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제가 올린 글(제목: 80년대 초반~중반 남자농구)밑에 이재만님
께서 '92년 올림픽 대표팀과 독일 올드 올스타와의 경기 내용 알려주신
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라고 리플 달아 주셨었지요?
우선 재만 님의 기억력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후추 커버 스토리에서 김병수 코치를 다루었을 때 제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 VS 독일 올드 올스타와의 평가전에 대해서 독분비관에 짧게
글을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우리 이재만 님께서 기억하고 계신
가 보네요. 다시한번 재만님의 기억력과 예리함에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
습니다.
재만 님께서 저에게 부탁하셨으니까 그 게임에 대해 말씀을 드릴께요.
그리고나서 당시 올림픽 대표팀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 VS 독일 올드 올스타전은 당시 올림픽
대표팀 기술고문인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일 꺼
에요.
그럼 먼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 멤버를 대략 살펴 보도록 하겠
습니다.
코칭스탭
기술고문: 크라머(독일)
감독: 김삼락
코치: 김호곤
선수.
김봉수, 신범철(이상 GK). 정광석, 강철, 이임생, 나승화,
김귀화(이상 DF). 신태용, 이문석, 조정현, 김병수, 이기범, 노정윤,
조진호, 최문식(이상 MF). 서정원, 곽경근, 정재권, 이태홍,
임근재(이상 FW)등
(이외에도 5~6명의 선수가 더 있는데 기억이 잘 안납니다.
이 점 널리 양해해 주십시오. 그리고 위의 선수들 중에 본선
대회에는 참가하질 못한 선수도 있습니다.)
우리 올림픽 대표팀과 친선 게임을 위해 내한한 독일 선수들은 현역에
서 이미 은퇴한 선수들로 구성 되었습니다. 대신 현역시절 세계 톱클
라스의 기량으로 유럽을 비롯한 전세계 축구팬들을 열광시켰던 선수들
이지요.
내한한 독일 올스타팀 주요 멤버는 다음과 같습니다.
브레덴스크(GK), 브르노 페차이, 한스 뮬러(한지 뮬러라고도 함), 만프
레도 칼츠, 짐머만, 아브람지크, 푀르스터 쌍동이 형제등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더 많은 선수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제가 전혀 모르는 선수들
이라서 이름을 기억할 수가 없네요.)
이들 선수들은 국내 축구팬들에게도 전혀 낯선 선수들이 아니었어요.
70년 중반~80년 대 초까지 MBC에서 매주 월요일 밤 10시 30분 부터
분데스리가 축구를 해주었을 때 주인공으로 나왔던 선수들이 바로 이
선수들이었거든요. 이 선수들 중에 특히 페차이, 칼츠, 한스 뮬러,
푀르스터 형제는 대단히 유명한 선수들이지요.
이들 대부분은 차범근 감독과 같은 시대에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했던
선수들입니다
원래는 칼하인츠 루메니게도 이 팀의 일원으로서 내한 할 예정이었는데
부인의 병환으로 인해 오질 못했습니다. 그 무렵에 부인이 많이 아팠
다고 하더라구요. 당시 국내 축구 팬들은 '천하의' 루메니게까지 오는
줄 알고 엄청나게 기대를 했었는데 아쉽게도 오질 못했습니다.
당시 매스컴에서는 내한한 독일 선수들을 '크라머 감독의 제자들' 이라
고 소개 했었는데 제가 알기로는 전원 다 제자는 아니고 일부만 크라머
감독의 제자일 겁니다.
올림픽 대표팀과 독일 올스타는 서울과 지방에서 두 차례인가 세 차
례 평가전을 가졌었습니다. 제 기억엔 1승 1패를 했던 것 같습니다.
(1승1무1패 같기도 하구....)
이 게임은 말 그대로 평가전이었기 때문에 양팀 모두 승부에 집착하는
경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올림픽팀은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을 앞둔
상태였기 때문에 선수들의 컨디션 조절 및 팀웍을 맞추는데 촛점을 두면서
경기를 했습니다. 독일 선수들 역시도 현역 선수들이 아니었던 만큼 격렬
한 플레이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절대 늘어지거나 불성실한 태도로
볼을 차지는 않았습니다.
