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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풍족 중의 빈곤의 영속성
산업불경기가 단순히 특수한 표명이 되고 있는 중요한 문제는 이제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전 문명세계를 통하여 자선사업가를 위협하고 있으며 정치가를 당혹케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진보된 민족의 장래에 암운을 던져주고 있으며, 소위 진보라는 것의 실체와 최종목적에 대하여서 의문을 제시하고 있는 사회적인 현상도 현재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생산은 증가하는데도, 임금은 겨우 생존을 허용할 수 있는 정도의 최저임금으로 되려는 경향이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은, 생산력은 증가하는 데도 지대는 현저한 증가를 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임금을 저락시키려는 항구적인 경향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그 이유가 있다.
모든 면으로 보아서 전진하고 있는 문명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서 인간노동력을 증가시키며 빈곤을 근절시키고 결핍과 결핍에 대한 공포감을 일소하는데 직접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진보가 개재하고 있는 모든 사물이나 진보적 사회가 얻고자 진력하고 있는 환경은 직접적이며 자연적인 결과로서, 가능한 한 최대의 물질조건의 (따라서 결과적으로 지적이며 도덕적이 되는)개량(改良)을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구증가, 교환의 증가와 확장, 과학의 발견, 발명의 발전, 교육의 보급, 정부의 개선, 생활양식의 개량 등은 물질력으로 고려한다면 일정한 노동이 아니라 전체노동이며, 특수산업에서가 아니라 전 산업에서의 노동생산력을 증가시키려는 직접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에 있어서의 부의 생산법칙은 “개인은 전체를 위하고, 전체는 개인을 위한다.”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진적인 문명이 가져오는 이득은 횡취(橫取)당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은 이 이득을 받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토지는 노동에 필요하지만 개인소유로 귀속되었기 때문에 노동생산력의 증가는 단순히 토지이용 기회에 대하여서 지불하는 가격인 지대를 증가시키는 것뿐이다. 따라서 진보의 진행으로 획득된 모든 이득은 토지에 귀속됨으로 임금은 증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노동소득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소득 중에서 소득을 가능하게 한 기회에 대하여 지불하는 가격도 상승하기 때문에 임금은 증가할 수 없는 것이다. 쿠바의 노예들이 사탕가격의 상승에 대하여서 흥미가 없는 것같이, 단순노동자도 일반적인 생산력 증가에 대하여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사탕가격이 상승하면 주인이 보다 더 혹사(酷使)를 하기 때문에 노예상태가 보다 악화되는 것같이 자유노동자도 노동생산력을 증가시키므로 인하여서 상태는 적극적인 의미에 있어서나 상대적인 의미에 있어서 악화되는 것이다. 지대의 계속적인 상승으로 시작된 가일층의 지대상승은 미래의 개량효과를 감소시키는 투기적인 경향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투기경향이 지대의 정상적 상승에서 발생하지 않는 한 임금은 노예상태 즉 노동이 경우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까지 저락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산력증가에서 오는 모든 이득을 박탈당하면서, 노동은 자연적으로 수반하는 이익이 없다면 적극적 죄악이 되는 진보적 문명의 일정한 재산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노동자는 절망적이고 비천한 노예상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서 생산력을 증가시키고 있는 모든 개량은 노동을 가일층 세분(細分)시키고 있으며 이것을 필연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 노동자의 능률은 구성원의 독립을 희생시키면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개체 노동자는 가장 평범한 부족분을 공급하는데 필요한 각종과정의 극소부분의 지식과 기술만을 습득하고 있는 것이다. 야만족의 전체 노동생산물은 근소하지만 각 구성원은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거처를 건립하며 카누를 제조하며 자신의 의복을 만들며 무기와 함정(陷穽)과 도구와 장식품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자기 종족이 보유하고 있는 자연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서 어떤 식물이 식용으로 적당하며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새나 물고기나 곤충의 성격과 거처하는 장소를 알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태양이나 성좌나 혹은 꽃의 방향과 수목 위의 이끼의 방향으로 방향을 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들은 자기의 결핍을 보충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들이 동족에게서 절연당한다고 하더라도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가 구성원으로 되어 있는 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유스러운 연결체를 만들고 있는 독립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야만인에 비해 본다면 문명사회의 최하층에 속해 있는 노동자는, 사회의 부를 형성하고 있으며 가장 소박한 욕구를 공급하고 있는 많은 물건 중의 한 가지나 혹은 한 가지 물건의 극소부분만을 생산하는데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 노동자는 자기노동에 필요한 도구를 제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으며 자기가 소유할 수도 없는 도구로 노동하고 있는 것이다. 