는 ‘또’ ‘가방’ ‘말’.
지훈의 문제점이다. 배열안되는 단어들.
지훈이 어디가 딱히 모자란다던가, 사고능력이 부족하다던가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말주변이 없어 뭐라고 표현을 못하는 것 뿐이다.
단적인 예로, 오늘 지훈이 차이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남자는 이미 지훈과 헤어지고 싶어한 눈치였지만- 그 ‘오펠리 앞에서’를 들 수 있다.
지훈은 먼저 그와 약속을 잡을 때 ‘오펠리 앞에서 만나자’라고 했고, 남자는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대로 오펠리 앞, 말 그대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발상 특이한 서지훈은 오펠리의 건너편에 서서 기다렸고.
아마 비오는 날 1시간동안 기다린 남자는 지훈이 비가 맞기 싫어 맞은 편 건물 처마밑에 있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차인 이유는 90%가 여기 있다.
그런 지훈이 매번 정석을 찾는 것은 커밍아웃을 한 유일한 상대이기도 하고.
“먹어. 식기전에.”
이젠 말하기도 전에 먼저 따뜻한 캔커피를 건네는 친구이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캔커피를 받아들고 작게 고개를 주억이는 것이 결코 캔커피가 성가신데 억지로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서지훈 나름의 굉장히 고마운 표현이란 것을 알고 있는 박정석이기 때문에.
“잘래…”
“오늘 부모님 계셔?”
“아니.”
“가자.”
지훈을 일으킨 정석의 걸음은 아마도 자신의 집을 향할 것이다.
혼자 집에서 자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는 게 서지훈의 지론이었으니까.
3.
“뭐 먹을래?”
“볶음밥.”
벌러덩 드러누워 셔츠 단추를 세개나 풀고 뒹굴뒹굴 하기 시작하는 지훈은 정석에게 충분히 위험수위다.
괜히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오늘은 대체 무슨 볶음밥일까… 하고 고민한다.
볶음밥은 많다. 할 수 있는 것도 많고.
김치볶음밥 참치볶음밥 치즈볶음밥 야채볶음밥 햄볶음밥 피자볶음밥
지훈이 말하는 볶음밥이 뭔지 정석은 후라이팬을 들고 잠시 고개를 갸웃 했다.
“볶음밥은…”
“… …”
“볶음밥은 미워.”
아. 김치볶음밥이구나. 서지훈은 매운 음식은 밉다고 했으니까.(밉다면서도 먹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석은 피식 웃으면서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도 죄다 서지훈 취향의 음식이다.
이유야 뻔하다. 언제나 지훈이 정석의 집에 신세를 졌고, 원채 밥을 챙겨먹는 성격이 아닌 정석은 지훈을 위한 음식이나 사다 놓을 뿐이다.
“나야 괜찮지만.”
“응?”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 듣는단 말이야. 내가 참치 볶음밥 만들었으면 어쩔 뻔 했어?”
“…정석이 볶음밥.”
저게 졸린가. 왜 또 헛소리야…
뒤를 돌아보니 쇼파 위에 발을 올려놓고 머리는 땅에 한 채로 자신을 보고 있는 다소 무서운(?) 지훈의 모습인지라 잠시 어깨가 움찔 한다.
안 그래도 ‘정석이 볶음밥’ 이라는 말도 오싹하거늘…
“가방은 어쩌다 잃어버렸어? 계속 매고 있었을 거 아냐.”
아까 울면서 했던 단어들 중 하나인 ‘가방’은 아마 잃어버렸다는 뜻일거다.
손에 줄곧 없었으니까.
“뺏겼어…”
“뭐? 누구한테?”
“소매치기.”
“으와- 서지훈 가지가지 한다.”
괜히 혼자 열받아서 정석은 탕탕대며 김치를 썰었다.
칼로 내려칠 때마다 빨간 김치국물이 뚝뚝-
탕탕 소리에 맞춰 지훈의 눈썹도 위아래로 움직인다.
“그 사람하고 키스 안했다.”
“…응. 먹어라.”
“데이트만 했어.”
“응.”
“정석아, 너랑도 키스 안했다.”
