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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시민단체.여성.지방관련 스크랩 삼성그룹 혼맥도
安同洙(俊洙) 추천 0 조회 277 08.04.21 23: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위적인 결혼에 의한 혼맥보다 사돈의 사돈으로 연결된 혼맥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재벌로 삼성그룹을 꼽는 데 주저하거나 이견을 내놓을 이들은 아무도 없다. 90년대말까지 매출액 기준으로 수위를 차지하며 재계를 이끌었던 현대그룹의 몰락 이후 삼성그룹은 2000년 1위 자리를 탈환하며 재계가 아닌 한국경제를 이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그룹을 빼놓고선 한국경제 자체를 논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방대한 거미줄 혼맥도

그룹의 덩치도 덩치지만 삼성이 보유하고 있는 각종 유무형의 자산과 파워는 이미 국내를 넘어서 세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삼성’이라는 브랜드는 국제적인 상표가 되어 있는 한편 세계 어느 곳에서도 삼성의 흔적을 찾는 게 어렵지 않다. 삼성의 독주란 재계의 시샘어린 말이 나올만 하다.


세계 지도를 놓고 대한민국 서울 태평로의 삼성본관을 기점으로 전세계에 산재한 삼성의 해외 지사·공장·지점 등을 하나의 선으로 그려보면 마치 부채살과 같은 촘촘한 거미줄 그림이 그려진다.


생산과 영업, 그리고 관리로 대표되는 삼성의 이 같은 거미줄은 혼맥도에 그대로 옮겨진다. 국내 최고의 재벌답게 혼맥도 역시 재계와 정계, 그리고 관계와 언론계에까지 국내의 거의 모든 재벌과 권문세가를 포괄하며 방대한 지도를 그리고 있다.


이 같은 삼성그룹의 혼맥도는 타 그룹과 달리 삼성에 의해 인위적으로 그려진 것은 아니다. 인위적인 사돈관계라면 LG그룹의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과 법무장관·내무장관을 지낸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이 고작이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은 삼성그룹의 혼맥도를 화려하고도 방대하게 거미줄화 하는 데 가교 역할을 한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1910년 경남 의령군 정곡면에서 경주이씨 문중의 부친 찬우씨와 안동권씨 문중의 모친 재림씨 사이에서 2남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열여섯 살 되던 1926년 부친이 정해준 박두을씨와 결혼했다. 박씨는 순천박씨로 조선 초기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이다.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
김병관 전 동아일보 회장
구인회 LG 창업주
노신영 전 국무총리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

‘의인물용 용인물의’

청과물 판매상에서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삼성그룹을 키워낸 이 창업주의 창업과정과 숱한 일화들은 그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일반에 소개됐다. 특히 최근에는 MBC TV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 함께 이를 드라마로 방영하고 있어 굳이 언급할 이유가 없다. 다만 이 창업주와 다른 경영인의 차이점이라면 그는 천부적인 투시력과 재능을 갖춘 사업가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정보수집과 분석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용병술에 있어서도 달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용병술과 관련 1938년 대구 견동에서 첫 사업으로 삼성상회를 경영할 때 사업이 정상궤도에 오른 1년 후부터 지배인이었던 이순근씨에게 인감과 수표책을 모두 맡겼던 사례가 자주 거론된다. 사람을 한 번 믿으면 모든 것을 위임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스타일, 즉 부하직원에 대한 상상을 뛰어넘는 신뢰를 보냈던 것이다. 이 같은 용병술은 이 창업주가 경영에서 손을 뗄 때까지 지속됐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이 창업주는 신입사원을 선발하는 면접 때 장안에서 제일 가는 관상가를 옆에 앉혀 놓고 응시자들의 인성을 자기 나름대로 평가, 당락을 결정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때문에 ‘이병철 경영철학’의 중심사상이 ‘의인물용 용인물의(擬人勿用 用人勿疑):의심가는 사람은 쓰지 말고 한번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이 창업주는 뛰어난 정보수집가였다. 그는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완벽한 정보수집을 하도록 지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38년 삼성상회를 열어 건어물·청과물을 취급하는 무역업을 하기로 결정내리기 전에 이 창업주는 2개월 동안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 베이징, 상하이를 여행하면서 적합한 업종선택에 고심했다. 또 반도체 사업 시작 전에는 도쿄와 미국 실리콘밸리에 정보센터를 설립하고 온갖 정보를 수집하며 관련 서적을 섭렵했다. 이 과정을 거쳐 사업결정을 내리면 그는 또 무서운 추진력을 발휘하며 밀어붙였다. 이때 이 창업주는 사돈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1968년 사돈기업이었던 LG가 독점하다시피 한 전자부문에 삼성이 진출, 두 집안 사이에 불협화음이 일었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이 창업주는 사돈이었던 LG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구인회 창업주와 약속했지만 산업의 조류를 살피던 그는 전자·전기산업과 나아가 반도체사업에 승부를 걸지 않을 경우 삼성이 낙오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따라 삼성전자를 설립했다.