야만인보다도 더 한정되고 더 계속적인 노동을 강요당하며, 야만인이 취득하는 단순한 생활필수품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을 취득하고 있을 뿐이면서 노동자는 야만인이 가지고 있는 독립을 오히려 상실하였던 것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하여서 자신의 힘을 적용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욕망이 동시적으로 발생하기 전에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서 간접적으로도 적용시킬 수 없는 것이다. 노동자는 단순히 생산자와 소비자 간을 연결시키는 연쇄(連鎖)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쇄가 이동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분리시킬 수도 없으며 이동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사회에서의 이 위치가 악화될수록 사회에 더 의존하게 되며 독립적으로는 아무 일이나 전연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서 사용할 수 있는 노동력은 이제는 노동자가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노동력은 타인의 행동이 탈취(奪取)하거나 타인행동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태양계의 운동에 대하여서 하등의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같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일반원인에 의하여 이 노동력은 탈취당하거나 의존하는 것이다. 원시적 저주는 복리(福利)가 되는 것같이 나타나서 사람들은 단조로운 수공 노동이 죄악이 아니라 선이라는 것과,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며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떠들어대면서 법률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인간은 환경을 조정하며 통제할 수 있는 신성한 힘인 인간으로서의 본질적인 특성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서 저자는 야만사회에 대한 감상적인 예찬자는 아닌 것이며, 루소나 샤토브리앙이나 쿠퍼로부터 자연아(自然兒)에 대한 관념을 전수(傳受)한 것도 아니다. 물론 저자도 야만사회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빈곤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저급하고 국한된 범위도 알고 있는 것이다. 문명이라는 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운명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힘의 해방이며 발전이며 개선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문명의 이득을 자유롭게 취득할 수 있는 인간이 후회를 하면서 야만사회를 관망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인간으로 하여금 반추동물을 선망하게 하는 기분과 같은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을 관찰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문명의 중심부에는 아무리 야만인이라 하더라도 교환하려고 하지 않는 많은 계급이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에 감히 항의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생존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테라델푸에고의 토착민이나 호주의 흑인이나 북극의 에스키모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는 선택이 부여되었거나, 혹은 영국과 같이 고도로 문명화된 국가의 최하계급이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야만인의 운명을 선택할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신중한 의견인 것이다. 부가 풍족한 중에서 부족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은 야만인이 가지고 있는 자유에 대한 의식도 없이 야만인이 결핍에서 받는 고통을 그대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조잡한 덕행(德行)이나마 성장시킬 기회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제한된 적은 범위를 감수하여야 하는 것이다. 만약 범위가 넓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향락할 수 없는 축복을 나타내는 것뿐이다.
