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3월쯤으로 기억 됩니다.말산(두산동)에서 살던 친구가 있었습니다.그당시 째지게 가난한 이유로 소통이 잘되는 중학교
동기 동창 (김 인 묵)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중학교 졸업을 하자마자 강릉 극장 앞 "삼문사"란 서점 점원으로 취직돼 있을때 입니다.어머니가 돌아 가신지 2~3개월 될 무렵 10대 후반으로서의 방황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것입니다.
그 친구를 찾아 갔습니다. 병 드신 할아버지 할머니 와 무능한 아버지를 되거리 장사(촌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보따리 채 사서 소매 하는장사)로 생계를 꾸려 가면서 막내 아들을 중학교에 보내 놓고 애 쓰시는 어머니를 돕고 동생 공부를 뒷 바라지 하기 위해 취직을 선택한
그 친구에게 시원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 찾아 갔을 겁니다.
취직 한지 2년이 넘었을 쯤 한데 신수가 훤하게 변한 모습 이었습니다. 오랫만에 만나 주고 받는 얘기 가운데 가정 형편이 많이
좋아 졌다는 얘기 였습니다. 그래서 나 보고 하는 말이 "너 삼왕 보겡이에 있지 말고 시내에서 일 거리를 찾아 보는게 어떨까 "하는
얘기 였습니다.그 친구가 힘써 보겠다는 말도 덧 붙혔습니다.
자장면 대접을 받으면서 고맙다는 말을 앞 세워 놓고 동의 했습니다.며칠후 편지를 받고 그 친구와 같이 삼문사에서 일 하게 되었지요. 최씨로 기억되는 주인의 주의 말을 듣고 3층에 자는 방을 지정 받았습니다.친구는 자전거로 출퇴근 했고요.
집에서 숙식을 하는 사람은 출퇴근 하는 사람보다 한두시간 일찍 일어나서 청소를 끝 내고 아침 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첫날 출근은 보광리에서 했습니다.하루 마감은 밤 9시,잠자리는 10시,기상은 04시30분 (청소 시간 약 2시간 소요)으로 기억 됩니다.3층 창고 옆 골방 에 닭 침랑 하나가 내 방이었습니다.책방에서 3층 까지 내부 통로는 약 8m 정도의 판자로된 게단 이었고요.
첫날이라 자는둥 마는둥 하다가 일어 났을 거예요. 대충 눈을 비비고 나서 침랑을 제 자리에 밀어 넣고 껌껌한 계단을 몇칸 네려
가는데 발을 헛 디뎌 바닥까지 미끄러 지면서 굴러 떨어 졌지요.깨 지고 터진데는 없는데 엉뎅이와 허리가 얼마나 아프던지 잇틀
동안 꼼짝도 못하고 골방에 누워 친구가 갖다 주는 누룽지와 눈깔 사탕 몇개로 허기를 달래며서 웬만 하면 출근을 할려고 했는데
친구를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주인이 보자고 한다기에 벌~벌 기다싶이 하면서 계단을 네려가 주인을 만났지요
여러말 않고 그만 두라고 했습니다 .시내 거주자를 구해 쓰겠다는 얘기 였습니다 .잘 하겠다고 사정 했지만 이미 굳혀진 생각이라 인정으로 기대 하기엔 불가능한 인상 이었습니다. 친구도 주인의 성격을 잘 아는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지요.
3층에 기어 올라가 손 보따리를 챙겨 가지고 내려와 친구에게 미안 하다는 말을 남기고 찔뚝 거리면서 서점을 나왔습니다.
불의의 안전 사고도 동정 받지 못하는 냉정한 사회가 있다는 또 하나의 시련을 맛 보았지요.그래서 방황의 먼 길은 다시 시작 되었고,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물어 보고 싶은데 내겐 그럴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아마 이게 촌넘이 겪어야 할 아픔 이었던가 봅니다. 그후 한동안 공상으로 나날을 보내면서 자동차 조수로도 가고 싶었고,돈을 많이 벌수 있다는양복재단사도 꿈이라면 꿈이기도 했습니다.
한참후 우연히 라사점 재단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도 일찍이 가정 형편 때문 중학교를 포기하고 양복점 심부름 꾼(입만 해결하는 직업)으로 있다가 어깨너머로 배우면서 재단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산 관음 개자리에 살았었지요.
그 친구 말이 양복도 양복 이지만 양재 쪽으로도 장래가 밝으니 생각해 보라면서 중앙시장 2층에 있는 중앙 양재 학원을 소개 받
았습니다.