볶음밥을 가지고 밥상을 앞에 놓자 발딱 일어나서 숟가락을 들고 마악 한입을 먹으려고 하더니…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 사람하고도, 박정석하고도 키스하지 않았다고.
정석은 언제나와 같이 건성으로 응응 하고 대답했다.
서지훈은 실연당한 날이면 언제나 ‘난 그 사람하고 키스 안했고, 너 하고도 안했어. 데이트만 했어.’ 라는 아리송한 말을 하곤 했다.
뭐 언제나 아리송한 말과 표정을 짓는 서지훈이니 그닥 신경쓰진 않지만…
“그래- 알았으니까 밥이나 먹어.”
“야아.”
평소 같으면 부리지도 않을 땡깡도 부린다.
이건 조금 예외사항인가…?
“아, 왜?”
“…왜 그래?”
왜 그러냐고 물을 사람은 정석인데, 지훈은 살짝 인상마저 찌푸리고 묻는다.
서지훈이 차인 날 울거나 혼자서 피식피식 웃을 때를 제외하면 표정은 거의 없는데 오늘따라 정말 ‘유난히’다.
“무슨 소리야?”
“좋아해.”
“무…뭐?”
“좋아해.”
이젠 어깨에 손까지 올리고 진지하게 말하는 지훈 덕분에, 정석은 얼굴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게 뭐지? 이거…고백이야?
머리를 빙빙 돌고 귓가에서는 지훈의 ‘좋아해’만 메아리 친다. 충격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까 차였다는 전화 통화 때보다 더 어버버 거리며 정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화 풀어.”
…지훈이 이 말을 하기 전까지는.
좋아한다는 말은 나름의 애교인 것이다.
그러니까 애교라기 보다는, 입바른 소리랄까.
보통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야~ 박정석 임마 내가 너 믿고 니가 제일 좋으니까 이런 일도 얘기하고 그러는거지- 속 좁게 삐지냐?’ 인 이 문장이, 서지훈에겐 ‘좋아하니까 화 풀어’ 따위로나 줄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그 순간이었다. 정석이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은.
아마도 지훈에게 화났다기 보다는 지훈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놀라고 순간 황홀경에 빠져버린 자신이 실망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들고 있던 숟가락을 딱 소리나게 내려 놓으며 일어난다.
“박정석?”
“내가 너 안 좋아하면 화내도 되는거지?”
“…너 싫어? 내가 싫어?”
그럴 리 없다.
너무너무 좋아해서, 친구의 이름으로 서는 것도 이젠 힘들 정도로…
그냥 친구 사이에도 할 수 있는 ‘좋아해’라는 말에도 이렇게 들뜨고 그런 자신이 화가 날 정도로 지훈을 좋아한다.
아니, 이 것은 사랑임을 이미 알고 있다.
“난…남자 안 좋아해.”
“… …”
“그냥 네가 친구니까. 그러니까 옆에 있는거지 사실 남자 사귀고 그러는 사람…인정못해.”
이 것은 정석 자신에게도 지훈에게도 거짓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입은 멋대로 나불나불.
마음은 아닌데 말을 비뚤게 나가는 것. 지훈이나 자신이나 이 점에서는 같다.
“그럼 내가 왜…”
“… …”
“왜…키스 안했는데…”
아까 겨우 그쳤던 눈물이 금새 눈가에 차오른다.
지훈이 눈물이 많은 타입은 아닌데, 유난히 이런 일에는 민감해서는 훌쩍이곤 한다.
가슴이 아픈 것은 가책이다.
언제나 지훈의 눈물을 닦아주었던 자신이 결국에는 울려버렸다는, 하나의 가책 때문에 아픈 것이다.
“…그리고…난 딱 부러지게 말하는 사람이 좋아. 그렇게 사람 헷갈리고 말 한마디에 고민하게 만들고…”
말 한마디에 심장을 들었다 놨다하고.
“그러는 거 지금까지 정말 힘들었거든. 고쳐줬으면 해. 줄곧 말했는데 네가 안 들었잖아.”
“말하면…아파…”
“… …”
“지금처럼…아플거야…”
숟가락 끝을 입에 물고 있던 지훈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림과 동시에 맺혀있던 눈물방울이 결국에는 뚝 떨어졌다.