독일 선수들은 은퇴한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고는 해도 기동력이라던
가 테크닉이 우리 젊은 선수들에 비해서 결코 떨어지질 않더군요.
그 중 몇몇 선수는 은퇴한 선수라고 보기에는 의심이 들 정도로 빠르고
테크닉이 좋더라구요. 저는 개인적으로 무척 놀랐습니다. 올림픽 대표팀
공격수들이 독일 올드 올스타 수비진을 잘 부수질 못했으니까요.
당시 독일 올스타와의 평가전은 '축구 천재' 김병수 선수의 복귀전이라
고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랜동안 부상으로 고생을 했던 김병수 선수가
독일 올스타와의 게임에 나왔거든요. 김병수는 플레이 메이커로 출전을
했어요. 제 기억엔 김병수 선수가 1차전 때 좋은 게임을 했던 것 같습
니다. '천재 미드필더'로 불리우는 선수니까 단순한(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패스를 하나 하더라도 웬지모르게 달라 보이더만요.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김병수의 아웃 프론트 킥(특히 땅볼로 깔아서) 으로 찔러 주는 패스는
천하일품입니다.
그 때 저는 마지막 게임을 보러 갔었습니다. 장소는 잠실 운동장이었
구요. 그 날 날씨가 가을이었던 것 같은데 몹시 추웠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 날 예상보다 관중들이 많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젊은 축구 팬들보다
는 나이 드신 축구 팬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당연히 추억의 선수들을
보러 오신 거겠지요. 제가 어릴 적부터 유독 좋아했던 선수들(특히 만프
레도 칼츠와 브르노 페차이)을 눈앞에서 보니 가슴이 벅차면서 묘한
감정이 들더군요. 본부석 쪽 스탠드에는 당시 대우 감독인 비츠케이도
와 있었고 차범근 감독 부부도 와 있었어요.
게임 끝나고 관중들이 다 빠져 나간 상태에서 독일 선수들과 차범근 감독
부부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라카룸 쪽 입구에서요.
현역 시절 세계 최고의 중앙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던
'오스트리아의 전기 철조망' 브르노 페차이는 차범근 감독과 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더라구요. 페차이와 차범근 감독은 프랑크푸르트 시절에
한솥 밥을 먹은 동료이기도 하지요. 페차이를 가까이서 직접 보
니까 체격이 어마어마 하게 크더군요. 차범근 감독이 왜소해 보일 정도였
습니다. 페차이 뿐 아니라 나머지 선수들 대부분이 키도 크지만 체격이
제가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컸습니다.
그 선수들 보면서 '차범근이 쟤네들 틈에서 견뎌낸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에 크라머 감독은 체격이 아주 자그마하신 분이었습니다. 마치 동네
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았어요. 팬들에게 매우 상냥하
고 자상하게 대해주시더군요.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 VS 독일 올드 올스타전에 관해서는 여기서 마
무리 짓고 당시 올림픽 대표팀과 크라머 감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겠
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대한 축구협회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을 앞두고 대표팀 기술고문으로 독일의 명장인 크라머 감독을 영입했습니다.
먼저 크라머 감독의 프로필등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나서 글을 계속 이어
나가도록 하지요.
데트마르 크라머(Dettmar Cramer): 1925年 독일 도르트문트 출생.
크라머는 현역 시절에 큰 부상을 당해 선수 생활을 오래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은퇴 후, 1949년 부터 독일 축구협회 서부 지구 주임코치를 시
작으로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고 하더군요.
크라머는 1960년 10월 도쿄 올림픽 일본 대표팀 기술고문으로 첫 도일
하면서 일본 축구와 인연을 맺었다고 합니다. 크라머의 지도를 받은
일본 대표팀은 도쿄 올림픽 8강, 그리고 4년 후인 64년 멕시코 올림픽
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당시 일본 대표팀이 기술고문으로 크라머를 영입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쾌거는 이룰 수 없었겠지요. 그뿐 아니라 크라머는 일본축구 발전
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입니다. 크라머는 지금까지 FIFA 지도원으로
서 70개국 이상을 돌며 축구 지도를 했는데 작년까지 중국 축구 학교에
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고 하더군요.