사돈들 대부분 그룹경영에 참여

국내 재계의 쌍벽이었던 이 창업주와 구 창업주는 10대 초반 함께 진주 지수보통학교를 다니면서 친분을 쌓은 죽마고우로 사돈까지 됐다.


이 창업주는 부인 박두을씨와의 사이에 3남4녀를 포함해 모두 4남6녀를 두었다.
장남으로 한때 삼성그룹 대권을 물려받았으나 물러나 현재 야인생활을 하고 있는 맹희씨는 1958년 손영기 농림부 양정국장의 딸 복남씨와 결혼했다. 손영기씨는 이후 경기도지사를 역임하다 1961년 당시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사장으로 영입됐으나 1976년 타계했다.
이 창업주의 맏며느리 손복남씨는 한때 안국화재 최대주주로 상무이사 직함을 가지고 경영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 CJ(주) 대표이사 회장인 손경식씨는 손복남씨의 동생이며 CJ그룹 이재현 회장이 아들이다. 즉 맹희씨 일가는 삼성그룹에서 분가해 CJ그룹을 독자적으로 경영하고 있다.


맹희씨는 안국화재 업무부장을 시작으로 삼성물산, 미풍산업, 중앙일보, 삼성전자 부사장 등을 거치며 경영수업을 쌓았다. 이에 차기 대권은 당연히 장남인 맹희씨에게 넘어갈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이 창업주는 1971년 ‘경영능력’을 이유로 맹희씨를 그룹경영에서 퇴출시키고 만다.


맹희씨는 2남1녀의 자녀를 두었지만 평범한 집안에서 사위와 며느리를 맞았다.
차남인 창희씨는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만난 아이치현 출신인 일본인 여성 나카네 히로미씨와 결혼했다. 그녀는 결혼 23년만인 1986년 이영자라는 한국이름으로 개명했다. 이씨의 부친은 일본 미츠이물산에서 중역으로 일했던 나카네 쇼지씨로 알려졌다.


창희씨는 한비사건(사카린밀수사건)으로 삼성그룹을 떠나 1973년 설립한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사와 1977년 인수한 특수세라믹사를 통합하여 새한미디어를 설립, 독자운영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백혈병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1991년 7월 미국에서 치료중 별세했다.


창희씨 사망 이후 부인 이영자씨는 새한그룹 회장으로 취임, 장남 이재관씨와 경영에 참여했다. 그러나 부회장으로까지 승진하며 새한그룹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됐던 이재관씨가 분식회계를 통해 1천억원대의 불법대출을 받아 구속돼 경영권을 상실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이영자씨도 경영에서 손을 뗐다.

“건희에 비해 너무 큰 키 아니냐”

두 형을 제치고 삼성그룹 경영대권을 거머쥔 3남 건희씨는 법무장관·내무장관을 거쳐 중앙일보 회장을 지낸 홍진기씨의 장녀 나희씨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부친이 서로 의기투합, 사돈을 맺자는 합의 아래 추진돼 성사됐다.


이병철-홍진기 두 사람의 교분은 4·19 후 고 홍 회장이 3·15 부정선거와 관련돼 옥고를 치루고 있을 때 시작됐다. 자유당 시절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을 역임한 고 홍 회장의 능력을 높이 산 전 국무총리 신현확씨가 이 창업주에게 고 홍 회장을 천거하자 이 창업주가 형무소로 면회가고, 또 집으로 찾아가 가족들을 위로한 게 인연이 됐다. 고 홍 회장은 출감 후 삼성에 몸담아 1965년 라디오서울(동양방송 전신)을 개국하면서 경영을 맡았다.
이 회장과 부인 홍나희씨는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첫 대면한 뒤 7개월 후인 1967년 4월 결혼식을 올렸다.
이 회장의 모친인 박두을씨는 홍나희씨를 처음 보고 “건희 키(1백68cm)에 비해 너무 큰 키(1백65cm) 아니냐”며 걱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어머니를 닮아 손자손녀들의 키가 큰 것을 보고 “2세를 위해 큰 여자가 괜찮다는 건희 말이 맞았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결혼으로 이병철 가문의 혼맥도는 바야흐로 거미줄망을 형성하게 된 계기를 맞는다. 이 회장의 처가인 홍진기 가문은 노신영 전 국무총리와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과 사돈을 맺고 있다. 또 노 전 총리는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과 사돈을 맺고 있어 이병철 가문은 현대 정주영 가문과도 혼맥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 회장의 자녀는 1남3녀. 한창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장남 재용씨는 대상그룹 임창욱 회장의 장녀 세령씨를 부인으로 맞았다(본보 443호 ‘대상그룹과 임대홍 창업주’ 편 참조). 또 차녀 서현씨는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의 아들 재열씨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이병철 가문은 중앙일보에 이어 동아일보와도 사돈을 맺게 됐다.