일부에는 이것이 과장된 언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현대문명의 철굽으로 강력하게 압력을 받고 있는 이들 계급의 진실한 상태를 인식하려고 노력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스웨친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 토크빌이 진술한 바와 같이 “우리는 결핍관념에 대해서는 너무나 빨리 익숙해지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는 과중한 것일수록 오래 지속되는 죄악도 관찰자에게는 계속적 지속성으로 인하여 과소평가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진술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면 그의 정당성이 적절하게 증명되는 것이다. 빈민계급이나 범죄계급이 존재하고 있어서, 어린 소녀들은 빵을 구하기 위하여 바느질을 하면서 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은 남루(襤褸)한 옷을 걸치고서 맨발로 시가(市街)에 범람하고 있는데도 화폐는 이방인에게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하여 조달되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에게 선교사를 파송한다니! 이것은 비통한 사실이 아니면 우스운 일이다. 바알도 이제는 무섭고 음흉한 팔을 벌리지 않고 있는데도, 기독교국가에 있어서 어머니들은 장례비를 얻기 위하여 어린 자식을 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고도로 발달한 문명국가에서의 위생위원회의 보고서나 빈곤한 노동자의 상태에 대한 연구보고서 등의 공식적인 문서와 같은 신빙할만한 보고에서의 야만인의 생활에 대한 저속한 기술에 도전하려는 것이다.
저자가 약술한 단순한 이론(가장 명백한 관계에 대한 인식이 이론이 될 수 있겠는지는 모르겠지마는)은 빈곤과 부, 고도의 생산력과 병행하는 저임금, 개명(開明) 중의 타락, 정치적인 자유 중의 사실상의 노예 등과의 연관에 대하여서 설명하였다. 또한 이 이론은 이 이론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이고 준엄한 법칙의 결과로서, 가장 혼란되었을지도 모르는 사실을 조화시켰으며, 이 이론이 언급되지 않았더라면 다양성과 모순성을 나타내었을지도 모르는 제 현상의 순서과 관계에 대하여서 설명하였다. 또한 이 이론은 기성국가에서 보다는 신생국가에서, 평균적으로나 총체적으로 부의 생산은 소량인데 이자와 임금이 고율이 되는 이유를 설명하였으며, 노동과 자본이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개량이 자본이나 노동의 보수를 증가시키지 않는 이유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과 자본 간의 참된 이해관계의 조화를 증명하면서 소위 노동과 자본 간의 분규도 설명하고 있다. 이 이론은 또한 보호무역론에 대하여서도 여지없이 비난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유무역이 노동계급의 이익을 항구적으로 실패케 한 이유도 표명하였다. 풍요와 함께 증가하는 결핍과, 부가 계속적으로 축적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 이론에서는 막연한 “과잉생산론”이나 혹은 “과잉소비론”에 의존하지 않고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산업불경기에 대하여서 설명하였으며 또한 직장이 과다하거나 과소하다는 불합리한 가정(假定)에 의존하지 않고서 선진사회에 있어서 생산력을 낭비시키고 있는 잠재생산자의 본의 아닌 유휴에 대하여서도 설명하였다. 또한 이 이론은 기계의 사용이 부여하고 있는 자연적 이득을 부인하지 않고서 기계도입에 흔히 야기되는 노동계급에 대한 악영향을 설명하였다. 인간의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법령에만 있을 수 있는 결점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율법에 귀결시키지 않고서 조밀한 인구에서 나타나는 악덕과 곤궁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모든 사실과 일치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를 살펴 보자. 정부나 산업이나 관세나 화폐 등에 있어서 가장 광범위한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는 제 국가에서 노동계급의 고뇌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는 풍족한데도 고뇌와 빈곤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토지가 독점되었으며 또한 토지가 전 국민의 공유(共有)재산이 아니라 개인의 사유(私有)재산으로 되고 있으며, 또한 노동이 토지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노동소득에서 다액의 수입은 탈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상이한 국가를 서로 비교하면서 현재의 세계를 관찰하여 본다고 하더라도, 임금의 고저를 결정하는 것은 풍족한 자본이나 혹은 노동생산력이 아니라 토지의 독점자가 지대로서 노동소득에 대하여 공납(貢納)을 과세하는 정도에 의하여서 결정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의 총량은 근소한데도 토지가 염가(廉價)인 신생국가야말로 토지가 고가인 부국보다도 항상 더 좋은 국가라는 것은 가장 무식한 사람이라도 알고 있는 주지의 사실이 아닌가? 토지가 비교적 저렴한 지역에서는 임금은 비교적 많으며 토지가 고가라면 임금이 떨어지는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토지가치가 증가함에 따라서 빈곤은 심각해지며 피구제민이 발생하는 것이다. 토지가 염가인 신개척지에 있어서는 걸인을 발견할 수 없으며 불평등의 상태가 대단히 미미한 반면에, 토지가 대단히 가치가 있어서 피트로 측정되고 있는 대도시에 있어서는 극단의 빈곤과 사치가 발견되는 것이다. 두 극단적인 사회등급 간에서의 조건의 불균형은 항상 토지가격으로서 측정되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보다는 뉴욕이 토지가 가치가 있지만 샌프란시스코 주민은 뉴욕이 불결하고 참상이 많음에 놀랄 것이다. 뉴욕보다는 런던이 토지가 가치가 있지만 런던은 뉴욕보다도 더 불결하고 빈곤한 것이다.