제가 알기로는 크라머 감독은 다른 건 몰라도 선수들 보는 안목에 있어
서 만큼은 정평이 나있다고 합니다. 크라머 감독은 차범근 감독의 레버
쿠젠 초창기 시절 스승이기도 하지요.
(크라머 감독의 프로필 일부는 일본 스포츠 잡지인 Number 570호에서
참조했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조금 아는 상식을 곁들였구요.)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 축구협회에서 무슨 이유로 크라머
감독을 올림픽 대표팀 기술고문으로 영입했는지는 제가 전혀 모르겠습
니다. 그져 제 단순한 생각으로는 한국 축구가 90년 로마 월드컵 본선
에서 힘 한번 제대로 못쓰고 참패를 했기때문에 크라머 감독을 영입한
것이 아닌가 보여집니다.
크라머 감독은 아시아를 비롯한 축구 후진국을 돌면서 축구 지도를 했던
분이었기 때문에 한국 축구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라는 판단이 섰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은 상당히 좋은 선수
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이 선수들을 크라머 감독에게 맡기면 올림픽에
가서 뭔가 일을 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이것은 모두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당시 국내 축구팬들은 크라머 감독에게 큰 기대를 걸었었습니다.
독일의 명장이 젊고 재능있는 우리 선수들을 지도한다면 크게 달라지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1960년 대인가 70년 대에도 외국인
지도자가 대표팀을 맡은 적은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날이 갈수록 크라머 기술고문과 김삼락 감독 사이
에 불신의 골이 깊어져 갔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그 중
하나가 훈련 방식을 놓고 두 분의 견해 차가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크라머 고문은 선수들에게 창조적인 축구를 강조하면서 강훈련을 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연습 시간도 길게 잡질 않았다고 하더군요.
크라머는 훈련의 양보다는 질을 더 중요시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크라머 감독은 '한국 선수들은 열심히는 뛰는데 전술 이해도가 너무
낮다. 그리고 훈련 때 진지성과 집중력이 많이 떨어진다.' 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제가 기억합니다.
반면에 김삼락 감독은 '크라머 기술고문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한국
선수들에 대해서 만큼은 크라머 보다 내가 더 잘 알기 때문에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켜야만 효과를 본다.' 라는 신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로 크라머 기술고문과 김삼락 감독이 부디낀 것 같아요.
급기야 나중에는 두 분 사이가 상당히 심각한 수준까지 간 걸로 알고 있
습니다.
기억하고 계신 후추인 여러분들도 계실텐데 당시 바르셀로나 올림픽
아시아 최종 예선할 때 한국 선수들이 후반전 중반만 넘어가면 여러 선수
가 다리에 쥐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조정현과 노정윤은 영락없이 후반
중반만 되면 쥐가 났어요. 그거 참 희한하데요.
그 원인이 훈련 부족에서 오는 건지 아니면 선수들 개개인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김삼락 감독을 비롯한 국내 축구 전문가들은 '쥐가 나는
것은 훈련 부족에서 오는 체력 저하 때문이다' 라고 판단을 했던 것 같
아요. 즉, 크라머 감독의 훈련 방법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었겠지요.
당시에 이 문제로 인해 이견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최종 예선이 끝난 뒤 크라머 기술고문은 해임이 됐습니다.
정확한 해임의 원인은 잘 모르겠으나 역시 김삼락 감독과의 불화가
가장 큰 원인이 아니었나 싶어요.(당시에 그렇게 보도가 됐었으니까요.)
크라머 감독은 한국을 떠나면서 '사랑하는 나의 아들들과 바르셀로나에
같이 못가는 것이 안타깝다. 하지만 나는 멀리서나마 내 아들들이 뛰는
모습을 지켜보겠다' 라는 식의 말을 했습니다. 크라머 감독은 올림픽
대표팀 선수들을 가르칠 때 늘 'my son' 이라고 표현 했다고 하거든요.