엘리트 사위들

이 창업주의 맏딸인 인희씨는 고려병원(현 삼성강북병원) 고문을 지낸 조운해씨와 결혼했다. 그는 경북지방의 대지주였던 조범석가의 자제로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한 의사출신이다.


차녀 숙희씨는 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3남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결혼했다. 당시 이들의 결혼을 두고 “한국 재계의 쌍두마차인 삼성과 LG가 사돈을 맺는다”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삼성의 전자부문 진출로 LG와 불협화음이 일자 양가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기도 했다.


셋째딸 순희씨는 남편과 이혼한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이 창업주가 애틋하게 여겼다는 넷째딸 덕희씨는 이정재씨의 아들 종기씨와 결혼했다. 이종기씨는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중앙일보 사장을 거쳐 제일제당 부회장과 삼성화재 회장을 역임했다.


다섯째딸 명희씨는 4·5대 국회의원과 삼호방직 및 삼호무역 회장을 지낸 정상희씨의 차남 재은씨와 결혼했다. 현재 조선호텔 회장으로 재직중인 정재은씨는 삼성그룹 경영에 깊숙이 참여하기도 했다. 경기고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한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엘리트였다.


명희씨의 장남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은 탤런트 고현정씨와 결혼해 한때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나 최근 이혼했다.


이 창업주는 이들 자녀 외에 일본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4남 태휘씨와 6녀 혜자씨가 있지만 모두 일본인과 결혼해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다. 다만 태휘씨는 일본 게이오 대학 출신으로 이 창업주 생존시 삼성그룹 비서실 이사와 제일제당 상무까지 지냈지만 부친 별세 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빌딩을 경영하고 있다는 것만 알려지고 있다.

난세의 지혜, 혼사에 반영

이처럼 이 창업주의 4남6녀 자녀들의 혼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권세가는 생각보다 적다. 이는 이 창업주의 평소 생활철학 혹은 처세학이 만들어낸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일제하에서 사업을 시작해 일제의 멸망까지 목격한 후 한국전쟁과 4.19, 자유당 몰락, 5.16 등 숱한 풍상을 겪는 과정에서 “특정 정치세력과는 지나치게 가깝지도, 지나치게 멀지도 않은 사이를 유지해야 한다”는 난세를 사는 지혜를 터득해 이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창업주 가문에서는 정계와 재계, 관계와 언론계 등 내노라 하는 권세가가 모두 등장한다. 이 창업주 스스로 이를 만들려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권문세가와의 통혼이 이뤄졌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창업주 가문의 혼맥도를 살펴보면 구인회가와 홍진기가를 거쳐 사돈의 사돈을 따지다보면 무려 50여 개의 권문세가들이 이병철가의 혼맥도 하나에 집대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돈의 사돈이 직접 이병철가와 사돈을 맺는 경우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 창업주의 차녀 숙희씨가 구인회가로 출가한 이후의 혼맥도에서 구인회→허정구→김동조→정주영→노신영→홍진기→이병철가로 이어지는 순환형태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또 두 명의 대통령이 이병철가 혼맥에서 등장하는데 노태우 전 대통령과는 다섯 다리를,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네 다리를 건너면 사돈으로 연결된다.

혼맥도 단골 김복동, 삼성 혼맥에도 등장

재계 혼맥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몇몇 가문은 이병철가에서도 어김없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이들은 많은 가지를 내놓고 재벌가문의 혼맥도의 동맥역할을 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즉 여기저기 널린 여러 가문들을 최단거리로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가문으로 이병철가를 비롯해 김복동 전 육사교장,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주,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송인상 효성 고문,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 허정구 전 삼양통상 명예회장, 홍진기 전 재무장관, 노신영 전 국무총리, 양택식 전 서울시장 가문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김복동 전 육사 교장은 김한수 한일합섬 창업주의 4남 중산씨와 강성진 전 증권업협회장의 2남 흥구씨를 사위로 맞았고, 그의 여동생 옥숙씨는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정숙씨는 금진호 전 상공장관에게 출가해 혼맥도에서 등장 빈도가 단연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사돈가인 김한수가와 강성진가는 다같이 양택식 전 서울시장 가문과 통혼하고 있다. 따라서 김복동가의 혼맥도에서 삼성은 물론 LG, 현대, SK, 두산 등 재계 인사들의 이름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어쨌든 삼성그룹은 2대 이건희 회장에 이어 3대로의 경영대물림을 위한 정지작업을 한창 진행중이다. 걸림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회장의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로의 후계구도를 뒤집을 만큼은 아니라는 게 재계의 공통된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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