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조강에서 띄운 시(詩)
정현채 엮음(접경지역 DMZ 인문학연합회 회장)
조강과 문수산은 물안개가 다리를 놓아 산과 강을 잇고 남한 김포와 북한 개풍군 사이에 있는 조강은 글을 적은 종이 다리를 놓아 이곳과 저곳을 잇는다. 70년 동안 들어가지도 못하는 조강(祖江)에 꽂혀서 반평생을 이러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고전을 보다가 “조(祖)‘자만 나오면 몇 시간이고 통진(通津)과 연결하느라 종이 다리를 놓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그랬는지 사는 곳도 조강이 있는 용강리로 옮겼다. 조강은 한강하구를 말한다.
김포시 월곶면 용강리를 기준으로 조강 건너 북한지역 임한면의 ”임한(臨漢)“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라 임한이다. 파주 교하(交河)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이라 ”교하“라 하고 임진강 한강이 만나는 조강은 삼기하(三岐河)라고 한다. 조강을 소재로 하는 조선시대 시(詩)의 특징은 밀물이 치고 올라오는 광경을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雪)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물꽃(水花)“이라 이야기한다. 지금은 그러한 문학 작품이 나오지 않고 있다. 상상 속에서나 그릴 수 있는 시어(詩語)다. 막힌 곳이기 때문이다. 조강에 배를 띄우는 그 날을 기다리며 조강을 소재로 하는 몇 편의 시(詩)를 전한다.
용산(龍山) 7수
조선시대 정두경의 시(詩) “용산(龍山)” 7수는 해상 문화와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읽게 되었다. 정두경(1597-1673 鄭斗卿)의 본관은 온양이며 자는 군평 호는 동명이다. 동명은 “용산” 외에도 임진강 장단으로 가는 ‘주과장단(舟過長湍)“에서 조수가 조강으로 밀려오는 모습이 마치 산과 같은 파도가 바위를 치며 올라온다고 그리고 있다. 작자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조강에서 밀물을 표현하는 기세는 대부분 비슷하다. ”벽란도(碧瀾渡)“에서는 고려 때 사신들이 왕래하고 예성강이 멀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문집으로는 《동명집(東溟集)》이 있다.
동명의 ”용산“ 일곱 수에서는 오대산에서 물이 흘러 내려가면서 마지막 조강에 이르러 서해로 들어가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발원지에서 시작한 물길은 중간에 지류를 만나고 합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용산에 이르러 포구의 풍경과 조강에서 배를 띄우면 나주까지 3일이면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곁들이고 있다.
오대산 앞으로 강물이 흘러 내리고 / 조강에서 오는 조수 한강 머리 지나가네
공세 실어 들이는 길 바닷길과 통하거니 / 산하 형세 본디부터 제왕 사는 곳이라네
五臺山前江水流 祖江潮過漢江頭 貢稅自通滄海路 山河元是帝王州
푸른 강물 백사장을 끼고서 빙 돌아들고 / 저녁 돛배 빗속에서 어부 집을 향해 가네
주인장이 객을 보고 어디에서 왔나 묻자 / 아침나절 소양강서 꽃과 이별했다 하네
碧水逶迤帶白沙 晩帆冒雨入漁家 主人問客發何處 朝別昭陽江上花
공자께서 맑은 강서 닻줄 끌고 돌아가매 / 버들꽃은 곳곳마다 강을 향해 피어 있네