크라머 감독이 떠난 후 나중에 스포츠 신문에 보도된 바에 의하면 크
라머 기술고문은 김삼락 감독과의 불화도 있었지만 축구 협회와도 관계
가 썩 매끄럽지 못했었다고 합니다.
축구협회에서 크라머 감독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크라머 감독이 축구협회 측에 이런 저런 것을 부탁을 했을 때
협회 측에서 그러한 걸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제가 사소한
것 몇 가지 알고 있는 게 있지만 확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 드리기
가 조금 그래서 이것은 그냥 넘어 가겠습니다.)
올림픽팀은 이러한 어수선한 분위기를 겪으면서 본선 무대에 섰는데
결국 예선 탈락을 하고 말았지요. 저는 당시에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워낙 올림픽팀이 매력적인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터라 어느정도는
성적을 내주지 않겠느냐라는 예상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예선탈락의
고배를 마신 것입니다. 그 때 만일 크라머 기술고문이 본선까지 같이
갔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었지요.
크라머 감독이 비록 한국에서는 크게 성공하진 못했지만 당시 우리 젊은
선수들에게는 큰 영향을 끼친 게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당시 올림픽팀의 핵이었던 서정원 선수가 한 말에 의하면 크라머
감독은 선수들에게 '게임이 끝나면 머리가 아파야한다!'라는 이야기를
늘 했다고 합니다. 즉 90분 내내 두뇌 플레이를 하라는 말이었겠지요.
지금도 서정원은 크라머 감독을 무척 존경한다고 하더군요.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과 크라머 감독에 대해서는 이쯤에서 줄이고
여러분들께 크라머 감독 이외에 독일 축구의 명장 두 세분 정도 소개해
드릴께요. 특히 후추 가족 여러분들 중에서 '일생을 축구로 한번 살아
보겠다!'라고 마음 먹고 계신 젊은 분들은 이들 감독들 이름을 반드시
알아 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선수들은 돈과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뛰어라!' 라는 말을 자주 했다는 바이스
바일러 감독은 독일에서 '위대한 감독' 으로 불리우는 전설의 인물
입니다.(바이스바일러는 이미 故人입니다.)
바이스바일러는 감독시절 지도자들과 선수들에게 늘 반듯한 태도를
강조 했다고 하더군요. 또한 바이스바일러 감독은 '트레이닝 방법,
시스템, 전술등의 지식과 아이디어등을 과시하는 지도자(감독)들이
많은데 그런 놈들은 거의 2류다. 지도자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선수들 앞에서 아는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팀의 공통 목적을 달성
하기 위해서 선수들이 전력을 다해 팀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그 '자세'를 육성 시키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도덕적이고 겸손한 감독이었다고 합니다.
* 푸트 데어발: 82년 스페인 월드컵 당시 서독 대표팀을 이끌었던 감독
입니다. 데어발 감독은 현역시절에 '살인적인 강슛'으로 명성을 날렸다고
합니다. 데어발은 연습하러 온 어린 아이가 GK를 보더라도 봐주는 거
없이 그대로 강슛을 때렸다고 하더군요. 그마만큼 매사에 진지했었답니다.
일본 축구의 영웅인 가마모토 구니시게는 선수 시절에 독일에가서
데어발에게 슛자세를 많이 지도 받았다고 합니다.
데어발은 '슛을 때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그러나 정확한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자세가 선행 되어야 한다.
나쁜 자세에서는 절대로 좋은 슛을 때릴 수 없다. 좋은 슛은 언제
나 좋은 자세일 때 나오는 것이다!' 라고 항상 강조를 했답니다.
* 루디 구텐돌프: 오래 전 함부르크SV를 이끌었던 '전설의 명장' 인데
제가 이 감독에 대해서는 자세한 건 모릅니다. 그져 명성만 알고 있을
뿐인데 유럽 축구 전문 서적이나 잡지등을 읽으면 구텐돌프라는 이름
이 자주 나오거든요. 그렇기때문에 이 분의 이름도 올려 봤습니다.