상이한 시간에 동일한 국가를 비교한다고 하여도 동일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여러 가지 조사를 한 결과로서 홀럼은 “자기는 현재보다도 영국에 있어서는 중세기에 수공노동자의 임금량이 보다 많았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이 사실여부는 고사하고라도 혹시 임금이 적은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현격하게 적지않았다는 사실은 명백한 것이다. 노동능률은 농업에 있어서도 700% 내지 800%로 추산하며, 산업분야에 있어서는 계산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하게 증가하였지만 다만 지대를 증가시켰을 뿐이다. 로저스 교수에 의한다면 현재 영국농지의 지대는 오백년 전을 기준으로 하여서 화폐로 측정하면 120배가 되며, 밀로 측정하면 14배가 되는데, 건축대지나 광산지역의 지대는 막대하게 상승이 되었다는 것이다. 포셋 교수에 의한다면 영국토지의 자본화한 임대가치는 현재로 45억 파운드 즉 218억 7000만불이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수천의 영국국민은 잔여 국민의 노동에 대한 하나의 유치권(留置權)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유치권의 자본화된 가치는 1860년도의 남부 흑인의 평균적인 가격으로 환산하여서 영국민을 노예로 가정하는 경우에 전 국민의 가치의 배 이상이나 된다고 하였다.
벨기에와 플랑드르, 프랑스나 독일에 있어서도 지대나 농지의 판매가격은 최근 30년 동안에 배로 증가하였던 것이다.(주1) 요약한다면 생산력의 증가는 토지가치를 증가시켰으나 노동가치에 대하여서는 증가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어떤 지역에 있어서 실제적인 임금이 상승하였다고 하여도 이러한 상승의 원인은 다른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임금이 하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여러 지역에 있어서는 임금은 그 이하로는 노동자를 유지할 수 없는 최저액까지 저락하였던 것이다. 생산물의 배당분으로서의 임금은 어디서나 감소되었던 것이다.