곧 어깨가 들썩이고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정석과 같이 발딱 일어난다.
“집에…엄마아빠 없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휭 하니 현관으로 가 신발을 꺾어 신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린다.
남은 건 아직도 옅은 지글대는 소리가 나는 김치 볶음밥.
비에 젖은 채로 베란다에 있는 지훈의 옷.
우산도 가지고 나가지 않았는데…
엄마 아빠 없다는 말, 붙잡아 달라는 말이란 건 알고 있는데…
모두 알고 있음에도 정석은 자리에 주저 앉았다.
힘들다는 말은 사실이다. 어느 짝사랑인들 힘들지 않겠는가.
하물며 친구를, 그 것도 남자를 사랑하는데… 아직은 어리다는 말이 어울리는 청년 박정석은 충분히 지쳤다.
…어떤 말을 하든 아픈 것은 서지훈이 아니라 박정석이다.
4.
너 요즘 지훈이랑 도통 안 다닌다?
이 말만 일주일 째.
어딜가든 항상 옆에 끼고 다녀서인지, 사람들은 요즘 혼자 다니는 정석만 보면 그 말 뿐이다.
‘언제 지훈이랑 같이 안 온 적 있나요~’ 라고 웃으며 너스레를 떨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응’ 하고 대답한다.
…그랬었나. 그렇게 붙어다녔었나.
몇 년간 지훈과 단 한번의 트러블이 없었느냐 하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지훈의 성격상 갑자기 말도 없이 연락을 끊을 때도 있었고, 괜히 정석 혼자 이건 자존심이다 어쩌구 싸운 다음날 지훈을 찾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결국 그 다음날 먼저 찾아갔지만)
연애도 아닌데 뭘 그렇게 밀고 당겼는지 어이 없기도 하지만.
일주일 이상 이렇게 연락을 않은 것도 처음이다.
사흘 째되던 날부터 더럭 겁이 들더니 막상 일주일이 넘고 나자 담담해진다.
상처가 자꾸 쌓이다 그 원인이 눈 앞에 안 보이니 딱지라도 생긴 듯.
이따금 자기 전 아직도 베란다에 있는 지훈의 옷이 눈에 밟힐 때 빼면 가슴이 아픈 일이 없다.
…옷 때문에 집에 가기 싫다.
“야, 정석아…”
“어?”
“이거 지훈이 만났었는데…전해주래…”
과 동기가 수업시간에 속삭이며 준 것은 쪽지였다.
새삼 연락한번 없는 건가… 하고 섭섭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는데- 그러고보니 서지훈.
말이 제대로 안 나온다는 걸 사실 본인도 알고 있기에 대화하는 거라던가, 전화통화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문자도 안 보내냐? 하고 투덜대고 있었는데.
…가방 소매치기 당했을 때 핸드폰도 잃어버렸겠구나.
설마 자신과 연락이 되는 동기를 찾아 캠퍼스를 헤매기라도 했을까?
충분히 그 것도 가능한 녀석인데.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주는 교수를 힐끔 보고 정석은 손을 아래로 내려 쪽지를 폈다.
-오늘 10시에 오펠리 앞에서 만나
그래, 까짓거 화해하면 되는거다.
쪽지가 구겨지도록 주먹을 꽉 쥐고는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9시 45분.
10분 후면 강의가 끝날 것이고 죽어라 뛰면 10시에 맞춰 오펠리 앞에 갈 수 있다.
그 다음엔? 만나서 뭐하지?
카페에 들어가서 지훈은 아이스크림, 자신은 커피를 먹으면서 화해하는거다.
그래 내가 먼저 눈 딱 감고 사과하면 안 받아줄 서지훈이 아니다.
호모를 경멸하는 게 아니라고, 그 날 화가 나서 말이 갑자기 나온 것 뿐이라고…
비도 오는데 집에 잘 들어갔느냐고, 혼자 집에서 잤는데 안 무서웠냐고 미안하다고.
그래그래 그 말 한마디면 된다. 왜 혼자 괜히 자존심을 세웠을까… 때로는 이렇게 먼저 화해하고자 숙이고 들어올 줄 아는 녀석인데…
…한없이 여리고 사랑스러운 녀석인 것을.