위의 세 분 감독 말고도 '전설의 명장' 혹은 '위대한 감독' 으로 불리
우는 감독들은 많이 있습니다. 유럽권 특히 독일 쪽에 이러한 감독들이
많이 있는 것 같더라구요.
다시한번 말씀 드리지만 후추인 여러분들 중에 유럽 축구에 지대한 관심
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이들 명장들의 이름만이라도 꼭 알아 두십시오.
저는 개인적으로 각국의 이러한 위대한 감독들이 거론될 때마다 항상
마음이 착잡해 집니다. 한국 축구는 왜 지금까지 위대한 명장을 배출하
지 못했을까요? 제가 여기서 말하는 '명장' 이란 것은 유명한 감독이
아니라 '한국 축구의 아버지' 로 불리울 수 있는 지도자를 말하는 것
입니다. '한국 축구의 아버지'가 있습니까? 혹시 있는데 저만 모르는
건가요? 우리 한국도 모든 축구인들과 축구팬에게 추앙받고 또 신임
받는 분이 있다면 참 좋을텐데 말입니다.
한국 축구의 아버지가 없으면 허다못해 '한국 축구의 삼촌' 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의 글은 제가 보더라도 이상하게 아쉬운 감이 많이 드네요.
영 자연스럽지 못한 느낌입니다.(늘상 그렇지만~~)
그런 의미(아쉬움을 달래는 의미^^)에서 여러분들께 어디 가서 써먹
으셔도 좋을 만한 상식 하나 알려 드리겠습니다. 축구화에 대한 상식
이니까 가뿐하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축구화는 거의 천연 가죽으로 만든다는 것은 다들 아시지요?
그 중에서 캥거루 가죽과 소가죽으로 축구화를 많이 만듭니다.
캥거루 가죽의 특징은 대단히 얇고 가벼운면서 부드럽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찰력이 상당히 강하면서 질기기까지 하다는군요.
그렇기 때문에 각 메이커 톱 모델 축구화는 거의가 캥거루 가죽으로
만든 제품입니다.
그렇다고해서 모든 고급 축구화는 다 캥거루 가죽으로 만드는 것
이냐? 그건 아닙니다. 캥거루 가죽 이외에 소가죽으로도 고급
축구화를 많이 만드는데 그 소가죽도 크게 3종류로 나뉜다고 합니다.
그 3종류를 제가 아는대로 말씀 드릴께요.
* 카프(Calf): 소가죽 중에 캥거루 가죽 소재에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카프'라고 합니다. 카프는 생후 6개월 이내의 아기 소로 만든
가죽이라고 하는데 표면이 매우 부드럽고 섬세하면서 탄력성이 좋다고
합니다. 한 가지 덧붙여서 말하면 3개월 이내의 아기소로 만든 가죽은
'누카프' 라고 한답니다.
* 키프(Kip): 키프는 생후 6개월~2년 정도 된 소로 만든 가죽이라고
합니다.
* 스테아(스펠링을 모르겠어요.): 스테아는 생후 3개월~6개월 이내에
거세(去勢) 된 2살 이상의 숫소로 만든 가죽이라고 하는데 축구화에
대단히 많이 애용되는 가죽이라고 합니다.
우리 노정윤 선수가 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당시
한.일전(0 대1로 졌을 때)에서 신고 뛰었던 축구화가 독일제 푸마
King Top이라는 제품이었을 겁니다. 그 축구화가 바로 스테아 가죽
으로 만든 것입니다. 독일 대표였던 키도 부흐발트(90년, 94년 월드
컵 주전 스토퍼)도 J-리그 우라와 레츠에서 뛸 때 푸마 King Top을
주로 신고 뛰었지요. 제가 이 축구화 오리지날 제품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축구화에 비해서 조금 무거운 감이 들더군요.
94년 미국 월드컵 이후 부터 축구화의 모양과 칼라가 상당히 다양해
졌지요. 빨간 색, 파란 색의 축구화도 나왔고, 흰색 축구화도 있구요.