흑사병(黑死病)으로 인하여 14세기의 영국에서 임금이 대폭적으로 상승되었다는 사실은 지주들이 법령으로 임금을 조정하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을 보아도 명백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인구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대폭적으로 감소하면 능률적 노동력이 실제로 감소된다는데 대하여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토지에 대한 경쟁의 감소는 지대를 대폭적으로 감소시켰으며, 임금은 대단히 상승시키기 때문에 권력과 벌칙으로 임금을 저락시키려고까지 하였다. 헨리 8세 재임 시의 영국에서 진행된 토지독점은 이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초래하였다. 토지의 독점이란 공유지의 종획운동(綜劃運動)과 포주(抱主)와 무위도식자(無爲徒食者)와의 교회영지(敎會領地)의 구분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귀족적인 가족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결과는 토지가치의 투기적 상승과 동일한 것이다. (“정치경제학원리”에서 토지보유와 관련시키지 않고 이 사실을 언급한 바 있는) 맬서스에 의하면 헨리 7세의 통치하에서는 반 부셀의 밀이면 1일간의 노동을 구매할 수 있었으나, 엘리자베스 치세에 있어서는 반 부셀의 밀을 가지면 3일간의 노동을 구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임금의 저락이 이 비교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같이 현저하지는 않았겠지만, 일반임금의 감소와 노동계급에 고통이 있었다는 사실은 “완강한 부랑자”에 대한 불평과 부랑자를 단속하기 위한 법령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아서도 명확한 것이다. 토지의 급속한 독점과 정상지대선 이상으로의 투기지대선의 보유라는 원인은 영국에 있어서도 최근에 방랑자와 빈민이라는 결과를 발생시켰던 것이다.
휴 라티머는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지금까지 1년에 20 내지 40파운드로 팔리던 토지가 현재는 50 내지 100파운드로 팔리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중농(中農)이어서 토지는 소유하지 못하였으며 다만 1년의 지대가 기껏해야 3 내지 4파운드 되는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 농장을 경작하여서 여섯 식구를 부양하였다. 아버지는 백마리의 양을 사육하였으며, 어머니는 30두의 암소에서 착유하였다. 아버지는 왕이 농장에 오면 마구(馬具)와 말을 제공할 수 있었으므로 왕의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나도 아버지가 블랙힐스 들판에 가면 마구의 고리를 잠그곤 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나에게 학교 교육을 시켰으며, 누이들에게 각 5파운드씩 소지시켜서 결혼시키는 등 교양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양육하였다. 아버지는 이웃 사람에게는 친절하였으며 가난한 사람에게는 적선을 하였다. 이 모든 것을 이 농장에서의 수익으로 하였는데 지대로 1년에 16파운드를 지불하게 되자, 군왕에게나 자신에게나 자식들에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으며 가난한 사람에게 물 한잔 대접할 수 없게 되었다.”
소농(小農)의 추방(追放)이 전적으로 지대상승에 있다고 언급하면서 토마스 모어 경은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이렇게 되어서 빈곤한 파탄자나 남자나 여자나 농민이나 고아나 과부나 자식을 가진 부모나, 부유한 가정보다 현저하게 많은 세대가 고향을 등지고 정처없이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라티머 가와 모어 가의 강건한 정신에서 즉 옥스포드 화형대의 불꽃 속으로 불굴의 정신으로 “리들리 선생이여! 인간답게 행동하여 봅시다”라는 외침이 폭발하였던 것이다. 번영으로 어지럽히지도 않았으며 사형집행인의 도끼로 가슴을 조이지도 않았던 혼합된 힘과 유화(柔和)는 변해서 가장 중심부에 있는 화판(花瓣)을 위축시켰으며, 영국의 장미를 부식(腐蝕)시키는 좀벌레를 번식시키는 절도와 방랑자와 범죄자와 빈민을 발생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인력(引力)에 대한 역사적인 해명을 인용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원리는 보편적이며 명백한 것이다. 많이 감하면 감할수록 잔여분은 적어지는 것과 같이 지대가 임금을 반드시 감소시킨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인 것이다. 즉 지대가 임금을 확실히 감소시킨다는 사실은 도처에서 인지되고 있는 것이다.