*
10시 반.
11시 반.
12시.
들고있던 아이스크림은 봉지 채로 녹아버렸다.
안에서 액체가 되버려 흐물흐물해진 아이스크림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는 혹시나 하고 핸드폰을 확인한다.
3분 전에 확인했듯이, 전화도 문자도 없었다.
…혹시나 오펠리 문 앞에서 기다리는 거냐고, 서지훈에게 오펠리 앞이란 건너편인 걸 모르는 거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정석은 가차없이 주먹을 날려줄 작정이었다.
세상에서 서지훈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박정석이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정석은 이미 오펠리 건너편에 서 있었다. 10시 반부터, 12시 까지.
덜렁 거리고 말도 잘 못하는 서지훈이지만…
그래도 약속을 어긴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하물며 자신이 스스로 한 약속 아니던가.
이것이야 말로 정석을 물먹인 것이나 다름없다.
설마 30분을 못 기다렸을까?
강의가 늦게끝나 버린 것이 정석의 죄는 아니다.
30분을 기다리지 못했을까…?
혹여나 자신이 늦은 새에 가버렸나 싶어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계속해서 화가 난다.
핸드폰에 전화를 해 보지만 안 받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엔 지훈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정석입니다…”
-어머, 정석아- 오랜만이다, 반갑다 얘… 그래, 잘 지내지?
“네… 자주 못 찾아뵈서 죄송해요.”
-아유 죄송은 무슨…맨날 우리 지훈이가 신세지는데… 근데 무슨 일이니? 지훈이는 아까 너 만난다고 나갔는데
“…아직…안 들어 왔어요?”
-아직 안 들어오다니? 헤어졌어?
“아뇨… 약속 시간이 어긋나서 못 만났거든요.”
-어제도 그러더니 또? 하여간 정석이는 대학생이라 바쁘구나.
…어제라니?
“네? 어제요?”
-응, 지훈이랑 어제 약속 없었니? 어제도 나가선 늦게야 들어오던데… 얘가 어딜 싸돌아 다니는거야…
그 다음부턴 아예 통화 내용조차 가물가물 하다.
뭐라고 안부를 묻고, 서지훈이 어디에 갔을 것 같다- 그런 이야기들을 하긴 했는데…
끊고나니 기억에 아예 없는 듯 싶다.
멍하니 서 있다가 다급하게 핸드폰 플립을 열어 쪽지를 열어준 과동기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동민아?”
-어어… 정석아, 내가 지금 통화하기가 곤란한데…
“하나만 물어볼게! 너 지훈이한테 쪽지 언제 받았어?”
-어? 어? 어제…오전…쯤? 어제 너 못만나서 못 전해 줬…
그 다음은 필요도 없다.
플립을 닫자마자 주춤주춤대던 발걸음이 신호등 앞으로 뛴다.
약속은 어제였을 거다.
지훈은 어제 10시에 나와 기다렸던 것이고…
그럼 오늘은…?
“…공…공중전화!”
지훈이 가장 즐겨찾는 곳이야 그 곳밖에 더 있으랴.
신호가 바뀌자마자 정석은 달려나갔다.
오펠리 앞을 지나쳐.
5.
“어디로 갈까요?”
“…자곡동요… 자곡동 현신타워요.”
밖은 벌써 어둡다.
1시부터 6시.
공중전화 앞에서 기다렸지만 지훈은 없었다.
…녀석이 공중전화 말고 갈 곳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다.
혹시나 그 어리한 성격에 길이라도 잃은 건 아닌지 괜히 어린애에게나 할 걱정을 하며 고개를 푹 숙인다.
걱정으로 한없이 가슴이 뛴다. 그럼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어딨는지도 알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다. 이젠 가장 잘 아는 사람조차 되지 못하는 건가…
한숨과 함께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오펠리 간판이 눈을 당겼다.
하필이면 오펠리 앞에 신호가 걸려서…
괜히 욱신대는 가슴에 눈을 내리깐…
“어…?”
눈이 틀리지 않다면.
혹은 환상이 아니라면.
“아,아저씨…아저씨 저 여기서 세워 주세요!!”
급한대로 천원짜리 다섯장을 던지곤 차에서 내렸다.