한 교실에 30명 정원으로 2교실 학원 인데 개원 한지 1년 되었고 6개월 교육에 1기생이 배출 되었다고 했습니다.
졸업한 사람들은 양재점을 차려 돈 벌이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당시 어머니의 재봉틀 삮 바느질로 보고 듣고 한게 있어
취미가 있었던가 봅니다. 남자 반바지도 만들어 봤고,여자 아이들 원피스도 만들어 본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가 만들다 놔둔것을 나는 엉뚱하게 마무리를 해 보곤 한게 자신감과 취미로 자란지 모릅니다. 어쨋던 우왕 좌왕 하는 내겐
희망 이었지요. 학원을 찾아 갔습니다. 교무실이 있었습니다.서른 중반된 여 선생 두분이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한분은 박 분남 선생으로 기억되고 한분은 최선생으로만 기억 됩니다. 나중 알고 보니 박선생이 강릉 옥계 금진 양조장 맏 딸로
확인 되면서 박선생 연고로 학원을 차리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무실에 들어서자 부산 사투리로 어떻게 왔느냐고 하기에 양재를 배우고 싶어 왔다고 하니까 깜짝 놀래는 표정으로 나를 훌터 보더니 여기는 여자들만 가르치는 학원 이라면서 남자는 않받는다고 했습니다. 나도 실은 여자들 만의 학원 인지 모르고 갔던 것이고 소개 하던 그 친구도 그 사실을 모르고 소개 했던 것입니다.
황당 했습니다.길이 아닌 길로만 찾아 혜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한심한 내가 미웠습니다. 한참 멍~하니 앉아 있으니 박 선생께서 나를 따라 오라 하기에 따라 갔더니 학생들이 실습하는 교실을 안내 하면서 1교실은 초급으로 개강 한지가 한달 반,2교실은
두달 됐다고 하시더군요. 역시 여자들 뿐 이었고, 단발 머리부터 머리를 길게 땋은 처녀들로 실습에 골몰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교무실로 와서 선생님이 나 보고 하는 말이 꼭 배워 보고 싶으냐 ? 여자들 틈에서 배울 용기가 있느냐 ?집은 어디냐 ?
학원비는 낼 형편이 되느냐 ?등등으로 다짐을 받는 것으로 보아 긍정적으로 돌아선 느낌이었습니다. 무조건 다 할수 있다고
했었지요. 그다음 문제는 초급반 진도가 한달 반 지났는데 더군다나 남자가 따라 갈수 있겠느냐 는것입니다.
자신 있다고 했지요. 입학을 해 놓고 보겠다는 생각과 어머니 한테서 배워 놓은것이 자신에게 용기가 되었는 모릅니다.
그럼 좋다 열심이 해봐 하더니 다시 나를 따라와 .....1교실로 가더니 학생들에게소개를 했다.학원 최초로 남 학생이 입학
하게 되었으니 박수 치라고.....깔깔대고 웃으면서 쑥떡 거리는 틈을 타 2교실에서도같은 소개를 받고 깔깔대는 웃음 소리를
뒤로 하고 나왔다.
이렇게 입학하여 열심이 배웠다. 집에와서 복습도 했고 숙제도 착실하게 해 갖다. 그때 실습 재료는 한지 였었다.
다른 학생들 보다 늦게 입학은 했지만 실습 과정에서 최 우수 평가도 여러번 받았다. 여 학생들로부터 인끼독차지 했다. 물론 남자가 하나 밖에 없으니 독점 일수 밖에 없지만 ...ㅎㅎㅎㅎㅎ
학원 생활의 취미가 기능화 돼 갈때 편지 한통이 날아 왔습니다.. 그때가 학원 다닌지 두달 채 안됐을 무렵 이었습니다
1959년 6월 20일로 기억 됩니다.둘째형 편지였어요. 대학 2학년 때인 같습니다.편지 내용은 남자가 양재 기술 보다 서울에서 남자다운 일을 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내용 이었습니다.고민 끝에 형의 뜻으로 굳히고 아쉬움과 선생님의 사랑을 멀리하면서 정 들었던 학원을 마감 했습니다.
6월 25일 서울 숭인동 시외 뻐-스 정류장에 도착한것은 강릉을 출발 한지 8시간 반 만이었습니다. 편지 주소대로 찾아 간곳이
청량리 부근 답십리 굴다리 지나 전농동 어느 판자집 이었습니다. 제천 교동에서 국수 공장을 정리하고 철물점을 시작하고 있는
종호 아저씨(철수 아저씨라고도 했음)댁 이였습니다. 둘째 형이 거기서 먹고 자고 학교 다닐 때 입니다.