1849년의 캘리포니아나 1852년의 호주에 있어서 임금이 돌연 대폭적으로 상승한 원인에 대하여서는 하등 기이한 것이 없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요리사의 임금이 월 500불로 앙등되었으며, 선주가 전 세계를 통하여 전무후무한 비율로 지불하기 전에는 고급선원이나 일반선원이 취업을 거부하기 때문에 선박이 항구에서 노후화되게 되었다. 이것은 토지가 자유스럽게 사용될 수 있는 비전유화지(非專有化地) 하에서의 충적광산의 발견 때문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광산들이 전유화지에서 발견되었거나 혹은 즉각적으로 독점화되어서 지대를 상승시켰더라면 상승하는 것은 임금이 아니라 토지가치였을 것이다. 컴스탁 광맥은 다른 충적광산보다 풍부하였으나 용이하게 독점화되었기 때문에 지하 2000피트에서 지상에서 수송되는 공기로 호흡하며 찌는듯한 더위 속에서 작업하는 광부들이 그나마 하루 4불을 취득할 수 있었던 것은 광산노동조합의 조직이 있었다는 것과 그 이하로 감소시킨다면 오히려 손해가 있을 것이라는 공포 때문이었던 것이다. 컴스탁 광맥의 부는 지대를 증가시켰다. 이 광산의 판매액은 수억대나 되었다. 그리하여 수입이 백만대가 아니라면 수십만대가 되는 재벌이 산출되었던 것이다. 또한 캘리포니아에 있어서 초기의 최고임금을 동부 제주(州)의 임금과 근사한 수준에까지 감소시켰으며 아직도 감소시키고 있는 원인에 대하여서는 하등 기이한 것이 없는 것이다. 전에 이미 표시한 바와 같이 노동생산력은 감소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가되었지만, 이제는 노동생산물 중에서 지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충적광산이 고갈됨에 따라서 노동은 심광(深鑛)이나 농지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나, 이러한 심광이나 농지는 독점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이미 자연적 기회는 노동에는 자유스러운 것이 못되었다. 이로 인하여서 노동자들은 막벌이라도 하기 위하여서 샌프란시스코 시가에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는 명백한 것이다. 시종일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영국해협이나 독일해에, 무한량의 일반노동이 하루에 10실링을 취득할 수 있으며 한때는 영국토지의 대부분을 포함시켰던 공유지(共有地)와 같이 비전유화되고 자유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무인도가 발생하였다고 가정하였을 경우 영국임금에 대하여서 어떠한 영향이 있을 것 같소?”라고 질문한다면 질문을 받은 사람은 전 영국의 일반임금은 하루 10실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곧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대에 대해서는 어떠한 영향이 있겠소?”라는 다른 질문에 대해서는 잠시 생각한 후에 지대는 필연적으로 저락할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다음 단계를 생각한다면 이 모든 지대저락은 영국노동의 대부분을 새로운 자연적 기회로 전환시키거나 산업형태나 산업방향을 많이 변화시키지 않고서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나, 다만 노동자가 이 새로운 기회에서 산출하는 것보다 소량을 산출하여서 노동자나 지주에게 제공하는 생산형태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임금의 대폭적 상승은 지대를 희생시킴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상기(上記)의 사람이나 혹은 이론은 몰라도 돈을 버는 방법은 알고 있는 실제적인 사업가에게 “여기 작은 마을이 있는데, 10년만 되면 대도시로 변할 것이고 역마차 대신에 철도가 부설될 것이며 촛불 대신에 전기가 가설되는 등 기계나 개량이 충분하여서 능률적인 노동력이 거대하게 증가된다면 이자도 오를 것 같소?”라고 질문한다면 “이자는 오르지 않소”라고 대답할 것이다.
“일반노동자의 임금은 오르겠으며 노동력만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독립생활을 할 수 있겠소?”라고 묻는다면,
“일반노동자의 임금은 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매 기회마다 도리어 떨어질 것이며, 단순노동자가 독립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며 그렇게 될 수 있는 기회는 더 어려워만 가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오를 것 같소?”