분명하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건 오펠리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지훈이었다.
“…지…훈아…”
“… …”
“서지훈…”
천천히 고개를 든 지훈은 우는 표정도, 그렇다고 지친 표정도 없이 여느때와 같은 무표정일 뿐이었다.
그럼에도…그럼에도 안타깝다. 설마 녀석, 오펠리 앞에 있을 줄은…
“왜…불러…”
왜 이제왔어… 나 많이 기다렸는데… 나 많이 창피하고 힘들었는데…
“쪼,쪽지 오늘 받았어. 어제 동민이 못 만났었는데…그러니까… 우선 들어가자. 응? 일어나…”
“그럴 것 같아서…”
“… …”
“기다렸어…”
쪽지의 ‘오늘’을 혹시나 오해할까봐…
쪽지를 언제 받을지 몰라서…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나와서 기다렸어.
“니가…말 똑바로 하라고 해서…”
…
“그래서 일부터 오펠리 앞에서 기다렸는데…”
‘건너편’이 아니었어. 문 앞에서 기다렸단 말이야.
“10시…때문에…지금까지 있었는데…”
아침 10시일지 저녁 10시일지 네가 헷갈릴까봐 저녁 10시까지 기다리려고 했어.
어제도 안나왔지만… 오늘도 기다렸어… 지금까지 기다렸어…
“볶음밥이면 다 좋아…”
네가 해준 거라면 뭐든 좋아.
내가 먹고 싶은 김치볶음밥이든, 네가 좋아하는 참치볶음밥이든…난 어느 것이든 다 좋아.
“말하면 아파…”
이걸 말하면…너무 아플 것 같아…
네가 그랬잖아. 남자가 좋은 사람은 싫다고…
그래서 너무 아플 것 같아서… 말 못했어…
“사랑…한다고 말하면…너무 아플까봐…”
“…하…”
“그래서 말 못했어…”
그래서…그래서…
니가 너무 좋은데…
“내가 왜 키스를 안했게.”
“… …”
“하려고 하면…생각나.”
네가 자꾸 생각이 나.
매일 공중전화 앞에서 날 안아주던 네가, 볶음밥을 만들어주던 네가, 이렇듯 내 앞에 서 있는 네가. 자꾸자꾸 생각이 났어.
“정석아…나…나 너무 좋아…네가 너무…좋아…”
이어 고개숙이려는 지훈을 정석이 일으켰다.
…아마도 지금 들은 것은 고백이다.
자신이 먼저 할까말까 고민하고 결국에는 가슴 속에 묻어뒀던 고백.
가슴 벅차게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단 한가지 방법.
언제나 자신의 의미대로 말을 해가던 서지훈이, 먼저 고백했다. 박정석을 좋아한다고.
“지훈아…”
“화 내지 마… 나…나 정말 미안하니까…”
“그게 아냐…지훈아 그게 아니라…”
화낼 일도, 서지훈이 미안한 일도 아니다.
‘나도’라고 말하려던 정석의 입술이 어느 순간 딱 다물어졌다.
그리고 양 손으로 지훈의 팔을 잡은 그대로, 그 입술 위로 머문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차마 말 못해.
혹여나 그 어떤 말이든 오해할까봐…
내 마음이 얼마나 뜨거운지 차마 말 못해…
그래서 정석을 말 없이, 지훈의 입술 위로 키스를 건넸다.
나도 너무 사랑한다고.
서지훈을 알아주는 사람은 박정석 밖에 없다.
차마 말못하는 그 사랑을 알아주는 사람은.
귓가로 사람들의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자신의 가슴이 얼마나 뛰는지 지훈에게 말로 못다할 것 같아, 정석은 꽉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으로 서로의 심장박동이 느껴지자 그제야 빙그레 미소가 띄워졌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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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랜만에...TT;
So1 스타리그 두 선수 이겼겠다 에헤라 디야 메인도 정훈이구나~ 얼씨구 좃쿠나!
하고 날려썼스빈다...
서지훈 총수제는 이주째 띵까먹고 어허허-_-;;
죄송합니다.TT ㅣㅏ너리ㅏㅁ넉;ㅣㅏㅁ너기ㅏ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