또한 축구화 바닥 스터드(일명 '뽕') 부분도 동그란 모양이 아닌 길쭉
한 모양으로 된 축구화도 현재 많이 애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최근에 나온 세련된 축구화보다는 고전적인 디자인의
축구화를 더 좋아합니다. 또한 칼라풀한 축구화 보다는 검정색 축구화를
더 선호합니다. 특히 애착이 가는 축구화는 독일제 아디다스 제품인
'World Cup' 이라는 축구화와 역시 아디다스 제품인 'Copa Mundial'
이라는 축구화입니다. 두 제품 모두 디자인이 매우 단순하지요.
Copa Mundial은 1982년에 아디다스사에서 내놓은 축구화인데 가장 오래
된 전통있는 축구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밑창은 고무로 된 고정식입
니다.) 핀란드가 낳은 세계적 스타인 리투마넨이 아약스 시절 이 축구
화를 자주 애용했습니다. 물론 현재도 많은 선수들이 Copa Mundial을
애용하고 있구요. 국내 선수 중엔 박남열이 예전에 이 제품을 자주 신고
뛰더군요.
'World Cup' 축구화는 고정식이 아닌 밑의 스터드(6개)를 바꿔끼는
제품입니다. 밑창은 고무가 아닌 알루미늄 소재로 되어 있지요.
World Cup 축구화 또한 대단히 오래 된 제품입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우리 차두리 선수가 신었던 축구화가 이 제품
입니다. 독일의 칸 골키퍼도 이 축구화를 신고 뛰었구요.
제가 말씀 드린 두 축구화 모두 캥거루 가죽으로 만든 제품입니다.
축구 선수들은 축구화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 좋은 예를 하나 멋지게 들어 드릴께요.
브라질 대표팀 주장 출신인 둥가가 J-리그 쥬빌로 이와타에서
뛸 때 축구화를 CRIX YASUDA라고 하는 일제 제품을 신고 뛰었습니다.
그런데 둥가는 회사 기술진에게 축구화 뒷꿈치 부분을 약 3mm정도만
낮추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사실 3mm라고 해봤자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볼을 차는 선수들에게 있어서는 그 정도의 수치라도 느낌이 다른가
보더라구요.
제가 오래 전에 독분비관에 이 이야기도 한번 해 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독일이 90년 로마 월드컵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를 1대 0으로
이기고 우승을 했지 않습니까. 당시 독일의 페널티킥 킥커는 안드레
아스 브레메였지요. 원래는 페널티킥 킥커가 마테우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날 마테우스가 새 축구화를 신고 나왔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브레메한테 양보를 한 것이랍니다. 아무래도 축구화가 새 것이
다 보니까 대담한 마테우스라도 조금 불안했었나 봅니다.
유럽 선수들의 경우 축구화 하나를 가지고 평균 2~3개월 정도 신는
다고 하는데 베켄바우어는 현역시절 길게는 1년을 넘게 신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축구화 가죽이 찢어지면 꿰메고 또 꿰메고 해서
거의 못 신을 때까지 신었다고 하더군요.
이러한 상식은 알아 두시면 좋을 것 같아서 제가 주책좀 떨어 봤습니다.
여러분, 지루한 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PS: 베베토가 한국에 왔더군요. 베베토는 세계적 선수 중에 가장 성실
하고 겸손한 인품을 지닌 선수로 알려져 있지요. 백넘버 7번이 아주 잘
어울리는 선수이기도 하구요.
베베토 이름 나오니까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브라질 선수들은 이름(본명)
이 워낙 길어서 주로 별명 비슷한 걸 쓴다고 하지요?
예를들어 펠레는 본명이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가린샤는 본명이 '마노엘 프란시스코 도스 산토스'
호마리오는 '호마리오 데 소우자 파리아' 라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선수들 호칭(별명)에도 나름대로 다 뜻이 있다고 합니다.
베베토는 '아기'를 의미한다고 하더군요.
둥가는 '꺼벙이'구요.
루이스 피구에서 [피구]는 포르투갈어로 '무화과 나무의 열매'라는
뜻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