춘풍 불자 떨어져서 강물 따라 흘러가니 / 멀리에서 바라보매 흰 눈 오는 것만 같네
公子澄江錦纜廻 楊花處處向江開 春風吹落隨流水 遠望還疑白雪來
무뢰배인 서울 사는 나이 젊은 악동들은 / 호주머니 속에 많은 수형전을 가졌다네
가끔은 강가로 와 술을 사서 마시고는 / 다시 수양버들 꺾어 말채찍을 만드누나
無賴京華惡少年 囊中多貯水衡錢 時來江上沽春酒 更拗垂楊作馬鞭
용산강의 장사치들 배 띄워서 출발하매 / 북을 치는 소리 속에 흰 갈매기 나는구나
뱃사람들 말하거니 봄 온 뒤로 바람 순해 / 조강 뜬지 삼일이면 나주 도착한다 하네
龍山商賈發行舟 打鼓聲聞起白鷗 爭道春來風勢順 祖江三日到羅州
해가 지자 바람 거세 하얀 물결 일더니만 / 큰 강 위에 뇌우 오매 교룡들이 울부짖네
아침 되자 낚싯배의 높이 석 자 되었으매 / 봄 강물이 한밤 새에 불어난 걸 알겠구나
日落衝風起白波 大江雷雨吼蛟鼍 朝來釣艇高三尺 始覺春流一夜多
장사꾼 탄 일천 돛배 만리 밖서 돌아오매 / 긴 바람이 물결 깨어 바다 문을 열어 주네
모든 배들 연미정의 정자 앞을 지나서는 / 양화도의 강나루를 향해 함께 들어오네
賈客千帆萬里廻 長風破浪海門開 俱從燕尾亭前過 共入楊花渡口來
정두경의 시 ’용산“은 오대산(강릉), 조강(김포), 소양강(강원 춘천), 용산강(서울), 나주(전라남도), 연미정(강화 월곶), 양화도(서울)를 소재로 하고 있다. 한강은 오대산에서 시작하여 두모포에 이르고 서쪽으로 흘러 용산포(龍山浦)와 양화도를 지나 행주나루에 이른다. 다시 김포 생태 조류공원 앞쪽을 지나 전류리포구에 이르고 다음은 파주 교하다. 교하 앞에서 임진강과 한강이 만난다. 조강의 시작이다. 제비 꼬리를 닮은 연미정 앞에서 두 길로 나뉘어 서해로 흐른다. 조강(祖江)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경기도, 황해도로 오고 가는 문물과 세곡선(공세)이 운행하는 수상터미널 역할을 했던 곳이다.
조강에 배를 띄우고 이 문순공을 생각하다
(泛祖江懷李文順公)
백마산은 높이 솟고 비는 아니 개었는데 / 조강의 물 급하여서 물결 높이 일어나네
배를 타자 전조의 일 더욱 생각나거니와 / 그 당시에 부를 읊던 재주 지닌 분이었네
白馬山高雨不開 祖江潮急浪崔嵬 乘舟倍憶前朝事 爲是當年作賦才
이 문순공은 고려 문신 이규보(1168~1241)다. 백마산은 조강 건너 개풍군 대성면에 있으며, 작자가 개풍군에 있는 포구에서 배를 타고 과거 이곳에서 조강부(祖江賦)를 지은 이규보를 회상하는 시다. 동명 정두경(1597-1673)은 선조 30년에 출생하고 현종 14년 사망했다.
허백당 조강을 건너다(渡祖江)
백운거사가 일찍이 이 나루를 건넜으니 / 일엽편주가 구름과 물 사이에 춤을 출 제
바람에 몰려온 파도를 필력에 끌어들여 / 가슴속의 불평한 기운을 다 쏟아내었지
내가 온 오늘은 가을비가 막 그친 뒤라 / 나루 머리의 바람기가 정히 맑고 아름다워
길이 읊으며 노를 저어 중류에 둥둥 뜨니 / 한없는 나그네 시름이 창공에 흩어져 버리네
이공은 부를 지었는데 나는 지금 시를 짓고 / 이공은 이마를 찡그렸는데 나는 눈썹을 폈네
행인은 제각기 근심과 즐거움이 있지만 / 하늘 뜻이야 어찌 안위를 만들려고 하랴
세간의 현달한 사람치고 고금을 통틀어 / 공을 이어 이 글 지은이가 바로 누구던고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공은 이규보(1168~1241)다. 조강에서 지은 ”조강부“가 널리 알려지면서 조선후대까지 조강에서 지은 시에는 백운거사나 이 문순공을 거론하고 있다. 백운거사, 이공, 이 문순공은 이규보를 지칭한다. 허백당 성현(1439-1504)은 조선시대 문신이다. 본관은 창녕, 자는 경숙, 호는 용재, 허백당이다. 1462년 23새로 식년문과에 급제하면서 나중에는 대제학을 지냈다. 《허백당집》 《용재총화》 등의 저술이 있다.