“지대 즉 토지가치만이 오를 것이오. 그러니 빨리 가서 토지나 구득(求得)하여서 소유하고 있으시오”라는 질의응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상기인의 충고를 실행한다면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앉아서 담배나 빨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또는 나폴리의 거지나 멕시코의 걸인과 같이 누워있으면 되는 것이고 풍선을 타고 하늘을 선회하거나 지하에 굴을 파서 잠복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은 전연 하지 않고 사회의 부에는 하등 기여하는 바가 없이 10년만 되면 부자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도시에서 사치한 저택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공건물 중에는 구빈원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장구한 연구의 결과로서 토지는 부를 생산함에 있어서 노동에는 필요한 것이므로, 노동에 필요한 토지를 지배하는 것은 노동을 존재케 하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노동의 모든 결실을 지배하는 것이라는 간단한 진리를 터득하였다. 모든 지점을 확보하여야 하며 모든 지점이 요새화되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골목길이 답사되어야 하는 적국(敵國)을 통과하는 것같이 우리는 지금까지 전진하여 왔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간단한 진리는 사회문제나 정치문제에 적응됨에 있어서, 일부분은 이 진리가 단순하다는 이유와 대부분은 문명세계를 압박하고 있으며 위협하고 있는 죄악을 설명하는데 정당한 면만 보이고 있는 일반적인 모순과 그릇된 사고습성으로 인하여서 은폐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묘하고 오도(誤導)적인 이론의 배후에는 각국의 정치적 형태가 여하튼 간에 법률을 제정하며 사상을 형성하고 있는 활동적이고 정력적인 권력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권력은 거대하고 유력한 금전 상의 이익을 가지고 있는 권력인 것이다.
이 진리가 대단히 단순하고 명백하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다시 검토하게 된다면 인식이 항상 새로워지는 것이다. 한 폭의 그림이 있어서 그 그림을 여러 번 감상하였지만 선이라든지 와형장식(渦形裝飾)이 얼굴이나 물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주의(注意)를 한번 하기 전(前)에는 경치나 식목 등에 대한 선이나 와형장식에 대하여 혼돈된 미궁을 표시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가 한번 형성되기만 하면 그 후에는 명백해지는 것이다. 이런 경우도 동일한 것이어서, 이 진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적인 사실은 질서있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며 다양성을 띄우고 있는 현상은 사실 한 원리에서 발생한 것이다. 불균등한 문명의 발달을 설명해주는 것은 자본과 노동과의 관계도 아니며 식량에 대한 인구압력도 아닌 것이다. 부의 분배에 있어서의 불균등의 중요한 원인은 토지소유의 불균등에 있는 것이다. 토지소유가 주민의 사회적 정치적 내지는 지적 문화적 상태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중요한 기본사실인 것이다. 토지는 인간이 거처하는 곳이며, 인간의 요구를 충당하여주는 창고이며, 인간의 욕망을 공급하기 위해서 노동이 투하되는 물질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도리 밖에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토지를 사용하지 않거나 토지생산물이 없다면 바다의 산물도 얻을 수도 없으며 광선을 즐길 수도 없으며 자연력을 이용할 수도 없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은 토지에서 탄생하였으며 토지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토지로 다시 환원을 하기 때문에 풀의 잎사귀나 들에 피는 꽃과 같이 토지의 자식인 것이다. 인간에게서 토지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을 제거시킨다면 남는 것은 형체없는 영혼뿐이다. 물질적 진보가 있다고 하여서 토지에 대한 의뢰심을 제거시키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진보는 토지에서 생산되는 부의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토지가 독점된다면 임금이나 노동력밖에는 소유하고 있지 않는 노동자의 상태가 개선되지 않으면서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다. 토지의 독점은 다만 토지가치나 토지소유로 인하여 발생되는 힘을 증가시키는 것뿐이다. 시간과 인종을 초월하여서 토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귀족정치의 기초이며 거대한 재산의 기본이며 권력의 원천인 것이다.
그리하여 오래전에 바라문은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어느 때라도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토지의 결실도 귀속된다. 백색 양산과 자부심으로 도취된 코끼리는 토지양여의 정화인 것이다.”
(주1) 콥든 클럽, “토지소유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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