신유한의 조강포구 마을 풍경 조강행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 지은 ”조강행(祖江行)“은 조강포구 마을 풍경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신유한은 숙종과 영조 시대의 문신이다. 본관은 영해(寧海)이며 자는 주백(周伯), 호는 청천(靑泉)이다. 경상도 밀양 출생이다. 1705년(숙종 31)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9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저서로는⟪해유록⟫과 ⟪청천집⟫이 있다. 17세기 초 신유한이 지은 조강행(祖江行)은 한국전쟁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선박의 출입이 정지된 옛 조강포구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조강행은 조강포구마을의 옛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청전은 봄날에 작은 배를 타고 한강을 유람하던 중에 조강포구에 다다른다. 날은 저물고 조강포구 선착장에 배를 대고 주변의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포구의 촌로로부터 조강이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합수하는 곳임을 듣는다. 해질무렵 포구의 거리를 쇼핑하면서 베(명주실, 옷).고기. 소금, 과일, 쌀 등을 산처럼 쌓아놓고 매매하는 상점들의 풍경과 아름다운 미녀들이 단장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술을 파는 젊은 기생들과 수작하는 뱃사공, 길손들이 주고받는 노래와 날마다 새롭게 흐르는 강물에 빗대어 술잔을 기울이고 팁을 주는 주막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일천척이 넘는 많은 배들이 조강에 띄워져 있거나 작은 배들은 선착장에 베틀의 실을 짜는 북처럼 일렬로 붙어 있는 모습이 대동강도 조강에 견주지 못할 정도로 풍성하고 번성하는 항구라는 사실을 청천은 조강행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작은 배로 조강에 정박하고 / 해질 무렵에 강촌 주막에 묵노라
큰 물결은 눈이 뿜어내는 것과 같고 / 큰 물결 출렁이며 하늘로 오르누나
강촌의 노인은 귀밑머리 희끗한데 / 이 항구에 사는 사람이라 말하네
조강은 일명 삼기하라 / 이곳에서 세 강이 합하여 큰 바다로 향한다.
남으로는 호서요 서로는 낙랑과 통하며 / 배들이 서로 잇닿은 것이 배틀의 북과 같고
고기 소금 과일 베와 쌀이 산을 이루니 / 이 항구는 하루에 천 척의 범선이 지나간다
황모 쓴 장년[뱃사공]은 어느 고을 사내인가 / 상인은 푸른 비단실과 술잔을 팔고 있고.
모두 한강은 건너기 어렵다고 하면서 / 주막에서 술파는 미녀와 웃으며 얘기하네
나부는 머리를 처음 올리고 / 막수는 눈썹을 그린듯
가늘디가는 버드나무 허리로 / 춘면가를 농염하게 부르누나(후략)
저자의 관로(官路)는 순탄치 못했으나 문장으로 이름을 떨쳐 당대의 문인들과 두루 교분이 있었으며 말년에는 경학 연구에도 힘써 많은 저술을 남겼다.
김택영의 새벽에 승천강을 건너다
(曉渡昇天江憶寄寧齋)
새벽에 승천강을 건널 때 영재를 생각하고 지어서 부치다
이른 새벽 서정을 출발하는데 / 달은 무리지고 천풍은 거세구나
강과 바다 온통 안개로 덮였고 / 떠나는 길 아직도 잠이 덜 깼네
조수는 문순공이 부를 짓게 하였고 / 산은 수강궁을 둘러 있구나
강 건너에 가인이 있는데 / 쪽배 함께 못 타는 것 한스럽네
문순공은 고려 문신 이규보가 조강을 건너면서 지은 ”조강부“를 뜻한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고종 때까지는 대략 500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조강에서 시를 지을 때 이규보의 조강부를 언급하는 것은 당시와 후대에도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김택영(1850-1927)은 조선의 문신, 학자이며 시인이다. 자는 우림, 호는 창강, 소호당 주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풍덕군편에 “충렬왕 4년(1278)에 수강궁(壽康宮)을 덕수현 마제산(馬蹄山)에 지었는데, 이 때부터 여기서 사냥을 구경했다. 승천포원(昇天浦院)은 승천부(昇天府) 옛 성(城) 밑에 있다. 승천포(昇天浦)는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조강도(祖江渡)는 덕수현에 있다.”
승천강은 승천포에 있는 강으로 조강과 만나는 것으로 유추한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고려시대 이규보가 조강을 건너며 지은 조강부를 회상하는 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풍덕군편에도 이규보의 “조강부”와 백원항의 “행도조강유작”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